제19장. 넘쳐나는 마음
3일에 걸친 대연회가 끝이 났다.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는 황제와 첫 춤을 춘 프리트홀트의 여식, 아델라이드였다.
단지 그녀에 대한 궁금증을 넘어서, 그녀가 보여 준 모든 것들이 화제가 되었다. 예컨대 그녀가 황제와 함께 춘 춤은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그 후 많은 귀족 남녀들이 그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다.
그녀의 드레스 또한 부인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덕분에 프란체스의 부띠끄에는 상류층 귀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프란체스는 아델라이드 덕분에 그야말로 대박을 친 것이다.
그렇게 한 주가 흘렀다.
수도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을 무렵, 황제는 개각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프리트홀트는 외무대신으로, 레니에는 내무대신으로 이름표를 바꿨다.
* * *
스트라우스 후작가의 식당. 크지 않은 식탁에서 프리트홀트와 아델라이드가 마주 보며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대부분의 귀족들처럼 너무 큰 식탁 때문에 멀리 떨어져 식사를 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이처럼 적당한 크기에 우아하게 장식된 식탁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식당과 주방이 바로 이어져 있어 갓 구운 빵의 냄새가 흘러 들어오는 것도 좋았다.
프리트홀트는 따끈한 스튜에 빵을 찍으며 말했다. 식사 때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 귀족들의 식사 예법이나 이 오붓한 시간을 사랑하는 그는 아델라이드와 식사를 하며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
두 사람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집사인 드란과 소니아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둘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친부녀지간 같아 보일까?’
“아델라이드.”
“네, 후작님.”
아델라이드가 프리트홀트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살짝 웃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물기를 담뿍 담은 해바라기 같았다.
보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웃음을 짓게 되는 그 모습을 본 프리트홀트가 빙그레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내일부터 외무관으로 출근할 거야. 그러니 너도 내일부터 같이 출근해서 나를 보조했으면 한다. 알겠지만 외무대신에겐 두 명의 비서관이 붙는데 한 명은 너로 정했고 다른 한 명은 모르세르가의 사람으로 배정되었다.”
“모르세르가요? 혹시 휴고 님인가요?”
“아는 사이인 거니?”
“아, 네. 전쟁터에서 몇 번 뵈었어요. 레니에 공작 각하의 비서관이기도 했으니까요.”
“오. 그렇구나. 그러면 일하기는 더 편하겠군.”
휴고의 첫인상은 매우 냉랭했다. 그러나 같이 말을 탄 이후로는 그가 그렇게 쌀쌀맞지 않다는 것, 의외로 서로 잘 맞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았다. 특히 지적인 부분에서 말이 잘 통했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트홀트라는 훌륭한 재상의 비서관이 되었으니 그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제대로 해 보고 싶었다. 한 번도 직접 해 보지 않았던 일이라 흥미도 돋고 의욕도 불타올랐다.
사실 아델라이드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큰 기쁨을 느꼈다. 수에비의 왕비였던 시절에도 가끔씩 국왕의 정무를 대신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다.
너무 잘해서도 안 되었고 너무 못해서도 안 되었고, 그녀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잘 타면서 업무를 할 줄 알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일을 꽤 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 뒤따라오는 성취감과 기쁨도 맛보았다.
“내 집무실에 가면 책장에 외교 백서가 있다. 그것을 한 번 보면 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세르비아가 처한 문제들과 그것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또 어떤 숙제를 남겼는지 등이 잘 기술되어 있다.”
“아, 그런 것이 있군요.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그렇지 못했는데 폐하께서 즉위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지. 이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제국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어. 더군다나 폐하에게는 대륙 최고의 재상인 레니에 공작이 있으니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 어느 한 부분 빠짐이 없이 제국의 토대가 튼튼하게 다져지고 있어.”
“폐하는 계속 전장에 계셨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너도 느꼈을 테지만 폐하는 일중독이야. 어떤 이들은 전쟁광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주어진 모든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비친 것 같아. 게다가 일단 손에 잡은 일은 최선의 방법으로 해결해 내고 말지. 전쟁은 그중 하나일 뿐이야. 그런 데다가 현안을 정확히 읽어 내고 진두지휘하는 레니에가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을 테고.”
“대단하군요. 두 분 모두.”
“그래. 그러니 두 분 사이가 틀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레니에 공작은 세르비아의 보석 같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폐하의 날개라고 할 수 있어.”
아델라이드는 프리트홀트와 대화를 하면서 베르톨트의 즉위 이후 세르비아가 매우 많은 발전을 해 왔음을 알았다. 정말 모든 면에서 놀라운 남자였다.
긴 아침 식사가 끝나자 프리트홀트는 임명장을 받으러 입궁하였고 아델라이드는 곧장 후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는 깔끔하면서도 부드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커다란 원목 책상이 큰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놓여 있었고, 양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책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중 한 칸에 세르비아의 외교 백서가 쪼르륵 진열되어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열 권을 모두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음.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담뿍 담겨 있었다. 책을 보는 것을 원체 좋아하는 데다가, 그것이 업무와도 관련이 있으니 이래저래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오래도록 집무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책에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 소니아가 찻잔을 채워 주고 가기를 두어 번, 또 집사장인 드란이 불편한 것이 없는지 보러 오기를 두어 번 했다.
* * *
임명장을 받은 프리트홀트는 황제와 잠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일분일초를 쪼개면서 일을 하는 황제가 자신에게 시간을 할애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훈훈하게 느껴지면서도 자신의 여식에게 너무 과하게 관심을 표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다른 부처도 마찬가지이지만 외무부는 특히 난민이나 국경 관리 등의 문제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
“알고 있습니다, 폐하.”
“아낌없는 지원을 할 터이니 자네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봐. 세르비아의 외교적 위상을 크게 떨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해 주게.”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황제는 말을 마친 뒤 잠시 프리트홀트를 바라보더니 차를 홀짝거렸다. 프리트홀트 또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오늘따라 차가 더 떫은 것 같았다.
“그, 별다른 문제는 없지?”
“무슨 문제 말씀이옵니까?”
“아델라이드가 불편해하거나, 뭐 그런…?”
황제는 차를 홀짝이며 프리트홀트의 표정을 예의 주시했다.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제 여식이 불편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겠지?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마는.”
“네. 제가 어련히 알아서 하고 있으니 심려 놓으십시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 얘기만 꺼내면 대놓고 까칠하게 구는 외무대신이 신기했다. 그 전까지는 자신에게 한없이 너그러웠던 사람인데 딸자식 하나 생겼다고 이렇게 박하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자신은 딸의 연인인데 말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더 자연스럽게 풀기 위해 설정한 관계가 오히려 난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베르톨트는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프리트홀트 역시 자신도 모르게 뾰족하게 나오는 대답이 우스웠다. 이런 것이 아비의 마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아들처럼 대견하고 듬직하게만 보이던 주군이 딸 이야기를 할 때면 괜히 오만하고 불손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둘은 연신 헛기침을 하다가 차만 들이켜기를 반복했다.
* * *
다음 날 아침 아델라이드는 요란한 장식이 달리지 않은 단정한 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전체적으로 채도가 낮고 목과 소매에 흰색 천이 덧대어진 옷이었다. 너무 밋밋할 것 같아 가슴에 진주 브로치를 단 게 그나마 눈에 띄는 포인트였다.
“오늘도 예쁘구나.”
“감사합니다, 후작님.”
아델라이드는 멋쩍어하며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프리트홀트는 아델라이드가 자신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아름다운지 모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수수하고 단정하게 입었는데도 그녀는 이슬을 머금은 햇살처럼 눈이 부셨다. 오히려 절제된 옷차림 때문에 외모가 더 두드러졌다.
‘하긴 아름다움을 모르는 게 더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지.’
후작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팔을 내주었다. 아델라이드가 방긋 미소 지으며 그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웠다.
출근하는 부녀의 모습을 집사장 드란과 소니아가 지켜보고 있었다. 드란은 자신의 주인이 무언가 꽉 차 보인다고 생각했고, 소니아는 아델라이드가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새로 부임한 외무대신 일행을 소개하는 것으로 외무부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프리트홀트가 자신의 운영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유능한 수장이 왔다며 큰 기대를 품었다. 그와 함께 등장한 아름다운 비서관에게도 많은 관심이 쏠렸다.
거기에는 순수한 관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자가 외무 고시도 통과하지 않고 어떻게 이 유능한 외무대신의 비서관이 되었는지 의구심과 불신, 불만을 품고 있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아델라이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함께 일하게 될 또 다른 비서관 휴고와 눈인사를 나눴다. 휴고는 그녀를 보고 잠시 웃어 주었으나 곧바로 그 특유의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아델라이드는 든든했다. 그의 무표정 뒤에 숨어 있는 다정함을 알고 있었으니까.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전, 인수인계 자료를 정리하는 데에만 오전이 후딱 지나갔다. 기사 한 명이 황제의 전언을 가지고 왔을 때까지, 세 사람은 점심시간이 되었는지도 모른 채 일을 하고 있었다. 기사는 아델라이드에게 점심식사 자리에 동석했으면 좋겠다는 황제의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폐하께 오늘은 식사할 여유가 없으니 며칠 후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대답을 들은 기사와 프리트홀트, 휴고는 아델라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식사 권유 같은 가벼운 것이기는 해도, 황제의 명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거절할 것이라고는 모두들 생각지도 못했다.
분위기가 살짝 이상하다고 생각한 아델라이드는 눈을 깜빡이다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쳤다.
“폐하께 말씀드리기 힘드시죠?”
기사가 희미하게 수긍의 뜻을 내비치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라이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서신을 써 드릴게요. 이걸 폐하께 전해 드리세요.”
기사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고, 휴고는 눈살을 찌푸렸으며, 프리트홀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황제는 기사가 올린 서신을 받아 들고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도저히 시간이 허락지 않아,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을 고대하겠습니다. 폐하의 아델.]
단호한 거절이지만, 그 안에는 안타까움과 사랑이 담겨 있었다. 황제의 식사 제안을 이리 단호히 뿌리친 경우도 없었지만, 이렇게 마음을 살랑이게 한 적도 없었다. 화를 낼 수도 없어서 베르톨트는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보면 곰 같고 어떻게 보면 여우 같으니.’
곁에 있던 레니에가 서신을 살짝 낚아채 읽어 보더니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여간 보통이 아니시군요. 쉽지는 않겠습니다. 폐하.”
“시끄러워, 점심이나 먹으러 가.”
황제의 뒤를 따르면서도 레니에는 뭐가 재미있는지 빙글빙글 웃고만 있었다.
* * *
재빨리 점심을 해결하고 돌아온 아델라이드는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
원래 그녀는 무엇에 하나 빠지면 다른 것들에는 무심해지곤 했다. 그래서 가끔 주위 사람들이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가 자신들을 챙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답게 한창 일하던 중이었다. 불현듯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하아. 어쩌지? 폐하께 그 치료 마법사에 대해 물어봐야 하는데.’
아델라이드는 보고 있던 문서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오늘은 폐하의 점심 제안을 거절했으니 내일 연통을 넣어 잠시 얼굴을 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남은 시간 동안에는 이것을 끝내는 것이 먼저였다.
다시 문서에 집중하려던 그때,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황궁의 모든 부처 집무실 문에는 세르비아의 상징 중 하나인 청동 천마 문고리가 달려 있었다. 그 문고리를 이용하여 문을 두드리면 제법 묵직한 소리가 났다.
세 사람 모두 고개를 들어 입구를 봤다.
황제가 팔짱을 끼고 비스듬하게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비뚜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렇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뭇하긴 한데, 너무 지나쳐. 사람이 쉬기도 하고 딴짓도 좀 해야 오래 달릴 수 있지 않겠는가. 조금만 쉬었다 하지.”
“오셨습니까, 폐하.”
프리트홀트가 입구로 다가가 예를 갖춰 황제를 맞았다. 휴고와 아델라이드는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황제의 뒤로 레니에와 황실 기사단장인 아른프리트가 서 있었다.
“아델라이드. 오늘이 처음인데 어떤가?”
“좋습….”
“아! 조금 쉬는 틈에, 그대는 나와 잠시 바람이라도 쐬면서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떻겠나.”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줄줄 읊는 통에 아델라이드는 멍하니 황제를 바라보았다. 베르톨트가 고개를 까딱하며 재촉했다.
잠시 멍해 있던 아델라이드가 황제의 뜻을 알아채고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프리트홀트와 휴고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그럼 잠시 폐하와 바람을 쐬고 오겠습니다.”
프리트홀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휴고는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이 자신의 사촌인 레니에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의 뒤에 있던 레니에는 잠시 어깨를 으쓱하더니 휴고의 앞으로 걸어왔다.
“자, 그럼 폐하가 지시하신 외무부의 과제를 좀 살펴볼까요?”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빼앗아 간 자리에 레니에를 남겼다. 프리트홀트 역시 황제의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과제의 벽 앞에 손을 들어야 했다.
레니에는 남은 이들과 함께 언제 끝날지 모르는 회의에 들어갔다. 황제가 원하던 바였다.
외무부 앞뜰은 황궁 안에서도 유려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외무부에는 외교 사절단이나 사신들이 왕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정원을 특별히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었다.
외무부의 정원은 설계가 매우 독창적이었고 설치된 건축물마다 각기 독특한 개성을 품고 있었다. 특히 외무부로 향하는 길목에는 좌우로 경사가 가파른 절벽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계단식 정원을 조성해 놓아 그 경관이 매우 볼만했다. 곳곳에는 비밀스런 통로들이 많아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곳이었다.
베르톨트와 아델라이드는 외무부의 정원을 나란히 걸었다. 아른프리트는 그 뒤로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외무부에서 일하면서 이 정원에도 와 보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지.”
“폐하, 점심 제안은….”
“그건 됐어. 내가 미리 의사를 물어본 것도 아니고 막무가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다음부턴 미리 언질을 주시면….”
베르톨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에 따라 아델라이드도 걸음을 멈추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아니 됐어. 그 얘기는 그만하지.”
아델라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베르톨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자신만 일방적으로 애달아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일이 바쁘다고 해도 식사 제안까지 거절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자신이었다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 시간을 학수고대했을 텐데. 이렇듯 자신의 절실한 마음을 몰라주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황제고 뭐고,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지. 하여간 그대는 정말.’
한숨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지금도 저 조그만 머리로 순간순간 일 생각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 모습까지 예뻐 보이니 자신이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폐하. 그런데 며칠 전 제게 보내 주셨던 그 치료 마법사를 한 번 더 볼 수 없을까요?”
“치료 마법사? 왜지?”
“아, 그게…. 제가 가진 그 마력석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분이라면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베르톨트는 알겠다며 다시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델라이드는 환하게 웃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진심이 담긴 미소였지만 돌아오는 베르톨트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과 달랐다.
“그대는 그렇게 말로만 감사를 하는 건가?”
“네?”
어쩐지 서늘한 그의 말에 아델라이드는 바짝 긴장이 되어 되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은 않고 그저 표정 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잠시 서 있던 아델라이드는 곧 얼굴이 발갛게 되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베르톨트와 아델라이드뿐이었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른프리트 단장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발뒤꿈치를 들고 서서 그의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조, 조금만 얼굴을 내려….”
그녀가 낑낑대며 자신의 입술을 그의 얼굴 쪽으로 가져가자, 베르톨트의 목 깊은 곳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 돌겠군.”
베르톨트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팔 힘이 얼마나 센지 아델라이드는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의 세찬 심장 소리 때문에 놓아달라고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겼다.
입맞춤을 원한 것은 맞지만 이렇게 어설프게 다가오니 베르톨트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뒤틀린 심사가 눈 녹듯이 녹아 내렸다.
여전히 자기 혼자 서운해하고 또 혼자 풀어지는 것 같아 스스로가 바보 같고 우스웠으나, 이렇게 까치발을 딛고 작고 말간 얼굴을 들이미는 그녀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직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자신이 이 여자에게 단단히 미쳤다는 것만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 * *
“어서 오세요.”
후드를 눌러쓴 마법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델라이드의 인사에 답했다. 후드 밖으로 나온 긴 머리가 하얗게 바래 있었다.
“앉으세요, 마법사님.”
마법사는 아델라이드가 가리키는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근 한 달 만이었다. 마법사는 전보다 더 과묵해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미리 준비해 둔 차가 놓여 있었다. 마법사의 넓은 소맷자락에서 하얀 손이 나왔다. 그는 고운 손으로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 차를 음미하더니 한마디 했다.
“차 맛이 좋군요.”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이네요. 서방으로 오가는 상단을 통해 구한 귀한 차랍니다. 떫지 않으면서도 향이 꽤 그윽해서 자꾸 찾게 되네요. 괜찮으시다면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이 차는 아델라이드가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 과묵하고 까탈스러워 보이는 마법사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서 어떻게 하면 그의 환심을 살 수 있을지 한동안 고민했다.
그러다가 마법사들이 차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왕 준비하는 거, 쉽게 살 수 있는 평범한 차보다는 특별한 차를 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상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귀한 차라며 추천해 주는 것을 조금 사 보았던 것이다.
그 노력이 쓸모없진 않은 것 같아 아델라이드는 속으로 가슴을 쓸었다.
마법사는 말없이 차만 연거푸 마셨다. 그러다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떼었다.
“귀한 차인 듯한데, 감사합니다.”
아델라이드가 빙긋 웃었다.
“저를 찾으신 연유가 무엇인지요?”
아델라이드는 조그마한 주머니에서 마력석을 꺼내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 때문이에요. 제가 가지고 있는 마력석인데, 이것에 대해 좀 여쭤보려고요.”
마력석을 집은 마법사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앞에 가까이 가져갔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마법사가 후드를 벗자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무척 젊고 잘생긴 미남이었다.
단순히 잘생긴 것이 아닌, 범상치 않은 외모였다. 머리카락과 눈썹이 하얗게 세었고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을뿐더러 피부도 몹시 창백했다.
하얀 피부 위에 자리한 고운 이마와 반듯한 콧날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는 마치 눈의 나라에서 온 것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눈은 볼 수 없었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길게 난 상처만이 과거의 고통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마력석을 눈높이로 들고 한참 동안이나 살폈다.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마치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갈랐다. 아델라이드는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것 같아 잠시 고민했다.
“지인에게서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렇습니까? 누구신지, 매우 큰 은혜를 입으셨나 보군요.”
대륙의 마녀, 벨라루아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준 것이니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도 말이 되긴 했다.
“이 마력석의 진짜 용도를 알고 싶어요.”
마법사가 흠칫 놀라며 아델라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은 눈으로 그녀를 꿰뚫어보는 듯했다.
아델라이드는 그의 신비한 풍모에 알 수 없는 믿음이 생겼다. 이 마법사에게는 자신이 아는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았다.
“전 이 마력석이 위장술 능력만 있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우연히 알게 된 벨라루아라는 마법사를 통해 이 마력석에 숨겨진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벨라루아…라고 하셨습니까?”
마법사가 눈썹을 움찔거리며 입꼬리를 떨었다. 그가 매우 놀라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벨라루아를 아세요?”
“그,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퍽 난감한 질문이었다. 그녀에 대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망설이던 와중에 마법사를 보니 그는 몹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절박해 보인다고 해서 모든 정황을 세세하게 말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벨라루아와의 일들을 대략적으로는 말해 주어도 좋으리라. 생각을 마친 아델라이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황제 폐하를 해치려 했어요. 그러다가 폐하의 검에 상처를 입었고, 그런 그녀를 제가 치료해 주었어요. 그때 그녀에게 마력석에 대해 얘기를 들었는데 자신의 스승이 이 마력석에는 진귀한 힘이 있다고 하였답니다.”
마법사는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뒤 그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스승이, 접니다.”
아델라이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다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그렇군요.”
“벨라루아는, 어디에 있습니까?”
“폐하를 피해 사라졌어요. 아마 안달루스의 황녀에게 갔을 거예요. 벨라루아는 자신이 황녀의 사람이라고 했거든요.”
“황녀라….”
“마법사님이 벨라루아의 스승이었다면, 그녀의 사연도 아시겠네요.”
“벨라루아가 저를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마법사는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 스승 같지도 않은 스승이라고도 했어요.”
아델라이드가 곤란한 듯이 말하자 마법사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벨라루아가 자신의 얘기를 꽤 많이 털어놓았나 봅니다. 신기하네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아델라이드도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벨라루아와의 인연은 자신이 생각해도 확실히 기이했다.
마법사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마녀로 몰려 결국은 화형당하는 벨라루아를 구해 냈습니다. 그리고 녀석의 능력을 일깨워 줬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쳐 버렸지만요. 그때 스쳐 지나가듯이 이 마력석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그렇다면 이 마력석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이 마력석은 수에비 왕국 발루아 가문의 것입니다. 어째서 영애께서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군요.”
아델라이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기까지는 솔직하게 말했지만 이 마법사에게 이 이상 어디까지 말해야 좋을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아직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으니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매우 위험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마력석의 능력을 알 길이 없었다.
“전 발루아 가문의 사람이 맞습니다. 발루아 가문의 가주께서 제게 직접 주신 겁니다. 그러니 제게 말씀해 주세요.”
마법사는 잠시 침묵했다.
그가 시력을 잃은 대신 얻게 된 것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 진실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세상은 암흑으로 변했지만 들리는 세상은 밝아졌다.
처음에는 소리가 무분별하게 날뛰었다. 하지만 차차 음조의 미세한 차이와, 음색의 오묘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실한 말과 거짓된 말의 미묘한 차이까지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마법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은 진실이다.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그녀는 매우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
“이 마력석에는 마법사의 영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봉인을 푼다면 그 영혼과 대화도 가능할 겁니다. 이 마력석의 가장 큰 능력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봉인을 풀었다면 발루아 백작 부부는 살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벨라루아는 자신의 스승에게 발루아 가문과의 인연에 대해 꽤 소상히 얘기해 준 듯싶었다.
“그, 그럼 봉인을 해제해야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나요? 봉인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단순한 마력석이고요?”
“네. 그렇습니다.”
“봉인 해제는, 마법사님이 하실 수 있나요?”
마법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마력석의 봉인을 해제해 주세요.”
아델라이드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해제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네. 하겠어요.”
위험이 될지도 모를 일을 자처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물론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의 목숨이 다시 위험해진다면 이것보다 더 유용한 마법 도구가 없을 터. 그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봉인을 풀 능력이 있는 마법사를 만난 지금, 봉인을 해제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문을 닫고 잠시 밖에 나가 계십시오. 봉인을 해제할 때 나오는 빛이 눈을 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네. 알겠어요.”
아델라이드는 일어나서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퍼뜩 마법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제가 마법사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오늘 이후로 저를 다시 보실 일이 있을까요?”
마법사는 고개를 부드럽게 저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아델라이드는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취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마법사는 아델라이드에게 마력석을 건네주고 사라졌다. 마법사가 간 뒤 아델라이드는 마력석이 달린 목걸이를 걸어 보았다.
그녀의 몸에 닿자 마력석이 푸른빛을 내며 반짝였다. 아델라이드는 주인과 닿으면 목걸이가 빛을 내는 것이라 추측했다. 그 빛이 자신의 청회색 눈동자와 꽤 잘 어울렸다.
그때, 말소리가 들렸다.
“휴우! 살았다. 그동안 답답해 죽는 줄 알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