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장. 우아한 계략 (19/39)

제18장. 우아한 계략

마침내 세르비아 군이 바이온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바이온은 예술과 문화의 나라지만, 결코 군사력이 강대한 나라는 아니었다. 정치적 상황도 썩 좋지 못했다. 나라의 안위를 형제국의 일개 공작에게 의지하여 그의 운신에 따라 나라의 명운이 좌지우지되는 판국이었다.

바이온의 뒤에 버티고 있던 것은 바로 안달루스 제국의 제1귀족 바오로 공작이었다.

바이온은 바오로 공작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주고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호의에 화답하기 위해 바이온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단지 힘을 보태는 수준이 아니라 정치와 군사를 모두 그가 관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바오로 공작이 발을 빼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바이온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 * *

세르비아 군의 개선 행진이 시작되었다. 지나는 곳마다 황제의 개선을 환호하는 제국민들로 가득했다.

행렬의 제일 앞에는 세르비아의 깃발을 든 화려한 기마대들이 위치하고 있었고, 그 뒤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황제가 보였다.

베르톨트는 검은 바탕에 푸른색과 흰색, 붉은색이 화려하게 배색된 황제의 군 정복을 입고 있었다. 적색 망토를 길게 늘어뜨린 채 환호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는 그에게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강력하고도 힘 있는 아름다움이 풍겼다.

황제의 뒤로는 친위대와 장군들, 병사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었다. 실로 장관이었다.

수도 녹턴으로 들어서자 환호하는 백성들이 황궁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와 그 군사들을 큰 함성과 박수로 맞았다.

하늘을 뒤덮은 종이 가루와 꽃들, 사람들의 함성, 길게 늘어선 군악대의 우렁찬 음악 소리는 승리의 기쁨을 더욱 고조시켰다. 그리고 그 정점에 황제가 있었다.

그의 젊고 수려한 외모는 백성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으며, 그러한 그의 매력은 어쩐지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황제에 대한 선망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황제는 축제를 선포했다. 열흘간 축제를 벌여 오랜 전쟁에 지친 병사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했다. 황궁에서도 대대적인 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세르비아의 내로라하는 귀족 처자들은 모두 황제를 뵙기 위해 벌써부터 단장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 제국 전체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황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재무 대신인 프리트홀트 라울 드 스트라우스를 불러 그와 독대하는 것이었다.

베르톨트는 그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집무실을 둘러봤다. 늘 전장에 있어서 그런지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조금 낯설었다.

밖에서 시종장 올란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재무대신 스트라우스 경이 드셨습니다.”

“들라.”

문이 열리며 온화한 미중년의 남자가 미소 띤 얼굴로 들어왔다. 그는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고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베르톨트는 탁자에 기대어 팔로 탁자의 모서리를 잡고 있었다. 어린 사자였던 그가 이제 사자 무리를 이끄는 왕이 되어 있었다. 프리트홀트는 자신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는 이 젊은 황제에게서 강력한 힘과 여유를 느꼈다.

“폐하. 귀환을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고맙네. 경도 수고했어. 이렇게 성대한 환영식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몰랐어.”

“후훗. 좀 더 하려다가 참았습니다.”

베르톨트는 깐깐하면서도 다정한 프리트홀트에게 피식 하고 웃음을 날렸다.

“내일 아침에 정무 회의를 열 테니 준비해 주게.”

“예, 폐하.”

“그리고….”

“예, 말씀하십시오.”

그때, 문밖에서 시종장 올란도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그의 손에 다기가 들려 있었다.

“경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어. 차 한잔하면서 얘기하지.”

황제는 갑자기 어조를 바꿔 친근하게 말했다.

집무실 한쪽에 있는 유려한 차 테이블에 다기가 놓였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올란도가 두 사람 앞에 놓인 찻잔에 물을 따르자, 화하면서도 향긋한 향이 올라왔다.

“자네는 나가 봐도 좋아.”

올란도는 예를 갖추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들게.”

“예, 폐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으로 보아 황제가 하려는 말이 보통 이야기는 아닐 것이었다. 프리트홀트는 조금 불안해졌다.

“폐하. 괜찮으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그래.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오간 말을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겠다고 약조해 주게.”

프리트홀트는 황제의 검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견고하였다. 타고난 위엄과 꿰뚫는 듯한 눈빛은 전쟁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예, 알겠습니다.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베르톨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고는 조용히 내려놓았다.

“어떤 이가 있어. 전쟁터에서 알게 되었지.”

황제가 고개를 들어 프리트홀트의 다갈색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연약하고 아름답지만 용감하고 영민한 사람이야. 그대가 그 사람의 후견인, 아니 양아버지가 되어 주었으면 하네.”

프리트홀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폐, 폐하. 제가, 아니, 양부라 하심은?”

“예전에 자네가 나한테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나를 아들 삼았으면 좋겠다면서 후에 내가 말하는 이를 양자로 삼겠다고 했던 거.”

“네, 그랬었죠. 그랬습니다.”

“참고로 아들이 아니라 딸이야.”

“딸…이요? 여성입니까?”

“그래. 여성이지.”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언저리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달려 있었다.

“폐하의 명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황명이긴 하지. 그러나 난 자네가 그녀를 진심으로 맞아 주었으면 하네. 생각을 해 봤어. 그녀에게 아버지가 있다면 자네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폐하, 그분을….”

베르톨트가 빙긋 웃었다.

“그래.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어. 그녀에게 새로운 가정과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주고 싶네.”

“새로운 신분이라고 하시면, 알려지면 곤란한 가문의 자제분이십니까?”

또 한 번 침묵이 지나갔다.

“그녀는 수에비의 왕실 사람이야.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지. 어쩌다가 그녀를 알게 되었지만, 그녀의 신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어. 게다가 그녀는 내 목숨을 살린 사람이라네.”

“목숨을요? 폐하, 언제 위기에 처하신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런 얘기는!”

프리트홀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황제가 죽을 고비에 놓였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그랬다면 자신에게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을 리 없었다.

“루이사가 납치되었던 것은 알고 있지?”

“예.”

“그녀를 구하러 안달루스의 바오로 공작을 만났다가 독에 당해 사경을 헤매게 되었어. 그때 그녀가 나를 살렸네.”

“폐하께서는 어지간한 독에는 반응하지 않지 않으십니까? 대체 어떤 독이었기에….”

“이 또한 비밀이니 더 이상 알아봐야 골치만 아플 걸세. 아무튼 그녀가 나를 살렸다는 것은 레니에가 잘 알아.”

황제는 말을 적당히 돌려 프리트홀트의 호기심을 끊으려 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쯤 세상에 없거나, 정말 운이 좋다면 바보 천치가 되어 안달루스 황실 감옥에 갇혀 있었을 거야. 그러니 그렇게만 알게.”

“예, 폐하.”

“3일 후에 있을 대연회 자리에서, 그녀를 자네의 여식으로 소개했으면 좋겠네.”

프리트홀트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 그렇게나 빨리 말입니까?”

“지금 레니에의 녹턴 본가에 있으니 한번 만나 봐. 그리고 축제 기간이 끝나면 자네와 함께 외무부에서 근무하게 했으면 해.”

“외무부 말씀입니까?”

“그래. 자넨 다시 외무부로 이동할 거야. 지금 세르비아엔 외교적 문제가 산적해 있으니 그리로 이동해서 능력을 발휘해 주게.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가서 비서관이나 보좌관, 뭐든 그녀가 편한 대로 해 줘. 아마 그대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폐하. 황실 정무를 보려면, 더군다나 외무부에 있으려면 정식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분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아무 연유 없이 일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아슬란어와 마이스터로어, 라스문어에 능통해. 또한 황실의 그 누구보다 훌륭히 일을 해낼 걸세. 이번 바이온과의 1차 전투 때 비밀 서신의 암호를 푼 것도 그녀야. 그리고 자네의 개인 비서라면 정식 절차를 밟지 않더라도 일할 수 있지 않나.”

프리트홀트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황제가 전쟁터에서 알게 된 수에비 왕실의 여자. 암호를 풀 수 있을 만큼 해박하고 황제의 목숨까지 구한 사람.

그리고, 황제가 마음에 품은 사람.

여기까진 알겠는데 왜 굳이 황실에서 근무하게 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어찌해서 황실에서, 그것도 외무부에서 근무해야 하는 것입니까? 무슨 연유가 있습니까?”

베르톨트가 움찔했다.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프리트홀트는 놓치지 않았다.

“그, 그건….”

“알고 싶습니다. 아니, 알아야겠습니다.”

황제가 헛기침을 하더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

“내가 그녀를 보고 싶기 때문이야. 자네의 양딸로 있으면 신분 세탁이야 되겠지만 그녀를 볼 명분이 없지 않나. 매번 황실로 부르기도 그렇고.”

프리트홀트는 사레에 들려 켁켁거렸다. 황제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여자 때문에, 아니 누구에게든 이렇게 관심을 갖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낯설다 못해 그답지 않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나중엔 더 놀랄 테니.”

“그, 그게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서 더 놀랄 일이 있습니까?”

“그녀를 양딸로 삼는다면 결국엔, 나도 얻을 수 있을 거네.”

프리트홀트가 놀라서 찻잔을 떨어뜨렸다.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지만 찻물이 모두 바닥에 쏟아졌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차 따위에 신경을 쓸 여력은 없었다.

“폐하를 얻다니요?”

“그대는 나의 장인이 될 거야!”

너무 놀란 나머지 프리트홀트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이런 얘기를 이렇게 대놓고 뻔뻔하게 하는 남자는 이 세상에서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이가 유일할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대가 좋아하니 다행이군.”

황제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 빙글빙글 웃음이 달려 있었다.

웃으니 순해 보였다. 10년 전, 양자 얘기를 꺼냈던 그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만 일어나지. 그녀가 기다릴 거야.”

* * *

프리트홀트는 황제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사르 공작가로 향했다. 가는 내내 마차 안에서 황제의 장인이 될 거라는 그 말을 되씹었다.

황제는 자신이 만나러 가는 이를 무척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자신을 다그칠 리가 없다. 그는 곧 만나게 될 사람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다.

세르비아의 수도, 녹턴은 녹음이 짙고 서정적인 곳이었다. 황제는 전장에서 10년을 머물렀지만 실상은 책을 좋아하고 사색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수도는 황제의 그런 이면을 닮아 있었다.

마차가 길 양쪽으로 곧고 길게 뻗은 참나무들을 지나쳐 갔다. 수백 년의 시간이 피부로 느껴지는 참나무 길을 지나면, 황궁처럼 규모 있고 화려하진 않지만 구석구석 우아하고 아름다운 사르 가문의 저택이 나타난다.

마차가 조약돌로 포장된 길을 따라 리듬감 있게 움직이더니 저택의 문 앞에 섰다. 프리트홀트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오셨습니까. 스트라우스 후작.”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르 공작 전하.”

레니에는 저택 앞뜰까지 나와 프리트홀트를 맞았다. 서열로 따지면 프리트홀트가 레니에보다 아래였으나 레니에는 프리트홀트를 결코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프리트홀트는 레니에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관리였다. 그는 효율적이고 공정하며 신속한 사람이었다. 또한 타인에 대한 매너가 매우 좋아 남녀 누구나 후작의 됨됨이를 칭송했다.

레니에는 접견실로 프리트홀트를 안내하면서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두 사람은 접견실 티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에 차가 놓이자 레니에가 본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폐하의 의중을 들으셨습니까?”

“예.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들었습니다. 대연회까지 시간이 많지 않아 바로 뵈러 온 것이고요. 물론 폐하께서 그리하라 무언의 압력을 주시긴 했습니다.”

프리트홀트가 다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프리트홀트 경은 폐하의 뜻을 모두 받아들이신 것입니까?”

“무슨 뜻으로 물으시는 겁니까?”

“전혀 모르는 이를 양녀로 삼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아무리 폐하의 뜻이지만….”

프리트홀트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네. 쉬운 일은 아닐 듯합니다. 하지만 전 폐하를…. 이런 얘기가 불경스러울지는 모르지만, 저는 폐하가 제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폐하는 부모가 없이도 너무나 훌륭히 성장하셨습니다. 하지만 너무 큰 책임에 짓눌려 개인으로서의 삶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제게는 그런 모습이 몹시 안타깝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폐하는 황제가 아닌 인간으로서, 한 남자로서 처음으로 제게 청을 하였습니다. 전 그 대상이 저라는 것이 고맙고 감격스럽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청을 들어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레니에는 온화하지만 단호하게 말하는 후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제를 아들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물씬 풍겨 났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도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레니에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종을 울려 집사를 불렀다. 곧이어 집사가 들어왔다.

“가서 아델라이드 님을 모셔 오게.”

집사가 물러나자, 레니에는 품에서 황제의 인장이 찍힌 종이를 꺼냈다.

“아델라이드 님을 양녀로 입적하는 것을 승인하는 폐하의 확인서입니다. 스트라우스가의 가주가 될지도 모를 분을 입적하는 것이므로 폐하의 허락이 있어야겠기에 준비했습니다.”

“하아! 벌써 이렇게까지.”

“원래 철두철미한 분이 아니십니까. 오래 모시고는 있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가늠조차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전하께서 그러시니 저희는 더하지요. 하하하.”

두 사람은 황제와 같이 일하면서 겪는 서로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능력 있는 관리들이 모여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으니 어째 황제의 뒷담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그때 문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디께서 드셨습니다.”

“모시게.”

레니에가 대답하자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들어왔다.

순간 프리트홀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들어온 이의 인상이 너무나 밝고 또 아름다워서 인간 같지가 않았다. 진부하지만 천사 같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벌꿀이 흐르는 듯한 굽실한 금발과 커다란 눈에 단호한 청회색 눈동자, 윤기가 흐르는 말간 피부, 꼿꼿한 자세. 그녀에게는 부드러우면서도 꺾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프리트홀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델라이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그녀의 청회색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프리트홀트와 레니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델라이드를 맞았다. 레니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델라이드 님. 이분은 세르비아의 재무 대신인 프리트홀트 라울 드 스트라우스 후작이십니다.”

“인사드립니다. 아델라이드라고 합니다.”

프리트홀트는 그녀를 꼼꼼히 살폈다. 몸가짐이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고 눈빛은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다.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레니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 오늘부터 당장 아버지와 딸이라고 부르면 너무나 어색하고 불편할 것이었다. 레니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 갈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시간을 주고 싶었다.

“앉으세요, 레이디.”

아델라이드는 프리트홀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전 레이디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요.”

“죄, 죄송합니다.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해서…. 후작님께 너무 큰 불편을 드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입니다.”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니고, 다만 아버지라는 위치가 처음이라 어색할 뿐이지요.”

“말을 놓으시지요. 후작님께서 말씀을 낮추지 않으시니 아랫사람인 제가 너무 불편합니다.”

아델라이드가 이렇게 먼저 이야기해 주니 프리트홀트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긴 자신은 50대 중반이고 앞에 앉은 레이디는 스무 살 정도로밖에는 안 보이니 말을 낮추는 것이 편할 듯했다.

“알겠네. 그럼 이제부터 말을 편하게 하마.”

“네.”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하자꾸나.”

“네.”

두 사람은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양아버지라는 사람이 매우 예의가 바르고 진중한 성품을 지녔다는 것을 알았다. 한마디로 신사였다.

미소를 지을 때 인상이 부드럽게 누그러지고 나이가 오십이 넘어서도 매력을 잃지 않은 이 중년의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자신과 닮은 듯했다. 두 사람 모두 말투가 차분하고 용모가 단아했으며 다른 이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었다.

“아직은 후작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양해해 주세요.”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폐하께서 처음 양녀 얘기를 꺼내셨을 때는 사실 너무나 어색하고 불편하여 거절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저의 안위를 걱정하시어 이런 청을, 어찌 보면 후작님께 너무나 무례한 청을 하신 듯합니다.”

“폐하는 너를 매우 아끼시더구나. 나도 좀 놀랐다.”

“…네.”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비록 짧게 대화가 오갔으나 프리트홀트는 아델라이드에 대해 이런저런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현재 스물한 살로 안달루스 어디엔가 있을 오라버니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황제를 만났고 그를 구했으며, 그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되었다.

수에비 왕국 시절의 그녀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하나 매우 존귀한 존재였던 것은 틀림없었다. 아마도 서로를 향해 많은 신뢰가 쌓이면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이 빛나고 아름다운 아이는 이제 프리트홀트의 여식이 되었다.

두 사람이 접견실을 나와 후작의 성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을 때, 인사를 하러 나와 있던 레니에가 프리트홀트와 아델라이드를 번갈아 보며 빙긋 웃었다.

“두 분, 왠지 모르게 닮으셨네요.”

대화를 하는 내내 같은 생각을 했던 터라 두 사람 모두 레니에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프리트홀트 경. 대연회 때, 아델라이드 양은 최고로 아름다운 여성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경 써서 준비해 주세요. 아! 물론 지금도 좋지만요.”

레니에의 말을 듣고 프리트홀트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제 여식으로 소개하는 것 말고도 다른 것이 있습니까?”

“비공식적으로 아델라이드 양의 데뷔탕트가 될 것입니다. 세르비아의 귀족들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야지요.”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레니에에게 인사를 한 프리트홀트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 아델라이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레니에는 아델라이드와도 짧게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마차는 조약돌이 깔린 사르 가문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이제부터는 발루아 백작가의 딸도 아니고 수에비의 왕비도 아닌, 세르비아의 아델라이드 라울 드 스트라우스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 * *

레니에는 프리트홀트와 함께 떠나는 아델라이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시야에서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스트라우스 후작이 오기 전 아델라이드와 나눴던 대화가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델라이드 님. 또 필요한 것 없으십니까? 폐하께서 무엇이든지 갖춰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하아, 모르겠어요. 폐하가 무슨 생각이신지, 제가 세르비아 제국 후작가의 양녀라니.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걸까요? 폐하께 누를 끼치게 되는 건 아닐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 레니에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 모든 것이 두렵고 불안하다 하여 사라지신다면 폐하는 온 대륙을 뒤져서라도 아델라이드 님을 찾아내실 겁니다. 어쩌면 전쟁도 불사하지 않으실 테죠.”

“무, 무슨 그런…!”

“진심입니다. 폐하는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곁에 있으라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게 부탁이든 명령이든.”

“…….”

“폐하의 의중은, 때가 되면 폐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조금 있으면 스트라우스 후작이 오실 겁니다. 그 전에 제게 부탁하실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델라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레니에는 불안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조금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을 떠나겠다며 고개를 숙이던 에드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레니에 님. 오라버니는 괜…찮으신 거겠죠? 그때, 몸은 많이 나아지셨던 거죠?”

아델라이드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 왔다. 수도로 귀환하는 동안, 레니에는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과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라버니인 에드가와의 이야기도 간략하게 해 주었다.

그녀는 오라버니의 소식을 더 듣고 싶었다. 에드가와 레니에가 한동안 함께 있었다고 하니 궁금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에드가가 많이 아팠는지, 많이 회복되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혹여 자신을 원망하지는 않았는지 등등.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에드가는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요. 이제 그를 찾는 일만 남았네요.”

아델라이드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레니에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반려로 맞으려는 것 같았다. 레니에에게도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그는 친우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그녀를 황제에게 데려간 것도, 그녀에게 황제의 목숨을 살려 달라 한 것도 자신인데 황제의 곁에 그녀가 있는 게 옳은지는 알 수 없었다. 가늠할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니 불안이 차올랐다.

레니에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신을 지키고 싶습니다. 당신이 에드가의 동생이기 때문에,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더 당신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을 그에게서 멀리 떼어 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제가 악역을 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발. 당신이 그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주세요.’

* * *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발루아 백작가의 가솔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수에비의 왕비였을 때는 얼굴을 가리고 다녔기 때문에 그녀의 외모를 아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왕비 시절 다른 사람 앞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수에비 국왕의 지시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가 다른 이들을 만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해서 아델라이드가 왕비로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녀의 지근거리에 있던 많지 않은 시녀들은 수시로 교체가 되었고 그나마도 세르비아 군이 입성하던 날 국왕의 검에 죽임을 당했다.

이제 아델라이드 왕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에드가와 소니아만 남은 셈이었다.

물론 벨라루아도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고자 하면 모든 것이 끝나겠지만 그런 가정은 제외했다.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 모를 확신이 들었다.

이제 마력석으로 외모를 바꾸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프고 가슴 아팠다. 자신을 아는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름도 바꾸지 않았다. 얼굴을 알아보는 자가 없으니 이름을 바꾸든 바꾸지 않든 별 의미가 없었다.

“아델라이드.”

“네, 후작님.”

“급하게 준비하느라 방이 갖추어지질 않았구나. 일단은 이 방을 쓰고 가구와 드레스들은 내일부터 하나씩 마련하자꾸나.”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프리트홀트는 진심으로 웃으며 대답하는 아델라이드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나이가 벌써 오십이었다. 같이 있은 지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프리트홀트는 알 수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기대보다 더 빛나고 출중한 아이였다. 더 지켜봐야겠지만 그녀를 향한 애정이 벌써 싹트기 시작한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아델라이드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침대는 레이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침대 맞은편에 보이는 화장대는 언뜻 보면 소박한 듯하지만 세밀한 장식들이 새겨져 고급스럽고 우아했다. 오랜 시간 혼자 지낸 후작의 성에 이렇게 화려한 여자의 방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게 조금 의아했다.

아델라이드는 커다란 창문 앞에 서서 커튼을 젖혔다. 그러자 밸모럴 성 안뜰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아름다운 정원의 중간에 분수가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나무들이 꽃 모양으로 된 분수의 네 군데를 감싸고 있었고, 여러 갈래로 쏟아져 나오는 분수대의 물은 계단식으로 흘러 제법 긴 수로에 이르렀다.

그 수로의 가장자리엔 잘 손질된 작은 나무와 꽃들이 가득했다. 붉은 벽돌과 타일이 깔린 바닥은 긴 수로의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정원은 문처럼 꾸며진 숲에서 끝이 났다. 그 문을 지나면 별궁이 나오는 듯했다. 성의 주인인 프리트홀트를 닮아 전체적인 정경이 섬세하면서도 매우 담백했다.

아델라이드는 한동안 넋을 잃은 채 안뜰의 전경을 바라보다 침대 머리맡의 줄을 잡아 당겨 시녀를 불렀다.

곧 문이 열리고 매우 낯익은 여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소니아!”

아델라이드는 뛰어가서 소니아와 포옹했다. 소니아가 웃는지 우는지 모를 소리를 내었다.

재회의 기쁨을 나눈 아델라이드는 품에서 소니아를 떼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어, 어젯밤에 이곳으로 왔어요.”

아델라이드는 흐느끼는 소니아를 다시 한 번 안아 주며 등을 토닥였다.

“어젯밤에?”

“밤늦게라도 뵙고 싶었는데, 다리가 아파서 치료를 받느라 깜빡 잠이 들었어요.”

“치료? 누가?”

“후작께서 주치의에게 제 다리를 진찰하라 하명하신 덕분에 주치의가 다녀갔어요. 며칠 동안 행군하느라 다리가 많이 불편했거든요.”

“그랬구나. 미안해, 소니아. 내가 미처….”

“아니에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셨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누, 누가 그랬어?”

“폐하께서요.”

“폐하께서?”

“세르비아로 오기 바로 전에 저를 부르셔서 왕비님이, 아니 아델라이드 님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으나, 병사들이 우글거려 위험하니 모습을 감추고 계신다고 하셨어요. 세르비아로 돌아가면 저를 면천해 주시고 아델라이드 님 곁으로 보내 주시겠다고도 하셨고요.”

“하아! 그랬구나.”

아델라이드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언제나 세심하게 신경 쓰는 베르톨트가 한없이 고마웠다. 머릿속에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걸까. 그는 늘 놀라운 사람이었다.

“후작님도 좋은 분 같아요.”

“응. 그런 것 같아.”

“소니아. 일단 준비를 좀 해야겠어. 아침 식사는 후작님과 함께하려고.”

“네. 그러셔야죠.”

소니아의 얼굴 한가득 웃음이 흘렀다. 누르려 해도 배시시 배어 나오는,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그런 소니아를 본 아델라이드도 미소를 지었다.

거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 끝에 반가움과 행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이 모든 것이 베르톨트의 관심과 배려가 만들어 낸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 * *

“아가씨. 조금 있다가 디자이너가 온다고 했으니 그때 드레스를 장만하는 것으로 하고, 지금은 이것을 입으세요.”

목욕을 끝낸 아델라이드는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며 소니아가 들고 있는 드레스를 보았다. 단정한 디자인의 하늘색 드레스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레스를 침대 위에 곱게 올려 둔 소니아는 아델라이드에게 다가가 머리를 말려 주었다. 자신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나와 미소 짓는 소니아를 거울로 바라보던 아델라이드가 팔을 들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시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같이 지냈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그것이 현실이 되자 믿을 수 없어 불안하면서도, 입가에 자꾸만 미소가 걸렸다.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단장이 끝난 즈음 스트라우스 가문의 집사인 드란이 아델라이드를 에스코트하러 왔다.

드란은 인자하면서도 넉넉해 보이는 중년의 신사였다. 실제 성격도 그러했다. 프리트홀트와는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고 스트라우스 가의 집사가 된 이후로 프리트홀트와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안주인이 없는 스트라우스가에서 안주인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드란이 안내한 곳은 그리 크지 않은 식당이었다. 8인용 식탁에는 눈부시도록 하얀 식탁보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고풍스러운 촛대와 화사한 꽃들이 놓여 있었다. 아늑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후작님?”

아델라이드가 무릎을 굽히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프리트홀트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잘 잤다. 첫날인데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았고?”

“전혀요. 배려해 주셔서 푹 잘 잤습니다.”

아델라이드는 드란이 내어 주는 의자에 앉았다.

“아델라이드. 지금 있는 그 방은 내 전 부인이 쓰던 방이다. 가문의 여성 친척이나 지인이 방문할 때만 가끔씩 쓰던 곳이야. 그러니 네 방으로는 부족해. 오늘부터 그 맞은편 방을 너의 방으로 꾸미기 시작할 거야. 마무리될 때까지만 지금 그 방을 쓰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하인들이 따끈한 스프와 신선한 샐러드를 가지고 나왔다. 아델라이드는 앞에 놓인 음식과 식기들을 보면서 저택이 여러 가지 면에서 섬세하게 잘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이 모든 것을 집사인 드란이 관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델라이드는 집안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드란의 치밀하고도 섬세한 능력이 새삼 놀라웠다.

프리트홀트와 아델라이드는 식사를 하는 내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은 대화가 잘 통했다. 취향도 맞았고 가치관도 비슷했으며 태도도 흡사했다.

프리트홀트는 이렇게 마음이 맞는 사람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델라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에드가와는 다르게 어른의 식견을 갖어 느낌이 새로웠고, 나이 차이가 나도 이야기가 잘 통했다.

“폐하의 통찰력이 놀랍구나.”

“폐하요?”

“그래. 너도 느끼겠지만 난 너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즐겁다. 폐하는 나와 어울리는 사람을 골라 가족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하셨지. 이번에도 그분의 예상이 적중한 것 같다.”

“네….”

황제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델라이드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수도로 환궁할 때, 아델라이드는 황제와 같이 오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에 띌까 봐 레니에와 따로 출발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황제를 보지 못한 지 벌써 사흘째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를 못 본 사흘 내내 무언가 허전하고 답답했다. 그래서 프리트홀트의 입에서 그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녀는 내심 반가웠다.

“모레 있을 대연회 때문에 수도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의 모든 레이디들이 다 들썩이고 있어. 황제 폐하의 눈에 들기 위해 안달이 났지. 너도 연회에 참석해야 하니 오늘부터 이틀간은 정신없이 바쁠 거다.”

“아…. 저도 참석해야 하나요?”

“당연히 참석해야지. 폐하께서 그날 네가 내 딸이라고 귀족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하라고 하셨어.”

아델라이드는 그렇게까지 만천하에 알려야 하는 건지 의아했다. 아니, 사실 곤혹스러웠다.

그녀는 연회나 파티를 좋아하지 않았다. 남자들의 시선도 부담스러웠고 경쟁자들 간 눈에 보이지 않는 다툼도 싫었다. 황제가 아직 미혼이니 많은 레이디들이 사투를 벌일 텐데, 그 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벌써부터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너무 걱정 말거라. 다 잘될 테니.”

“제가 사람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래. 그런 거 같구나. 그렇지만 폐하께서 너를 많이 배려하고 계시니 걱정할 것 없다.”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계획에 대해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자신을 왜 프리트홀트 후작의 딸로 만들어야 했는지, 왜 자신을 대연회에서 소개하려 하는지, 왜 황실의 외교부에서 근무하라고 하는지 등등. 그녀는 황제에게 직접 묻고 싶었다.

이유가 전혀 짐작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말 그렇게 할 계획인지를 재차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고, 또 무서운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 대담한 계획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델라이드는 식사를 마친 뒤 녹턴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를 만났다. 연회 때 입을 드레스와 보석을 골라야 했다.

드레스를 맞출 시간이 없었기에, 기존에 만들어 놓은 드레스 중 하나를 대충 골라서 세부적인 장식만 자신의 기호에 맞게 고쳐서 입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녹턴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이 디자이너는 아델라이드를 보자마자 그녀에게 환상적으로 어울리는 드레스 세 벌을 골라 주었다. 그리고 아델라이드를 유심히 관찰했다.

오늘 아델라이드가 입고 온 하늘색 드레스는 그녀의 희고 매끈한 피부와 날씬한 몸매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적당한 목을 드러내는 네크라인 덕에 우아한 이목구비와 청초한 목선이 돋보였다.

이러한 그녀의 특징을 파악한 디자이너 프란체스는 대연회 때 아델라이드를 어떤 이미지로 보이게 할지 모든 구상을 마쳤다.

“영애. 하얀 피부와 날씬한 몸매를 부각시키기 위해, 음, 그리고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톤의 화장을 하는 게 좋겠어요.”

프란체스와의 열띤 논의 끝에 아델라이드가 연회 때 입을 드레스가 정해졌다. 걸을 때마다 물결치듯 흩날리며 몸의 곡선이 아름답게 드러나는 하얀 실크 드레스였다.

아델라이드는 거울을 보며 드레스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고혹적이면서, 걸을 때는 유혹적이기까지 했다.

“등 라인이 더 드러나도록 수선할까 합니다. 여기 맞는 보석은 이것으로.”

프란체스가 보여 준 보석은 아델라이드의 청회색 눈동자를 닮은 사파이어 목걸이였다. 뒷목 부분에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이어진 끈이 길게 달려 있었다.

심플하지만 매혹적인 드레스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사파이어 목걸이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프란체스는 깊게 파인 매끈한 등 뒤로 다이아몬드 줄을 길게 늘어뜨리면 걸을 때마다 사내들이 줄줄이 쓰러질 거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프란체스, 그런데 이건 너무 파격적이지 않을까요? 이렇게 몸매를 내보이는 것도 그렇고 등을 그렇게 판다면….”

“너무 아름다울 거예요. 더구나 이런 피부라면 빛나는 하얀 드레스가 어울린다고요. 그리고 폐하께서 뭘 해도 좋으니 최고로 아름답게 꾸며 놓으라 하셨어요.”

“폐하가요?”

“네. 어제 제게 서신을 보내셨는데, 모르셨어요?”

아델라이드는 놀라서 눈만 깜빡였다.

‘언제 그렇게.’

고맙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 그리고 등에 작은 상처가 있다면서요? 그건 치료 마법사가 와서 없애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드레스를 입었을 때 상처가 보이면 안 되니까요.”

방긋 웃은 프란체스는 아델라이드의 등 뒤에서 초크를 들고 수정할 부분을 표시했다. 워낙 안목이 뛰어나고 실력이 출중해서 아델라이드가 무어라 말하지 않아도 척척 진행되었다.

아델라이드도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프란체스 역시 아델라이드가 마음에 들었다. 후작의 양딸이라고 해서 어떤 사람일지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실제로 보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울뿐더러 겸손하면서 평민인 자신을 배려해 주니 흥이 나 자기도 모르게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황제가 직접 서신까지 써 가며 신경 써 달라 하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 아름다운 아가씨에 대한 호감도는 최고점을 찍고 있었다.

사실 프란체스는 녹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황제의 팬이었다.

프란체스가 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치료 마법사가 방문했다.

대륙에서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마법사들은 사람을 치료하거나 물건을 고치는 일을 주로 했다. 그나마도 의술이 발달하면서부터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질환이나 상처를 낫게 하는 정도의 마법만 남았다.

오늘 방문한 치료 마법사 역시 상처를 낫게 하여 그 흔적을 없애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마법사는 소니아의 도움을 받아 아델라이드 등에 있는 무수한 상처들을 없앴다. 이제 흔적만 남은 것도 아직 아물지 않은 것도, 신중하면서도 꼼꼼하게 살펴보며 흉터를 지워 나갔다.

“흉터라는 것이 본래, 고통은 없어졌지만 고통받을 당시의 기억이 육체에 남아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 흉터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 기억이 몸에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을 뜻하지요.”

“기억들이 사라진다는 건가요?”

뜻밖의 말이었다. 아델라이드는 놀라워하며 물었다.

“머리로는 기억하겠지만 가슴으로는 느끼지 않게 됩니다. 나의 일이긴 한데 남의 일인 것처럼 인지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상처로 인해 생겨난 트라우마와 악몽 등이 사라지게 됩니다.”

밤에 악몽을 꾸지 않게 된다니, 아델라이드는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한번 악몽을 꾸면 몸이 축나고 마음도 괴롭기 그지없었다.

“아델라이드 님. 내일 한 번 더 방문해 상처를 모두 없애겠습니다. 한꺼번에 모두 없애려니 힘이 부치는군요.”

상처를 완전히 없애 원래처럼 복원하는 것은 쉬운 마법이 아니었다. 과거 이 상처가 생겼을 때의 아픔과 고통을 일정 부분 같이 없애 주기 때문에 마법을 거는 쪽의 신체적, 정신적인 부담이 컸다.

마법사는 꽤 긴 시간 동안 땀을 흘리며 마력을 흘려 넣더니 내일 다시 방문하겠다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아델라이드가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이름을 물어도 속세에서 더 이상의 인연을 만들지 않겠다며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옆에 있던 소니아는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다며 혀를 차고는 아델라이드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가씨. 저 마법사 실력은 좋은가 봐요. 정말 상처가 많이 사라졌어요. 내일 한 번만 더 하면 등이 매끈해지겠어요.”

아델라이드는 이것 또한 베르톨트의 세심한 배려임을 알고 있었다. 곁에 있지 않아도 매순간 이렇듯 그가 느껴져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주저앉아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 그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 * *

세르비아 황제의 집무실.

“레니에. 전리품 배분과 관리, 군수 물자 관련 보고는 언제까지 볼 수 있지?”

“레니에.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들을 위한 복지 계획도 짜야겠어.”

“레니에. 현재 안달루스 제국의 정세가 어떤지 좀 알아봐 줘. 특히 바오로 공작에 대해 알아야겠어.”

“레니에. 사병을 갖고 있는 귀족들과 그 현황도 알고 싶어.”

“레니에. 세르비아 제국령이 된 수에비, 카프카의 발전 계획도 세워야 해. 이건 회의를 거쳐 의견을 수렴할 테니 계획이 나올 때까지의 일정만 잡아 줘.”

“레니에. 현재 황실 인력에 대한 자료가 필요해.”

“레니에. 세르비아 내각 인력 현황과 인원을 상세히 파악해야겠어.”

“레니에. 이번 가을 가뭄 때 물 관리 계획도 올려 줘.”

“레니에. 3년간 황실 자금 관리 계획 대장도 찾아 줘.”

“레니에. 각 산업 분야별 인재 취합도 시작해. 평민도 포함하도록!”

“레니에. 이민족이 많아진 지금, 세르비아 제국민의 기본 의무와 권리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어.”

레니에는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황제의 지시를 받아 적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뒤부터 황제는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마치 대신들을 괴롭히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폐하. 아직도 더 남았습니까?”

지금까지 적은 목록만 해도 109개였고 그중 30개 정도는 올해 안에 파악하기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늘 저녁까지 정리해 줘. 내일부터 3일 동안 대연회가 열리겠지만 그에 앞서 오전 국무 회의에서 각 부처 장관들에게 발표할 거야. 앞으로 6개월 동안 코피 쏟을 각오 하는 게 좋아.”

레니에는 황제가 악마처럼 웃는 것을 보았다. 그 웃음 끝에 무언가 계략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저 미친 황제 놈!’

“레니에. 너 지금 속으로 나 욕했지?”

베르톨트가 레니에를 노려보았다. 레니에는 곧 표정을 풀고 방긋 웃으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폐하의 깊은 심중을 헤아릴 수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런 거 없어.”

“그렇습니까?”

“넌 너무 순수하지 못해. 그동안 전장에 나가 있느라 살피지 못했던 국정을 집중해서 살피고자 하는 게 속뜻이라면 속뜻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래서 레니에는 적당히 입을 다물고 있으려 했으나, 순수하지 못하다는 말에 그만 배알이 뒤틀려 버렸다.

“어련하시겠습니까. 전 다만 이 모든 것이 혹시 아델라이드 님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을 뿐입니다.”

레니에의 말에 황제의 짙고 숱 많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귀신같은 자식!’

“시끄럽다. 시답지 않은 말은 집어치우고 지금까지 적은 거나 다시 보여 다오.”

그렇게 다시 시작된 황제와 레니에의 업무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나중에는 레니에가 대놓고 화를 내더니 자신은 좀 쉬어야 한다며 휴고를 대신 들여보내서 끝난 것이었다.

레니에 못지않게 냉철하고 일을 좋아하는 휴고도 일을 마쳤을 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제가 쏟아 내는 국정 업무들은 그저 질문이나 요구가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대강 처리할 수가 없는 종류의 일들이었다.

휴고는 황제의 통찰력과 집중력에 혀를 내둘렀다.

다음 날 아침, 황제는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국무 회의를 직접 주관했다. 그 결과 각 부처별 대신들은 어마무시한 일 폭탄을 받았다.

대연회 날이어서 한껏 부풀어 있던 귀족들은 자신들 앞에 떨어진 업무를 받아 들고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세르비아의 대신들은 보시오. 그대들 앞에 놓인 이 과제들은 세르비아 제국민들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만 하는 것들이오. 앞으로 우리 세르비아의 100년, 500년 미래가 달린 일이란 말이지. 그러니 조사할 것은 치밀하게 조사하고, 대책을 세워 보고를 해야 할 것은 각 부처별로 심도 깊은 대화와 연구를 거친 뒤 보고하도록 하시오. 각 항목마다 일정이 표기되어 있으니 기한을 엄밀히 준수해 주시고, 이의가 있다면 별도로 나에게 말해 주시오. 직접!”

황제의 말이 끝나자 고위 대신들과 그들의 보좌관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저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감히 누가, 그것도 직접…!’

국무 회의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끝이 났다. 대신들은 받아 든 숙제들을 가지고 모두 자신의 부처로 돌아가 부처 회의를 열었다. 일정 내에 끝내려면 여유가 없었다.

모든 부처는 대연회가 끝난 다음 날부터 야근 모드에 돌입했다. 황제는 흐뭇해했다.

* * *

세르비아의 황궁, 워럼 성은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것으로 유명했다. 화려하다고는 해도 색채가 다채롭다기보다는 디자인에서 웅장함이 느껴지는 성이었다. 성 내부와 외부 모두 견고하고 압도적인 미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대연회가 열리는 연회장은 높은 천장과 천장에 그려진 아름다운 벽화, 화려한 샹들리에, 벽에 무수히 달린 창문과 신비로운 문양이 부조된 창문틀, 온통 마호가니와 금으로 채색된 홀 안의 색감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사실 베르톨트는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이유로 이 연회장을 싫어했다. 이 공간이 원래는 이토록 화려하지 않았지만 몇 대 전 왕이었던 자의 지나친 낭비벽과 허영으로 지금과 같이 화려한 곳이 되었다.

그런 이들의 말로는 대체로 비슷하다. 그는 안달루스 제국의 수탈 때문에 불만이 턱 끝까지 차오른 백성들의 봉기로 결국엔 폐위되고 말았다.

베르톨트의 어머니였던 선대 왕비는 이 공간을 사용하지 않았다. 베르톨트도 황좌에 오른 후 이 대연회장을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온 제국민에게 승리의 기쁨을 전하고 제국의 위용을 외부에도 알릴 겸 일부러 대연회장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연회장에 들어선 많은 귀족과 초대된 극소수의 평민들은 연회장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연회장에 들어선 많은 여성들이었다.

아직 미혼인 젊은 황제에게 잘 보이려는 귀족 여성들이 화려한 모습으로 연회장에 들어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모두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그 덕에 연회장에 모인 많은 총각들은 신이 났다.

드디어 대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강렬한 타악기 소리가 울리자 모든 사람들이 홀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황궁의 시종장 올란도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남부 그린스터 영지의 영주이신 헨리 에리스타 백작과 영애 루이사 에리스타입니다.”

문이 열리고, 강렬한 붉은 머리의 노신사와 육감적인 몸매의 루이사가 들어왔다.

루이사는 보통 때 입는 황실 기사단의 정복이 아닌, 몸매가 드러나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었다. 치렁치렁 늘어뜨린 붉은 머리와 그에 대조되는 흰 피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보석이 많이 박힌 붉은 드레스가 그녀의 하얗고 매끈한 피부를 한껏 돋보이게 해 줬다.

드레스는 타이트하게 몸에 밀착되어 육감적이면서도 잘록한 몸매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자리한 많은 사람들이 루이사의 농익은 아름다움에 탄성을 흘렸다.

시종장 올란도의 호명으로, 대귀족이라고 하는 세르비아의 권세가들이 계속 소개되었다. 휴고의 가문인 모르세르 후작가가 호명되고 프리트홀트가 호명되었다.

“세르비아의 외무 대신인 프리트홀트 라울 드 스트라우스 후작과 그의 영애 아델라이드 죠세파 로렌느 드 스트라우스입니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스트라우스 후작 혼자 참석하는 줄 알고 있다가 시종장이 영애라고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모두들 홀의 입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언제나 단정하면서도 중후한 멋을 풍기는 프리트홀트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을 지닌 레이디가 서 있었다.

그들이 입장하자, 지나치는 사람들이 숨을 헉 들이마시는 소리와 몇몇 남자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홀을 가득 메운 사람들 모두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후에는 공작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귀족 중 마지막으로 레니에 프랑수아 콩데 드 사르 공작이 호명되었다.

멋을 한껏 부린 레니에는 오늘도 아름답고 화려한 미모를 뽐내며 등장했다. 그의 얼굴에 깃든 미소에 많은 여자들이 아찔해했다.

마지막으로 황제가 등장했다.

“세르비아의 빛나는 태양, 베르톨트 한스 악셀 크라젤 폰 카롤링거 3세이십니다.”

대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이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검은 머리를 뒤로 넘겨 훤칠하면서도 잘생긴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고, 섹시한 입매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황제의 연회복은 정복과 연미복을 절충하여 제작된 것이었다. 검은색의 정장에 짙은 회색과 검은색의 실크가 덧대어져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하얀 드레스 셔츠 위로 빛나는 은색과 금색이 배색된 나비넥타이가 세련된 아름다움을 한껏 살려 주었다.

황제 특유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몸매는 아름다운 연회복을 만나 그야말로 섹시한 매력과 우아한 멋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었다. 평소에도 워낙에 잘생긴 황제였지만 이렇게 꾸미고 등장하니 여자들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곳곳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세르비아의 독립과 함께 전쟁에서 승리한 우리 자신들을 축하하는 날이오. 이번의 쾌거는 나의 승리이자 여러분의 승리이니 모두 자축의 파티를 맘껏 즐기시기 바라오!”

황제의 축사가 끝나자 홀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모여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 황제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프리트홀트와 아델라이드도 있었다.

베르톨트는 다가오는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늘 정말 예뻤다. 하얗고 매끈한 피부는 새하얀 드레스를 만나 더욱 빛났고, 짧은 금발은 그녀의 피부색은 물론 드레스와도 매우 잘 어울렸다.

화장을 해서인지 청회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욱 깊어 보였다. 옅게 칠한 립스틱 때문에 입술은 더 탐스럽게 빛났다. 가슴과 허리를 바싹 조이고 엉덩이부터 부드럽게 흐르는 듯 퍼지는 하얀 실크 드레스는 아델라이드의 가늘면서도 굴곡진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황제의 앞으로 걸어가는 아델라이드의 얼굴과 몸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뒷모습을 보고 헉 하며 숨을 삼키는 자도 있었다.

등은 프란체스가 말한 대로 깊게 파서 은밀한 관능미를 보였고 뒷목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다이아몬드는 걸을 때마다 살랑거리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엉덩이 라인부터 덧대어진 실크 자락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물결치듯 펄럭였다.

그야말로 한 마리 나비가 너울대며 날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망할 프란체스 같으니라고. 아름답게 보이게 하라고 했지. 누가 벗겨 놓으라고 했나.’

깊게 침음을 삼킨 베르톨트는 모든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델라이드를 보았다.

“폐하. 이번에 제가 양녀로 삼은 아델라이드입니다.”

“세르비아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델라이드가 허리를 깊게 숙이며 베르톨트에게 예를 표했다.

“축하하오. 프리트홀트 경. 드디어 가족이 생겼군.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분을 양녀로 맞이했으니 참으로 기쁘겠구려. 영애는 세르비아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인 스트라우스의 정통 후계가 되었소. 그러니 앞으로 스트라우스 가문을 더욱 빛내 주길 바라오.”

사람들은 오랫동안 혼자 지내던 프리트홀트 후작이 양녀를 맞았다고 하니 놀라워했다. 그리고 저런 아름다운 아가씨를 어디에서 데리고 왔는지 궁금해했다.

황제가 공식적인 축하 인사를 마치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잦아들었다. 모두들 새로운 스트라우스가의 일원이 된 아델라이드에게 인사하고 싶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오늘 연회장은 크게 두 무리로 나뉘었다. 황제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무리와 아델라이드에게 접근하고 싶어 하는 무리가 바로 그 둘이었다.

그래서 베르톨트와 아델라이드는 각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베르톨트는 근 5일 만에 아델라이드를 보는 것이지만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부터는 그녀의 근처로 다가서지도 못 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 너머로 아델라이드 쪽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 녀석은 또 누구지?’

‘누군데 저렇게 가까이 있는 거야?’

‘저 녀석이…. 아니, 저 아가씨는 뭐가 저리 좋아서 웃고 있는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베르톨트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그녀의 곁에서 남자들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아델라이드는 점점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황실의 연회였다.

그녀의 긴장이 풀려 가는 그때, 또 한 남자가 아델라이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베르톨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고 있는 레이디에게 실례의 말을 전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낮게 욕을 뇌까리며 아델라이드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영애. 저에게 첫 춤을 추는 영광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남자가 정중하게 아델라이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델라이드는 처음 받는 춤 신청에 당황해 머뭇거렸다.

남자의 뒤에서 약간의 노기와 엄중함을 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타깝게도 그 영광을 자네에게 뺏기기 싫군.”

베르톨트에게로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연회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을 한낱 배경으로 전락시킬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그였다.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대, 나의 손을 계속 민망하게 할 텐가?”

아델라이드는 황제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앞으로 한 발 나섰다. 황제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오히려 제가 영광이옵니다, 폐하.”

고개를 드는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한가득 피어 있었다.

그녀는 하얀 실크 장갑을 낀 손을 베르톨트의 손 위에 얹었다. 황제가 그 손을 꼬옥 잡고는 플로어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이 선남선녀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제국 최고의 미남으로 인정받고 있는 황제였고, 여자는 보는 이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 주는 미녀였다.

이미 익숙한 황제보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미녀에게 집중했다. 단정한 이목구비와 눈부신 금발이 독특한 매력을 자아내는 미인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청회색의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심장을 아릿하게 하였다.

황제가 레이디의 등과 허리 사이에 한 손을 얹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은 뒤 어깨 높이로 들어 올렸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멈추었던 음악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베르톨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델라이드를 이끌었다. 크게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동작이 매우 부드럽고 유연했다.

“춤을 잘 추시는군요.”

“조금 추지.”

조금 추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춤에 관심이 없고 다른 것을 공부하기에 바빠 춤을 제대로 연습하지 못했다. 춤이 서툰 아델라이드를 그가 얼마나 잘 리드하는지, 그녀가 춤을 못 추는 것을 다른 이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선수라고 할 수 있었다.

“조금이 아니신데요.”

“난 몸으로 하는 건 뭐든지 잘해. 타고났지.”

오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에게 이 정도 자신감은 조금도 과하지 않았다.

아델라이드는 그의 외모를 홀린 듯 바라보느라, 그가 한 말을 한 박자 늦게 받아들였다. 그 의미를 곱씹는 동안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베르톨트는 붉어진 아델라이드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한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다른 의미는 없어.”

“아, 알고 있어요.”

음악에 맞춰 베르톨트가 아델라이드를 한 바퀴 돌렸다. 그에 따라 드레스가 펄럭이며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아델라이드의 뒷목부터 허리까지 이어져 있던 목걸이의 꼬리도 함께 춤을 추었다.

순간 황제가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아델라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에선 이렇게.”

그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한쪽 발을 크게 내디뎠다. 그에 맞춰 그녀의 한쪽 발이 뒤로 물러났다.

경쾌한 움직임이었다. 동작에 따라 아델라이드의 하얀 드레스가 크게 물결쳤다.

“다시 돌고.”

그의 말은 주문과도 같았다. 아델라이드는 그의 손을 잡고 다시 한 바퀴 돌았다.

회전이 멎고 제자리에 왔을 때, 그가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이 마주 봤다. 베르톨트의 타는 듯한 시선이 그녀의 시선을 옭아맸다. 음악이 빨라졌다.

“한 번 더.”

연회장이 그녀의 눈앞에서 빠르게 돌았다. 그녀는 다시 베르톨트의 앞에 멈춰 섰다. 음악이 조금 더 빨라졌다.

베르톨트가 아델라이드의 허리를 휘감고 들어 올려 함께 빙그르르 돌자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공중에서 하얀 물결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아델라이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자신이 이렇게 역동적이면서도 화려하게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자신을 이렇게 리드하는 베르톨트가 신기했다.

“나를 믿어!”

그가 그녀를 들어 올려 한 바퀴 돌고, 또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사뿐히 내려놓았다. 아델라이드는 그의 리드에 따라 몸을 맡겼다.

정신이 없었지만 그가 그리는 그림이 보였다. 그 안에서 자신은 믿기지 않을 만큼 물 흐르듯 춤을 추고 있었다.

“놀라워요. 제가 이렇게 춤을 출 수 있다니.”

“나도 그대가 놀라워.”

황제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뒷말을 하지 않았지만, 아델라이드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무엇을 놀랍다고 하는 것인지.

둘은 마주 잡은 손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스텝을 밟으며 돌았다. 베르톨트의 뜨겁고도 집요한 시선은 여전히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폐, 폐하. 그렇게 보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데?”

그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반문했다. 그의 짙은 눈썹이 움찔거렸다. 대답을 바라는 듯한 표정에 아델라이드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보고 있지?”

“그, 자, 잡아먹을 듯이….”

차마 자신의 입으로 내뱉기 어려운 말이었다. 아델라이드는 민망한 나머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그사이 그가 한 걸음 멀어졌다가 한 걸음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아델라이드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스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정말 잡아먹고 싶어.”

그가 다시 멀어졌다. 놀란 그녀의 귓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누가 들었을까 봐 좌우를 둘러보았다.

다시 남자가 가까워졌다.

“후우. 이렇게 입고….”

황제가 이마 위로 내려온 앞머리를 쓸며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황제고 뭐고 없어. 그대를 여기서 쓰러뜨리고 싶어.”

다 같이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는 부분이 나오자, 아델라이드 역시 그에 맞춰 박수를 치며 한쪽 발을 굴렀다.

그녀의 주위를 베르톨트가 한 바퀴 돌았다. 박수를 치는 아델라이드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빨갛게 불타올라 있었다. 그가 다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갈까?”

베르톨트의 약간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춤을 추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의 말과 시선, 손길 때문에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다리는 자꾸만 힘이 빠졌다.

아직 곡이 끝나지 않았지만 황제는 아델라이드와 함께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베르톨트는 나가면서 레니에에게 호스트 역할을 부탁했다. 별다른 당부도 없이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는 짧은 한마디가 다였다.

레니에는 말릴 겨를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지는 황제를 보며 어처구니없어했다. 황제와 같이 춤추기를, 오늘 처음 등장한 아름다운 레이디와 같이 춤추기를 기대하고 있던 젊은이들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 * *

둘은 연회 중간에 잠시 쉴 수 있도록 준비된 방으로 들어갔다. 열려진 발코니 창으로 찬바람이 살짝 들어왔다.

“폐, 폐하. 그, 그만요. 자국이 남을지도 몰라요.”

베르톨트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아델라이드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다 그녀가 만류하자 아델라이드의 매끈한 목과 어깨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난 그대가 아름답게 보이길 원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드레스를 입으라는 게 아니었다고. 이렇게 헐벗으니까 자국 날까 봐 키스도 마음대로 못 하겠잖아.”

투정 어린 소리에 아델라이드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면 제 등에 난 흉터는 왜 치료해 주셨어요?”

베르톨트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쇄골 부근으로 움직이면서 웅얼거렸다.

“그대가 입고 싶은 디자인의 드레스를 흉터 때문에 입지 못할까 봐. 하지 않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은 큰 차이니까.”

그랬다. 목까지 올라오는 디자인의 드레스가 아니라면 등이 조금이라도 드러날 것이었다.

그녀가 흉터 때문에 입고 싶은 드레스를 입지 못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그런 슬픈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되도록 자신이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입술을 잠시 멈추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다 해야 해.”

“…네.”

아델라이드는 벅찬 나머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간신히 입을 열어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에게 호응이라도 하듯, 잠시 쇄골에 머물렀던 뜨거운 입술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봉긋하게 솟아 있는 가슴까지 그대로 미끄러지듯 키스를 쏟아부었다.

베르톨트의 무릎에 앉아 있던 아델라이드가 몸을 바르르 떨며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그는 그녀의 가슴과 드레스 사이의 경계선에 집요하게 입 맞추면서 드레스 밖으로 가슴을 그러쥐었다.

아델라이드는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허리 쪽에서 무언가 찌르르 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흐읍!”

다시 사람들 앞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그녀의 살결에 자국을 남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여린 피부는 그의 뜨거운 숨결만으로도 울긋불긋해졌다. 고개를 든 베르톨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대를 원해. 미치도록 원해.”

“폐하.”

“남자였을 때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는데, 여자인 그대는 너무 힘드네.”

비틀린 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의 눈에 고통스러운 느낌이 역력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그대를 안지 못하는 것도 힘들고, 보지 못하는 건 더더욱 힘들어. 조금만 기다려. 매일매일 그대와 눈을 맞추고, 매일매일 안아 줄게.”

“폐하….”

그의 말 하나하나가 아델라이드의 가슴을 울렸다. 아델라이드는 그의 진득한 고백에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그대를 온 세상에 공개하고 떳떳하게 사랑하고 싶어.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 그때는, 기절할 때까지 사랑할 거야.”

“폐하!”

그의 마지막 말에 아델라이드는 순간 경악했다. 어떻게 이렇게 낯 뜨거운 말을 할 수 있을까. 둘만 있더라도 부끄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베르톨트의 입술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연회장으로 돌아가는 건 포기해야겠군.”

불에 덴 듯 뜨거운 입술이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물었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살덩이가 갈급하게 그녀의 혀를 그러쥐며 빨아들였다.

베르톨트는 한참 동안이나 아델라이드의 장미 꽃잎 같은 입술을 탐했다. 아델라이드가 숨이 가빠 몽롱해질 즈음에야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입술은 퉁퉁 부어 있었고, 목과 어깨에는 온통 빨갛게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이런 상태로 베르톨트와 함께 나타난다면 누가 봐도 야릇한 상상을 할 게 뻔했다.

결국 아델라이드는 연회장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런 일이 두 번은 없을 거라고, 베르톨트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가 황실 마차에 올라 황궁을 빠져나가는 것을 본 후,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연회는 아직 한창이었다.

레니에와 프리트홀트가 황제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델라이드와 같이 계신 게 아니었습니까?”

프리트홀트가 황제의 뒤를 흘끗대며 물었다.

“왜? 그대의 여식을 내가 홀로 두었을까 봐?”

베르톨트는 마치 자신에게 따져 묻는 듯한 프리트홀트의 어조에 놀라면서도 그가 벌써부터 딸이랍시고 아델라이드를 챙기는 게 재미있었다.

“데리고 나가셨으면 데리고 오시는 게 맞지 않습니까?”

프리트홀트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옆에 있던 레니에는 프리트홀트가 황제에게 툴툴대는 것을 생전 처음 보았다.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속으로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걱정하지 말아. 아델라이드는 곱게 집으로 갔으니.”

“돌아갔다고요? 혼자 가게 두셨습니까?”

이번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제법 큰 소리를 냈다. 베르톨트는 역시나 재미있다는 듯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프리트홀트를 바라보았다.

“걱정 마. 황실의 마차에 태웠고, 쉐도우도 붙였으니.”

“그, 그렇습니까?”

황실의 마차는 오랫동안 황제의 곁에 있었던 레니에도 한 번밖에 타 보지 못한 것이었다.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서 있던 레니에는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의 그림자인 쉐도우까지 붙였다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안달하는 것을 보니 프리트홀트 경이 지금까지 어찌 자식 하나 없이 지냈나 모르겠군. 완전히 딸 바보가 된 꼴이 아닌가.”

“그 무슨 말이십니까. 딸 바보라뇨?”

“여하튼, 아델을 생각하는 마음은 자네보다 내가 더 지극하니 그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아, 아델이요?”

프리트홀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찌 자기 딸의 애칭을 저리 당당히 부른단 말인가. 아비인 자신이 둘 사이를 허락도 안 했는데.

곁에 있던 레니에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을 꾹 닫고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프리트홀트는 자신이 유일하게 존경하는 정치가였다. 그야말로 한결같은 황제바라기 후작인데, 며칠 전에 생긴 딸 때문에 황제에게 큰 소리를 내다니. 레니에는 그런 그가 매우 낯설었다.

“자네가 이리 아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니 참으로 고맙군.”

“그런데 아델라이드가 왜 돌아갔습니까? 어디가 아픕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황제가 주저하는 것이 영 수상했다. 프리트홀트가 눈을 모로 뜨며 바라보았다.

“이런 연회가 처음인데, 너무 긴장했나 보더군. 내가 너무 춤을 과하게 추었는지 부담스러웠나 봐. 머리도 좀 아프고 빈혈기도 있다고 하고…. 뭐, 이래저래.”

황제는 뒤로 갈수록 말을 웅얼거렸다. 후작은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의 딸을 그가 더 잘 알고 있고, 그가 더 가까운 것 같고, 그가 더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폐하. 아직은 제 딸입니다. 비록 친딸은 아닐지라도 부모와 자식의 연을 맺었으니, 딸의 신변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제게 먼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제 여식에게 최대한 예를 다해 주십시오. 이미 그렇게 해 주시고 계시고 또 앞으로도 그러실 거라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원래 프리트홀트는 굉장히 깐깐한 남자였다. 지금껏 황제에게는 너그러운 모습만 보였기 때문에 베르톨트는 그의 그러한 면모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작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까다롭다는 평가가 들려오면 베르톨트는 의아해하며 헛소문으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 순간, 다른 이들이 왜 후작을 그리 평가했는지를 베르톨트도 알 수 있었다.

“물론이야. 아델은 그럴 가치가 충분하니까.”

“공식 석상에서는 애칭도 삼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 그러지.”

베르톨트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곁에 있던 레니에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어금니를 꽉 물어야 했다.

그때 멀리서 황제에게 다가오는 붉은 머리가 보였다. 연회에 참석한다고 꽤 잘 차려입은 루이사였다. 그녀의 뒤를, 겸연쩍은 표정의 아른프리트가 따라오고 있었다.

“에리스타 백작가의 루이사가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황실 기사단장 아른프리트가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루이사와 아른프리트는 허리를 깊이 숙여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베르톨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일어나게.”

몸을 일으킨 루이사는 턱을 높이 들고 도전적인 눈빛으로 베르톨트를 바라보았다. 아른프리트는 여전히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폐하. 아까 같이 나갔던 프리트홀트 후작님의 영애는 어디로 감추셨나요?”

베르톨트와 레니에는 순간적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루이사가 아델라이드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루이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사람이므로 중요한 비밀은 가급적이면 그녀가 모르는 게 좋았다.

베르톨트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화제를 돌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른프리트. 두 사람은 언제 결혼식을 올릴 것인가? 제국으로 오면 둘이 결혼하라고 했을 텐데.”

“그, 그러셨어요?”

루이사는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른프리트는 그 옆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직 청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아! 이렇게 답답한 인물을 봤나. 지금 이 자리에서 청혼하게.”

황제가 명했다. 아른프리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청혼해 주세요. 저도 원해요.”

루이사가 팔짱을 끼며 한쪽 다리를 건들거렸다.

다행히 다리가 드레스 안에 있어서 다른 이들은 알지 못했지만, 전장을 같이 헤매고 다닌 황제와 아른프리트는 이 불손한 자세를 잘 알고 있었다. 베르톨트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날렸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하나둘 모여들었다. 아른프리트는 계속 멀뚱하니 서 있었다.

“어서요. 폐하께서 명하셨잖아요. 지금 해 주세요, 청혼!”

루이사가 쐐기를 박았다. 그녀는 황제가 아른프리트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은 몰랐지만, 그가 한시라도 빨리 청혼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젠 기다리기도 지쳤고 어서 빨리 그의 아내가 되어 사랑받고 싶었다.

고장 난 시계처럼 그대로 굳어 있던 아른프리트가 갑자기 한 걸음 물러났다. 한쪽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들어 루이사를 바라보았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베르톨트 또한 아른프리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른프리트가 한쪽 손을 들어 루이사의 손을 잡았다.

“나의 부관이며 나의 동지인 그대, 루이사. 긴 시간 동안 나는 그대를 지켜보았소. 그대는 끔찍한 전쟁터에서도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 주었지. 승리했을 때도, 패배했을 때도, 그대는 항상 나의 곁에 있었소. 내 거친 손으로 그대를 원한다는 게 미안했지. 그래서 죽을 때까지 나의 곁에 있어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소. 그런데 이제는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 버려서, 더 이상 숨길 수도, 감출 수도 없소.

루이사. 이제부턴 전쟁터가 아닌 이곳에서, 나의 동지가 아닌 아내가 되어 남은 시간 내 곁에 있어 주겠소?”

아른프리트가 말을 잠시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부족하지만,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언제나 조금 멋대가리 없다고 생각한 아른프리트였다. 어딘가 약간은 부족하고 또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청혼은 진실했고 그래서 멋졌다.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이 아름다운 장면을 함께 지켜보았다.

아른프리트는 황실 기사단장 정복의 안쪽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반짝이는 그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보다 더 반짝이는 반지가 보였다.

구경꾼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반지에는 꽤 알이 굵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아른프리트는 반지를 살며시 루이사의 오른손 약지에 끼웠다. 딱 맞았다.

루이사의 손끝이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두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살며시 열었다.

“네. 결혼해요. 어떻게 안 할 수 있겠어요.”

그 순간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아른프리트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른프리트. 반지는… 또 언제….”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던 루이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른프리트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에 키스를 했기 때문이었다.

둘러싼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고 난리를 피웠다. 황제도 그곳에 서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 남녀가 주인공이었다. 담백한 아른프리트답지 않게 진한 키스여서 더욱더 환호성이 커졌다.

아른프리트가 입술을 떼자 루이사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밭은 숨을 내쉬었다.

“폐하. 되도록이면 빨리 결혼할 거예요. 다음 달에라도 당장.”

베르톨트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제발 그렇게 해, 루이사. 앞마차가 가야 뒤마차도 가지.”

흥분한 루이사는 황제의 말을 앞부분만 들었다. 하지만 곁에 있어서 뒷말까지 다 들은 레니에와 프리트홀트는 고개를 휙 돌려 황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루이사가 아른프리트의 손을 이끌고 사람들 틈을 헤쳐 나갈 때까지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연회에 모인 사람들은 저 말괄량이 루이사를 누가 데리고 가나 심히 궁금해하고 있었기에 너도 나도 둘의 모습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아른프리트를 짝사랑하고 아른프리트 또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베르톨트는 생각했다.

‘음. 루이사가 결혼 준비를 하느라 당분간은 아델라이드에게 관심을 갖지 않겠군.’

그리하여 베르톨트에게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프러포즈였다.

<3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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