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드러나는 운명
바오로 공작의 성을 나와 한참을 달리던 중 갑자기 베르톨트가 말을 멈추었다. 덩달아 레니에도 말을 멈추고 옆으로 다가왔다.
베르톨트는 검을 들어 자신의 팔뚝을 스윽 그었다. 검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폐하!”
“레니에. 아무래도….”
베르톨트가 말을 하다 말고 눈썹을 꿈틀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레니에는 황제의 행동에 놀라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무슨…. 혹…시?”
“바보 같았어. 조금도 방심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 찻잔입니까?”
베르톨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안색이 창백하고 눈동자의 모세혈관이 터져 눈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그래. 그것밖에 없어. 황녀와 이야기할 때부터 기운이 이상하다 싶었지만 내색할 수 없었지. 혈들이 제멋대로 날뛰려 해. 피를 내어 길을 냈다고는 하지만 일시적일 거야. 곧 정상이 아니게 되겠지.”
베르톨트는 웬만한 독에 내성이 있었다. 그런데도 아까부터 서서히 끓어오르는 이 뜨거운 느낌은 예사롭지 않았다. 내장을 다치게 하거나 목숨을 위협하는 여타의 평범한 독과는 다른 것이었다.
“레니에. 이거 아무래도, 샤말란인 것 같아.”
“샤말란?”
“어지간한 독성은 나를 이렇…게 만들지 못해. 아그리파가… 말한 적 있어. 마법…사들이 만든… 독…. 독에 내성이… 있건 소드마스터건 간에 당한다고….”
베르톨트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해독약도 황녀가 갖고 있겠군요.”
“그…렇겠지. 그걸 빌미로… 빌어먹을!”
황녀는 이런 비겁한 술수를 써서라도 황제를 갖길 원했던 것인가? 레니에는 그녀의 집요함을 실감하자 다시 한 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혹시 모르니… 진영에 가거든 아그리파에게 연락해. 내가… 하아…! 아는 자 중에서는 샤말란을 해…독할 유일한… 사람이니. 허억!”
베르톨트의 허리가 갑자기 꺾이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폐하!”
“흐어억!”
본격적으로 고통이 시작된 것인지 황제가 크게 신음을 토해 냈다. 하지만 곧 허리를 펴며 레니에를 바로 보았다. 애를 쓰고는 있지만 좀 전보다 더 눈에 핏대가 서 있었다.
진영까지 하루는 족히 걸린다. 그때까지 황제가 버틴다는 보장이 없고, 가서 아그리파를 데려오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지금 쉐도우가 곁에 있다면 아그리파를 데리러 떠났겠지만 쉐도우는 루이사를 구출하고 아른프리트와 진영으로 복귀 중일 것이다.
방법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레니에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폐하. 되도록이면 빨리 진영으로 가시죠. 가서….”
힘이 점점 빠져 말 머리 쪽으로 몸을 기울이던 베르톨트가 피식 웃었다. 얼음 같은 제 친우가 당황하고 애달아하는 것을 무척이나 간만에 보았기 때문이다.
“가서,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레니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가지.”
시간이 없다. 레니에는 다시 말에 올라 길을 재촉했다.
‘어쩌면 그 방법으로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을지도….’
어떻게 되었든 어서 진영으로 가야 한다. 레니에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두 사람은 쉬지 않고 달렸다. 레니에는 뒤처지고 있는 베르톨트를 돌아다보았다. 황제의 몸이 자꾸만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베르! 조금만 참아. 곧 진영에 도착할 거야.”
레니에는 마음이 급했다. 저도 모르게 입에서 황제의 애칭이 튀어나왔다.
베르톨트는 혈관들이 미친 듯이 날뛰는 느낌에 휩싸였다. 심장이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워지고 있고 머릿속에서는 박쥐들이 날아다니는 듯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상태가 그러한데도 자신의 애칭을 부르는 레니에의 목소리를 들으니 웃음이 났다.
‘네가 정말 급하긴 하구나.’
이 와중에도 녀석의 하얗고 말간 얼굴이 생각났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슬퍼할까? 아니면 무서워할까?’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그저 녀석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피가 끓는 느낌은 이제 허리와 다리로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피가 부글부글 끓고 온몸이 타는 듯해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혈관 속의 피는 미쳐 날뛰고 있었다. 오면서 양쪽 팔과 다리를 몇 번씩 검으로 베어 피가 밖으로 흘러나오게 했지만 이미 그것도 한계를 넘어섰다. 베르톨트의 피는 애마인 카를로스의 윤기 나는 털에도 축축이 스며들었다.
베르톨트의 숨이 거칠어졌다. 정면을 응시했지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레니에는 말을 멈추고 그늘을 찾아 황제를 바닥에 누였다. 물통을 황제의 입에 가져다 대고 물을 흘려 넣어 주자 베르톨트가 힘겹게 물을 삼켰다.
“이제 반나절만 가면 돼. 조금만 참아.”
레니에가 비통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 * *
두 남자가 세르비아 군의 진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황제의 막사까지 전력 질주하는 통에 먼지가 뿌옇게 일자 사람들이 놀라서 하나둘 몰려들었다.
레니에는 황제를 부축하며 재빨리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안 되었다. 베르톨트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그의 허리를 꽉 잡아끌었다.
애마 카를로스의 배와 안장은 이미 황제의 피로 흥건히 젖어 바닥으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베르톨트의 입에서는 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에 찬 신음이 맴돌고 있었다.
근위병들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레니에는 고개만 까딱하고는 급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휘장을 걷으니 자그마한 책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 아델라이드가 황급히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순간 헉 하며 숨을 멈추었다.
베르톨트가 고개를 들어 눈물이 가득 차오른 아델라이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고 싶던 이였다. 절로 기쁨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폐, 폐하…!”
레니에는 황제의 침대 위에 베르톨트를 눕혔다.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의 얼굴부터 발끝까지를 빠르게 훑었다.
“쉐도우.”
몽롱한 의식 속에서 베르톨트가 힘겹게 입을 움직였다. 그러자 어디선가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그리파를 데…려와. 큭!”
검은 그림자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더니 곧 자취를 감추었다.
베르톨트의 고개가 있는 대로 꺾였다. 꺼억꺽 숨이 넘어가고 손으로는 시트를 힘껏 그러쥐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 속에서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몸을 돌려 물과 수건을 가지러 갔다.
루이사를 구하러 간다던 황제가 처참한 몰골로 다시 나타난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세르비아 최고의 무인이라는 그가 저리 고통스러워하다니. 그 가늠할 수 없는 아픔에 온몸이 날카로운 무언가로 베어지는 듯했다.
베르톨트의 옷을 급히 벗기는 레니에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입술을 짓이겼다. 입을 열면 흐느낌이 나와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는 태어나 자신의 친우인 베르톨트가 이렇게 아파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아프다 내색을 않던 친우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본 레니에는 충격과 공포로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물과 수건을 가지고 옆에 앉은 에드가의 얼굴에도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그도 자신과 비슷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통에 고개를 좌우로 젓고 이를 악문 황제의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짙은 밤하늘과 같은 머리카락이 고개를 내저을 때마다 그의 얼굴에 들러붙었다. 아델라이드가 떨리는 손으로 물을 적신 수건을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폐…하!”
뭐라 말도 못하고 그저 그를 불러 보았다.
“흐읍…!”
신음 소리가 악다문 잇새로 흘러나왔다. 잠시 후 베르톨트가 눈을 떠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녀석의 곁으로 왔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온몸의 세포들이 날뛰는 고통이 찾아왔었다. 자신의 얼굴을 닦아 주는 녀석의 손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에…드가.”
“흐…으윽.”
결국 참지 못했는지 녀석의 입이 열리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곧 입을 앙다물고 자신의 얼굴을 쓸어 내려 줬다. 베르톨트는 자신보다 더 아파하는 얼굴로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녀석을 보니 조금 위안이 되었다.
“괜…찮아. 조….”
다시 아픔이 휘몰아쳤다. 피가 부글부글 끓고 누군가가 심장을 쥐어짜 냈다.
베르톨트의 눈동자가 뒤로 넘어갔다. 터져 버린 모세혈관 때문에 빨개진 흰자위만 보였다. 다시 그의 허리가 꺾였다.
“폐하! 하아! 레, 레니에 님. 어, 어떻게 좀 해 보세요!”
“흐읍! 큭!”
베르톨트의 숨넘어가는 소리에 아델라이드가 부들부들 떨며 레니에에게 비명과도 같이 소리쳤다.
“하아…! 독에 당하셨습니다. 마법으로 만든 독이라 딱히 해독 방법이 없어요. 아는 마법사를 불렀으니 방법을 찾아…봐야죠.”
“무, 무슨 그런…! 누, 누가 그런 거예요? 누가요?”
“알렉시아… 황녀입니다.”
“황녀요? 그… 안달루스 제국의 황녀 말인가요?”
들어 보았다. 수에비까지 소문이 퍼졌던, 그 인형처럼 아름답다는 안달루스 제국의 유일한 황녀. 그녀다.
“에…드가, 괜찮아. 조금… 다친 것뿐… 흡!”
고통이 강렬하게 휘몰아치다가 잠시 잠잠해졌는지 말을 잇던 황제의 고개가 다시 떨어졌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에드가… 부탁이 있습니다.”
레니에가 슬픈 눈빛으로 아델라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말… 하기 싫지만….”
“무슨 말씀인데요? 무엇이든 괜찮아요. 어서요.”
“아그리파라는 마법사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쉐도우가 갔으니 하루 정도면 되겠지만… 지금 폐하의 상태로는 그 시간까지 버틸 수 없습니다.”
“버, 버틸 수 없다니요? 그럼… 어떻게 해요?”
눈물을 뚝뚝 흘리던 아델라이드가 놀라 눈물을 멈추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래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말을 들은 베르톨트가 눈을 감은 채 앓는 소리를 내더니 손을 올려 레니에 쪽으로 휘저었다.
“레, 레니에…. 너… 흡! 지금 뭐….”
그러나 레니에는 베르톨트의 말을 무시했다.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듯 아델라이드의 눈을 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를 살려 주십시오. 이분을 살릴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습니다. 시간을 벌어 주십시오.”
“그, 그게 무슨.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동침을 하시면 됩니다.”
“…….”
“그, 그만 닥쳐!”
베르톨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손이 레니에의 손을 잡았다. 그 고통 속에서도 그의 손아귀의 힘은 엄청났다. 레니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입니다. 샤말란은 미약은 아니지만 샤말란 때문에 날뛰는 혈들은 그렇게 해야 잠시 다스릴 수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레니에가 아델라이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레니에의 말은 아델라이드를 크게 흔들었다. 베르톨트를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으나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심장이 쉴 새 없이 두방망이질했다. 그녀의 뿌연 시야에는 숨을 헐떡이며 침대 시트를 쥐어짜듯 움켜쥔 한 남자만 보일 뿐이었다.
“에, 에드가. 그…러지 말아.”
베르톨트가 힘겹게 말했다. 아델라이드가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시선을 맞추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어떻게 해서든지… 버틸게. 할… 수 있어.”
“그러다 죽습니다. 그 시간을 견뎌 내지 못할 거라고요.”
레니에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샤말란은 지독한 독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중독되고 특수한 해독약이 아니고서는 해독할 방법이 없다. 다만 마법으로 만든 독이 모두 그러하듯 육체관계로 독이 퍼지는 속도나 고통을 줄일 수 있다. 육체관계를 맺는 사이 아그리파가 해독약을 구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델라이드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대로 황제를 둔다면 아무리 위대한 자일지라도 사람인 이상 그렇게 오래는 견디지 못한다. 세르비아를 주름잡는 철의 군주라도 이번엔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레니에는 황제가 어떤 마음으로 고집을 부리는지 알기에 이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레니에. 크흡! 걱정하지 마라. 난 죽지 않아.”
안다. 레니에가 얼마나 자신을 생각하는지. 자신의 친우가 얼마나 마음 졸이고 있는지.
베르톨트의 상반신 근육들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아델라이드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시트를 움켜쥔 큰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너무나 안쓰러워 아델라이드의 입에서도 신음이 새어 나왔다. 순간 베르톨트가 고통으로 몸을 뒤틀었다.
“흐으읍!”
아델라이드의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폐, 폐하! 폐하!”
아델라이드의 울음 섞인 소리에 베르톨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무언가 이야기하려다 그저 웃어 보였다. 미소마저도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로지 그를 살리겠다는 일념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레니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다는 긍정의 대답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았다. 그 모습을 본 베르톨트가 거의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를 내었다.
일어나서 가슴팍에 숨겨 두었던 마력석을 꺼낸 아델라이드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곧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주문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서서히 그녀의 갈색 머리는 꿀이 흐르는 것만 같은 금발로, 갈색 눈동자는 꿈을 꾸는 것만 같은 청회색의 눈동자로, 판판했던 맨가슴은 봉긋하게, 그리고 미세하게 얼굴이 변해 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여린 듯 결의에 찬 단정한 이목구비, 가는 몸에 비해 풍만한 가슴, 굴곡진 엉덩이,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는 마치 여신 같았다. 베르톨트는 흐린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거였나? 너의 원래 모습이?’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어떤 마음으로 본모습을 숨기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아델라이드가 베르톨트를 돌아보며 살포시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 그는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때 막사 한구석의 허공에서 공기가 일렁거렸다.
마치 아지랑이가 피듯 움직이더니 점차 어떤 형상으로 변해 갔다. 그 형상은 서서히 사람의 모습으로 뭉치더니, 곧 검은 후드를 푹 눌러써 얼굴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쇳소리가 섞인 여성의 목소리가 후드 아래에서 흘러나왔다.
“오…! 안 되지요. 그런 방법은.”
대륙의 마법사들은 두 부류다. 하나는 질병을 치료하며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부류이고 나머지 하나는 첩보나 암살 등을 일삼는 부류이다.
후자는 음지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그 수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두 부류 모두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벨라루아.
그녀는 다른 마법사들과는 조금 달랐다. 보통 마법사들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아 마법을 익히는 반면 그녀는 마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자연스럽게 마법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그녀는 두 번째 부류의 마법사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잔악함은 대륙에서 그 악명이 자자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보통의 마법사와는 차원이 다른 천부적인 재능, 거기에 잔인한 손속까지.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마법사가 아니라 ‘마녀’라고 불렀다.
그 벨라루아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레니에가 막사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근위병!”
후드 아래 형형한 눈빛이 기묘하게 반짝였다. 흐릿한 형체가 끅끅거리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런, 공작님. 귀여우셔라! 제가 마법사라는 걸 잊으셨나 보군요. 이 밖으로는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불러 봤자 아무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벨라루아가 웃음을 뚝 하고 그치더니, 한쪽 손을 들어 황제를 향해 내밀었다. 손을 둥글게 말아 쥐었다 폈다 하자 그 움직임에 따라 베르톨트가 사지를 떨었다. 그의 허리가 비틀리고 입에서는 거친 신음이 났다.
“큭! 크으윽! 흣!”
“뭐,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아델라이드가 소리쳤다. 마녀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베르톨트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니 자신의 몸이 찢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가 가슴속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마녀는 아델라이드의 말에 동작을 멈추더니 방향을 틀어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걸음걸이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걷는다기보다는 미끄러지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벨라루아는 아델라이드의 바로 앞까지 와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대…. 그대가 황제의 여자군요. 흐음.”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이상하게 벨라루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델라이드는 눈을 깜빡여 봤지만 매한가지였다.
눈동자가 있어야 할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에서 번득이는 눈빛, 그 아래 달싹거리는 입술 비스무레한 것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순간 벨라루아의 목에 검이 드리워졌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베르톨트가 검을 들어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단호한 결기와 서늘한 살기가 섞여 있었다.
“후훗. 폐하의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 해독제를 쓰기 전까지는요.”
벨라루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레니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해, 해독제가 있나?”
“네, 있습니다. 제 품에.”
뱀의 혀같이 달콤하고도 오싹한 목소리였다. 레니에의 기세가 한층 사나워졌다.
“그 해독제를 내놔. 그러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호오! 저를 죽이시게요? 불가능할 텐데요.”
벨라루아의 조롱하는 말을 어느 누구도 헛소리로 치부하지 못했다. 막사 안에 있는 사람 모두 이 마녀를 죽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을 정도로 벨라루아에게서는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이길 수 없는 한 차원 높은 존재라는 느낌. 아델라이드는 왜 사람들이 그녀를 마녀라고 부르면서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죠?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여기에 온 거잖아요!”
아델라이드가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내뱉었다. 굴복하는 기색 없이 그녀는 언제나처럼 곧은 시선으로 벨라루아를 쳐다봤다. 후드 안에 감춰져 있던 벨라루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꽤 똑똑하네.”
벨라루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짧게 웃더니 뒤로 물러섰다. 쇠를 긁는 듯한 그 목소리로,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말했다.
“해독제를 드릴 테니 폐하도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십시오.”
“원하는 게 무엇이죠?”
베르톨트 대신 아델라이드가 물었다.
“당신요.”
형체 없는 벨라루아의 시선은 아델라이드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르톨트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는 푸르른 검기로 휩싸인 검을 휘둘러 벨라루아를 사선으로 내리쳤다.
파바박!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검은 재로 변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다시 베르톨트의 앞에 벨라루아의 흐릿한 형체가 나타났다.
“저를 죽이지 못한다니까요.”
말을 마친 그녀가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자, 베르톨트가 허리를 크게 앞으로 구부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마녀가 주먹을 꼭 쥐었을 때는 베르톨트가 앞으로 완전히 고꾸라졌다.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그만! 그만해! 그만하라고! 제발!”
아델라이드는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토록 강인해 보이던 황제가 바닥에 쓰러져 사지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레니에가 황제에게 달려가 그를 부축하는 모습이 점점 뿌옇게 흐려졌다.
“그만해! 제발, 그만해! 해, 해독제, 흐윽!”
아델라이드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해독제를 드릴게요. 당신은 저랑 가세요.”
해독제. 그 단어에 아델라이드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안 돼! 안 돼!”
온몸에 경련이 일어난 베르톨트가 고개를 들며 힘겹게 말했다.
“정말 보통 분이 아니시네요. 아직 정신을 놓지 않으시다니. 그렇지만 지금 해독제를 드시지 않으면 몸이 망가진다고요.”
“그 해독제, 내게 줘.”
레니에의 얼음 같은 음성이 그들 사이를 갈랐다. 벨라루아는 레니에가 내민 손 위에 작고 빨간 병을 올려놓았다.
“레, 레니에! 그러지 마!”
친우가 어떤 선택을 한 것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베르톨트는 이를 악물고 바닥을 기어 와 레니에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레니에는 황제의 팔을 뿌리쳤다. 아델라이드가 눈물을 흘리며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 다가가 아델라이드를 안은 벨라루아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손은 깍지를 끼고 입으로 주문을 중얼거렸다. 벨라루아의 눈이 그림자 아래에서 기이한 빛을 띠었다.
곧 그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더니 그녀의 형상이 서서히 허공으로 흩어졌다. 베르톨트는 사라져 가는 아델라이드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 * *
막사 안에 베르톨트와 레니에가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신을 잃어 가던 베르톨트에게 레니에가 강제로 해독제를 먹인 후 베르톨트의 온몸을 난도질하던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때부터 베르톨트는 침대에 앉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레니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폐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묻는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는 아델라이드와 베르톨트 중에서 베르톨트를 택했다. 아델라이드가 납치된 것에 책임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 앞에서 마냥 떳떳할 수가 없었다.
레니에의 물음에도 황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계속된 침묵. 그것을 깬 것 역시 황제였다.
“레니에. 자책하지 마라. 내가 너였더라도 똑같이 했을 거야.”
“폐하….”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너를 질책하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아. 넌 내 목숨을 살리는 대가로 에드가에게 빚을 졌어. 그러니 후에 그녀가 다시 위기에 처하면 오늘의 일을 떠올려. 그리고 그때는 반드시 그녀를 먼저 생각하고, 그녀를 살려라. 내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겨!”
레니에는 주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형제이며 동지인 레니에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한 것이다.
자신만큼 그녀를 사랑해 달라고. 아니, 자신보다 그녀를 더 아껴 달라고.
마음의 크기만큼 절절한 그의 목소리가 레니에의 가슴속에 깊숙이 박혔다.
“알겠습니다, 폐하.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주군을 살리기 위하여 아델라이드를 보내는 대신 해독제를 가져왔으나, 그것은 주군이 원한 결과가 아니었다. 결국 황제를 살리는 대신 불충을 저지른 셈이었다.
물론 레니에는 후회하지 않았다. 공적인 임무를 처리할 때 그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러한 자신의 태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번 사건 또한 늘 그러했듯 냉정하게 처리한 것이었다. 다시 그 상황이 온다 해도 마찬가지의 선택을 할 만큼.
그러나 가슴 깊이 차오르는 미안한 마음이 떨쳐지지 않았다.
“레니에. 아까 그 마녀를 베었을 때 칼날에 걸리는 느낌이 있었어. 다시 나타나긴 했지만, 몸이든 영혼이든 분명히 어딘가에 상처를 입었을 거야.”
베르톨트는 자신의 검을 검집에서 꺼내 살펴보았다. 결연한 황제의 태도에서 그가 다음에 할 일을 정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검기에 베였을 거야.”
그는 세르비아 제국의 유일한 적통이며 제국 최고의 무인이었다. 예로부터 황실의 적통은 그 옛날 신관들의 능력을 일부 이어받는다고 알려져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런 황실의 피를 가장 강하게 타고난 사람이 베르톨트였다.
그는 인간 외의 존재도 죽일 수 있는 희귀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마법과는 다른 능력으로, 황실의 적통에게만 따르는 선물 같은 능력이었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 상처 입은 마녀, 멀리 가지 못했어. 가서 에드가를 데리고 올게.”
“피를 많이 흘리셨습니다. 조금 있다가 쉐도우나 클리터스와 함께 다녀오시지요.”
“지금 가지 않으면 안 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잡을 수 없어. 또 그 마녀에게 기척을 숨기고 다가갈 수 있는 이는 나나 쉐도우 정도야.”
레니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 * *
공간을 이동하자마자 벨라루아의 마법에 당한 아델라이드는 달리는 말 위에서 의식을 잃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벨라루아는 기절해 있는 아델라이드를 품에 안은 상태로 말을 전속력으로 달렸다. 달리는 도중에 입에서 울컥하고 쏟아져 나오는 피를 한 손으로 쓰윽 닦았다.
세르비아의 황제는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미쳐 버릴 지경에 이르러서도 독에 정신을 점령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심장을 조이며 극한의 고통으로 몰고 갔는데도 자신의 여자를 보내지 않겠다며 검을 휘두르는 기세라니.
무엇보다 환영을 베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내상을 입혔다는 것이 벨라루아는 경악스러웠다.
벨라루아의 옆에서 말을 달리는 남자가 중간중간 그녀를 힐끔거렸다. 알렉시아 황녀가 거느리는 그림자 부대의 일원, 우드쉐어였다.
그는 세르비아 진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매복해 있었다. 벨라루아는 자신의 실체를 거기에 두고 정신만을 움직여 황제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의 그 판단은 정확했다. 만약 벨라루아가 실체까지 온전한 모습으로 갔다면 아마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우드쉐어는 벨라루아의 상태를 눈치채고는 가까운 마을의 여관에서 쉬어 가기로 했다. 그대로 계속 달렸다가는 상처가 더 벌어져 심각한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여관에 도착한 후 벨라루아는 아델라이드와 한방을 쓰겠다고 했다. 바로 옆방에는 우드쉐어가 자리 잡았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벨라루아는 검은 로브를 벗어 던지고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그녀는 테이블 한편에 앉아 있는 아델라이드를 보며 툭 하고 차디찬 말 한마디를 뱉었다.
“마법을 걸어 놓았으니, 이 방에서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아델라이드는 아무 대답 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벨라루아가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던 머리칼을 귀찮다는 듯이 뒤로 넘겼다.
그녀의 얼굴 한쪽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마도 화상이 남긴 흉터인 것 같았다. 엉망으로 엉겨 붙은 그 피부에서 아델라이드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벨라루아가 다시 손을 움직여 상의의 단추를 하나둘 끄르기 시작했다. 그 간단한 동작이 힘에 겨운지 얼굴을 찌푸리며 끙끙대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잠시 멍해져 있던 아델라이드는 심상치 않은 신음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벨라루아에게 다가갔다.
“다쳤군요. 도와줄게요.”
“필요 없어.”
날이 선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 정도 매몰찬 대답에 포기할 아델라이드가 아니었다.
그녀가 가여워서도, 자신이 이타심이 넘쳐서도 아니었다. 남편의 모진 폭행으로 몸이 상해 옷을 입고 벗는 것조차 힘겨웠던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팔을 다쳐서 단추 푸는 것조차 쉽지 않잖아요.”
그 말대로 단추 하나 푸는 것도 고역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가 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벨라루아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면서 아델라이드를 빤히 쳐다봤다.
승낙의 신호로 해석한 아델라이드는 벨라루아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녀는 아델라이드가 도와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단추를 풀고 상의를 벗기자 위아래가 붙은 얇은 속옷만 남았다. 속옷 위로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내상만 입은 줄 알았더니 검이 지나간 자리 그대로 칼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하아. 카롤링거 3세는 정말 대단하군.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벨라루아는 자신의 부상이 당황스럽고 어이없었다. 정신을 분리했을 때 공격을 받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대로 육체까지 타격을 입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치료를 하려면 조금… 내릴게요.”
아델라이드의 손길은 말투만큼이나 조심스러웠다. 벨라루아의 옷자락을 스치듯 아주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그 정도에도 벨라루아는 끙 하고 나지막하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델라이드는 한쪽 어깨끈을 내리고서는 그대로 손을 멈추었다.
“가, 가만히 있어요. 이, 일단, 소독을 할게요.”
침착하려 해도 손끝이 바르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벨라루아의 드러난 피부가 온통 끔찍한 상처로 덮여 있었다. 얼핏 봐도 옷으로 가려진 곳에까지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온몸에 이런 상처와 화상 자국이 가득할 것이었다.
“소독, 먼저 한 다음에 여,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을게요.”
벨라루아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플 거예요. 아프면 소리를 내세요.”
입술을 지그시 깨문 아델라이드는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 상처에 비하면 자신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던 자신이 왠지 우습게 느껴졌다.
치료가 끝날 때까지 벨라루아는 작은 신음도 내지 않았다. 심지어 자세가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눈을 내리깔고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다가 아델라이드가 모든 치료를 마치자 그제야 눈을 떴다.
“대단하네. 내 상처를 보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봐.”
감정 없는 말투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반복된 학대에 얼마나 단련된 것일까. 지켜보는 아델라이드의 가슴이 미어졌다.
“놀랐어요.”
아델라이드는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고 싶었다.
“그래?”
“힘들었겠어요.”
벨라루아는 아델라이드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어째서 네가 더 힘들어 보이지?”
“고통이, 뭔지 아니까요.”
아델라이드가 서글프게 웃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등의 상처가 다시금 쑤셔 오는 것 같았다.
“그래? 네가?”
“…네.”
벨라루아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델라이드의 하얗고 깨끗한 얼굴을 찬찬히 훑어봤다.
태양을 머금은 듯한 금발을 빛내며 앉아 있는 이 여자가 싫었다. 이 여자는 너무나 아름답고 당당했다. 이런 존재는 망가뜨리고 싶어진다.
벨라루아는 열다섯 살 때 처음으로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외모가 꽤 예쁘장했고 영민했지만, 노예라는 신분으로는 주인의 여자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인에게 마법을 시연해 보였다. 인생 최초의 도박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그의 시선을 끌었고, 비로소 그의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귀족 남자들이 어떤 족속들인가. 주위에 여자가 넘쳐 났고, 벨라루아의 주인 역시 흔하디흔한 귀족 남자였다.
주인은 얼마 안 가 벨라루아에게 싫증을 느끼고 곧 그녀를 외면했다. 벨라루아는 주인에게 매달렸지만 그럴수록 주인은 그녀를 더 귀찮아했다. 결국 그는 그녀가 사술을 쓴다며 나라에 밀고했다.
잠시 떠오른 옛 생각을 떨쳐 내려 고개를 저은 벨라루아는 다시 아델라이드의 뽀얀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너, 무척 곱구나. 귀족이겠지?”
“노예…입니다.”
“노예? 어떤 노예? 설마 황제의 시침 노예? 그래서 곁에 있는 거였어?”
“아, 아닙니다. 시침 노예가 아니라 시중 노예입니다.”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반짝인 벨라루아는 아델라이드 앞으로 의자를 조금 더 당겨 앉았다. 아델라이드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빤히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호오, 카롤링거 3세가 여자를 시중 노예로 두고 있었어?”
“…….”
“네 목에 걸려 있는 그것…. 하아! 바로 그거군. 마력석!”
입을 꾹 다문 아델라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벨라루아가 빙그레 웃었다. 모든 걸 간파했다는 듯한 미소였다.
“남자로 위장했던 모양이군.”
아델라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법사에게는 마력석이 대단치 않을지 몰라도 일반인에게 마력석은 무척 귀중한 것이었다. 이 귀한 마력석에 관해 입을 열 필요도 없었고 무언가를 알려 주고 싶지도 않았다.
상체를 아델라이드 쪽으로 쑥 내밀고 있던 벨라루아가 자연스럽게 목에서 마력석을 빼내어 들었다. 아델라이드가 다급히 저지하려 했지만 마법을 쓴 것인지 눈만 커다래질 뿐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런 아델라이드를 본 벨라루아가 살포시 웃었다. 다 소용없으니 쓸데없는 힘은 빼지 말자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벨라루아는 손에 든 마력석 목걸이를 들여다보았다.
가만히 살펴보던 그녀의 미간이 점점 일그러졌다. 앞뒤로 살피더니 마력석을 둘러싸고 있던 목걸이 장식을 쉽게 분리했다.
아델라이드는 놀라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력석이 목걸이와 이렇게 쉽게 분리될 수 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들은 적도 없었다.
마력석을 들여다보는 벨라루아의 눈빛이 무언가 익숙한 물건을 보는 듯 담담하고도 아련했다. 그렇게 벨라루아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마력석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이제 주, 주세요.”
“…….”
“주세요. 제 마력석.”
벨라루아가 고개를 들어 아델라이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동안의 침묵이 힘들어 아델라이드가 다시 입을 떼려던 그때, 깊게 침잠한 목소리로 벨라루아가 물었다.
“이거… 정말 네 거야?”
“무슨… 말이에요? 제 거 맞아요. 저희 부모님에게서 받은 거예요.”
“부모님이라….”
말끝을 흐린 벨라루아가 아델라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숨을 크게 내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 혹시… 수에비의 발루아 가문 사람이야?”
아델라이드는 또다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원래 커다란 눈만 더 커다랗게 뜨고 벨라루아를 바라볼 뿐.
눈빛만이 오가는 기묘한 정적.
벨라루라의 입에서 신음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 부모…. 혹시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어? 어렸을 적 부모를 마차 사고로 잃은 그 발루아 가문의 남매 맞냐고!”
“뭐, 뭐예요? 당신… 어떻게 우리 부…모님을 알아요?”
맞잡고 있던 손이 툭 하고 풀려서 치마 옆으로 떨어졌다. 벨라루아가 어떻게 부모님이 당한 사고를 알고 있는지, 아니 그보다 어떻게 자신이 발루아 가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놀랍고 두려웠다.
“이 마력석…. 내가 네 부모, 정확히 말하면 네 어머니한테 드렸던 거야.”
벨라루아는 마력석의 뒤편을 아델라이드에게 내밀어 보여 줬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마력석을 받아 든 아델라이드가 그 뒤편을 보니 투박한 앞면에 비해 한군데가 만질만질하게 갈려 있었다. 그곳에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엘, 루라옴므아. 벨.]
‘엘, 루라옴므아’는 라스문어로 ‘신이시여, 지켜 주소서’라는 뜻이었다. 벨은 벨라루아의 애칭이었다.
어떤 연유인지,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든 것이 의아하기만 한 아델라이드는 무엇부터 물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마녀라 불리는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안다는 생각에 그만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머리가 뒤죽박죽되어서 그저 입만 뻥긋 열었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난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사람들에게 배신당해 마녀로 몰렸어. 감옥에 갇힌 3년 동안 고문이라는 고문은 다 당했지. 당시 어느 곱디고운 백작 부인이 감옥으로 와서는…. 그날도 고문의 여파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나를 간호해 줬어. 그 백작 부인은 그 후로 매일매일 나를 찾아왔지. 내가 마녀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자 이렇게 고문만 계속할 것이 아니라 석방해야 한다며 탄원을 올리기도 했어.”
마치 봇물 터지듯 벨라루아의 입에서 과거의 조각들이 튀어나왔다. 이야기를 강제한 사람도 없건만 벨라루아는 기묘할 정도로 담담하게 한 마디 한 마디 토해 냈다. 마치 이 이야기를 할 날을 기다려 왔다는 것처럼.
“그 부인 때문에 내게 행해지던 고문이 멈추었지. 수에비에서 매우 막강한 가문의 백작 부인이라서 그 부인의 탄원서를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난 고문 없는 날들을 지냈고 인간적이지 않던, 아니 인간적일 수가 없었던 그 많은 날들이 다시 오지 않음에 신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어.
그런데 감옥에서 정말 우연찮게도 그 백작 부부의 살해를 청부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감옥 안이라 감시의 눈이 살벌하기도 했고 난 실어증에 걸려 말도 못할 때였는데…. 결국 그분께 그 음모를 말하지 못했어. 다만 어떻게든 그분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에 마력이 있는 나에겐 크게 쓸모가 없는, 하지만 일반인들에겐 요긴하게 쓰일 이… 마력석을 목걸이로 만들어 드렸지. 나중에 내 스승에게 들었는데 이 마력석은 위장술뿐만 아니라 진귀한 힘을 가지고 있어. 스승 같지도 않은 스승인데…. 하아…!”
무언가 마뜩잖은 기색으로 뒷말을 내뱉은 벨라루아가 한숨을 쉬고 마저 얘기를 이어 갔다.
“인간은 그저 잔인한 동물이며 끔찍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내게… 위안의 손길을 주신 분들을 살려 달라고… 처음으로 신께 빌면서 말이야.”
벨라루아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델라이드를 아무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 백작 부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차 사고로 죽었어. 어린 남매만 남겨 두고 말이야.”
아델라이드는 마력석을 품에 꼭 쥐고는 말없이 흐느꼈다. 간혹 답답한 듯 가슴을 치기도 했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와 입을 꾹 다물기도 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들의 삶은 왜 이리 가혹하고 험난한지 모르겠다. 가슴이 저미고 견딜 수 없이 시렸다.
서럽고, 아팠다.
부모의 얘기를 듣고는 소리도 내지 못하며 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벨라루아의 표정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다. 벨라루아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델라이드의 팔을 꽉 잡더니 그녀를 흔들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섬광과 같은 무엇이 벨라루아의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갔다.
“너…, 너, 너…. 그 발루아 백작 부인의 딸…이라면….”
설마 하는 마음에 아델라이드는 숨을 헉 들이켰다. 벨라루아의 입매가 한껏 비틀어졌다.
“수에비 왕과 결…혼…, 왕비가 되었다고 했어.”
아델라이드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벨라루아의 말을 부정하듯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냐, 아냐, 난… 아냐!”
“그… 그 늙은 변태 같은 왕이 발루…아 백작가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고….”
“아냐! 아냐!”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새파랗게 변했다. 입술을 마구 짓이겨서 피가 터져 있었다.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곧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네가… 그 왕비구나! 그 백작 부인의 딸이자….’
바닥에 털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은 벨라루아는 의자에 앉은 아델라이드의 손을 꼭 잡고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몸을 떨며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울고 있는 이 기구한 여자가 마치 자신 같아 보였다. 한없이 가여웠던 지난날의 자신….
벨라루아는 발루아 가문의 여식이 수에비의 왕인 윈터스 2세와 혼인한다고 들었을 때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음지의 정보 길드에 있다 보면 대륙의 은밀한 비밀들을 알 수 있는데 윈터스 2세는 미친 변태 새끼였다. 그가 그 누구도 아닌 발루아 백작과 연을 맺는 것을 두고 정보 길드에서는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었다.
그러나 벨라루아는 정확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 사랑했던 귀족가의 자제가 바로 윈터스 2세의 사촌이었다. 그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배신당했고 마녀로 몰렸다.
그것을 위안한 이들이 바로 발루아 백작 부부였고, 윈터스 2세의 사촌을 탄원한 이들도 발루아 백작 부부였다. 감히 왕의 사촌에게 죄를 묻고자 한 것이었다.
벨라루아는 그래서 그 백작 부부가 윈터스 2세에게 살해당했고 그 후에 그가 그들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니 그들의 딸이 불행해졌다면 그 이유는 자신에게 있었다. 왕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만큼, 아니 자신보다 더 가여운 이가 수에비의 왕비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왕비였음을 부정하고 있는 아델라이드 말이다.
“네가 누구인지 황제도 알고 있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델라이드가 젖은 눈을 들어 벨라루아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가 말을 뱉었다.
“몰라요. 돌아오시면, 이번 밀담을 끝내고 돌아오시면, 그때… 말씀드리려 했어요. 당신들이 이렇게 비겁하게 독을 쓸 줄 몰랐죠.”
베르톨트를 생각하자 갑자기 심장이 덜컹거렸다. 아델라이드는 눈앞에 있는 여자를 정색을 하며 바라보았다.
“나도 황제에게 당했어. 지금쯤 황제는 해독이 되었을 테니 오히려 내가 더 치명상을 입은 꼴이야. 몸은 다른 곳에 두고 영혼만 막사에 간 거라 설마 다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검으로 영혼에 이렇게 타격을 준 사람은 황제가 처음이지. 그는 보통 인간이 아니야. 그러니 황녀가 그렇게 탐을 내겠지만.”
“황녀요?”
벨라루아가 멈칫했다. 분위기에 취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꺼내고 말았다.
한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에게라면 모를까, 아델라이드에게는 어떤 말이라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안달루스 제국의 알렉시아 황녀 말이야. 난 그의 사람이거든. 지금으로써는 말이야.”
“황녀가 폐하를 원하나요? 세르비아가 아니라?”
“그녀는 제국에는 관심 없어. 그게 안달루스든, 세르비아든. 그녀의 관심사는 그저 카롤링거 3세뿐이지. 하긴 그를 가진다면 세계를 가진 거나 다름없겠지만 말이야.”
둘의 대화가 다시 멈추었다.
아델라이드는 오늘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이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쩌다 보니 마녀를 만난 것도 놀라운데 자신의 부모 얘기도 듣게 되었고, 제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정체가 드러나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안달루스 제국의 황녀라는 인물이 황제를 원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황녀가 너를, 그러니까 황제의 여자를 데려오라 했어.”
거역할 수 없는 명이기에 반드시 따라야 했지만 벨라루아는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를 데리고 가는 일이 왠지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별안간 창문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검을 든 남자가 무서운 기세로 들이닥쳤다.
“누구 맘대로 데려간다는 거지?”
“폐하!”
한 손에 검을 쥐고 있는 베르톨트였다. 푸른 검기가 불꽃처럼 타오르며 검을 휘감았다.
“마녀! 이번엔 살아 나가지 못할 거야.”
저 검에 베이면 이번에는 정말 죽을 것이다.
벨라루아는 살의에 찬 황제의 눈빛을 보고 생각했다. 이럴 때는 도망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부상 때문에 멀리 달아날 수는 없겠지만 짧은 거리를 순간 이동할 수는 있을 것이다.
“너와 같이 있던 자들은 모두 죽었다. 너도 곧 그들 곁으로 보내 주지.”
베르톨트가 벨라루아를 향해 달려든 순간 벨라루아는 재빨리 마법을 시동해 그 자리를 피했다.
황제의 검이 사라지는 벨라루아의 긴 머리카락을 베었다. 벨라루아가 서 있던 자리에는 머리카락만이 남아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포기하지 않고 벨라루아를 뒤쫓으려는 베르톨트를 아델라이드가 불러 세웠다.
“폐하!”
황제가 뒤돌아 그녀를 보았다.
“폐하! 그녀를, 그녀를 보내 주세요!”
아델라이드의 간곡한 부탁에 베르톨트가 멈칫했다. 아델라이드는 한 번 더 간절하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녀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살려 두면 언젠가는 너와 나를 해치려 들 거야. 다시 만난다면 그땐 둘 중 한쪽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
아델라이드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면서 눈물을 흘렸다.
“알아요. 제 말이 바보 같겠지만, 그래도 그게 오늘은 아니에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베르톨트의 가슴에 콱 박히었다.
황제가 쫓아오지 않는 것을 알아챈 벨라루아는 아델라이드가 황제를 막았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급히 도망치느라 로브조차 챙기지 못한 탓에 흉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대, 쓸데없는 짓을 했어.’
이상하게도 밤바람이 상쾌했다.
* * *
별이 쏟아지는 듯한 밤이었다. 베르톨트는 천천히 진영으로 말을 몰았다.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품에 안겨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불안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이상했다. 그녀가 그를 먼저 불러 보았다.
“폐하.”
베르톨트는 아무 대답 없이 그녀를 더 당겨 안았다.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괜찮아.”
벨라루아의 해독제가 제 역할을 톡톡히 한 모양이었다. 아델라이드는 내친김에 하나를 더 물었다.
“어떻게 마녀가 여기 있는지 아셨습니까?”
“바보같이 황녀가 내미는 차를 그대로 마시긴 했지만, 그렇게 어리석지만은 않아. 마녀의 옷에 내 검의 흔적을 묻혀 놓았어.”
검의 흔적. 검의 궤적이라고도 한다.
소드마스터는 검기를 주입한 검을 휘두를 때 자신만의 고유한 흔적 또는 궤적을 남길 수 있다. 그건 마치 사람의 지문과도 같아 소드마스터마다 그 모양이 달랐다.
보통 사람이 판별하기 힘들 정도로 크기가 매우 작아서 대부분의 경우 본인만 그 흔적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타인의 흔적도 가려낼 정도로 예민한, 혹은 실력이 뛰어난 소드마스터도 간혹 있기 마련이었다.
베르톨트가 마녀를 추적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 바로 그 검의 흔적이었다.
“너를 볼모로 잡고 있으니, 아무리 정신이 없더라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
언제부턴가 베르톨트의 온 신경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그 와중에도 마녀의 옷자락에 검흔을 남겼을 줄이야.
아델라이드는 가슴이 욱신거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사방에 깔려 있는데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별들이 쏟아지고 공기가 조금 차게 느껴지는 밤, 한동안 두 사람을 태운 말발굽 소리만 울렸다. 아델라이드는 이 적막이 마음에 들었다.
돌연 고요함을 뚫고 베르톨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 너를 무어라 불러야 하지?”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를, 아니 그대를, 수에비의 왕비를, 내가 무어라 불러야 하는가?”
순간적으로 아델라이드는 서늘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
검의 궤적을 따라 아델라이드가 있는 곳을 알아낸 베르톨트는 당장에라도 그 안에 뛰어들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방에는 마법이 둘러쳐져 있었다.
창문을 깨려고 했으나 역시나 마법 때문에 튕겨져 나간 탓에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위해 귀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의 청력은 다른 이들보다 몇 배는 더 강했으므로 듣고자 한다면 마법으로 봉해진 장소 안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난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사람들에게 배신당해 마녀로 몰렸어. 감옥에 갇힌 3년 동안 고문이라는 고문은 다 당했지. 그때, 어느 곱디고운 백작 부인이 감옥으로 와서는…. 그날도 고문의 여파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나를 간호해 줬어.
그 백작 부인은 그 후로 매일매일 나를 찾아왔지. 내가 마녀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자 이렇게 고문만 계속할 것이 아니라 석방해야 한다며 탄원을 올리기도 했어. 그 부인 때문에 내게 행해지던 고문이 멈추었지.”
‘뭐지? 마녀가 자신의 얘기를 하는 건가?’
그 음산하고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던 마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것이 조금 우스웠다. 더군다나 그 상대는 자신이 납치한 여자가 아닌가.
그러나 안에서 느껴지는 아델라이드의 기운은 무척이나 슬프고 비통한 것이었다. 벨라루아의 이야기가 그녀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는 듯했다.
‘좀 더 들어 볼까.’
벨라루아의 이야기가 잠시 멈추었을 때 그녀를 도와주었다는 귀부인이 아델라이드의 어머니임을 알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살해당했다는 것도.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스멀스멀 이상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무언가 더 엄청난 것이 몰려오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
어째서 그런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벨라루아의 입에서 수에비의 왕비라는 말을 들었을 때 베르톨트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머릿속에서 그동안 에드가를 보면서 미심쩍었던 모든 것들을 바쁘게 짜 맞추었다.
외국어를 하는 시종, 지나치게 예쁜 이목구비, 도저히 천한 출신이라고는 여길 수 없는 몸짓과 태도, 고요히 있어도 드러나는 우아함.
그리고… 학대받은 흔적.
위장을 풀었을 때 보인 태양 같은 그 탐스러운 머릿결, 언젠가 한번 들어 보았던 어리고 아름답다던 수에비의 왕비.
‘그 사람이… 너였나?’
그녀가 다른 이와 결혼했었다는 것보다 대륙에서도 유명한 그 늙고 잔혹했던 윈터스 2세에게 고통을 당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마음이 아파 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악몽과 등의 상처가 떠오르니 윈터스 2세가 한 짓이 상상되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는 닿지 않을 짐승의 상처받은 소리가 베르톨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검을 쥔 팔이 경련을 일으키듯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러나 마녀의 한마디에 아귀다툼이 벌어진 양 들끓던 머릿속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황제의 여자를 데려오라 했어.”
베르톨트는 일어나 검을 빼 들었다.
* * *
“폐하.”
아델라이드가 촉촉한 눈망울로 베르톨트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할 것인가. 한 남자의 아내였어도, 수에비 왕국의 왕비였어도 당신을 향한 마음은 진심이라고 할 것인가.
전남편이 준 깊은 상처 때문에 당신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할 것인가. 충격받았겠지만 자신을 한 번 더 보아 달라고 말할 것인가.
만약 그가 일개 평민이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뻔뻔하게 그리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니까, 사랑한다면 같이 있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제국의 황제였다. 귀족도 아니고 황제, 대륙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
그에게 적국의 왕비였던 자신이 어디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아델라이드는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내지 않았다. 베르톨트는 그녀의 흐릿한 눈동자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감을 보았다. 그녀가 무너지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아델라이드를 꽈악 끌어안았다. 그가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자신의 심장 부근에 가져다 대었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니야! 그대를 원망하는 게 아니야. 내 심장 소리 들리지? 내 심장이 말하고 있잖아. 그대가 남자여도, 인간이 아닌 존재라 해도 원해. 너무 원해서… 아플 지경이야.”
아델라이드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울고 있는 그녀의 어깨가 더욱 작아 보였다.
“그대가 선택할 수 없었던 일이야. 그대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도 없었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던 시간이야. 그렇게 기특한 그대가… 내가 이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알았다고 다시 나에게서 도망칠까 봐 겁이 나. 겨우, 겨우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라질까 봐 겁이 나. 그래서 그래. 그래서….”
아델라이드의 뒤통수를 쓰다듬는 그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수에비의 왕비였으면 또 어떤가. 지금은 배우자가 없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의 그녀를 온전히 사랑하면 된다. 그것이 베르톨트가 내린 결론이었다.
다만 그녀를 어찌 불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내 고민하다가 뱉은 말이었다.
고민이 흐르고 넘쳐,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크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서야 자신의 물음에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아델라이드를 꼬옥 안고 등을 한참이나 쓸어 주었다.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그녀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조금 놀라긴 했어. 그것마저 부정하진 않아.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난 스무 살이 되면서부터 전장에서 살았어. 전장이란 곳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볼 수 있는 곳이지. 가장 어이없고, 가장 참혹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가장 아파. 그대가 수에비의 왕비였다는 것, 적국의 왕비였다는 것, 나에게는 전장에서 겪었던 일보다 충격적이지 않아.”
아델라이드의 등을 가만히 쓸어 주던 손이 잠시 멈추더니 그녀의 머리 위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저 호화롭고 안온한 곳에서 펜대만 굴리는 귀족이었다면 그대의 과거가… 그래, 그대의 과거에 무척 요란을 떨지도 몰라. 그들은 그저 작은 새장 안에 갇힌 새들 같아. 그래서 작은 일에도 시끄럽게 지저귀지. 하지만 새장 밖에서 온 세상을 날아다니며 직접 먹이를 잡고 생존해야 하는 야생의 새들은 그런 일로 놀라지 않아. 아까도 말했지만 그대가 겪은 일은 어린 그대가 어찌할 수 없었던 것들이야. 이렇게 훌륭히 견뎌 냈다는 게 안쓰럽고 대견할 뿐이야.”
베르톨트는 말이 많았던 것 같아 조금 겸연쩍어졌다. 품에서 아델라이드를 떼어 낸 그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려 무릎을 굽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소리 없는 울음을 그친 그녀의 얼굴은 볼만했다. 눈가와 얼굴이 온통 빨개지고 눈두덩이와 눈 밑이 있는 대로 부어 있었다. 마치 한참 울면서 떼를 쓴 어린아이와 같았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코끝에 쪽 소리 나게 입 맞추었다. 그러자 놀란 그녀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곧 시선을 내렸다.
“자, 이제 대답해 줘. 내가 그대를 무어라 불러야 하지?”
말간 얼굴이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곧이어 분홍빛 입술이 조그맣게 열렸다.
“아델라이드. 아델이라고 불러 주세요.”
희미하게 웃은 그녀가 수줍게, 그러나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 모습에 베르톨트 또한 빙긋이 웃어 보였다. 아델라이드는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았다.
“자. 이제 돌아가 볼까, 아델?”
그녀를 말에 올린 그가 자신도 훌쩍 뛰어 그 위에 올라탔다.
베르톨트는 말고삐를 힘차게 잡아 당겨 앞으로 나아갔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따뜻한 품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꼈다.
아델라이드는 진영으로 가는 내내 베르톨트의 고백을 들어야 했다. 또한 앞으로의 계획도 들어야 했다. 사실 그건 계획이 아니라 계략에 가까웠다. 새장의 새들에게 선보일.
중간중간 깜짝 놀라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어떤 때는 그건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다가도, 황제가 이상한 논리로 타당성을 설명할 때는 잠잠히 듣기도 했다.
베르톨트는 자신의 품에 안겨 귀를 쫑긋거리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아델라이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슴속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그녀의 눈부신 금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녀의 귓불에도 입을 맞추었다. 아델라이드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결국 황제는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고 깊은 키스를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