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6장. 함정 (17/39)

제16장. 함정

레니에는 자신도 같이 가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황제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레니에를 말릴 수가 없었다. 혹시 일이 잘못되면 자신 대신 볼모로 잡힐 생각이라는 것을 황제는 알고 있었다.

“레니에. 무슨 생각인지 알아. 그러나 일이 그렇게 되게 하지 않을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도 가야겠습니다.”

베르톨트의 단호한 말에도 레니에는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황제는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오후까지 바오로 공작의 성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여유가 별로 없었다. 세 사람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아른프리트는 가는 내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루이사가 잡혀간 순간부터 말을 할 수도, 잠을 잘 수도, 무언가를 먹을 수도 없었다. 그녀가 당할 고통을 생각하면 심장이 저릿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베르톨트와 레니에는 아른프리트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도 말없이 달렸다. 다만 중간중간 그의 어깨를 두드리거나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아른프리트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었다.

“아른프리트 경. 도착하면 나와 레니에는 바오로 공작의 성으로 들어갈 거야. 그대는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우리 침투 공작 요원들과 루이사를 찾아내어 바로 귀가해.”

“루이사를 찾으면 루이사를 먼저 보내고 저는 폐하와 합류하겠습니다.”

“아니! 난 처음부터 끝까지 레니에하고 있을 걸세. 자네가 합류하면 루이사를 빼돌린 것을 들킬 우려가 있어. 그러면 우리가 바이온을 치려는 계획도 발각될 수 있고. 그러니 내 말대로 해.”

“…알겠습니다.”

* * *

“루이사 에리스타.”

바오로 공작은 오늘도 루이사를 찾아 지하에 내려왔다.

루이사는 두 팔이 십자로 묶인 채로 갇혀 있었다. 그는 매일 한참 동안이나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잡힐 때 얼굴에 생채기가 생긴 것을 아쉬워했다.

‘이 새끼는 왜 또 와서 지랄이야.’

루이사는 바오로 공작의 독사 같은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초리에서 때때로 진득한 무언가를 발견할 때면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벌써 10년이나 지났군. 그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바오로 공작이 의자에 앉았다. 묶여 있는 루이사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날 언제 봤다는 거야? 난 당신을 처음 보는데.”

“그대는 기억에 없겠지. 하지만 난 그대를 알아.”

“미친놈!”

루이사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그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들은 모두 이렇게 성질머리가 고약한 건가?”

“나 성질머리 고약한 거에 당신이 보태 준 거 있어? 왜 날 끌고 온 거냐고! 그거나 말해!”

“왜, 일까?”

“죽이려면 차라리 지금 죽여. 한 방에 죽이라고!”

“널 죽이려면 벌써 죽였겠지. 넌 내게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어.”

바오로 공작이 의자에서 일어나 루이사에게 다가왔다. 그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자 루이사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다.

“너를 구하려고 지금 누가 오고 있는지 아나?”

“하! 나를 구하러? 아무도 오지 않을 거야. 일개 부대장밖에 안 되는데!”

호기롭게 대답했지만 루이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안 올 거라고는 했지만, 그의 말에서 풍기는 느낌으로 보아 왠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올 것 같았다.

사실 아른프리트는 당연히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자가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라면 아른프리트 정도의 인물이 아닐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루이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곧 두 눈을 부릅뜨고 공작을 향해 소리쳤다.

“너! 폐하를 불러서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하! 네깟 놈한테 당할 세르비아의 황제가 아니다!”

바오로 공작은 어깨를 으쓱하고 올렸다가 내리더니 또 한 번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그러게. 너의 황제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 만한 자가 아니더군. 나도 이참에 황제를 죽일 수 있다고 보진 않아.”

“그, 그럼 뭐지? 죽일 수 없다면 왜 불렀어?”

“정치적인 함정이라는 것도 있잖나.”

순간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루이사는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그러나 이 독사 같은 자의 생각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하아. 레니에 경이라도 같이 와야 할 텐데. 이 인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안달루스의 유일한 황녀, 알렉시아도 올 거야. 어때? 그 10년 전 우리가 모두 만나는 게.”

루이사의 눈이 커졌다.

‘10년 전? 10년 전이면…, 알렉시아 황녀를 구해 줬던 그때? 그 자리에 이자도 있었나?’

“뭐야? 그때 당신도 있었어?”

“큭큭. 그래 나도 있었지. 그 복면을 쓴 자객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게 바로 나니까. 그때 그대를 보았지.”

키득키득 웃던 바오로 공작은 손을 들어 올려 루이사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사람 일이라는 게 무척 재미있지 않나. 이렇게 우리가 다시 한자리에 모이다니.”

“무슨 개소리야! 다시 만나 뭘 어쩌겠다는 건데?”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런데 말이야. 황녀는 왜 그렇게 너를 싫어하는 거지?”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루이사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황녀의 속을 모르겠단 말이야. 그대 혹시, 황제를 좋아하나?”

“무슨 말 같지도 않은. 황제는 내 주군이야.”

“그런데 왜?”

바오로는 재미있다는 듯이 낮게 킬킬거렸다. 그의 이죽거리는 면상을 보니 루이사는 속이 끓어 올랐다.

“황녀가 나를 싫어한다는 게 무슨 말이야?”

“너를 납치하자고 한 게 바로 황녀였거든. 알렉시아는 너를 제거하길 원하지만 난, 글쎄.”

바오로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루이사는 송곳과 같이 날카로운 그 웃음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 시간 동안 알렉시아 황녀는 베르톨트를 마음에 품었고 루이사를 제거해야 할 상대로 규정한 모양이었다. 단지 그의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황녀의 집착이 대단하네. 나 같은 것조차도 거슬린단 거야?”

“그럴지도. 알렉시아 황녀는 보기와 다르게 엄청나게 소유욕이 강하다고.”

‘참 나, 이 세상에는 왜 이렇게 미친놈들이 많은 거야?’

바오로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품 안에 있는 시계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이제 올라가 봐야 되겠어.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지”

“야! 이 자식. 날 풀어 줘. 폐하 곁으로 보내 달라고!”

그는 무심하게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루이사는 그의 등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야! 이 개새끼야!”

공작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 * *

“여기서 헤어지세.”

황제의 말에 아른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주군을 향해 경례를 붙였다.

“반드시 루이사를 구하겠습니다.”

“당연하지. 난 웨딩드레스를 입은 루이사를 보고 싶어.”

베르톨트가 소리 내어 웃고 레니에를 바라보았다. 레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럇!”

두 사람은 아른프리트에게서 멀어져 갔다. 눈앞에 바오로 공작의 성이 보였다.

세르비아의 황제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오로 공작은 뛰어나와 젊은 황제를 맞았다.

“오셨습니까. 폐하.”

50대인 바오로 공작은 흰머리가 희끗희끗했지만 피부는 매끈하고 몸매는 호리호리했다. 그러나 곱상한 외모와 달리 그의 눈매와 눈동자는 매우 날카로웠다.

말에서 내린 세르비아의 황제는 10년 전 그 어둠 속에서 본 청년이 아니었다. 당시 언뜻 봤을 때도 남다른 외모 같았지만 오늘 보니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훤칠하고 떡 벌어진 어깨, 단단한 근육으로 둘러싸인 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과 묘하게 흘러나오는 섹시함과 카리스마까지, 같은 남자가 봐도 질투가 날 정도로 근사한 남자였다. 바오로 공작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겉으로는 화사하게 웃었다.

‘이래서 알렉시아가 잊지를 못했군.’

황제의 뒤로 은발의 아름다운 남자가 따라왔다. 황제가 검은 표범이라면 이 은발의 사내는 화려한 백마와 같았다.

그러나 화려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유로운 웃음과 냉철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바오로 공작은 감탄 어린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인사드립니다. 전, 세르비아의 재상 레니에 프랑수아 콩데 드 사르입니다.”

남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날카롭던 바오로 공작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아! 그 유명한 레니에 공이시군요. 이렇게 만나게 되니 영광입니다.”

바오로 공작은 진심으로 반가웠다. 레니에는 세르비아를 넘어서 안달루스에까지 그 천재성과 미모로 유명했다. 그런 자를 이렇게 보게 되니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이렇게 귀한 분들을 모시게 되어 한없이 영광입니다.”

바오로 공작은 연신 영광이라고 하며 자신의 접객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베르톨트와 레니에는 바오로 공작의 환대에 기분이 묘해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 상황이 기이했다. 공작은 두 사람을 진정한 손님으로 대하고 있었다.

접객실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세르비아의 황궁이 견고하고 웅장하다면 바오로 공작의 성은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지나치게 화려했다.

‘영지민들의 고혈을 어지간히도 쥐어짰군.’

둘러보던 베르톨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앉으시지요.”

베르톨트와 레니에가 바오로 공작의 맞은편에 앉자 바오로 공작은 탁자 위에서 종을 들어 소리를 냈다. 곧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차를 내오게.”

“네, 각하.”

집사가 뒷걸음쳐서 물러난 후 베르톨트가 입을 열었다.

“루이사는 어디 있는가?”

황제가 입을 열자 바오로 공작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젊은 황제는 목소리와 어투만으로 자신의 우위를 각인시켰다. 그러한 여유는 열심히 연마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타고난 자존감에 뼛속까지 긍지로 차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그런 고귀함을 무너뜨릴 무기가 있었다. 교활함, 그리고 술수였다.

공작이 비릿하게 웃었다.

“먼저! 제가 이렇게 폐하를 모신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세르비아와 안달루스가 피를 보지 않고 평화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얘기이긴 하다만 바오로 공작, 자네와 내가?”

“음, 두 제국의 실질적인 군주라고 해야겠죠.”

“안달루스의 실질적인 황제가 자네라는 것인가?”

바오로 공작은 자신을 계속 자네라고 부르는 젊은 황제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직은 아닙니다.”

레니에가 바오로 공작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레니에는 겸손한 말투와는 달리 다리를 꼬고 앉아 웃음을 흘리고 있는 이 뱀 같은 자를 보며 생각했다.

‘이자, 위험하다. 보통이 아냐.’

“그래서 또 한 분을 모셨습니다. 아마 거의 당도하셨을 텐데….”

그때 문밖에서 집사가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각하. 제국의 황녀, 알렉시아 에마 마리 율리아나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밤하늘같이 검은 머리카락, 새하얗고 매끈한 피부, 초록색 눈동자, 붉은 입술, 풍만한 가슴과 손에 잡힐 듯 잘록한 허리.

한눈에 보아도 알렉시아 황녀는 눈이 확 뜨일 만한 미인이었다. 베르톨트 앞으로 걸어오는 도도한 태도와 그에 걸맞지 않은 수줍은 표정은 어느 사내라도 두근거리게 하는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세르비아 제국의 황제를 뵈옵니다. 안달루스의 황녀 알렉시아 에마 마리 율리아나입니다.”

그녀는 화려하고 풍성한 치마 자락을 옆으로 펼치고 무릎을 굽혀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마리 공작새 같았다.

베르톨트는 알렉시아 황녀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곧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뭐 하자는 수작이야?”

베르톨트가 노여움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때까지 바오로 공작을 참아 주고 있었지만, 황녀까지 등장하자 그는 서슬 퍼런 살기를 숨기지 않고 내뿜었다.

“어째서 황녀가 여기 온 것인가?”

사자와 같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였다.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던 알렉시아는 얼굴을 들고 촉촉한 눈망울로 베르톨트를 바라보았다.

“폐하. 노여워 마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아시겠지만 지금 안달루스 제국은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제 아비인 황제는 실정을 거듭하여 유명무실해진 상태고, 오라버니인 황태자 또한 간신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민란 때문에 귀족뿐만 아니라 제국민의 마음도 멀어지고 있어 세르비아로 망명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하여 지금 저는 바오로 공작과 손을 잡고 안달루스 제국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르비아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그림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폐하를 만나 뵙고자 했던 저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알렉시아는 미리 준비한 내용을 읊는 것처럼 서슴없이 말했다. 그녀의 정중한 말에도 베르톨트와 레니에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렇소? 그래서 나의 부대장을 인질로?”

베르톨트가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바오로 공작께서 인질로 잡고 계신다는 그분은 저 알렉시아가 책임지고 풀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노여움을 푸세요.”

베르톨트는 황녀를 잠시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가 앉자 서 있던 나머지 세 사람도 의자에 앉았다. 때마침 집사가 금과 은으로 만든 다기를 들고 들어왔다.

“폐하. 차 한잔하시면서 얘기를 나누시지요. 제가 식사 대접을 한다고 하여도 드시지 않으실 것 같아, 귀한 차로 위안을 삼으려 합니다.”

바오로 공작이 희미하게 웃으며 집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는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화려하면서도 고혹적인 찻잔에 따끈한 물을 따랐다. 그러자 찻잔 안에 있던 붉은 꽃봉오리가 열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 모습을 레니에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하. 염려 마십시오. 어떠한 독도 없으니까요. 있다면 저희 모두 이 자리에서 쓰러지겠지요. 이 차는 사우린 대륙의 밀림에 서식하는 열대 꽃으로 만든 것입니다. 향기는 강하나 맛은 은은합니다. 심신을 안정시키고 머리를 맑게 해 주니 정무를 보실 때 드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의 말을 뒷받침하듯 방 안 가득 청량하면서도 달큼한 향이 가득 찼다. 바오로 공작은 아무 이상 없다는 듯이 먼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것을 바라보던 알렉시아 황녀가 한 모금 따라 마셨다.

뒤이어 베르톨트와 레니에가 한 모금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첫 맛은 산뜻하고 중간 맛은 달달하고 끝에는 은은하게 쓴맛이 났다. 베르톨트는 향과 맛이 입에 맞지 않아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았다.

바오로 공작은 화친을 맺기 위해 불가침 조약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옆에 앉아 있는 알렉시아 황녀는 불가침 조약의 대가로 안달루스 제국에서만 나는 광물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레니에가 손을 들어 그들의 말을 막았다.

“황녀님. 무척 매력적인 제안입니다만 저희가 오늘 여기 온 목적은 저희 사람을 되찾고자 함입니다. 이렇게 공식적인 얘기는 제국으로 돌아간 뒤 사신단을 파견하여 정식으로 청해 주시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레니에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으나, 그는 지지부진한 대화에 짜증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옆에서 듣던 베르톨트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베르톨트가 레니에를 거들었다.

“맞소. 이런 문제는 정식으로 사신을 보내 뜻을 전달하는 게 맞소.”

“어째서 제 뜻을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제가 세르비아와 안달루스의 화친을 이끌어 낸다면, 안달루스 내에서 저의 입지가 공고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황권에도 훨씬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폐하의 그 은혜를 모른 척하겠습니까?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알렉시아의 눈빛이 강렬했다. 말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말끝에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묻어났다. 오로지 베르톨트만을 향한 것이었다.

“황녀님은 저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시는지요?”

레니에가 알렉시아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알렉시아는 질문한 레니에와 바오로 공작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는 베르톨트를 가만히 응시했다.

황녀가 입을 열었다.

“저를 드리겠습니다.”

세 남자의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황녀의 정확한 저의를 몰라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무슨 뜻이오?”

베르톨트의 서늘한 눈빛이 알렉시아를 향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사르륵 올라갔다.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공을 세우도록 도와주시면 향후 제가 황권을 쥐고 난 후 저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폐하의 반려가 되겠다는 말입니다.”

순간 바오로 공작은 의자를 거칠게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녀. 이게 무슨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황녀가 제 입으로 타국에 황권을 넘기겠다니!”

바오로 공작의 눈에서는 경악과 함께 노기가 넘쳐흘렀다.

‘아무리 황제가 좋아도 그렇지. 이건 아니지 않는가. 미친 계집 같으니라고!’

“공작. 폐하 앞에서 이 무슨 무례요. 당장 사과하고 자리에 앉으시오!”

알렉시아는 도리어 자신의 편인 바오로 공작을 나무랐다. 공작은 어처구니가 없고 당황스러워 할 말을 잃었다.

한동안 알렉시아를 노려보던 그는 잠시 머리를 식혀야겠다며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나 알렉시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베르톨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폐하. 공작의 무례함을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난 공작보다 그대를 이해할 수 없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폐하. 저를 폐하의 반려로 받아 주세요. 그러면 폐하는 전쟁 없이 안달루스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제국의 황후가 되겠죠. 속 빈 강정이 된 안달루스의 황제보다 대제국의 황후가 더 낫지 않겠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를 갖게 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황녀는 곱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도 했지만, 한 제국의 황녀라는 이가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알렉시아는 황실의 혈통이었다. 그런 자가 자신의 가치를 이렇게 쉽게 낮출 수 있단 말인가.

레니에는 인형처럼 앉아 있는 알렉시아를 보며 뭔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베르톨트에 대한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감정이 무서웠고, 그녀의 예측할 수 없는 성정이 두려웠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베르톨트는 창밖으로 검은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보통 사람은 느끼지도 못할 기척이었지만 기민한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황녀. 안달루스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앞으로 우리가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결정되겠지. 그러나 그대가 황권을 장악해 안달루스를 내 발 아래 가지고 온다고 해도,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말아. 하나의 제국이 어디 그리 쉽게 만들어지고 스러지는가. 그대의 뜻이 그러하다 해도 다른 이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도 그대의 뜻을 받아 줄 생각이 전혀 없고.”

“폐하!”

“하나 더! 가장 중요한 건데, 나의 황후는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될 걸세. 그러니 나에 대한 마음은 접는 게 좋아.”

“그 사랑하는 사람, 제가 될게요. 제가 노력하면 폐하도 저를….”

“아니! 그런 감정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이미 있어.”

레니에는 깜짝 놀라 베르톨트를 바라보았다. 알렉시아의 눈에는 망연자실한 빛이 떠올랐다.

“있, 있다고요? 그, 그 사람…, 루이사인가요?”

황녀는 확인하고 싶었다. 그 말을 들은 베르톨트는 눈썹을 움찔거리며 헛웃음을 날렸다.

“대답할 필요성도 못 느끼지만 기분이 나쁘니 이것 하나만은 짚고 넘어가지.”

베르톨트는 그녀의 물음에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루이사를 자신의 짝으로 생각했다는 것에 살짝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루이사는 내게 형제 같은 존재야. 형이랑 결혼할 수는 없지 않나.”

자리에서 일어선 베르톨트는 레니에를 보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만 돌아가자는 의미였다.

“나를 초대한 이는 공작인데 공작이 나가 버렸으니 이 만남도 의미가 없군.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베르톨트와 레니에는 얼어붙어 있는 황녀를 자리에 남겨 두고 접견실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베르톨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쉐도우한테서 신호가 왔어. 루이사를 빼냈으니 어서 나가자.”

두 사람은 걸음을 빨리했다.

성문을 빠져나오니 정원 입구에 두 사람의 말이 대기하고 있었다. 말에 오르는데 급히 누군가가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알렉시아였다.

“왜 벌써 가시나요? 그리고 몸은, 괜찮으신지요?”

알렉시아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녀가 달려오는 사이 베르톨트는 이미 안장에 올라앉아 있었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본 그가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이? 무엇이 괜찮냐고 묻는 거지?”

“아, 아닙니다.”

그녀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잠시 보였던 당황이 뒤이어 나온 말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나저나… 루이사는 어쩌시려고 그냥 가시는 겁니까? 이대로 가신다면 전 그녀를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황녀!”

베르톨트의 굵으면서도 낮은 목소리에 노여움이 잔뜩 배어 있었다.

“내가 복안도 없이 여기까지 왔을 거라고 생각했나? 루이사는 이미 우리의 손에 들어왔고, 그대는 지금 나를 걱정할 때가 아니야. 바오로 공작의 군대인지 그대의 군대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바이온 왕국은 무너지고 있을 거야. 그대들의 자금줄이었을 텐데 안됐군.”

황제의 눈빛은 서늘하고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알렉시아는 그가 물론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은밀한 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바이온 왕국을 칠 줄은 몰랐다. 제대로 한 대 맞은 격이었다.

“역시 폐하시군요.”

그를 올려다보는 황녀의 얼굴엔 경외의 눈빛이 흘렀다. 역시 자신의 짝이 되고도 남을 남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더 그가 탐이 났다.

“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폐하.”

한마디 더 건네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왔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황녀가 바르르 떨면서 남자를 올려다보면 한 번쯤은 두근거릴 만도 한데 베르톨트는 그저 무심할 따름이었다. 아무런 대답도 않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대로 말머리를 돌린 베르톨트가 성 밖으로 힘차게 말을 몰았다. 그 뒤를 레니에가 바짝 뒤쫓았다.

‘갖고 싶어, 저 남자. 반드시 가질 거야.’

치맛자락을 잡은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알렉시아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리면서 비릿한 웃음이 나왔다.

“벨라루아, 나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허공에 한 형상이 서서히 나타났다. 로브를 푹 뒤집어쓴 여자였다.

“세르비아의 황제, 대단하네요. 찻잔에 독을 묻혔는데도 끄떡없는 것을 보니.”

약간의 쇳소리가 섞여 왠지 모르게 음산하고 기분이 나빠지는 목소리였다.

“어째서 효과가 전혀 없는 거지?”

“그렇지 않습니다. 샤말란은 우리 마법사들이 만든 최고의 독약입니다. 독을 푸는 길은 제 품 안의 해독약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 해도요. 다만 견뎌 내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대단하긴 하네요. 지금쯤 혈관에 퍼져 날뛰기 시작할 텐데….”

알렉시아는 입술을 짓이겼다.

발레리아가 말한 샤말란을 매개로 그를 손에 넣으려 했다. 자신과의 혼약과 해독약을 맞바꾸려 했는데 황제는 혼약 얘기도 야멸차게 거절했고 샤말란도 견디어 냈다.

아마 몸의 이상을 느끼고는 있지만 일부러 자신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으리라. 알렉시아에게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고,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는 건가?’

“벨라루아. 가서 황제가 마음에 둔 그 사람을 찾아서 데리고 와.”

“곱게 모셔 와야 하나요?”

“아니. 숨만 붙어 있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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