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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풀린 수수께끼

레니에는 아델라이드를 본 순간 ‘이 사람이다!’라고 확신했다.

그런 그녀가 황제 앞에서 옷을 벗어 남자임을 증명했을 때 너무나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자신의 모든 감각이 이자가 그녀, 에드가의 동생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으로 봐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자가 소니아랑 만나는 것을 보았을 때도 레니에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 후로 계속해서 그자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벗은 몸을 봤음에도 그자가 아델라이드 왕비라고 생각했다.

다만 어떻게 남자인 건지, 혹 에드가가 여동생이 아니라 남동생을 말한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것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아델라이드가 용병의 위장을 풀기 위해 위장 마력석의 존재를 밝혔을 때, 그리고 주문을 외워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든 의문이 풀렸다.

* * *

베르톨트의 앞에는 아델라이드가 앉아 있었다. 레니에는 그 옆으로 보조를 맞추며 말을 몰았다. 아델라이드와 레니에는 각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베르톨트는 자신의 품 안에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아델라이드를 보자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역시 생각에 잠겨 무의식적으로 말을 몰고 있는 레니에가 보였다.

‘이 사람들이…. 대체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긴 오늘 새벽부터 진영이 무척 분주했다. 어젯밤에 잡은 간자 둘을 처형했기 때문이다.

베르톨트가 간자를 보았을 땐 이미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세르비아 군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안달루스 제국의 제1귀족인 바오로 공작이 보낸 자들이라고 실토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르비아 군의 군사력과 향후 진로, 주요 인물에 대한 정보를 보냈다고도 말했다.

세르비아 병사를 죽인 것도 그 두 용병이었음이 밝혀졌다. 자신들의 정체를 눈치챈 병사를 진영 밖으로 유인하여 죽인 것이었다.

이렇듯 적국 안달루스에 정보를 빼돌리고 살인까지 했으니 두 사람은 황제의 명에 따라 처형되었다.

세르비아 군은 이른 아침의 소란을 뒤로하고 다시 바이온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내일까지는 목표한 지점에 도착해야 했다. 세르비아의 거대한 군 행렬이 서서히 이동했다.

아델라이드는 말을 이렇게 오래 타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잘 타지도 못하는 말을 온종일 타고 있으니, 목부터 종아리까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허리는 이미 진즉에 감각이 없어진 채였다. 그녀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폐하.”

“왜 그러지?”

“저, 말을 너무 오래 탄 것 같아요. 조금 걸어도 될 것 같은데….”

“어디가 불편한가?”

자신은 그저 조금 걷고 싶다 말한 것뿐인데, 황제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불편하냐고 물었다. 이것 역시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서임을 알기에 아델라이드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조금, 조금 허리가 아파서요.”

“허리?”

황제가 손으로 아델라이드의 허리 부근을 지그시 누르자, 놀란 그녀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렸다.

아델라이드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베르톨트가 단단한 한쪽 팔로 즉시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녀는 말 위에서 떨어질 뻔한 아찔함이 가시기도 전에 자신의 몸을 끌어당기는 단단한 팔 때문에 당황하여 울고 싶어졌다.

‘걷다가 쓰러지더라도 내려가고 싶어. 이러다 정말 심장마비로 죽고 말 거야.’

그녀의 고개가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떨어졌다.

베르톨트가 작게 웃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아델라이드의 목덜미 쪽에서 들려왔다.

“에드가. 그렇게 긴장하다간 몸이 더 굳을 거야. 오늘 밤에 마사지를 좀 받아야겠군.”

“네? 그, 그런…. 아닙니다, 폐하.”

“이래 보여도 꽤 많은 병사들의 허리를 풀어 줬어. 그러니 기대해도 좋아.”

베르톨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배어 있었다.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익어 갔다.

그날 밤 베르톨트는 정말 아델라이드의 허리를 만져 주었다. 아델라이드는 처음에는 좀 어색하고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그가 큰 손으로 마사지를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상념들이 싹 사라졌다. 대신 눈물이 쏙 배어 나올 정도로 아파 비명을 삼켜야만 했다.

어색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은 대신 베르톨트에게 옮겨 갔다. 아델라이드의 몸을 목부터 엉덩이 부근까지 리듬감 있게 만지는 동안 그는 점점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은 뼈랑 근육도 예쁘군. 그런데 아무리 덜 자랐다고 해도 사내가 이런 골격일 수 있나?’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나 예쁜 녀석을 껴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미치긴 했나 보다. 이 순간에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굳은 몸을 풀어 주려고 만지는 것일 뿐인데, 자신의 몸이 반응해 버렸다. 아랫배가 팽팽히 당겨지고 묵직해지는가 싶더니 그것이 반쯤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베르톨트는 매만지던 손길을 급히 멈추었다. 더 이상 마사지를 계속하다간 못 볼 꼴을 보일 것 같았다.

“완전하진 않지만 이 정도면 됐을 거다.”

“감사합니다, 폐하.”

아델라이드는 눈에 대롱대롱 매달린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자신의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지켜보던 베르톨트도 천천히 침낭 안으로 몸을 누였다.

“에드가.”

“네. 폐하.”

“간자였던 용병들 말이다.”

그 말을 듣자 아델라이드는 감으려던 두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홱 돌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어제 클리터스 대대장과 조금 소란이 있었나 본데, 넌 뭐 들은 거 없느냐?”

아델라이드는 침을 꼴깍 삼켰다. 갑자기 자신에게 어제의 일을 묻는 황제가 이상했다.

“없습니다. 왜, 왜 제게 물으십니까?”

“음, 그들을 잡도록 도와준 이가 네 친우인 소니아라는 얘기가 있더구나.”

“소니아요?”

“그래. 네가 그 시녀와 친하니 뭔가 알고 있지 않나 해서 물어봤다.”

“아닙니다. 전 모릅니다.”

“그래?”

“네.”

“그 시녀가 도운 것이 확인되면 제국에 돌아갔을 때 보상을 할 예정이다.”

“보상이요?”

“응. 면천이라든가, 아니면 다른….”

황제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잠을 청하려는 모양이었다. 작아진 목소리로 질문인 듯 혼잣말인 듯 읊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 시녀는 어떻게 여자인 그들이 남자임을 알았을까? 완전한 여자의 몸이었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델라이드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자신이 아는 황제는 절대 허튼소리를 하거나 허투루 행동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연루되었다고 의심하거나 황제 자신이 아직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레니에 님이 말했을까? 아냐. 그럴 거라면 폐하께 비밀로 하자는 얘기는 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폐하는 어찌 아셨을까?’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레니에는 왜 자신에게 더 이상 위장 마력석에 대해 묻지 않는지, 황제는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흘리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 답답했다.

아델라이드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자신도 모르게 이불을 들썩들썩하며 뒤척였다. 그 기척에 베르톨트가 아델라이드 쪽으로 돌아누우며 한마디 했다.

“에드가. 그 조그만 머리 그만 굴리고 자 둬. 지금 그 허리 상태에 수면 부족까지 겹치면 내일 버틸 수가 없어.”

황제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을까 봐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터였다. 그 와중에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델라이드는 히끅, 하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베르톨트의 한쪽 볼이 씰룩거렸다.

어젯밤 베르톨트는 무언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쉐도우를 시켜 일의 전말을 알아 오도록 했다. 다시금 쉐도우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에드가가 그자들이 지녔던 위장 마력석으로 위장 마법을 풀었습니다.”

* * *

행군 마지막 날 저녁.

세르비아 군은 바이온 왕국의 접경 지역에 다다랐다. 황제는 근처에 진영을 구축하라고 명한 후, 기사들 몇몇과 레니에를 데리고 근처로 시찰을 나갔다.

3일 내내 지옥의 행군을 했던 군사들은 이제야 제대로 된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막사를 세우고 짐을 풀었다. 아델라이드도 그들과 같은 마음이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황제의 막사 안을 정리했다.

“레니에.”

“예, 폐하.”

근처를 시찰하는 내내 황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레니에에게 할 말이 있어 다른 장군을 대동하지 않고 나온 듯했으나, 간혹 표정 없는 얼굴로 레니에를 바라볼 뿐이었다. 참다못한 레니에가 말을 걸었다.

“폐하. 무슨 일이 있는지요?”

레니에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하게 물었다.

“매우 공손하군.”

황제가 조금 빈정거리는 말투로 답했다. 레니에는 자신의 친우가 무언가에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말투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그렇거니와, 몸에서 은근한 노여움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레니에. 너와 나는 무슨 사이지?”

가볍게 답할 만한 질문이 아니었다. 레니에는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몰라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베르톨트는 친우이지만 세상이 두려워하는 피의 군주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공과 사를 분명히 하기 때문에 자신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철저하기를 바랐다.

줄곧 군신의 관계이면서도 막역한 친구 사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레니에 또한 베르톨트처럼 매사에 엄격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군신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친구이지요.”

신중하게 꺼낸 답변에도 황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어두워진 밤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윽고 그가 느릿한 목소리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군신이라. 난 너와 군신의 관계인 적이 한순간도 없었는데.”

“폐하!”

“넌 내게 단 한 번도 신하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내게 얹어진 이 왕관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고 벅차 숨도 쉬기 힘들 때가 있었지. 그럴 때 시선을 돌리면 내 곁엔 항상 네가 있었다. 세르비아의 천재인 네가. 그게 어떤 의미였는 줄 아나?”

베르톨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런 얘기는 손발이 오그라들어 죽어도 하기 싫었지만, 너는 내게 친구이며 형제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야. 내가 만일 누군가의 손에 죽거나 배신을 당할 경우 인정하고 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너뿐이다.”

“폐하!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럴 일은 영원히 없을 겁니다.”

“알아. 넌 내 뒤통수를 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느니 죽음을 택하겠지. 네가 내게 무언가를 숨기거나 속인다면 그것은 나를 위해서일 거야.”

친우가 처음으로 꺼낸 속마음이었다. 레니에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베르톨트가 새삼 고마웠다. 에드가의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은 에드가와 아델라이드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황제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아델라이드가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면 황제에게 많은 의미를 남겨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런 것이냐?”

“무슨…?”

“에드가의 일 말이야. 왜 내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 거지?”

기어코 올 것이 왔는가. 레니에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무리 감추려 애를 써도 이 무지막지한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베르톨트는 무언가 의심쩍어하면서도 자신이 하는 말을 모두 받아 주었음이 틀림없다.

그래도 에드가가 아델라이드인 것까지는 아직 모를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까. 알고 있더라도 기껏해야 어제의 용병 사건 정도일 것이다.

그것으로 미루어 녀석의 성별과 신분을 의심할 수는 있겠지만 확신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도라면 아직은 밝히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가능하면 밝힐 필요가 없는 상황을 조성하는 게 좋다.

‘그러면….’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폐하. 에드가를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베르톨트가 아무 말 없이 레니에를 바라보았다. 그의 깊고도 고요한 검푸른 눈동자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레니에는 저 눈동자가 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아시겠지만, 그는 안 됩니다.”

“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남자이기 때문이지요. 폐하와 에드가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둘 사이는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곁에 두고자 계속 고집하신다면 에드가는 평생 음지에서 살아야 할 테지요. 드러내 놓고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에드가는 말라 죽거나 시들어 죽을 것입니다.”

베르톨트의 꾹 다문 입술이 일그러졌다.

“두 번째 이유는?”

“에드가는 폐하의 곁을 떠날 것입니다. 녀석은 노예 신분을 벗어나면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에드가가 전에… 몹쓸 짓을 당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레니에는 아델라이드의 신분을 빼고 그녀의 이야기를 조금 알려 주려 했다. 그래서 넌지시 꺼낸 말에 베르톨트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무겁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복잡한 표정을 본 레니에는 그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에드가는 속박이 싫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를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유롭게 훨훨 날듯이 살아가고 싶다 했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곁에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베르톨트는 가슴을 무엇인가가 쿵 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연이어 묵직한 돌덩어리가 온몸을 짓눌러 왔고, 그런데도 그것을 들어 던져 버릴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거였나? 녀석에게서 느껴지던 그 허무한 바람 같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그 무심함이? 어느 순간, 그렇게 떠날 생각이었나?’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니에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기에 일부만 말했지만 그것이 베르톨트를 괴롭히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괴로운 것이 낫다. 레니에의 말대로 두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에드가가 아델라이드라는 것이 밝혀지면 더욱더 그럴 것이었다.

어찌 황제가 적국의 왕비였던 사람을 정인으로 맞이할 수 있겠는가. 그건 베르톨트가 남자와 결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폐하는 그러실 수 있지만 제국은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르톨트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비틀린 입에서 헛웃음이 터지더니 대상 없는 살의가 만면에 드러났다.

“처음부터 이상했어. 넌 신분 확인도 되지 않은 녀석을 나의 시종 노예로 붙였다. 녀석은 시종장의 심부름꾼이었다고 하기엔 너무 영특하고 아름다웠어. 잘난 귀족들보다 더 우아했지, 일개 심부름꾼이.”

“폐하, 아시면서 왜 그를 마음에 담으려 하십니까? 조금만 이상해도 내치시는 분이 어째서…!”

“넌! 넌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느냐?”

베르톨트의 말에 레니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마음대로 되지 않지. 그게 마음대로 되었다면 내가 지금 베르톨트, 너와 이런 얘길 나눌 이유가 없지.’

레니에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제 앞에 있는 사람은 황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세르비아 제국의 황제.

“폐하. 아무리 그래도 에드가는 안 됩니다. 그저 시중 노예로만 대하십시오.”

“녀석이… 에드가가 어떻게 마력석으로 그들의 위장을 풀었지?”

“어찌 아셨습니까?”

“네 말대로 난 황제다. 그러니 어제 내 앞에서 일어난 소동을 모를 리 없잖아.”

“…….”

“대답해, 레니에.”

“…위장 마력석의 사용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렇다면 너는 어째서 에드가에게 연유를 캐묻지 않았지?”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에드가는 바이온과의 전쟁이 끝나고 제국으로 돌아가면 바로 면천을 신청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 잘도….”

“폐하. 우리 세르비아는 전쟁 노예들이 종전 후 면천 신청을 하면 언제나 승인해 주었습니다. 그 노예가 죄를 짓지 않는 한 신청을 승인하지 않을 명분이 없습니다.”

“빌어먹을!”

“그리고 에드가는 폐하의 숨겨진 동성 애인으로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젠장! 너 진짜!”

서슬 퍼런 노기가 베르톨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폭주하기 일보 직전의 짐승 같은 기운 앞에서 레니에는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베르톨트가 으르렁거리며 내뱉는 목소리가 들렸다.

“넌 에드가가 남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한마디에서 숨도 못 쉴 정도로 응축된 감정이 느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베르톨트의 집요한 눈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렸다.

레니에의 등줄기에서 땀이 솟아났다. 황제의 주위로 피어오르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았다.

“폐하. 에드가는… 지나가는 바람입니다. 그를 잡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그녀의 오라비처럼 잡을 수 없는 존재야.

이 말은 속으로만 묻어 뒀다. 씁쓸한 미소가 레니에의 입가에 맴돌았다.

베르톨트는 몸을 돌려 거칠게 말을 몰았다. 레니에의 말이 진심으로 들렸다. 언제나 그러하듯 레니에는 황제인 자신을 먼저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러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레니에의 말이 맞다고, 옳다고, 결국엔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화가 났다.

너무나 화가 났다.

에드가, 그 녀석이 여자일 거라는 의심을 했다. 쉐도우의 보고를 듣는 순간, 에드가 그 녀석도 같은 방법으로 남장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뻤다.

남자인 에드가와는 결혼할 수 없지만 여자인 에드가와는 결혼할 수 있으니까.

에드가가 남자여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여자라면 모든 것이 더 수월할 것이었다.

‘그런데, 떠난다고? 바람이라고?’

베르톨트는 미친 듯이 말을 몰아 자신의 막사 앞에 섰다. 말고삐를 근위병에게 던져 준 그가 막사의 문을 거칠게 열었다.

휘장을 젖히고 들어서자, 막사 안을 정리하고 있던 아델라이드가 베르톨트를 돌아보았다. 아델라이드가 환하게 웃었다.

“다녀오셨습니까, 폐하.”

황제는 한걸음에 달려가 아델라이드를 품에 안았다. 아델라이드는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황제는 화가 나 있었다.

‘왜 이러지? 불안해 보여.’

손을 올려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부드러운 손길에 베르톨트는 잠시 움찔하더니, 몸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베르톨트의 얼굴엔 고통이 서려 있었다. 진하고 굵은 눈썹 사이가 일그러져 있었고 굳게 닫힌 입술은 작게 짓이겨져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 입술을 쓸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 베르톨트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곧이어 그의 입술에서 나온 붉은 혀가 아델라이드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핥았다.

아델라이드가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빼려 하자, 베르톨트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놓아줄 수 없다는 듯 자신에게 더욱 밀착시켰다.

그리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혀로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그 농밀한 느낌에 아델라이드는 허리 부근 어딘가가 찌르르 울렸다.

아델라이드의 귀에 황제의 느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입 벌려. 키스하게.”

황제의 부드러운 듯 거친 입술이 장미 꽃잎처럼 붉은 아델라이드의 입술을 집요하게 탐했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베르톨트의 목 깊숙한 곳에서 거친 신음이 올라왔다. 아델라이드는 그의 큰 손에 뒷머리가 감싸인 채 진득하고 농밀한 혀의 움직임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숨이 가빠왔지만 베르톨트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손이 아델라이드의 허리를 더듬더니 부드럽고 말랑한 엉덩이를 지나 허벅지를 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았다.

그 바람에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다. 아델라이드는 엉겁결에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매달렸다. 그대로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안아 들고 침대로 가 부드럽게 그녀를 내려놓았다.

베르톨트를 올려다본 아델라이드는 깜짝 놀랐다. 그의 눈동자에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위험할 정도로 짙게 빛나고 있었다.

“폐, 폐하!”

베르톨트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귓가를 물고 핥았다. 아델라이드는 생경한 느낌에 몸이 움찔거리며 떨려 왔다.

그의 거친 숨결이 그녀의 목과 쇄골 언저리를 지나가며 붉은 화인을 남겼다. 손길은 이내 그녀의 상의 끈을 풀고 있었다. 매듭이 잘 풀어지지 않아서인지 그는 짜증 섞인 욕설을 낮게 내뱉었다.

“제기랄.”

지독히도 침잠된 그의 목소리가 둘 사이의 뜨거운 공기를 갈랐다. 그 순간 아델라이드는 화들짝 정신이 들어, 끈을 풀려는 남자의 손을 다급하게 잡았다.

“폐하. 안 됩니다!”

아델라이드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베르톨트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잇새로 무겁게 가라앉은 말이 흘러 나왔다.

“왜? 남자라서?”

베르톨트의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당황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뇨. 전, 자격이, 없으니까요.”

꺼내기 힘겨운 말을 천천히 뱉어 냈다. 그러고는 손을 올려 살포시 그의 뺨에 갖다 대었다.

베르톨트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아델라이드의 손에 한숨을 쉬며 입을 맞추었다. 그 작고 흰 손을 뒤집어 손바닥 움푹한 곳에 여러 번 자잘한 키스를 했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 담긴 키스였다.

마음이 가득 차다 못해 넘치고 흘러서 베르톨트는 순간 녀석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과거의 나쁜 경험이 그에게 어떤 상처로 남아 있는지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두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에드가. 날 봐.”

명령이 아닌데도 베르톨트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아델라이드의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위로 올라갔다.

“네가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난 몰라. 하지만 지금 넌 그 누구보다 예쁘고 빛나. 네게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베르톨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미소 지었다. 아델라이드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홀린 듯이 보았다.

“난 세르비아의 황제야. 그런데 말이야. 황제인 내가 너 하나만 바라보며 이렇게 안달이잖아. 몸이 아플 정도로 너를 안고 싶고 갖고 싶은데도, 네 말 한마디에 움찔한다고.”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베르톨트가 또 한 번 빙긋 웃더니 그녀의 목과 쇄골 언저리에 얼굴을 묻었다.

“넌 그런 사람이야. 자격이 없다고? 무슨 그런 소릴. 네 웃음소리, 네 목소리, 네 표정 하나하나에 내가 반응하잖아. 그런데 자격이 없다니!”

아델라이드는 그의 고백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혼잣말인 듯, 고백인 듯, 은밀한 듯, 다정한 듯 갈피를 못 잡는 그의 말엔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과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섞여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황제의 시선을 느끼며 가슴이 두근거리던 것이.

이 사람의 품에 안겨 잠드는 밤을 설레면서 기다린 것이.

자꾸만 그의 잘생긴 입술만 보이던 것이. 이 남자가 안아 주면 어떨까 상상하는 자신을 알고 깜짝 놀라던 것이.

이 남자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일 뿐.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면 얼마나 자신을 원망하고 증오할까. 그런 생각이 들자 눈이 질끈 감겼다.

베르톨트의 거칠었던 숨이 한결 부드러워지고 이내 낮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면 너와 함께할 수 있을까….”

말끝에 한숨이 묻어 나왔다.

‘이러다 정말 미칠지도. 전쟁을 빨리 끝내고 세르비아로 돌아가야겠어.’

생각을 정리한 베르톨트가 고개를 들었다. 평정심을 되찾은 그의 눈동자가 깊고도 따스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오늘은 이렇게 안고만 잘게. 이틀 동안 너를 안을 수 없어서 고역이었어.”

그는 자세를 고쳐 아델라이드를 옆으로 누이고 다시 품에 안았다. 그리고 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마음이 노곤하게 풀어질 정도로 무척이나 다정한 손길이었다.

“폐하.”

“…….”

“죄, 죄송해요.”

그가 낮게 웃었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을 안고 있을 때 이렇게 목 깊숙한 곳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이 좋았다.

“뭐가 죄송하지?”

“그냥, 모든 것이 다요.”

“죄송해하지 않아도 돼. 나중엔, 정말 밤마다 울릴 거야.”

마지막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자 또다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의 품 안으로 얼굴을 묻었다.

‘정말이지. 이 사람은 이런 말을 잘도….’

* * *

아침이 밝았다. 새로운 곳에 진영을 구축하고 처음 맞는 아침인지라 모든 이들이 분주했다.

베르톨트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주변을 순찰하고, 전령을 띄우고, 수뇌부를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매일 열심히 일하는 황제 때문에 세르비아 제국의 장군들과 부관들도 덩달아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다.

세르비아 진영은 오전 내내 군을 다시 정비하였다. 자연히 노예들은 새로운 진영에 맞게 달라진 일을 배당받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모두가 분주했다.

해가 넘어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질 즈음, 진영으로 전령 하나가 말을 타고 들어섰다.

전령은 곧장 레니에의 막사 앞으로 가더니 근위병에게 말을 전했다. 그러자 근위병은 즉시 경계 태세를 풀었다. 막힘없이 막사 안으로 들어선 전령이 황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제2대대 소속 러셀 유니르가 제국의 태양 베르톨트 한스 악셀 크라젤 폰 카롤링거 3세를 뵙습니다.”

“전하라!”

“바이온과 안달루스의 제1귀족 바오로 공작과의 연합은 우리 세르비아 군의 기습으로 무산되었습니다.”

뒤에 있던 레니에와 클리터스를 비롯해 모든 장군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러나 제2대대 대장 아른프리트가 부상당했으며, 부대장 루이사가 납치되었습니다.”

베르톨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나자빠졌다. 레니에와 클리터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고! 납치?”

황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아른프리트 님이 이끄는 저희 군이 복귀하고 있습니다. 약 1시간 후면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두 눈을 번뜩인 황제가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올렸다.

‘감히 누가 루이사 에리스타를 납치했단 말인가.’

이번 바이온과의 전쟁이 끝나면 아른프리트와 결혼할 예정이었는데, 납치라니. 세르비아의 붉은 전사를 감히 누가 데려갔단 말인가.

분노가 치밀어 오른 베르톨트는 휘장을 걷어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는 뒤따르는 클리터스와 레니에를 돌아보고는 서슬 퍼런 목소리로 명령했다.

“레니에, 클리터스. 아른프리트를 맞으러 가야겠다.”

“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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