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그와 그 남자
“레니에 님. 제가 저들의 모습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레니에, 클리터스, 휴고를 포함하여 모두가 놀라 일제히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시선들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며 레니에에게 말했다.
“레니에 님. 그 전에 사람들을 뒤로 물려 주십시오.”
“다들 물러나 있거라.”
레니에의 말이 떨어지자 클리터스, 휴고, 소니아와 병사들은 레니에와 아델라이드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이제 레니에와 아델라이드, 그리고 무릎을 꿇은 채 손과 발을 포박당해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앨리와 로레인만 남았다. 아델라이드는 병사들에게서 건네받은 목걸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주문을 외우면 나도 위장이 풀리겠지. 결국 나도 포박해 모질게 문초할 거야.’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갑자기 온몸에서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핑 돌고 속이 울렁거렸다.
진정하기 위해서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아델라이드는 레니에의 적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왜 나를 그리 보느냐. 그 사내와 같은 눈으로….’
레니에는 가슴이 욱신거렸다. 손아귀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델라이드는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읊조리듯 중얼거렸지만 점점 소리가 커졌다.
그에 따라 엘리와 로레인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부담스러우리만치 풍만했던 가슴이 납작해지고 머리 색깔과 눈동자 색깔이 변했다. 얼굴에는 각이 좀 더 생기더니 곧 완전한 남자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변한 아델라이드였다.
붉은 갈색 머리는 어둠 속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로, 가슴은 볼록하게, 몸의 곡선은 더욱 가늘게 변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피부와 더욱 고와진 얼굴선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위장하고 있던 엘리와 로레인은 자신들이 변했다는 것보다 아델라이드가 변했다는 것에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레니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에드가의 이름만 되뇌었다.
“저도 마력석으로 제 모습을 위장하고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제 얘긴… 차차 말씀드릴 터이니 우선 이 간자들을 체포하세요.”
잠시 그녀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레니에는 무엇이 생각난 모양인지 흠칫했다.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로브를 벗어 아델라이드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입고 있어요.”
아델라이드가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깜빡이자 그가 재촉했다.
“어서, 후드도 쓰고.”
그제야 아, 하며 얼른 로브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꽁꽁 둘러싸 모습을 감춘 아델라이드에게 레니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다시 남자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네.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위장을 푸는 주문을 외우는 즉시 다시 모습이 바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자리를 빠져나가세요. 그리고 에…드가의 모습으로 계십시오. 제가 다시 언급할 때까지 이 일은 함구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폐하께도 말이죠.”
“레, 레니에 님….”
“당신의 본모습을 또 누가 아나요?”
“…소니아가 알고 있어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이 일은 우리 셋만의 비밀입니다.”
아델라이드는 레니에의 재촉하는 시선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왜 저들을 잡기 위해 이토록 애를 쓴 겁니까?”
자리를 뜨는 그녀의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느낌이었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돌려 레니에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저는 현재 세르비아 제국에 몸을 의탁하고 있으니까요. 제국군이 위험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오늘처럼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후에 노예 신분을 면천받고 소니아와 함께 오붓하고 자유롭게 살려고 했어요. 지금은….”
‘제 뜻대로 되지 않겠지만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오빠를 찾고 싶었다. 소니아와 셋이서 고통 없이 평안하게 살고자 했던 소박한 희망이 이렇게 본모습을 드러낸 순간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비밀이라고 하긴 했으나 레니에는 곧 자신의 신분과 사정을 추궁할 테고 그러면 곧 정체가 밝혀질 것이다. 살아남을 수가 없다.
심장이 지끈거리고 숨통이 조여 와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아직은 그 희망 버리지 마세요. 당신에 대한 것은 나중에, 나중에 논할 겁니다. 그러니 지금까지처럼만 행동하세요.”
아델라이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떨려 왔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해하려 하는 것은 아님이 확실했다. 그녀는 등을 돌려 총총히 사라졌다.
레니에는 그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큰 소리로 클리터스와 병사들을 불렀다. 그들은 레니에의 명령에 따라 간자들을 일으켜 끌고 갔다.
간자들은 끌려가는 와중에도 꽥꽥대며 자신들의 무고를 알렸지만 그것도 잠시, 곧 병사들의 주먹에 입을 닫아야 했다.
남아 있던 클리터스와 휴고는 의문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레니에를 바라보았다.
“에드가는 어디 갔습니까?”
“그들의 본모습을 보고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아 먼저 들어가라고 했어.”
“그래요?”
“클리터스 자네는 일단 저자들을 심문해서 자백을 받게. 나는 폐하께 보고를 드려야겠네.”
클리터스는 에드가가 없는 것이 미심쩍었지만 레니에가 이리 말하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갖춰 인사한 클리터스는 간자들이 끌려간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휴고가 레니에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저들의 위장술을 어떻게 풀었습니까?”
“에드가가 마력석을 이용해서 풀었다. 녀석이 주문을 알고 있더구나.”
“에드가 님이 주문을요?”
“그래.”
“어떻게요? 에드가 님은 어떻게 위장 마력석을 알고 있는 겁니까?”
레니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정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델라이드는 다시 남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후 소니아의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걸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겹겹이 쌓여 그녀는 생각에 골똘히 잠기었다.
‘왜 레니에 님은 나를 다그치지 않는 거지? 왜 더 이상 묻지 않는 거지? 레니에 님의 마음을 모르겠어.’
“에드가!”
아델라이드는 자신을 부르는 소니아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아, 아니. 그냥. 왜 레니에 님이 더 이상 묻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레니에 님이라면, 아까 은발의 그분?”
“응.”
“저, 에드가. 나 그분 수에비 궁에서 뵈었어.”
순간 아델라이드의 걸음이 멈추었다. 아델라이드는 놀란 얼굴로 소니아의 어깨를 잡았다.
“레니에 님을 뵈었다고?”
“응. 그, 시신 말이야. 나를 불러서 그 시신이 왕비가 맞느냐고 물었어. 그분은 내가 왕비의 전속 시녀인 줄 이미 알고 있어.”
아델라이드가 크게 휘청거렸다. 동공이 흔들리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에드가. 왜 그래?”
“소, 소니아!”
잔뜩 당황한 소니아가 아델라이드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아델라이드의 몸을 안고 연신 등을 쓸어 주었다.
‘당신은, 당신은 아는 건가요? 내가! 내가 아델라이드인 줄, 당신은 아는 거죠?’
“소니아. 그 사람은, 내가, 수에비의 왕비인 것을, 아는 것 같아.”
아델라이드의 흐느낌 섞인 말소리가 소니아의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 숨을 헉 하고 들이쉰 소나아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형님. 에드가 님이 마력석의 마력을 푸는 주문을 알고 있다고 폐하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막사로 돌아오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는 레니에를 보면서 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레니에는 낮고 고요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에드가 얘긴 적당한 때를 보아서 폐하께 고하겠다. 그러니 너도 그때까지는 입을 다물어라. 지금은 일단 에드가가 그대로 있는 게 좋아. 그대로….”
‘남자인 채로.’
레니에는 마지막 말을 삼켰다.
휴고는 아까부터 영 이상한 태도를 보이는 사촌 형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속을 모르니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레니에는 마치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엉킨 실타래를 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레니에가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휴고를 바라보았다.
“휴고 패트릭 콩데 드 모르세르!”
느닷없이 자신의 풀 네임을 호명하는 통에 휴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지금 이 시간부로 제국으로의 귀환을 명령한다. 넌 나의 비서관으로 전장에 있으니, 나의 명령만으로 귀환이 가능하다. 지금 모르세르가가 아닌 발루아가로 귀환하여 사람을 찾아라.”
“귀, 귀환이요?”
휴고는 어처구니가 없어 뭐라고 하려다가 레니에의 형형한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사촌인 레니에는 언제나 얼음장 같은 이성과 논리를 갖추고 평정심을 유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무언가 크게 그를 흔들고 있었다.
“누굴 찾으란 말씀입니까?”
휴고가 바짝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물었다.
레니에가 읊조리듯 대답했다.
“에드가 죠세파 로렌느 드 발루아.”
*
1년 전. 수에비 왕국과 세르비아 제국의 국경 지대 엔카르트.
사르 공작가의 관할 영지인 엔카르트는 매우 척박해서 영지민이 적긴 하나, 그 중요도가 낮지는 않았다. 수에비 왕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그곳은 군사적으로 꽤 요충지였다. 그래서 이 지역은 세르비아 제국에서 가장 명망 있는 가문인 사르 공작가가 관리하고 있었다.
레니에 프랑수아 콩데 드 사르는 어릴 때부터 매우 영민하고 이성적이었다. 그를 가르치는 스승들은 모두 그의 천재성에 혀를 내둘렀고, 그 가문에 그 후손이라고 칭송했다.
레니에의 놀라운 점은 천재적인 두뇌만이 아니었다. 그는 사르 공작가 특유의 은색 머리카락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묘한 매력을 지닌 붉은 갈색 눈동자에 미색까지 뛰어났던지라, 그가 요요한 표정을 지으며 수업을 들을 때면 스승들도 가끔 얼굴을 붉히곤 하였다.
그만큼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이제 사르 공작가의 가주가 되었다.
레니에는 매우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따라 황궁을 드나들다가 자연스럽게 황궁에 사는 한 소년과 친구가 되었다. 자신과는 다른 방향이지만 어쨌든 자신보다, 혹은 자신만큼 아름답고 힘이 있는 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어릴 때 부모를 잃으면서 일찍부터 전장에 나가 군을 이끌어야 했다.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야 했고, 제국의 미래를 짊어져야 했다. 가혹하리만치 자신을 몰아세웠던 그 소년은 이제 젊은 황제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세르비아의 황제와 재상으로서 주종 관계였으나 막역한 친우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봐 온 서로의 환경과 피나는 노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좁혀지지 않는 차이는 있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레니에는 이성 문제를 대하는 사고방식이 자유분방했다. 반면 황제는 철저히 자신을 통제했다.
그럴 바엔 일찍 결혼하여 황후를 맞이하라고 레니에가 충고했지만 황제는 자신이 전장을 떠도는 동안 황후가 성에서 외롭게 시들어 갈 것이라며 혼인을 미루었다. 많은 대신들이 레니에와 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젊은 황제는 한사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둘은 이제 스물여섯이 되었다.
주군과 신하의 관계이면서 친우이기도 한 이 이상한 미남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한 명은 황성과 전장을 오가며 황제의 국정 운영을 도왔고, 한 명은 주야장천 전장에서 군인들과 구르고 굴렀다.
“폐하. 이 땀 냄새 나고 더러운 녀석들이 그렇게 좋습니까?”
“하하하. 그러는 너는 그렇게나 여자들을 만나면서도 반려 하나 아직 못 찾은 거야?”
“가슴을 뛰게 하는 레이디가 아직 없습니다.”
“그렇게 여자들이랑 즐기기만 하다가 엄한 놈한테 꽂힌다.”
“폐하나 이 지겨운 사내놈들 사이에서 나오십시오.”
레니에는 한동안 농담을 주고받다가 이내 허리를 숙여 황제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황제가 다음으로 노리고 있는 곳은 수에비 왕국이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자신의 영지, 엔카르트에 군사를 주둔시키려면 적어도 3개월 전에 엔카르트에 가서 미리 준비해야 했다.
“그동안 살펴보지 못한 터라 이번에 가면 3개월 정도는 있을 예정입니다.”
“알았어. 가서 준비 잘하고 몸조심해라.”
“폐하도 다시 뵐 때까지 강녕하십시오.”
레니에는 황제를 떠나오면서 자신보다 더 지독한 놈은 세상에서 저 인간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물색하고 물색해 여자를 데려갔으나, 황제는 기어이 안지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건강한 사나이인데 어찌 저리 여자한테 무심한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혹 전장에서 황제의 애인 역할을 하는 병사가 있는지 알아봤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하긴 황제는 동성애자가 아니지. 그가 여자를 원할 때의 그 눈빛과 열기를 내가 아는데.’
죽마고우인 둘은 서로에 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레니에는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말에 박차를 가해 엔카르트 지방으로 달렸다.
엔카르트에는 3년 만에 왔다. 레니에는 이곳에 올 때마다 황량한 남자의 마음 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허망하고 쓸쓸한 느낌이 싫어서 더욱 오길 꺼렸는지도 모른다.
레니에가 영지의 아칸소 성으로 입성하자 성내에 있던 시종들, 시녀들이 좌우로 대열을 이루어 주인을 환영했다. 그중 시종장인 아르센이 앞으로 나와 레니에를 맞았다.
“각하, 오셨습니까.”
“잘 있었나, 아르센?”
오랜만에 보는 아르센은 이제 앞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그러나 이 강직하고도 깔끔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레니에는 곧장 서재가 있는 2층으로 향했다.
“각하. 먼 길 오셨으니 따뜻한 물로 몸을 좀 녹이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 목욕은 밤에 하고 저녁 전까지 영지 내 관리 대장과 입출금 명부, 영지민 주거 자료를 좀 보겠네.”
아르센은 레니에를 따라 집무실로 이동했다. 그는 레니에가 정무를 볼 수 있도록 도왔다.
젊고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인 레니에는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3년 동안의 영지민 주거 자료 분석을 마쳤다. 그동안 아르센은 간간이 차를 올리거나 서류를 정리하며 레니에를 지켜보았다.
작업의 양이 실로 어마어마했고 동시에 계열이 다른 일이라 복잡했으나 레니에는 막힘이 없었다. 일을 처리하는 속도도 대단했다. 아르센은 이러한 레니에의 능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엔카르트에 있는 한 달 동안 레니에는 엄청난 양의 업무를 해치웠다. 크게 보면 세 가지 일이었다.
첫째는 세르비아 제국의 내무부 업무였고, 둘째는 수에비 왕국을 치기 위한 엔카르트의 준비 태세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엔카르트 영주로서의 업무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한 가지 일도 버거웠을 테지만 레니에의 역량은 세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엔카르트에 온 지 한 달이 되어 가는 어느 날이었다.
오전 영지 시찰을 마치고 오후 내내 집무실에서 일하던 레니에를 시종장 아르센이 찾아왔다. 아르센은 오늘도 어김없이 깍듯한 태도로 서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아르센, 무슨 일이 있는가?”
“각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지라 우선은 제 임의대로 했습니다. 방금 전 마르세 숲에 쓰러져 있던 나그네를, 그 근처 영지민이 발견하여 성으로 옮겼습니다.”
“나그네?”
“네. 사내인데, 특이하게도 은발이라고 합니다.”
“은발이라고? 나와 같은?”
세르비아 제국에서 은발의 남자는 매우 드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발은 사르 공작가의 태생이라는 표식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각하보다 조금 더 옅은 색인데,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칼에 맞아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의사를 불러 응급 처치를 마친 상태입니다.”
“생명에 지장은 없나?”
“의사 말로는 며칠 지나 봐야 알 것 같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쉽지 않을 듯합니다. 워낙에 몸이 많이 망가졌는지라….”
“그래? 거참 어디서 그렇게…. 여하튼 수상한 자일지도 모르니 자네가 잘 지켜보게.”
레니에는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영지에 들어온 이 낯선 사내에게 관심이 없었다. 다만 같은 은발이라는 것에 약간의 호기심이 일었을 뿐이었다.
아르센은 은발의 사내 곁을 지키도록 어린 시종 하나를 붙였다. 어린 시종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남자의 손을 잡아 주기도 하고,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아 주기도 하고 물을 먹여 주기도 하는 등 그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어린 시종은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를 처음 보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 눈동자를 보고 싶었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를 살리고 싶었다.
낯선 사내가 온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레니에는 시종장에게 그 남자가 죽을 고비를 넘겼고 정신을 차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각하, 한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아르센이 물었을 때 레니에는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보통 때라면 아르센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센과 그 옆에 선 어린 시종의 눈빛이, 그를 만나 보라고 간곡히 말하고 있었다.
“흠, 알겠네. 이 업무만 끝내고 가 보지.”
어째서 저 두 사람이 저런 눈빛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레니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황제의 서신을 처리하는 일로 골치가 아팠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어서 답장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골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에 드는 서신을 완성했다.
“아르센.”
레니에는 시종장을 불러 손님에게 가 보자며 앞장을 서라 했다. 멀지 않은 별채까지 두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다다랐다.
손님방 앞에서 아르센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어린 시종이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레니에의 표정과 몸이 굳어 버렸다.
침대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긴 은발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강물처럼 부서졌다. 선이 고운 얼굴과 진회색 눈동자의 조화가 그를 마치 천상의 존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레니에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르센이 말했다.
“이분은 엔카르트의 영주님이신 레니에 프랑수아 콩데 드 사르 공작이십니다.”
“이렇게 치료해 주시고… 잠자리까지…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는 말하는 것조차 힘이 드는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윽고 그 희미한 미소를 다시 지어 보였다.
레니에는 남자치고는 낭랑하고 고운 목소리가 그의 외모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침대 옆으로 다가서서 물었다.
“그대 이름이 무언가?”
“…에드가입니다.”
에드가의 상태는 심각했다. 레니에가 방문한다는 소리에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아 있었지만 실은 그마저도 몹시 힘에 부쳤다.
에드가의 표정이 묘하게 불편한 것을 알아챈 레니에는 그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의사를 불러 그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참혹했습니다. 얼굴만 봐선 심각해 보이지 않지만 몸은 엉망진창입니다. 더군다나 자상이 매우 심각해 회복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견디고 왔는지, 정신력이 대단한 자입니다.”
“음, 알았다. 자네는 이틀에 한 번씩 들러 저자를 치료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나에게 고하라.”
“네. 알겠습니다, 각하.”
레니에는 다시 에드가의 방으로 들어갔다. 누워 있던 에드가가 몸을 일으키려고 움찔하자 레니에는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그럼에도 뜻을 굽히지 않은 에드가는 결국 상체를 조금 일으켜 비스듬히 앉았다. 어린 시종이 그의 어깨와 허리에 푹신한 베개를 대 주었다.
“됐습니다. 위중한 환자를 억지로 앉혀 놓고 얘기를 듣게 할 정도로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네.”
에드가의 눈빛에서 슬프면서도 미안한 듯한 감정이 느껴졌다. 레니에는 뭐 이렇게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 있는가 싶어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은 내 영지에 들어온 손님입니다. 그것도 매우 도움이 필요한 손님이죠. 움직일 정도로 회복되려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엔카르트는 영지민이 적어 이주해 오는 사람이나 손님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사람이 그리운 곳이라고 할까요. 그러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이 저와 이 엔카르트 영지민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잘 쉬고 잘 먹어서 어서 빨리 회복하는 것입니다.”
레니에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에드가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의 표정은 미안함, 놀라움, 안도, 어색함에서 마침내 다시 미안함으로 변해 갔다.
그처럼 소년같이 순수한 감정 표현이 레니에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에드가라는 이 아름다운 남자의 존재만으로 방 안이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엉망이 된 몸으로 저토록 온화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보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어쩐지 말이 길어질수록 자신이 작아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레니에는 한숨을 쉬었다. 이 자리를 빨리 피해야 했다.
“이 집의 주인으로서 당신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정도는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듣는 게 낫겠군요. 지금은 괴로울 테니.”
고개를 까딱한 레니에는 방을 나섰다. 그의 뒤에서 낭랑하고 따뜻한 에드가의 음성이 들렸다.
“고맙습니다.”
복도로 나온 레니에는 자신의 집무실로 성큼성큼 발길을 옮겼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후, 이게 뭐야! 내가 호의를 베풀고 왜 내가 부끄러워하는 거야!’
집무실에 앉아 있는 내내 에드가의 그 풍부한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잘 마시지도 않는 차를 연거푸 세 잔이나 마셨다.
“아르센.”
“네, 각하.”
“지금 당장 우리 사르 가문의 정보원에게 전령을 보내게. 엉망이 된 몸으로 수에비 왕국에서 도망친 은발의 남자, 에드가에 대해 알아보라고 해.”
“에, 에드가요? 왜 그가 수에비 왕국에서 도망쳤다고 생각하십니까?”
“엔카르트는 수에비와의 접경 지역이야. 그러니 수에비에서 왔겠지. 만일 세르비아 사람이라면 저런 은발을 내가 모를 리 없잖아. 더군다나 저렇게 생겼는데.”
“그, 그렇죠.”
“그리고 누군가가 노리고 한 일이 아니라면 저렇게까지 몸이 망가지기 어려워. 그러니 필시 그 누군가를 피해 도망쳤을 거야. 자객에게 칼을 맞은 것도 그렇고, 아마 에드가는 아직 쫓기고 있을 거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바로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아르센이 나가고 나서 레니에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꾸욱 꾸욱 눌렀다. 오랜만에 느끼는 두통이었다. 그는 아르센이 타 준 다 식은 차를 입에 마저 털어 넣었다.
한 달이 지났다.
에드가는 정말 말을 잘 들었다. 그는 의사의 말대로 조금씩 운동을 했고 쓰디쓴 약도 잘 먹었다. 그런 그를 어린 시종 대니가 잘 보살폈다. 그는 대니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또 미안해했다.
그리고 그는 레니에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기 쉽지 않을 텐데, 레니에는 가끔씩 들러 자신의 상태를 묻거나 하며 말상대가 되어 주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꽤 자신에게 신경을 쓰는 레니에가 조금 귀여워 보였다. 그러면서도 항상 냉정하고 날이 서 있는 그가 어른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 달이 지나자 에드가는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보름이 더 지나자 대니와 함께 짧은 산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곧 성안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 은발의 사내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다. 성안의 이곳저곳을 산책하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따뜻한 미소를 선물하는 그를 칭찬하는 이야기였다.
길에서 에드가와 마주친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고 행복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성의 분위기를 레니에도 모르지 않았다.
어느 날은 대니의 부축을 받으며 꽤 오랫동안 산책을 하는 에드가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는 그를 대하는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자신 앞에 서면 사뭇 긴장하던 사람들도 에드가 앞에서는 표정부터가 달라졌다.
문득 에드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자신을 깨달은 레니에는 당황하여 몸을 돌렸다.
‘미친놈. 은발 처음 보냐. 평생 지겹도록 보는 은발인데.’
그는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뱉었다. 할 일은 태산인데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에드가 님. 오늘 저녁은 각하께서 같이하자고 하십니다.”
“각하께서요?”
“네. 오후 6시까지 대식당 홀로 오시기 바랍니다.”
“아, 네.”
아르센이 나가자 대니는 무엇이 신나는지 콧노래를 부르면서 부산해졌다.
“대니.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각하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럼 준비를 하셔야죠.”
“준비? 어떤?”
“레니에 각하는 세르비아 제국의 제1귀족이면서 재상이세요. 그런 분의 초대이니 당연히 목욕을 하시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죠.”
대니가 이야기를 마치자 에드가는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너무 수선을 떠는 것 같은데.”
에드가가 대니의 볼을 부드럽게 쓸며 웃었다. 대니는 볼을 조금 붉히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퉁명스럽게 에드가에게 말을 뱉었다.
“그게 예의입니다. 엔카르트는 사람이 적어서 누가 초대를 하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응답으로 호의를 표하거든요.”
대니의 말에 에드가는 자신이 너무 모르고 쉽게 말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대니의 손을 잡고는 예의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알았다.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대니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레니에는 긴 식탁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기 전 목욕을 했는지 오늘따라 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는 긴 은발을 느슨하게 땋아 한쪽으로 내리고 있었다. 갖춰 입은 드레스 셔츠가 그의 부드러운 이미지와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졌다.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레니에가 말문을 열었다.
“나와 같은 것으로 준비했어요.”
“네, 각하. 잘 먹겠습니다.”
에드가가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레니에는 식사를 하는 중간중간, 아무 말 없이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놀랍게도 에드가의 식사 예법은 완벽했다. 나이프와 숟가락, 포크를 번갈아 가며 집을 때나 입으로 가져가 씹을 때나 음식을 덜어 낼 때, 그의 동작에는 고도로 훈련된 우아함이 배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좀 걸을까요?”
바라던 바였는지,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하던 에드가가 고개를 들어 활짝 미소를 내뿜었다.
“영광입니다, 각하.”
에드가의 찬란히 빛나는 미소를 본 순간 레니에의 가슴속 무언가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에드가의 미모가 심장 건강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슨 남자가 저리 아름다울까. 남자도 홀리는군.’
두 사람은 식사를 느긋하게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아칸소 성의 정원은 아기자기한 맛은 없지만 근방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잘 가꿔진 곳이었다. 레니에가 먼저 걷고 에드가가 한 발 뒤에서 따라왔다.
“그대.”
“네, 각하.”
걸음을 멈춘 레니에는 돌아서 에드가를 마주 보았다. 키가 비슷하여 시선을 맞추기가 편했다.
“수에비 왕국에서 추방당했더군요.”
언제나 온화한 미소가 떠나지 않던 에드가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에드가가 주먹을 꽈악 쥐었다.
“제가 좀 알아보았습니다. 저희 집에 묵고 있는 손님이 어떤 분인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각, 각하. 속이려 한 것은, 아닙니다.”
“추방당한 자를 숨겨 주는 것은 국제 조약에 어긋납니다. 그건 알고 계시겠죠? 수에비의 그 유명한 발루아 백작가의 가주님. 그리고… 윈터스 2세의 매제.”
에드가의 동공이 덧없이 흔들렸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카이스턴, 그 거지 같은 왕을 싫어합니다.”
“각하. 그럼 저를, 어쩔….”
“그대로 계십시오. 카이스턴 국왕과는 그런 조약을 지킬 의무도, 가치도 없으니까요.”
“…….”
“다만 왜 추방당하신 건지, 그건 알아야겠습니다.”
에드가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다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어린 누이, 아델라이드의 흐느낌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아픔과 고통이 물감 번지듯 온몸에 번졌다.
“조사하셨다니 아시겠지만, 제겐 여섯 살 어린 여동생이 있습니다. 여동생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왕비가 되었지요. 그러나 동생은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매일 카이스턴의… 매질과 고문에 가까운 폭력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몰랐는데, 함께 간 소니아라는 시녀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습니다.”
말하기도 힘들 만큼 중간중간 목이 메었다. 에드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동생을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꺼내 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궁에 들어갔죠. 그러나 결국… 카이스턴에게 붙잡혔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괜찮습니다. 다만 제 동생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그것도 모르고 저 혼자 하루하루 편하게 잠들었다는 것이… 그것이 너무나 아프고 미안합니다. 그 후로 추방령을 받았으나 아시다시피 곧 뒤따라온 자객의 손에 칼을 맞았습니다. 카이스턴은 결코 저를 살려 둘 자가 아니었죠. 다음부터는 각하께서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에드가의 간략한 이야기는 정말 레니에가 아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실, 레니에의 정보원이 갖고 온 내용이 더 자세했지만 맥락이 다르지 않았다.
에드가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 레니에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레니에는 정보원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처절할 정도로 시리고 아픈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욱 에드가에게 신경이 쓰였다.
“힘드셨겠군요.”
레니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겨우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전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악마에게 붙잡혀 있을 아델라이드가… 그 녀석이….”
에드가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진 동시에 그는 삐져나오는 울음을 손으로 막았다. 그 모습을 보자 레니에는 누군가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 애가, 너무나 불쌍합니다. 너무나, 너무나….”
에드가는 나무 기둥을 붙잡고 오열하다가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고문을 당할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고통은 아델라이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런데 지금, 레니에가 보고 있는 지금, 너무나 격한 감정이 휘몰아쳐 무너지고야 말았다.
레니에는 부들부들 떨리는 에드가의 어깨를 한 손으로 꾸욱 잡았다. 어떻게 위로를 해 주어야 할지 몰랐지만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한참이나 울음을 꾹꾹 누르던 에드가는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고 레니에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각하.”
레니에는 어깨에 올린 손을 내리지 않았다. 말도 없이, 그저 에드가를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애써 감정을 갈무리한 에드가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깨에 올려진 레니에의 손을 살며시 잡아 아래로 내렸다.
“각하.”
레니에의 얼굴이 에드가의 코앞에 와 있었다. 레니에의 손가락이 올라와 에드가의 입술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쓸었다.
“울음을 참느라 깨물어서, 입술이 부었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레니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에드가의 얼굴로 올라왔다. 에드가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괜, 괜찮습니다. 정말, 전….”
“괜찮다니 다행이군요.”
레니에가 말을 툭 하고 뱉었다. 방금 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무색하게 다시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되었다.
그는 에드가의 손을 끌어 마저 걷자는 듯이 자신의 옆에 세웠다. 그리고 뒷짐을 지고 먼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한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둘 사이에 자리 잡았으나 또 한순간 탁 하고 풀어져 버렸다.
“그럼 에드가 당신은 어쩔 셈입니까?”
“전, 여동생 아델을 찾을 것입니다. 안달루스 제국에 지인이 있습니다. 그를 찾아가 아델을 빼 올 방법을 모색할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럴 생각이군요.”
세르비아 군은 1년 안에 수에비 왕국을 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에비 궁에 가서 왕과 왕비를 끌어내어 참수해야 한다. 왕과 왕비는 사정이 어떻든 살려 둘 도리가 없다.
레니에는 에드가에게 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각하와는 상관없는 얘기일 텐데….”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상관없지 않습니다. 당신의 여동생은, 우리한테 죽을 테니까요. 난 지금 그것을 위해 여기 있는 것입니다.’
레니에는 에드가를 생각하면 본인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에드가를 만나면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 가슴 저린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에드가에게 그의 동생을 데려다 주면, 그래서 에드가의 근심이 사라진다면 자신의 이런 감정도 사라지지 않을까.
맨 처음 에드가를 봤을 때만 해도 단순히 그의 외모에 충격을 받았었다. 레니에는 지금껏 자신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이었고 그 아름다움이 여태 겪어 보지 못한 생소한 느낌을 풍겨 당황했다.
그러나 당황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신선했다. 누군가의 존재 때문에 자신의 일상이 이리 자극을 받는다는 것이 무척 새롭고 설렜다.
그리고 에드가의 지혜와 지식에 감탄했다. 세르비아의 천재인 자신을 지성으로 기쁘게 하는 자가 있다니 놀라웠다. 그와 고전을 이야기하고 인문을 논하고 철학을 주고받으면서 그의 방대한 지식과 유연한 해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에드가도 마찬가지였다. 에드가 역시 세상 어딘가에, 자신과 이토록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레니에는 매일 오후 에드가와 함께 티타임을 가지면서 서로의 기호, 생각, 식견, 감성을 공유했다. 살아오면서 이런 부분이 항상 목말랐던 레니에는 에드가와의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평소, 당신은 누구와 이런 얘기를 했습니까?”
“아델이 결혼하기 전에는 그 녀석과 했습니다. 그 녀석은 제 동생이지만 또 다른 제 자신이기도 했지요. 부모님을 일찍 잃어서 그런지 동생과 저는 사이가 무척 좋았습니다. 단순히 오빠와 동생이기보다는 동지이고 친구였죠.”
“부럽군요. 전 나눌 이가….”
레니에는 갑자기 황제인 베르톨트가 생각나 피식 웃었다. 굳이 나누었다고 하면 그 인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과 내가 과연 동등할 수 있을까? 친구이기 전에 나의 주군인 것을.’
“전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는 게 잘못이라고요. 그렇게 하려 할 때, 나를 포함하여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힘들어지는 것이라고. 그래서 가주의 자리도 동생에게 물려주고 자유로이 유랑을 하고 싶었습니다. 전 순수한 자유를 꿈꿨지만 동생은 모든 이들과 행복해지는 것을 꿈꿨으니까요. 책임감이 남달랐죠. 그래서였을까요. 녀석은 그 끔찍하고 지독한 날들을 다른 이들에게 털어놓지도 않고 혼자 감내했습니다. 그래서 더, 더 가슴이 아픕니다.”
에드가의 눈빛이 흐려졌다. 레니에는 어떤 말도,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었다.
무슨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알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또한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은 그의 동생을 죽음의 길로 내몰 것이었다.
지금도 세르비아 군이 엔카르트로 진군하고 있다. 이들은 레니에가 세운 전략과 전술로 수에비를 격파할 것이다. 그리고 왕과 왕비를 참수하고 그 목을 성문에 걸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상처를 드러내며 떨고 있는 이 사람의 동생을 말이다.
레니에는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이 참혹한 상황이 견딜 수 없었다. 심장 끝까지 차오른 감정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유독 진솔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 그날 밤 에드가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레니에가 이런 직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보기에 저런 자는 스스로를 정해진 자리나 직위에 가둘 수가 없었다. 특히 세르비아의 ‘재상’은 엄격함과 격식이 가장 많이 요구되는 자리였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강해졌다. 에드가는 레니에와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자유로운 사상과 감성에 놀라 탄복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재상이라니.
물론 그의 능력을 발휘해 세르비아를 놀랍게 설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 가지고 성이 찰까 싶었다. 가능하다면 그와 함께 세상을 유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자신이 아델 이외의 누군가를 이처럼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제 몸도 많이 나아 이곳에 더 기거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조금 더 늦게 회복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는, 이런 나를 알면 우스워할까? 아니면 기뻐할까?’
에드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침대 위에 누웠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자신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이 났다.
자신과 레니에 사이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생겼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 건 꼭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표정과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그것이 이곳에 계속 있을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아델을 구해야 한다. 그러니 이 따뜻하고 평화로운 기분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이런 자신이 싫었다.
‘이기적이구나, 에드가. 이제 떠나야겠다.’
다음 날 아침. 에드가는 아르센에게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했다.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 먼 길을 떠나시는 것은 무리예요.”
“아닙니다. 더 있게 되면…. 여하튼 더는 신세지고 싶지 않습니다.”
“후우, 그렇다면 각하께 인사는 드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각하는 외부 시찰 중이신데 곧 들어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그게….”
그를 보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가야 한다고. 당신 곁에 더 있고 싶은데, 이 마음 때문에 더 있을 수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에드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시종장님께서 잘 말씀해 주세요.”
그때 갑자기 밖에서 웅성거림이 났다.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벌컥 열리고 시종 하나가 들어오며 소리쳤다.
“아르센 님, 각하께서 다치셨습니다!”
아르센과 에드가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빨리 뛰어갔다.
에드가는 심장이 땅으로 내려앉는 듯했다. 달려가는 내내 두 다리가 자꾸만 멋대로 휘청거렸다.
아르센은 주위를 둘러싼 기사와 하인들을 헤치며 레니에의 곁으로 다가갔다. 에드가도 아르센의 뒤에 바짝 붙어 레니에에게 갔다.
“각하. 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아! 별거 아냐.”
곁에 서 있던 호위 기사 한 명이 대신 말을 이었다.
“시찰 중 갑자기 자객들이 나타났습니다. 세 명인데 각하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급시에 당한 터라 그만….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아니다. 내가 부주의했어. 머리가 복잡해서 그대만 데리고 무작정 나간 내가 잘못이지.”
레니에는 말하면서 흘긋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에드가는 그야말로 참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두들 너무 신경 쓰지 말게. 그래도 한센이 세 명 모두 처리했으니. 난 그저 경미하게 옆구리를 스친 것뿐이야.”
“비껴가서 망정이지 큰일 나실 뻔했습니다. 그놈들은 수에비의 전문 킬러로….”
“그만! 그만둬, 한센.”
레니에가 황급히 한센의 입을 막았으나, 에드가는 이미 모든 것을 알아챘다. 카이스턴 국왕이 보낸 자객이 은발의 레니에를 자신으로 착각하고 달려들었던 모양이다.
참담해진 에드가는 고개를 돌리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레니에는 한센을 노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센은 레니에가 왜 그런 노기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에드가는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자책감과 미안함, 그리고 안도가 뒤섞인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난, 난 결국 그를 다치게 했구나. 여기 있는 게 아니었어.’
챙길 짐이라고는 작은 보따리 달랑 하나였다. 그것을 침대 위에 놓고 책상에 앉았다. 얼굴을 보고 직접 인사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에게 감사의 마음은 전하고 싶었다.
펜과 종이를 꺼내 짧은 작별의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며 펜이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첫 마디, ‘존경하는 각하’를 쓰고 손이 멈추었다.
‘무엇을 쓴단 말인가. 어떻게 쓴단 말인가.’
펜을 쥐고 있는 손이 떨렸다. 마음은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에드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젠 생각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무언지 모를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와중에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에드가!”
별안간 그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급히 뛰어 왔는지 숨을 헐떡이는 레니에가 허리에 붕대를 감은 채로 문에 기대어 있었다.
“각하! 어찌 이런 몸으로 여기까지!”
“간다고?”
레니에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에드가는 몸이 굳어 버렸다.
“네.”
“아직은 이르지 않는가? 아직은.”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를 마주한 에드가는 보일 듯 말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각하, 전 할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더 있으면, 더 있으면… 떠나지 못할 겁니다.”
“에드가.”
레니에는 에드가의 팔을 들어 손을 잡았다. 잡은 손이 땀으로 축축했다.
“에드가. 난, 난 그대를 도와줄 수 있어.”
“각하. 아닙니다. 그 미치광이 카이스턴이 포기하지 않을 텐데, 각하의 곁에서 제가 너무 안이했습니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제 동생과 저를 끝까지 쫓아올 것입니다. 제가 여기 더 있으면 오늘과 같은 일이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그럼 전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각하께서 다치시면….”
“에드가. 아냐. 내가, 내가, 아니 어쩌면 내가….”
‘내가 지켜 줄게. 그런데 어쩌면 내가 그대를 고통스럽게 할지도 몰라.’
무어라 말할까. 레니에는 고민했다.
그를 옆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자신 때문에 그가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 그를 보호하려면 놓아주어야 한다. 이 모순된 상황에 레니에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에드가의 손을 꽈악 잡았다가 놓았다. 동시에 레니에의 심장이 꽈악 쥐었다가 펴졌다. 욱신거리던 아픔이 갑자기 툭 하고 풀려 버렸다.
“그래. 그래, 가야겠지.”
에드가의 떨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둘은 이별을 예감했다.
“말 한 필과 짐을 좀 챙겨 줄 테니 가져가게. 그것마저 사양하지는 말아 줘.”
“…네.”
레니에는 돌아섰다. 에드가는 그의 꺼진 등을 바라보았다.
“그대, 다시 볼 수 있을까?”
“…….”
“건강해. 그리고… 평안하게.”
레니에가 저벅저벅 걸어갔다. 복도를 지나는 그의 뒷모습에 에드가는 무너졌다. 거센 바람이 가슴을 지나쳐 가고 있었다.
그렇게 에드가는 엔카르트에 온 지 한 달 만에 돌아갔다.
레니에는 그가 떠나고 난 뒤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수에비 왕국을 더 빨리 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에드가가 그렇게 찾는 동생을, 어쩌면 자신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났다.
레니에의 준비는 철저했고, 덕분에 사상자 없이 수에비에 입성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카이스턴 국왕의 오랜 실정으로 군사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해 있었기에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사태가 줄을 이었다.
레니에는 누구보다 빨리 수에비 왕국의 본성에 들어왔다. 자신의 옆에 있는 한 마리 검은 야생마 같은 황제가 매의 눈으로 왕과 왕비를 찾았다. 레니에의 행동이 빨라졌다.
그러던 중, 침실에 들어선 병사의 외침이 들렸다.
“폐하! 여기 왕과 왕비의 시체가 있사옵니다.”
레니에의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는 황제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바닥에는 검붉은 선혈이 흩뿌려져 있었고 중년을 훨씬 넘긴 남자와 긴 금발의 여자가 한곳에 쓰러져 있었다. 레니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빨라졌다.
“레니에 경. 이 시체가 왕과 왕비인지 확인토록 해.”
“존명!”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니에가 시체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황제는 시체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레니에를 흘긋 바라보고는 다른 기사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황제가 나간 후 레니에는 찬찬히 시체를 확인했다. 죽은 남자의 시체는 왕이 분명했다.
그러나 여자의 시체를 확인한 레니에는 그녀가 왕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어 쉽게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에드가의 동생일 리가 없었다.
귀족 가문의 자제로 태어나 왕비가 되었다면 고된 육체노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체의 손발은 오랜 노동으로 투박해진 모양새였고, 특히 가사노동에 시달린 흔적이 보였다.
레니에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안도했다. 왕비가 어디론가 달아났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는 병사를 시켜 왕비의 전속 시녀들을 대령하라고 명령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시녀들이 차례차례 들어왔다. 시체를 확인한 그들은 하나같이 흠칫 놀랐다.
얼굴이 상한 시체는 사실 신원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들은 꿀처럼 흐르는 긴 금발만 보고 왕비가 맞다고 말했다. 그중에는 소니아도 있었다.
그의 직감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증언과 정황 증거를 볼 때 이 시체는 왕과 왕비가 확실했다. 그는 조사를 조용히 마무리하고 이 시체를 성문에 걸라고 명령했다.
‘아델라이드 왕비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사람들의 말처럼 그리 아름다웠다면 반드시 사람들 눈에 띌 터인데.’
레니에는 수에비의 포로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미처 멀리 가지 못하고 이 속에 숨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색대는 한나절 동안 특별한 이를 찾지 못했다고 전했다. 결국 그는 별다른 소득 없이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에는 클리터스 대대장이 와 있었다. 수에비 궁에서 일했던 시종장의 심부름꾼을 데리고 왔다고 했다. 그 녀석이 아슬란어와 마이스터로어, 라스문어를 할 줄 안다며 한번 보겠냐고 물었다.
레니에는 시종 녀석들 중 그런 능력의 소유자가 있다는 것이 우스웠다. 살기 위해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자를 데려오라고 했다.
잠시 후 막사의 휘장이 젖혀지고 하얗고 단정한 미소년이 들어왔다.
순간 누군가가 레니에의 심장을 쥐었다가 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레니에는 들어온 이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곧 단아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