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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자각 (12/39)

제11장. 자각

황제는 종일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침 식사 시간 때 잠깐 본 것 외에는 도통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식사도 무척 조용하고 짧게 끝낸 탓에 황제의 기분이 어떤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아델라이드는 레니에의 막사를 다녀오는 길에 시냇가에 들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큰 참나무에 가 보니, 길게 아래로 처져 있는 가지에 아델라이드가 소니아에게 준 손수건이 묶여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곤 손수건을 풀어서 옷 주머니에 넣었다.

황제는 저녁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서 황제의 근위병이 아델라이드에게 왔다. 그는 황제 폐하가 오늘 밤은 밖에서 주무시니 그런 줄 알라며 한마디 하고 사라졌다.

또 무슨 큰일이 난 건가 하는 생각에 밖으로 나와 다른 막사들을 살펴보았지만 무언가 이상한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군사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막사로 돌아오던 클리터스가 아델라이드를 발견했다.

클리터스는 전투 훈련 후 처음 보는 아델라이드에게 반갑게 달려갔다. 그를 본 아델라이드가 공손히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클리터스 대대장님.”

“에드가!”

“폐하께서는 지금 안 계십니다.”

“아, 아니 폐하를 뵈러 온 게 아니라 그냥….”

호신술 수업 이후 처음 만난 것이어서 그런지 클리터스는 아델라이드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호신술을 가르쳐 주면서 조금 가까워지나 싶었는데 황제의 불편한 기색 때문에 계속되지 못했고 그 후로는 특별한 접점도, 만남도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어색하게 서 있는데 에드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대대장님. 혹시 오늘 밤 무슨 야외 훈련이나 시찰이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없다.”

“아… 그렇군요.”

아델라이드는 말을 해도 되나 싶어 잠깐 고민하다가 근위병이 기밀이라는 당부 없이 한 이야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비밀은 아닐 것 같아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오늘 밤 밖에서 주무신다고 기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혹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해서 여쭤봤습니다.”

“밖에서?”

“네. 근위병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음…. 진영 주변을 살펴보시거나 다른 일이 있으시겠지. 굳이 알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알리지 않으신 거 같다.”

“그렇군요….”

“거, 걱정되느냐?”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냥 오늘 종일 뵙지 못해서요.”

“폐하는 전혀 걱정할 것 없다. 그분은 혼자서 사단 두어 개는 씹어 드실 분이니.”

클리터스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황제라면 정말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델라이드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오늘 너 혼자 자겠구나.”

“네? 아, 네.”

“걱정은 네가 해야지. 폐하의 막사라 하더라도 너 혼자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위험할 수 있으니 단속 잘하고 자거라.”

황제의 막사 앞뒤로 근위병들이 각각 둘씩이나 있었다. 그런 곳에서 이렇게 여염집 문단속 하라는 듯 말하는 클리터스를 아델라이드는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을 클리터스도 느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색한 나머지 그는 괜히 몇 마디를 덧붙였다.

“아무튼 매사 조심하는 게 좋잖아. 그러니 새겨들어라.”

‘바보 같은 놈. 이게 무슨 얘기냐.’

클리터스는 말을 뱉으면 뱉을수록 바보 같은 말만 하는 자신을 아주 죽이고 싶었다. 추태를 그만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잘 자라는 인사만 덜렁 해 버리곤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그렇지만 자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아델라이드는 몸을 돌려 쌩하니 가 버리는 클리터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인사했던 마지막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보고 있었다.

* * *

칠흑 같은 밤, 작은 오두막집에서 나오는 불빛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 앞에는 그림 같은 두 남자가 말을 타고 서 있었다.

“수소문해서 겨우 찾았습니다.”

“…….”

“마음에 차셨으면 합니다.”

“시끄럽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레니에를 향해 베르톨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제 됐으니 가 봐!”

“알겠습니다.”

“쉐도우.”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땅으로 내려왔다. 그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굽혔다.

“네. 폐하.”

“떨어져 있어.”

황제가 떨어져 있으라고 할 때는 극히 드물었다. 그것이 어떠한 경우들인지 알고 있는 쉐도우는 오늘이 그 몇 안 되는 경우 중 하나일 거라고 짐작하고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레니에도 베르톨트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더니 말을 돌렸다.

‘폐하.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으실 것 같으니.’

돌아서는 레니에의 얼굴에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음이 걸려 있었다.

베르톨트는 오두막집의 문을 조용히 열었다. 내부는 거실과 침실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한쪽에는 침대가 있었고, 그 위에 후드가 달린 검은 로브를 둘러쓴 사람이 베르톨트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베르톨트는 입고 온 로브를 벗어 중앙에 있는 테이블 앞 의자에 걸쳐 놓았다.

“나를 보아라.”

베르톨트의 듣기 좋은 저음이 공간을 울렸다. 등지고 있던 자가 서서히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동시에 후드를 벗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척 앳되어 보이는 외모의 남자였다. 에드가처럼 갈색 머리에 암갈색 눈동자,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난히 입술이 붉었다. 그 붉은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오늘 주인님을 모시게 된 룰루라고 합니다.”

베르톨트는 심사가 뒤틀렸다. 에드가와 외모가 비슷한 녀석을 찾으려 한 것이 역력했지만 에드가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에드가가 단정하고 우아하다면, 지금 앞에 있는 자는 나른하면서 색정적이었다.

룰루라고 한 자가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베르톨트에게 천천히 걸어와 그의 바로 앞에 섰다. 그러곤 베르톨트의 한 손을 살며시 잡았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은밀한 곳으로 저를 부르셔서 매우 귀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리 잘생기기까지 하시니 오늘 무척 기대가 되네요.”

룰루는 교태 어린 웃음을 흘렸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베르톨트를 볼 때부터 설레었다.

살롱을 통해 갑작스럽게 의뢰를 받았을 때는 내키지 않았었다. 그러나 보수가 워낙 좋아 그냥 눈 한번 꼭 감고 어떤 귀족 나부랭이 변태 자식이라 하더라도 견디어 보자는 심산으로 이곳에 왔다. 살롱 마담이 워낙 부추기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는 지금까지 룰루가 접한 적 없는 기막힌 외모의 소유자였다.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는 자신의 감각을 찌릿하게 울릴 정도로 멋있었다.

베르톨트는 룰루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앉았다. 그는 아무 감정 없는 눈빛으로 그저 룰루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룰루는 베르톨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자신의 아래에 깔린 남자의 탄탄한 몸이 느껴져 룰루의 눈이 절로 반짝였다.

‘하아…. 이 남자, 몸 끝내주네.’

곧이어 룰루는 자신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마지막 단추까지 풀어내자 유려한 손동작으로 셔츠를 벗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룰루의 상체는 얼굴과 같이 뽀얗고 고왔다. 여리면서도 음심을 자극하도록 잘 가꿔진 몸에 찬사를 보내는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연히 룰루는 자신했다. 지금 자신이 타고 있는 이 남자도 자신을 열렬히 원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룰루는 베르톨트의 두 손을 살며시 들어 자신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베르톨트의 손을 입으로 가져가 중지 끝을 살짝 혀로 핥자 베르톨트의 두꺼운 눈썹이 움찔하더니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흐음…. 이래도 꿈쩍하지 않으시겠다? 얼마나 버티시려고.’

룰루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좀처럼 변화가 없는 남자의 표정이 그의 승부욕에 불을 질렀다.

그래서 그랬다.

룰루는 갑자기 적극적으로 돌변했다. 베르톨트의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댄 것이었다.

순간 베르톨트의 눈이 커지더니, 룰루를 거칠게 밀쳐 냈다.

베르톨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룰루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쿵!

생각지도 못한 일에 룰루는 엉덩이를 만지며 상을 찌푸릴 대로 찌푸렸다. 엉덩이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런 룰루를 앞에 두고 베르톨트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말없이 의자로 저벅저벅 걸어간 그는 로브를 손에 들었다.

“아니, 대체 왜 그러십니까? 제가,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등 뒤에서 룰루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르톨트는 뒤돌아 룰루를 보았다.

“네가 잘못한 것은 없어. 다 내가 미련한 탓이다.”

“그게 무슨…?”

베르톨트가 짙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간이 있는 대로 찡그러졌다.

“그만 돌아가겠다.”

베르톨트는 오두막 문을 거칠게 열고 나왔다. 밤공기가 싸늘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에 올라탔다.

달리는 말 위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조 섞인 웃음을 뱉었다. 자신이 어찌 이리 못나고 어리석은지 몰랐다.

룰루라는 남자의 얼굴을 봤을 때부터 오두막 문을 박차고 나올 때까지, 모든 것을 에드가와 비교하고 있었다. 손가락의 움직임, 눈빛, 목소리, 미소, 피부는 물론이거니와 체향과 주위의 공기까지 온통 에드가와 견주어 보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은 에드가 생각을 지우려고 여기까지 와 놓고는 쉴 새 없이 에드가만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은 에드가가 아닌 다른 남자는 체향은커녕 향수 냄새조차도 맡기가 싫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불편했다. 딱히 접촉을 하지 않아도 이런 느낌인데 안는 것은 불가능했다.

베르톨트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은 남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에드가를 원하는 것이었다. 녀석이 여자든 남자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냥 에드가를 원하는 것이었다.

녀석의 동그란 뒤통수가 귀엽게 보이는 것도, 수려한 눈썹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팔랑이는 긴 속눈썹 때문에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도, 오뚝한 콧날에 키스하고 싶은 것도, 꽃잎 같은 입술을 베어 물고 싶은 것도,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싶은 것도, 작은 미소 하나에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것도,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은 것도,

모두 자신이 그 녀석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녀석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 내가 녀석을 좋아… 난 녀석을 좋아… 좋아한다…!’

머릿속에 자욱했던 연기가 사라져 갔다.

달려가는 내내 베르톨트의 얼굴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진영까지 절반쯤 달렸을 무렵 그를 기다리고 있는 말 탄 남자가 길목에 있었다. 친우 레니에였다.

베르톨트는 말을 잠깐 세우고는 레니에를 쏘아보았다.

“알고 있었지?”

“무엇을 말입니까?”

“…얍삽한 놈!”

그의 웃는 얼굴을 잡아 뜯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여유로운 저 태도가 베르톨트의 심사를 삐딱하게 했다.

“생각보다 빨리 나오셨습니다.”

“놀리지 마라. 들어서서 그자의 얼굴을 본 순간 깨달았다.”

베르톨트가 한숨을 쉬며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런 친우의 모습을 레니에는 가만히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가시죠, 폐하.”

베르톨트도 잠시 레니에를 마주 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웃어 본 지가 얼마 만인지 몰랐다.

빈정거리는 듯하지만 항상 너그럽게 자신을 대해 주는 레니에가 고마웠다. 함께한 시간만큼이나 쌓여 있는 서로에 대한 마음이 조금 더 각별해지는 것 같았다.

“이럇!”

밤공기를 가르며 황제가 말을 재촉했다.

* * *

시간은 어느덧 10시가 다 되어 갔다. 아델라이드는 막사를 나와 시냇가로 향했다.

시냇가를 가는 것까지야 남들한테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지만 소니아와 만나는 것은 조심해야 했다. 어느 누구도 소니아를 알아봐서는 안 되었다. 혹시라도 소니아와 아델라이드를 연관 지어 아델라이드의 정체를 의심하는 자가 있으면 곤란해질 테니 말이다.

아델라이드는 항아리 바위 근처에 도착한 다음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소니아를 기다렸다. 잠시 후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소니아.”

아델라이드가 자그맣게 소니아를 불렀다. 그 작은 소리를 민감하게 캐치한 소니아가 반가운 얼굴을 하고는 아델라이드에게 달려왔다.

둘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아델라이드.”

“오는 길에 누가 따라오진 않았지?”

“응. 난 잠시 바람 좀 쐬고 온다고 하고 나왔어.”

“그래, 잘했어. 그 두 사람 어때?”

“그게 말이지. 두 사람이 여기 정보를 어딘가로 넘기는 것 같아.”

“정보를 넘긴다고?”

“둘이서 어젯밤 슬며시 나가길래 뒤쫓아 갔었어. 그런데 어디선가 새가 날아오는 거야. 그 새의 발에 무언가를 묶어서 날려 보내더라고.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그건 여기 정보를 누군가에게 보내는 모습이었어.”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해 봤다. 지금까지 파악된 사실은 네 가지였다.

두 남자는 누군가에게 고용된 용병이다.

둘은 마력석을 이용해 여자로 위장해 있다.

둘은 세르비아 제국군과 관련된 정보를 넘기고 있다.

방법은 새를 이용한다.

또한 추측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아마 둘은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 날까 봐 그 세르비아 병사를 죽였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다. 다만 우연찮게 듣게 되었을 뿐이다.

‘사실을 말하면 믿어 줄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게다가 증거도 없는데 무턱대고 말했다가 그 용병들이 아니라고 하면 끝이었다.

그렇다면 용병들의 정체를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새를 잡아 증거를 확보하든가, 밀지를 보내는 현장을 잡든가, 마력석을 이용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든가, 무력을 사용하여 그들의 입으로 실토를 하게 하든가 해야 하는데, 이 중에서 사실상 아델라이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용하는 마력석을 훔쳐서 위장 마력을 풀자니, 그 방법을 어떻게 알았는지부터 털어 놓아야 한다.

그러면 그들을 지켜본 소니아의 존재도 당연히 말해야 할 테고, 그랬다가 소니아가 왕비의 시녀였다는 것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위장 마력석의 존재와 연관 지어 당장 아델라이드의 정체를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아…. 아직은 너무 위험하다.’

아델라이드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이대로 그 용병들을 소니아보고 계속 감시하라고 하자니 소니아가 너무 위험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접을 수는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들이 무언가 빌미를 주어야 한다.

“소니아. 미안한데 조금 더 그들을 지켜봐 줘. 그리고 이상한 점이 있으면 오늘처럼 이렇게 신호를 줘.”

“나는 괜찮은데, 아델 네가 괜찮을까?”

아델.

아델라이드는 매우 오랜만이었다. 아델이라는 애칭을 듣는 것이.

그녀는 소니아의 뺨을 한 손으로 어루만졌다.

“듣기 좋구나. 아델이라….”

소니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소니아. 왜 또 울어.”

“흑. 아니, 그냥. 그냥, 아델….”

아델라이드는 소니아를 꼬옥 안아 주었다.

“우리 조금만 참자. 이 세르비아 군대에서 조금만 참으면 우리가 벗어날 길이 생길 거야. 그럼 그때 같이 살자.”

“흑, 흑. 그래. 알았어.”

소니아는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한때 백작가의 영애였고 왕비였는데 지금은 노예의 신분이니, 아델라이드가 누구보다 암담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담담하게 이끌어 주는 아델라이드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소니아. 난 왕비일 때보다 지금이 더 좋아. 지금은 하늘을 볼 수 있고 책도 읽을 수 있어. 그리고 너를 만날 수도 있잖아. 그러니 자꾸 울지 마. 알았지?”

“…응.”

소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아델라이드는 소니아를 꼭 안아 주면서 소니아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그놈들 조심해야 해. 너무 뒤쫓아 가면 안 돼.”

소니아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이드는 소니아의 등을 몇 번 더 토닥이더니 한 손을 잡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그녀들은 중간쯤에서 헤어졌다.

아델라이드는 멀어지는 소니아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한쪽 다리를 저는 소니아를 보면 가슴 밑바닥이 물에 잠기는 것 같았다. 보는 사람조차 아플 만큼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과 비통함, 애틋함이 가득 뒤섞여 있었다.

“에드가.”

잠시 멍하니 어둠 속에 서 있던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이름이면서도 자신의 이름이 아닌 그 이름을 듣고 새삼스레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소리 난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황제와 레니에가 서 있었다.

황제의 시선이 서늘하다 못해 무서웠다.

‘너…. 그 표정은 뭐지? 저 여자를 보면서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 그런 표정은….’

베르톨트는 그다음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녀석의 시선 끝에는 여자로 보이는 누군가가 있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인영을 보는 에드가의 표정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지독히도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아픔이 맺혀 있었다.

에드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깊은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 무심한 녀석이 말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레니에가 말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죠?”

“…친구를 배웅했습니다.”

“친구요?”

아델라이드는 순간 거짓말을 둘러댈까 생각했다. 그러나 잘못하면 더 의심받을 것 같아 소니아의 존재를 감추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의연하게만 행동하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네. 수에비 궁에서 유일하게 저와 친하게 지낸 시녀였습니다.”

“…그렇군요.”

베르톨트는 에드가가 얼마 전 가장 친한 친구가 그 시녀였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 냈다. 녀석은 그 시녀와 서로를 이성으로 생각하는 사이는 아니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녀석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었지?’

그는 녀석의 얼굴에서 무엇이라도 잡아내겠다는 듯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빛은 집요하고 또 집요했다.

황제의 강렬한 눈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던 아델라이드는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지그시 깨문 베르톨트는 그녀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아델라이드는 깜짝 놀라 황제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레니에. 자라!”

“들어가십시오, 폐하.”

베르톨트는 레니에에게 인사도 아니고 명령도 아닌 짧은 말을 남기더니 곧장 아델라이드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리고 자신의 막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델라이드는 잡힌 손목이 아팠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제가 무언가에 화가 나 있는 것 같아 그저 그의 큰 보폭에 맞추려 애를 썼다.

‘무엇 때문에 이리 화가 난 거지? 설마 나 때문은 아닐 거고. 밖에서 자고 온다더니 지금 돌아온 것도 그렇고, 혹시 일이 잘 안 되었나?’

황제에게 손목을 붙들린 채 가면서도 아델라이드는 황제가 무엇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지 침착하게 생각하려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전언을 들었는데 의외로 일찍 돌아왔다. 그것으로 미루어 황제의 일이 무언가 틀어졌을 거라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지?’

베르톨트는 막사에 들어와서야 아델라이드의 손목을 놓았다. 잡은 자리가 붉게 올라와 있었다.

아까는 자신도 모르게 녀석을 잡아끌었지만 이렇게 붉은 자국이 난 것을 보니 너무 세게 잡은 것 같아 미안해졌다.

베르톨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의 시선이 아델라이드의 손목에 머물렀다.

“괘, 괜찮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곧 괜찮아집니다.”

아델라이드는 손목을 뒤로 감추며 급히 말을 이었다. 잡힌 건 자신인데 잡은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으니 당황스러웠다.

그는 잠시 그렇게 아델라이드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로브를 벗었다. 아델라이드는 바로 그의 옆으로 가 로브를 받아 들었다. 순간 베르톨트가 멈칫거렸다.

“폐하, 씻을 물을 준비할까요?”

황제의 얼굴을 보았으나 표정이 없어 의중을 조금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때 황제가 고개를 숙여 아델라이드를 마주 보았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갑자기 눈을 맞추는 바람에 아델라이드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 뭐야. 갑자기.’

베르톨트의 멋들어진 입술 끝이 미세하게 올라가더니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드가. 목욕을 하고 싶은데.”

“모, 목, 목욕이요?”

“그래, 목욕. 네가 목욕하라고 물을 가득 받아 놓지 않았더냐.”

“그, 그랬죠.”

아델라이드의 얼굴은 붉다 못해 완전히 홍당무가 되어 버렸다. 그런 그녀를 보는 황제의 나른한 얼굴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슬쩍 드러났다.

“그럼 준비해.”

베르톨트는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그의 탄탄하면서도 긴 다리가 돋보였다.

아델라이드는 왔다 갔다 하면서 수조통에 있는 물을 욕조로 옮겼다. 물 이동 장치가 있었으므로 힘이 들진 않았다.

“물을 데울까요?”

“아니. 난 열이 많으니 괜찮다.”

고개를 끄덕인 아델라이드는 목욕 용품을 욕조의 머리맡에 나란하게 줄지어 놓고 잠시 후 욕조 안에 물이 가득 차자 손을 넣어 온도를 확인했다. 아무리 데우지 않는다 해도 너무 차면 감기가 걸릴까 봐 염려되었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향유를 넣을까요?”

“응. 조금.”

아델라이드는 늘어서 있는 향유병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향유는 시트러스의 상큼함과 우드의 묵직함이 잘 조화된 향을 내었다.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에게 어울리는 것이긴 했지만 궁에 있을 때 자신도 이 향을 좋아했었다.

조금 멀찍이 앉아 있던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가 고른 향유병을 바라보았다. 귀띔도 하지 않았는데 정확히 지금 자신이 원하는 향을 골라냈다.

‘안목 있군.’

아델라이드는 목욕물에 향유를 떨어뜨린 후, 수건을 가져와 욕조 옆의 걸이에 걸었다.

“폐하. 다 되었습니다. 그럼, 저는 나가… 있을까요?”

“왜?”

“그, 그야 편하게 목욕하시려면.”

“넌 나의 시중 노예다. 그러니 네가 당연히 나의 목욕 시중을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델라이드의 낯빛이 새하얘지더니 고개가 떨어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황제의 말이 옳았다. 어느 시중 노예가 황제의 목욕 시중을 들지 않고 혼자 목욕하게 내버려 두고 나간단 말인가.

“그, 그렇죠. 제가 시중을 들어야죠.”

황제가 일어나서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아델라이드는 여전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베르톨트는 일부러 느릿하게 옷을 벗었다. 웃옷을 벗고 연달아 아래옷까지 벗고 나니 그야말로 나체가 되었다.

그때까지도 아델라이드는 계속 고개를 떨어뜨린 채 황제의 발치만 보고 있었다.

‘음. 고개를 들지 않겠다…?’

베르톨트는 피식 웃음이 났다. 남자끼리 무엇이 부끄럽다고 저러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했다.

욕조 안에 몸을 담그자 대번에 나른해졌다. 몸을 비스듬하게 누이자 욕조 끝에 발이 닿았다.

전장이라 조그만 간이 욕조를 설치한 탓이었다. 베르톨트의 장신을 감당하려면 그 크기가 만만치 않아야 했다. 베르톨트는 몸을 한 번 쭈욱 펴고는 양팔을 욕조 밖으로 꺼내어 늘어뜨렸다.

“후우…, 좋군.”

피로가 풀리는 상쾌한 기분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기분 좋은 탄성을 흘렸다. 그는 고개를 조금 돌려 약간 뒤로 물러나 있는 아델라이드를 보았다.

아델라이드는 계속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물소리가 첨벙 난 것으로 보아 황제는 욕조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황제의 몸을 씻겨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저 머릿속만 윙윙거렸다.

그때 베르톨트가 손가락 튕기는 소리를 내 아델라이드를 불렀다. 아델라이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심하게 잘생긴 얼굴이 촉촉하게 물기에 젖은 채 빙긋이 웃고 있었다.

‘무, 무슨 사람이 저렇게 생겼담.’

“에드가. 이제 씻겨 줘야 하지 않을까?”

베르톨트의 두툼하면서 붉은 입술이 보기 좋게 호선을 그렸다. 그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델라이드는 지나치게 아찔한 느낌에 순간적으로 훕! 하고 숨을 들이켰다.

잠시 주춤거리던 그녀가 욕조 가까이 다가왔다.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리고 욕조 옆에 놓인 거품 타월을 집어 들었다.

“폐, 폐하. 제가 누군가를 목욕시켜 드린 적이 없어… 처음이라… 서툴 겁니다. 불편하시면… 그만둘 테니 말씀하십시오.”

“걱정 마라. 그럴 일 없을 테니.”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대답을 듣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입 안에서 뜻 모를 소리가 웅얼거렸다. 베르톨트는 미소를 감추느라 입가가 실룩거렸다.

아델라이드는 거품 타월을 욕조 안으로 넣어 물을 적시고 목욕제를 뿌려 거품을 내었다. 거품이라도 발라야 신체의 무엇이든 덜 보일 것 같았다. 정말 머리가 아파 왔다.

우선 욕조 밖으로 늘어진 팔을 닦았다. 손가락부터 손등, 팔, 어깨까지 정성스럽고 부드럽게 닦아 올라갔다.

기분 좋은 손길에 황제가 나지막이 신음을 흘리자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베르톨트는 그 떨림을 감지하고 있었다.

아델라이드가 양팔을 다 닦아 내자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황제는 팔뿐만 아니라 등에도 근육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가슴과 등 곳곳에 흉터가 보였다.

등을 문지르던 아델라이드는 유난히 길게 나 있는 흉터 부근에서 손을 멈췄다.

“카프카에서 보낸 첩자에게 맞은 칼자국이다.”

황제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잠겨 있었다. 황제가 아델라이드 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의 넓은 가슴이 아델라이드의 눈앞에 보였다. 아델라이드는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웠던 건 그 아래 나 있는 흉터 자국이었다. 왼쪽 옆구리에서 배로 이어지는 흉터가 제법 길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베르톨트는 대수롭지 않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건 안달루스 제국의 제1검객이 안겨 준 거지. 검술에 미숙하던 어릴 때라 상처가 좀 컸어.”

아델라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그 상처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어린 피부에 이런 상처가 났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손길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그 검객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 자리에서 죽었지…. 내가 죽였어.”

그 검객은 베르톨트의 검술 스승이었다. 스승이었던 자는 안달루스 제국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 자신의 제자를 죽이려 했다. 검술의 천재였던 베르톨트가 한창 일취월장하고 있던 때였다.

그는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승을 이겼다.

그 이후로 베르톨트는 누군가를 완전히 신뢰하거나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스스로 금하였다. 누구나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운 셈이었다.

잠시 옛 생각에 취해 한동안 눈을 감고 있는 베르톨트가 느른하게 두 눈을 떴다.

“에드가.”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에 이끌려 아델라이드는 멍하게 베르톨트를 바라보았다.

강렬하면서도 그윽한 눈빛이 그녀의 얼굴 곳곳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시선으로 키스를 퍼붓고 있는 듯했다.

“닦아 줘.”

아델라이드는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베르톨트의 단단한 가슴이 있었다.

방금 전보다 손끝이 더 떨려 왔지만 겨우겨우 떨림을 억누르고 거품 타월을 그의 가슴에 문질렀다. 시선을 아래에 둘 수조차 없을 정도로 얼어붙은 나머지, 그저 탄탄하기 그지없는 이 가슴팍만을 쳐다봤다.

어찌나 눈을 부릅떴는지 흡사 노려보는 모양새였다. 그녀의 얼굴은 붉다 못해 터지기 일보 직전의 토마토가 되어 귀까지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베르톨트의 눈에는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뻐 보였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녀석의 빨갛게 물든 귀를 만져 보았다.

“히익!”

아델라이드는 너무 놀란 나머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몸을 뺐다. 갈 곳을 잃은 손을 거둔 베르톨트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에드가. 이래서 어찌 목욕 시중을 들겠어.”

“죄, 죄송합니다.”

아델라이드는 잔뜩 붉어진 얼굴을 아래로 푹 수그렸다. 거품 타월을 들고 있는 손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베르톨트는 피식 웃음이 났다. 에드가는 마음이 순수한 건지 몸가짐이 단정한 건지, 반응이 남달랐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지만. 녀석의 반응은 자꾸만 자신의 마음에 불을 당겼다.

‘다시 키스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몸에 손을 댄다면 놀라 도망갈까?’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어 다행이었지만 베르톨트의 분신은 아까부터 일어날 대로 일어나 있는 상태였다. 에드가의 손길이 닿을 때부터 아랫배가 팽팽하게 당긴 터라 이제는 아플 지경이었다.

“에드가.”

“…예, 폐하.”

“고개 들어 나를 봐.”

황명이라 거역할 수가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황제의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떨어져 있고 그 끝으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그 사이로 그 검푸른 눈동자가 뚫어질 듯이 자신을 꿰뚫고 있었다. 온몸이 저릿했다.

“선택해. 씻겨 줄 거야? 아니면….”

“아니…면?”

올가미에 걸린 양 그저 그가 하는 말을 따라했다. 그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키스할래?”

“…….”

입을 벌려 그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려다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리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무릎을 꿇고 욕조를 잡은 손끝이 떨려 왔다. 마음속으로는 어떻게든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고, 도망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몸은 꼼짝할 수 없었다.

뜨거운 베르톨트의 손이 그녀의 뒷목을 살짝 잡더니 상체를 일으킨 그의 입술이 아델라이드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불에 덴 듯 뜨거운 입술이었다.

그의 혀가 입술을 한 번 핥아 올리고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는 바람에 입술이 열리자 그 틈으로 부드럽게 그의 두툼한 혀가 밀고 들어왔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원래부터 연인이었던 사이의 행위 같았다.

키스 경험이 없는 아델라이드일지라도 황제가 키스를 얼마나 잘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숨이 부족해 몸을 비틀라치면 믿을 수 없이 부드럽게 변했다.

질척이며 뜨거운 숨을 불어넣어 주면서 입술을 빨아 올리다 슬쩍 깨물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델라이드가 조금 여유가 생겨 생각이라는 것이 들라치면 다시 거칠게 달려들었다.

그러길 몇 번째, 키스만으로도 뇌가 녹아 녹진해지려 했다. 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싶을 때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황제의 깊은 검푸른 눈동자가 잔뜩 열기를 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의 입맞춤으로 부어 오른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살며시 쓸며 그가 입을 열었다.

“…위험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에 긍정이라도 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그가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붉게 피어올랐다.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 잘 준비를 하자꾸나.”

베르톨트는 그녀의 코끝에 살짝 입 맞추고는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빼앗아 들었다. 아델라이드는 그의 몸이 보일 것 같아 재빨리 일어나 침상 쪽으로 움직였다.

사실 베르톨트는 일어날 형편이 아니었다. 에드가와의 입맞춤으로 흥분할 대로 흥분한 아랫도리를 보일 수가 없어 녀석에게 타월을 빼앗아 들고 자신이 마저 씻겠다고 한 것이었다.

아까는 녀석을 그대로 욕조 안으로 잡아끌어 몸을 겹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멈출 수 있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자 녀석에게 닿고 싶어 안달하는 스스로가 몹시 우습기도 하고 당황스러웠다.

베르톨트가 씻는 동안 아델라이드는 그의 침대를 정리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녀는 순간 머리가 띵 울리는 느낌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저 사람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직 감기 기운이 있나?’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어째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 같았다. 황제 때문에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는데, 그렇게 마음이 어수선했던 것이 몸 상태에 영향을 준 걸까. 침대로 어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도 꾹 참고 침의를 꺼내기 위해 서랍을 연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휘청거리는 느낌에 쓰러질까 싶어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나타나 아델라이드의 허리를 휘감았다.

이제 막 씻고 나온 베르톨트였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베르톨트의 검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폐, 폐하.”

“미안해, 에드가. 아직 성치 않은 몸인데 내가 괜히 목욕 시중을 부탁했구나.”

“아닙니다. 당연히 시중 노예인 제가 해야 하는 일인걸요.”

“시중 노예….”

베르톨트는 시중 노예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널 어찌 시중 노예로 대하겠느냐. 내 마음을 알아 버렸는데.’

한숨 섞인 웃음을 흘린 그는 자신의 침대 위에 아델라이드를 내려놓았다. 아델라이드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완쾌되지 않았잖아. 그러니 오늘은 내 침대에서 자거라.”

“아닙니다, 폐하. 전 괜찮아요.”

아델라이드는 다급히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녀의 어깨를 베르톨트가 부드럽게 눌렀다. 예상외로 강한 힘에 그녀는 도로 침대 위에 눕게 되었다.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괜찮지 않아.”

그는 침대 위 작은 등만 빼고 막사 안의 모든 등을 껐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아델라이드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할 때마다 어찌 알았는지 베르톨트가 휙 돌아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정지 화면같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침대로 돌아온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에게 갈아입으라며 자신의 침의를 던져 주었다.

“폐하. 이건 제 것이 아닙니다.”

“알아. 내 것이 더 좋으니 이것을 입어.”

“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거듭 손사래를 치는 아델라이드를 보는 베르톨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그렇게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괜찮다는 말 좀 안 할 수 없나? 넌 하나밖에 없는 나의 시중 노예이자 나의 사람인데 지금 몸이 아파. 그러니 네가 좀 더 편한 침대에서, 좀 더 편한 옷을 입고 편하게 쉬었으면 한다. 그게 그렇게 힘든가?”

베르톨트의 날카로운 어조에 기가 죽은 아델라이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하아…. 전 편하지 않아요. 불편해 숨도 쉬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속마음과 다르게 순순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황제의 침의를 뒤집어썼다. 입고 있던 셔츠와 조끼, 바지는 벗은 다음 단정하게 개어 침대 한구석에 밀어 두었다.

그의 침의를 자신이 입으니 너무 커서 우스꽝스러워 보인다고 아델라이드는 생각했지만, 베르톨트가 보기엔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아델라이드가 이불 속에 쏙 들어가자 베르톨트는 허리에 두른 수건을 벗더니 가운을 걸쳤다. 그리고 그대로 이불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이 사람 미쳤나 봐. 누가 남자 노예와 이런 차림으로 한 이불 속에 있어.’

아델라이드는 다시 몸이 떨려 와 그에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순간 황제가 게이라는 것이 실감되었다. 그는 자신을 시침 노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폐하. 전… 시침 노예가 아닙니다.”

아델라이드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물거렸다. 그러자 황제가 그녀의 몸에 팔을 감고 그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맞닿은 그의 따뜻한 체온이 등에서부터 느껴졌다.

“안다. 걱정하지 마라. 잡아먹지 않을 테니.”

그의 말에 어쩐지 웃음이 묻어났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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