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장. 혼란 (10/39)

제9장. 혼란

막사 주변을 정리하던 아델라이드는 다가오는 클리터스 부니에를 보고 허리를 폈다. 자신을 보는 클리터스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폐하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순간 아델라이드는 깜짝 놀라 두 눈을 깜빡였다. 클리터스를 보면서 황제를 떠올리다니, 어제 일이 충격이긴 한 모양이었다.

‘미쳤어.’

클리터스는 아델라이드의 바로 코앞까지 온 후 입을 열었다.

“에드가, 무얼 하고 있지?”

“아, 네. 막사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어요. 비가 올 것 같아서요.”

“음, 그래. 날이 좀 흐리긴 하지.”

하늘을 한 번 봤다가 아델라이드를 한 번 봤다가, 그러나 떠나지는 않고 머뭇머뭇하는 모양새가 어쩐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아델라이드는 그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생각해 봤는데…. 그런 험한 사건도 있었고 해서 말이야. 에드가, 나한테 검술을 배우지 않을래?”

“검술이요?”

“간단하게라도 단검술이나 호신술을 가르쳐 주고 싶어. 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대대장님이 직접 가르쳐 주시려고요?”

클리터스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이드는 한 부대를 이끄는 그가 그럴 시간이 있나 싶어 의아했다.

“시간이 되시나요? 저도 배우고는 싶은데….”

“어제 일 때문에 일정이 연기되어서 시간이 나.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꼭 필요한 기술만 뽑아 속성으로 알려 줄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도록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클리터스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제국군의 시체를 발견한 사건은 아델라이드의 귀에도 들어왔다. 같은 편 병사가 지척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한 일은 진영을 뒤숭숭하게 했고 그녀 역시 간담이 서늘했다. 그러니 비록 노예의 처지라 하더라도 간단한 호신술 정도는 배워 두어서 나쁠 게 없었다.

“당분간은 매일 해야 하니까 시간을 정했으면 해. 그래야 나도 일정을 정할 수 있으니까. 에드가 넌 언제가 괜찮지? 난 오후 3시부터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 괜찮아.”

“아, 전 대대장님 시간에 맞출게요. 폐하께서 특별히 지시하시는 게 없다면요.”

“그래. 그럼, 오후 4시부터 5시까지 매일 한 시간씩 훈련받도록 하자.”

“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당장 시작할까?”

“지금요?”

“곧 4시잖아. 오늘은 좀 일찍 시작하자고.”

“네.”

그길로 아델라이드는 클리터스를 따라 막사 사이 제법 큰 공터에 다다랐다.

전혀 생각 못 한 일이라 당황스럽긴 했지만, 아델라이드는 외국어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든 배우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이것 역시 그녀에겐 기꺼운 일이었다. 몸을 쓰는 일 중에서 춤추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 잘 배우지 않았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뭐든 재미있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클리터스의 진지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그의 앞에 섰다.

“자! 일단 누군가에게 붙잡혔을 때 빠져나오는 방법을 가르쳐 줄게. 먼저 이렇게 뒤에서 손목을 잡혔을 때는 말이지.”

그 말과 동시에 클리터스는 아델라이드의 등 뒤로 가서 그녀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순간적인 아픔에 아델라이드가 흡, 하고 숨을 들이쉬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클리터스의 태도가 어찌나 열정적인지 그녀는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에게 집중했다.

“일단 상대방과 너무 밀착되어 있다면 한 발 떨어져서 약간의 간격을 만들어야 해. 자, 앞으로 한 발 나가 봐.”

손목이 잡힌 채 아델라이드가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팔이 꺾인 반대 방향으로 빨리 회전해.”

처음 해 보는 동작에 그녀가 우왕좌왕하자 클리터스가 아델라이드의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자! 이럴 때는 주먹을 날려도 되고 이렇게 몸을 빼도 돼.”

말과 함께 동작을 보여 주는 걸 잊지 않았다. 클리터스는 잡히지 않은 아델라이드의 반대편 손을 들어 자신에게로 주먹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만일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으면 차라리 이렇게 뒤로 넘어지는 거지.”

아델라이드를 뒤에서 잡고 있는 상태 그대로, 그가 갑자기 뒤로 넘어졌다. 다행히 바닥에 볏짚이 깔려 있어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넘어지는 바람에 놀란 아델라이드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마찬가지로 놀란 클리터스가 재빨리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의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잡았다.

“괜찮아?”

그의 눈에 걱정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넘어지면서 입술을 깨문 모양인지 아델라이드의 아랫입술이 조금 터져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괘, 괜찮아요.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피가 나, 입술.”

괜찮다고 말해도 클리터스의 얼굴에서 근심 어린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

“미안….”

그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델라이드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아델라이드는 흠칫 놀라 그만 그의 손을 반사적으로 밀어내고 말았다.

무언의 거부를 당한 클리터스가 멋쩍어하며 일어났다. 그는 아델라이드에게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이건 괜찮지?”

아델라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웃더니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팔을 당기자 아델라이드가 가볍게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다음은요?”

빙그레 웃음을 머금은 단아한 얼굴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클리터스는 아델라이드를 아무 말 없이 한참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제야 흐음, 하고 헛기침을 했다. 괜스레 헛기침만 두어 번 더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알았다. 이제 시작이니 너무 조급하게 맘먹지 마. 어떤 상황이 닥쳐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아날 방법은 다 있으니까.”

아델라이드가 입을 꾸욱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클리터스는 가르치는 대로 제법 잘 따라 하는 에드가를 보니 기특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며 집중하는 모습은 그를 웃음 짓게 했다. 에드가는 몰랐겠지만 그는 중간중간 피식 하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어금니를 콱 깨물기도 했다.

물론 곤란한 부분도 있었다. 호신술의 상대 역할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서로 신체가 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그럭저럭 해 나갔는데, 계속해서 몸을 부딪히다 보니 차츰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에드가의 몸에서 깔끔하면서도 달큼한 향이 난다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의식하게 되었다. 에드가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고 있다는 것도, 격렬하게 움직이다 보니 부지중에 단추도 한두 개 풀어져 버렸다는 것도.

그러다 어느 순간 에드가의 매끈한 가슴팍이 하얗게 드러났다.

클리터스는 그 가슴을 타고 땀방울이 또르르 굴러가는 것을 보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에드가!”

녀석은 주저앉은 채 붉어진 얼굴로 밭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숨을 고르느라 바로 대답하지는 못했지만, 통통한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클리터스를 보며 미소 지었다.

둥글게 휜 그 눈꼬리에 클리터스는 한층 더 아찔해졌다. 단둘이 있는 이곳, 이런 에드가를 자신만 볼 수 있다는 데에 작은 희열을 느끼기까지 했다. 클리터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었다.

녀석을 만지고 싶다. 저 붉고 예쁜 입술을 물어 버리고 싶다. 뽀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싶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그는 애써 외면하려 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사내의 음심을 자극할 녀석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자신이 이렇게 될 줄이야.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미 흘러가는 마음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드가에게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자신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녀석이 갖고 싶었다. 아니, 갖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몸의 중심부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클리터스가 휘청거렸다.

“대대장님!”

아델라이드는 클리터스를 부축하기 위해 급히 일어서려 했다. 그것을 본 클리터스가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괜찮아. 그나저나 너…, 옷.”

일어나려다 말고 엉거주춤 다시 앉은 채,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상의는 단추가 모두 풀어져 거의 허리까지 드러나 있었다.

남자의 몸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가슴에 신경을 안 쓰게 된 것인지, 아델라이드는 이렇게 가슴이 드러날 때까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얼굴이 벌개져서는 허둥지둥 옷을 추어올리는 그녀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낮으면서도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거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당황하던 클리터스와 아델라이드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황제가 서슬 퍼런 눈을 하고 서 있었다.

클리터스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고, 아델라이드 또한 있는 대로 벌게진 얼굴에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거기에다 둘 다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고 미처 단추를 여미지 못해 풀어 헤쳐진 아델라이드의 옷 사이로 뽀얀 살결이 드러나 있었다.

그야말로 어지간한 설명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베르톨트는 레니에와 장시간 회의를 하고,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막사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진영 내부를 거닐던 도중에 멀리서 녀석과 클리터스 부니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둘이 무엇을 하는지도 궁금했고 녀석이 누군가와 있다는 것 자체에도 호기심이 일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에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녀석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부어오른 입술, 그 아래 마구 풀어 헤쳐진 웃옷, 그 안에서 땀으로 반짝이고 있는 하얀 살결은 누가 보아도 의심하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황제는 강렬하다 못해 차갑게 식어 버린 눈으로 아델라이드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이어 예상치 못한 눈빛까지,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바짝 굳어졌다. 그가 자신을 왜 그런 눈으로 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칼날 같은 시선이 견디기 어려워 어디론가 숨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클리터스 부니에. 얘기해 보게.”

주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고 있었다.

그의 엄청난 존재감에 압도된 아델라이드는 황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드가에게 호신술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호신술? 그런데 넌 왜 복장이 그 모양이지?”

황제의 진한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 말을 씹듯이 뱉어 내는 투에서 언짢아하는 감정이 느껴져 아델라이드는 입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제가 잘, 못해서, 옷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입술은 왜… 부어 있느냐?”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두 사람이 그런 관계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녀석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겁이 났다. 아주 잠깐, 둘이 입을 맞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이 까맣게 암전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이성이 날아가 버린다. 베르톨트는 녀석이 얽힌 일이라면 머리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먼저 뛰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

누가 그를 피도 눈물도 없는 철의 황제라고 했던가. 그는 실소가 나왔다.

“제 부주의로, 시범을 보이시는 대대장님의 손에 부딪혔나 봅니다. 하, 하지만 괜찮습니다. 살짝 긁힌 것뿐이에요.”

아델라이드의 음성이 점점 잦아들었다. 황제가 이리 무섭게 물어 보니 괜히 클리터스에게 미안해졌다. 황제의 집무가 길어질 것을 짐작하고 잠시 클리터스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인데, 왜 갑자기 그가 나타나서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건지.

참으로 난처했다. 게다가 이 와중에도 그와 있었던 일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는 시간. 황제는 계속해서 아델라이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델라이드는 몸이 쪼그라드는 듯했다.

‘숨도 못 쉬겠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응축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그때, 클리터스가 긴장감으로 팽팽해진 공기를 가르고 들어왔다.

클리터스는 황제의 싸늘한 시선에서 자신이 이만 물러나야 함을 짐작하고 그에게 경례를 했다. 그리고 아델라이드에게도 짧게 인사했다.

“에드가, 내일 이 시간에 또 보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아델라이드가 클리터스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내일? 매일 하기로 한 건가?”

클리터스가 물러가려던 찰나, 황제의 목소리가 발길을 붙잡았다.

“네, 폐하. 당분간 에드가에게 호신술과 단검술을 가르치려 합니다.”

“며칠 가르친다고 이 녀석이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래도….”

“됐다. 황제의 시중 노예가 그리 녹록한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내가 녀석에게 시간을 너무 많이 준 것 같군. 에드가, 이제부터 나의 갑옷과 무기를 네가 관리해라. 카를로스도 챙겨. 이 모든 것이 원래 시중 노예가 하는 일이니.”

아델라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호신술과 단검술을 배우려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인지나 연구하거라. 그게 더 효율적일 거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녀의 부족한 근력과 어설픈 호신술로는 아직 상대방을 제압할 수 없다. 그러니 황제의 말대로 그의 옆에 껌 딱지처럼 붙어 있어야 죽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순순히 그러겠다고 말하기가 싫었다. 왠지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가 꼬리를 내리고 끙끙대는 꼴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내일 하루는 더 훈련하고 싶습니다. 오늘 배운 기술을 완전히 마스터하고 싶어요.”

목소리는 떨렸지만 되도록이면 야무지고 결연하게 말하고 싶었다.

황제가 아델라이드의 얼굴을 다시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도록.”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황제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아델라이드는 클리터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대장님.”

“아냐. 폐하의 말씀이 일리가 있어. 그나저나 너는 괜찮겠느냐?”

“사실 지금까지 갑옷이나 무기, 카를로스를 폐하께서 직접 관리하셨어요. 원래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

아델라이드는 클리터스에게 미안해하는 지금, 왜 자신이 황제를 두둔하며 같지도 않은 이유를 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럼 훈련은 내일 하는 것으로 하자. 오늘 배운 네 가지 기술이라도 알고 있으면 써 먹을 데가 있을지도 몰라.”

“네, 대대장님.”

미안한 마음에 아델라이드는 평소보다 더 밝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클리터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유독 가라앉은 것처럼 들렸다.

“에드가.”

“네, 대대장님.”

“호, 혹시….”

“……?”

“폐하께서 너를, 힘들게 하지는 않으시니?”

아델라이드는 클리터스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몰라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뱉고도 민망한지 뒷머리를 긁으며 황급하게 부연 설명을 했다.

“아니, 그, 너에게 다른 요구를….”

“아뇨, 아닙니다. 폐하는 제게 친절하세요. 그저 조금 많이 신경 써 주시는 것뿐입니다.”

클리터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챈 아델라이드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커졌다.

황제가 자신에게 깊이 다가왔다가 갑자기 선을 긋긴 했어도, 그동안 자신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에게보다 신경 써 줬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가 그를 비하하거나 의심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클리터스 부니에처럼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부관이 자신 때문에 황제를 오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 그러시겠지.”

클리터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았다. 이만 가자.”

클리터스가 몸을 돌려 앞서 걸었다. 아델라이드는 세 걸음 정도 떨어져서 뒤따랐다.

클리터스는 황제가 에드가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황제는 원래 모든 것에 무심한 인물이었다. 크게 노하지도 크게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묵묵히, 그리고 완벽히 수행할 뿐이었다.

그 모습은 클리터스에게 매우 감명을 주었기에, 클리터스는 그런 주군을 모시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에게 새 시중 노예가 생긴 후부터 황제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자신이 에드가를 황제에게 데려간 것은 세르비아 군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충심 때문이었다. 그러니 에드가가 황제의 시중 노예로서 제 역할을 잘 해내고 황제가 그를 필요로 하면 당연히 기뻐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는 에드가가 묘하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간혹 황제의 막사 앞에 이 동그란 머리가 보일 때면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녀석의 얼굴과 몸짓을 한동안 바라봤고, 어쩌다 한 번 그 꽃잎 같은 입술이 위로 올라갈 때면 넋을 놓았다. 전에 시냇가에서 녀석의 젖은 모습을 보았을 때는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바람에 몸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그는 스스로의 마음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좋아한다. 에드가를.’

그러나 에드가는 황제의 시중 노예였다. 감히 황제의 노예를 빼앗아 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또한 황제는 이 시중 노예를 은근히 챙기고 있었다. 매사 무심하고 냉정한 황제가 이렇게 특별하게 생각하는 존재는 처음이라 녀석을 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에드가도 황제를 꽤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황제를 두둔하고, 황제의 시선에 안절부절못하고, 황제의 등장에 얼굴을 붉혔다.

클리터스는 가슴이 답답했다. 에드가를 원하고 있지만, 녀석을 가질 수는 없었다. 수도에 가서 면천을 받고 애인으로 삼으면 모를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베르톨트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황제와 노예라고 직접 선을 그은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녀석에게 얼굴을 붉히고 화까지 내 버렸다.

그는 막사로 돌아오는 길에 바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심하군.’

흐린 하늘에 꽤 커다란 구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도 저 하늘처럼 찌뿌둥하니 우울했다.

괜스레 흥분하는 바람에 자신의 부관한테 못난 꼴을 보인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다. 그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던 녀석의 얼굴이 생각나 자꾸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 넌 언제나 그렇게 순진한 표정이지. 항상 나만 이상한 놈이야.’

그의 입매가 한껏 비틀어졌다. 한숨도 아니고 웃음도 아닌 기괴한 실소가 나왔다.

그 후 막사에 돌아온 베르톨트와 아델라이드는 말없이 각자 일만 묵묵히 했다. 서로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마치 누가 더 말을 하지 않나 내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고요하기 짝이 없는 밤이 지나갔다.

밤새 비가 내렸는지 땅이 촉촉했다. 덕분에 공기도 더욱 맑고 깨끗해졌다.

막사 밖으로 나온 아델라이드는 한껏 기지개를 켜고는 아침 일을 시작했다. 다른 막사들도 병사와 노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분주해 보였다.

아델라이드는 종일 바빴다. 황제의 애마인 카를로스를 씻기고 먹이고 단장시켰다. 그리고 황제의 갑옷과 무기들을 광나게 닦고 막사 안의 물품들을 정리했다.

사실 모든 것이 특별한 관리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유지되고 있었지만 아델라이드는 황제에게 시위라도 하듯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베르톨트는 인상을 구겼다.

일을 마친 아델라이드는 오후 훈련을 받기 위해 클리터스에게 향했다. 클리터스는 아델라이드에게 어제 배운 기술을 다시 한 번 선보였고, 동작을 계속 반복하며 아델라이드가 몸에 익힐 수 있도록 도왔다.

지금껏 그녀는 몸으로 하는 일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오늘, 의외로 자신의 몸이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클리터스와 몸을 부딪히며 동작을 익히는 것이 영 거북하고 불편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땀이 배어난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갔다.

클리터스 또한 아델라이드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보람을 느꼈다.

“에드가, 기회가 되면 좀 더 몸을 단련하도록 해. 전장에서뿐만 아니라 언제든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해.”

“네, 대대장님.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군사 일정상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친 짧은 훈련이 막을 내렸다.

아델라이드는 그에게 고마워서라도 배운 것을 잊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훈련을 끝내고 돌아가는 그녀의 얼굴에 고마움과 뿌듯함, 그리고 약간의 아쉬움이 뒤섞여 있었다.

* * *

“어이! 거기 시중 노예!”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밤. 아델라이드는 시냇가에서 몸을 씻고 막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낮에 훈련을 마친 후 제대로 씻을 기회가 없었던 터라 황제의 저녁을 챙기고 나서야 겨우 시내에 몸을 담글 수 있었던 것이다.

아델라이드는 소리 나는 쪽을 돌아다보았다. 제법 말쑥하지만 매우 불량하게 보이는 장교가 허리에 한 손을 얹고 남은 한 손으로 아델라이드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계급이 있어 보였다. 아델라이드는 내키지 않았으나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의 시중 노예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노예라는 스스로의 처지를,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그는 얼마 전 아델라이드에게 밤을 함께 보내자고 제안했던 사일러스 마일런 루이 소장이었다.

약간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허리를 굽혀 그에게 인사했다.

“에드가라고 했던가?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씻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뒷받침하듯 아델라이드의 앞머리와 상의 앞부분이 조금 젖어 있었다. 얼굴은 방금 씻은 것처럼 반짝반짝 윤이 나고 있었다.

촉촉한 녀석의 모습에 사일러스는 무언가가 뭉근하게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며칠 전 녀석에게 그런 제안을 하고 거절당한 후 한동안 녀석이 생각나곤 했었다. 잠자리에서도 이 녀석의 말간 얼굴과 이 예쁜 입술이 떠올라 혼자 끙끙대며 욕정을 해결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서 마주치니 다시 은밀한 기운이 고개를 들었다.

“너, 정말 폐하의 시침 노예가 아니냐?”

“…아닙니다.”

“그래? 그렇다면 가끔씩 서로의 침대를 데워 주는 관계는 가능하지 않을까?”

“저, 저는 필요 없습니다. 그럴 여유도 없고요.”

“하아. 여유가 없다니 그것이야말로 재미있는 말이네.”

그가 아델라이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약간 흔들거리는 그 움직임이 굉장히 건방져 보이기는 해도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아니, 이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판단했다.

“경험이 없나 보구나. 침대에서의 기쁨을 알면 그런 소리는 못 할 텐데 말이야.”

아델라이드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한쪽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보기와 다른 아귀의 힘에 놀라 아델라이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노, 놓아주십시오.”

“싫은데. 그때는 폐하가 나타나는 바람에 잘도 빠져나갔지만 지금은 너와 나 단둘뿐이야. 우리 좀 더 솔직해지자고.”

“놓아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앙탈을 부리는 것도 맘에 들어. 전장에서는 이렇게나마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게 좋아.”

그가 가느다란 아델라이드의 허리를 잡더니 자신의 몸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확연히 차이 나는 힘 때문에 아델라이드는 크게 흔들리며 사일러스 쪽으로 끌려갔다.

“소리 지를 겁니다!”

“질러 봐. 어디 얼마나 예쁜 소리를 내는지 들어 보게.”

그의 눈빛이 이상하게 반짝였다. 그가 아델라이드의 허리를 잡고 뒤로 돌리니, 꼭 뒤에서 끌어안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 상태 그대로, 그는 한쪽 손을 그녀의 어깨에 두른 채 누르며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당겨 자신의 하체와 밀착시켰다.

아델라이드는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밤마다 카이스턴 국왕이 그녀에게 한 짓이었다.

이렇게 뒤에서 끌어안은 뒤 곧바로 엎드리게 해서 채찍을 맞았던 기억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그래, 얌전히 있어. 너무 무서워하진 말고.”

사일러스가 아델라이드의 목에 얼굴을 묻어 그녀의 체향을 맡았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와 닿자 아델라이드의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일어났다.

“이상하네. 네 몸에서는 향기가 나. 보통 노예들은 이렇지 않은데 말이야.”

‘안 돼. 안 돼. 어떻게 해야 하지?’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아델라이드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어제 클리터스가 그러지 않았던가. 그는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그녀는 그 말을 주문과 같이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갑자기 사일러스의 축축한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가 그녀의 목을 강하게 빨며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너 정말, 하아! 피부가 곱구나.”

그의 숨결과 혀의 감촉이 다시 한 번 뒷목에 느껴지더니 그가 츄룹 소리를 내며 목덜미를 빨아 올렸다. 후덥지근하고 질척한 느낌 때문에 아델라이드는 미칠 것만 같았다.

어둠 속을 바라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차오르는 눈물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의 허벅지 부근에 단단한 무언가가 닿았고 곧 그것이 허벅지를 뭉근하게 누르기 시작했다. 손이 덜덜 떨리고 눈앞이 하얗게 변해 가는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자고 되뇌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끔찍한 일을 당할 것이니.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나만이 나를 도울 수 있어.’

낮에 배웠던 호신술 동작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지금이야!’

사일러스의 손이 그녀의 가슴 쪽으로 이동하자 아델라이드가 팔꿈치로 그의 명치를 가격했다. 순간적으로 그가 허리를 굽히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었다.

“헉!”

그녀는 곧장 몸을 돌려 주먹으로 그의 턱을 가격했다. 그러자 사일러스의 시선이 잠시 위쪽으로 향했다. 이때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을 아래로 내려 그의 중심부를 힘껏 때렸다.

“으악!”

남자의 비명이 고요한 어둠을 꿰뚫었다. 사일러스가 자신의 중심을 두 손으로 잡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델라이드가 뒷걸음치자 그가 마구 소리를 질렀다.

“너! 이 새끼! 죽여 버릴 거야!”

아델라이드는 뒤돌아 막사 쪽으로 달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눈에서는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저 앞으로 뛰어가는 것만이 살아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시야가 흐려졌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기거하는 막사가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드는 막연한 방향으로 무작정 뛰고 또 뛰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에 쿵하며 부딪치는 바람에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누군가가 갑작스런 충격에 뒤로 넘어가는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순간 아델라이드는 놀란 마음에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주먹으로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무서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아 반쯤 정신을 잃은 채 마구잡이로 손발을 휘둘렀다.

“에드가!”

묵직한 목소리만큼이나 단단한 팔이 그녀를 붙잡았다. 흠칫한 그녀가 몸을 심하게 부르르 떨고는 팔로 그의 가슴을 끙끙대며 밀어냈다.

그러나 그는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그녀를 꽈악 힘주어 안았다.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듯 부드럽게 그녀를 감싸는 품에 안겨, 아델라이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들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누군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이 목소리와 너른 품이 그가 누구인지 말해 주고 있었다.

“폐하!”

“진정해, 에드가!”

그가 놀란 아델라이드를 품에 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그 손길이 서투르면서도 따뜻했다.

“괜찮아, 에드가. 괜찮아!”

황제의 굵으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아델라이드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의 목소리와 그의 냄새, 그의 손길은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따뜻한 위안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품을 파고들 뿐이었다.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베르톨트는 오랫동안 그러고 서 있어야 했다.

가늘게 떨리던 그녀의 어깨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안아 들고 막사로 돌아왔다.

가는 내내 내려 달라고 그녀가 사정사정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리가 떨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걸으려 하면 오히려 시간이 지체된다며 핀잔을 줬다.

그 말에 아델라이드는 입을 꾹 닫고 가만히 안기고 말았다. 깊은 밤이라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막사에 도착해서야 베르톨트는 그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대로 있거라.”

베르톨트는 탁자 위에 비치되어 있던 술병 하나를 들었다.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것은 코냑이었다. 황제는 코냑을 작은 잔에 가득 부어서 아델라이드에게 가지고 왔다.

“마셔. 진정이 될 거다.”

창백한 얼굴의 아델라이드가 손을 들어 잔을 받았다. 그녀의 손이 아직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저 술 못합니다.”

이 와중에도 술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녀석을 보니 베르톨트는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아주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괜찮다. 바로 잠들 거야. 뭐, 취해서 주정해도 받아 줄 테니.”

황제의 잘생긴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아델라이드는 받은 술잔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한입에 털어 넣었다.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거쳐 배 속으로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머리끝까지 찌르르 울리는 그 화끈한 느낌에, 설명을 듣지 않아도 무척 독한 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제는 빈 술잔을 받아 탁자에 올려놓고는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자, 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 건가?”

아델라이드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 표정이 없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읽을 수 없었다.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떨구고 좌우로 저었다.

“폐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신경 쓰고 안 쓰고는 내가 결정해. 넌 그저 무슨 일이 있었는가만 말하면 돼.”

“그래도 말씀드리기 싫습니다. 폐하께서 아실 만한 일도 아니고요.”

녀석은 완강했다. 녀석이 이렇게 완강히 거부를 할 때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는 게 낫다. 베르톨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따라 더 작아 보이는 그의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때 녀석의 목에 있는 자국이 보였다. 그 자국은 틀림없는 키스 마크였다.

녀석은 울면서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녀석의 목에는 누군가의 키스 마크가 있다.

생각의 끝에 다다른 순간 베르톨트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에드가만 아니라면, 자신의 일을 베르톨트가 알기를 원하지 않는 녀석만 아니라면 당장 그 개새끼를 찾으라 명했을 것이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진정하려 애쓰는 녀석의 모습에 베르톨트는 마음이 저려 왔다. 자신의 분노를 터뜨리는 것보다 녀석이 안정을 되찾는 일이 훨씬 더 중요했다.

“알았다. 더 이상 묻지 않을 테니 그만 누워서 자.”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살며시 침대 위에 눕혔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술이 들어가서인지 아델라이드는 몸이 노곤해졌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눈꺼풀이 무거웠다. 두 눈을 껌뻑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나비의 날개처럼 펄럭였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베르톨트를 올려다보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이 술, 정말 좋네요. 천장이 막 돌아요….”

평소라면 절대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녀석이 입꼬리를 올리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조그만 입술 사이로 새빨간 혀가 나왔다가 들어갔다.

녀석에게 준 건 베르톨트가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한 잔씩 마시던 코냑이었다. 독하기는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청하기엔 안성맞춤이었는데, 녀석에게는 좀 많이 독한 듯했다.

아델라이드는 히죽거리다가 바로 울 것처럼 울먹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다 눈꺼풀이 그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감겨 버렸다.

그녀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본 베르톨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표정이 섬뜩할 정도로 서늘했다.

“쉐도우.”

공중에서 검은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착지했다.

“그 개새끼를 찾아!”

그림자가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하더니 다시 공중으로 사라졌다.

헤실헤실하던 아델라이드를 보며 짠한 표정을 짓던 남자는 사라졌다. 막사 안에는 서슬 퍼런 기운을 내뿜는 사나운 짐승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 시간도 채 되기 전에 그림자는 그 개새끼를 찾아냈다. 황제는 그의 막사로 향했다.

기척을 감추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여인과 침대 위에 누워 태평하게 자고 있는 사일러스가 보였다.

베르톨트는 검을 뽑아 들어 검끝을 그의 턱에 바짝 갖다 댔다. 조용히 자고 있던 사일러스는 턱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느낌에 눈을 떴다. 그는 자신에게 검이 겨눠져 있음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제1대대 2분단 소장 사일러스 마일런 루이!”

사일러스가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어둠 속에서도 동물처럼 빛나는 안광, 서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그리고 이 거대한 존재감이 황제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폐, 폐하!”

“조용히 밖으로 따라 나오거라.”

사일러스는 벌벌 떨면서 막사 밖으로 나왔다. 황제의 검이 다시 머리 위에 닿자 이마를 땅에 박을 듯이 대었다.

“너는 장교로서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나의 시중 노예를 희롱했다.”

“아닙니다! 희롱한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다면 희롱이다!”

변명하려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다른 이도 아닌 나의 사람이다. 그대는 두렵지 않던가?”

“폐, 폐하. 녀석은 그저 노예입니다. 전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참으로 뻔뻔하군. 다른 이였다면 그 말이 먹힐지 모르겠으나, 나는 황제다. 그리고 네가 건드린 녀석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주군의 노예다. 내 것을 마음대로 건드려도 된다고 누가 그랬지?”

사일러스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장교씩이나 되어서 자신의 욕정도 조절하지 못하다니! 그럴 바엔 차라리 시침 노예를 들여라.”

베르톨트의 검 끝이 사일러스의 턱을 들어 올렸다. 황제는 그의 눈에 담긴 공포를 읽었다.

사일러스의 목구멍에서 이상한 신음이 나더니 그가 아래로 꺼질 듯 이마를 땅바닥에 쿵쿵 박았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한 번만 선처해 주십시오.”

그의 음성이 덜덜 떨렸다. 그는 이마를 연신 조아리며 애걸복걸했다.

“사람들 앞에서 너의 죄를 낱낱이 밝히고 망신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나의 시중 노예 또한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이니 다른 방법으로 너의 죄를 갚아라.”

“네, 하명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곧 있을 바이온과의 전투에 합류하여 공을 세워라. 그렇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 거야. 그것도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황제의 엄중한 목소리에는 그의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반드시 공을 세우겠습니다.”

아델라이드가 나중에 안 것이지만, 사일러스 마일런 루이는 바이온과의 전투에서 누구보다 많은 적의 목을 베었지만 안타깝게도 적의 독화살에 맞아 사망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