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그녀, 힐다 (7/39)

제6장. 그녀, 힐다

아델라이드의 여린 듯 야무진 외모는 남자들에게는 음심을, 성숙한 여자들에게 모성 본능을 일깨웠다.

더군다나 황제의 시중 노예라는 위치는 노예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다 보니 아델라이드는 전장의 노예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자 노예들은 아델라이드가 지나갈 때마다 흘끔거리며 그녀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개중에는 꽤 야한 이야기를 하는 치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델라이드는 그들의 그런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남다른 분위기를 느낀 적은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날씨만큼 평화로운 분위기가 진영에 감돌았다. 황제의 막사 밖에는 황제와 클리터스를 비롯해 몇몇 병사들이 모여 이른 아침에 훈련했던 단검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그들 근처를 오가며 다른 노예들과 주변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볕이 좋은 날에는 막사 안의 이불이며 옷가지, 신발 등을 모두 가지고 나와 말리는 것이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그래야 소독도 되고 무엇보다 이불 감촉이 뽀송뽀송해지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널까요?”

아델라이드가 근처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몸매가 꽤 풍만한 여자 노예에게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속눈썹이 긴 눈을 깜빡였다.

“저, 이것도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녀가 그 말을 한 순간 주위에 있는 다른 여자 노예들의 시선이 아델라이드와 그녀 쪽으로 확 집중되었다.

그러나 아델라이드는 역시나 그러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에게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도울 일이 있으면 뭐든 말씀하세요.”

귀를 쫑긋 세운 채 그들을 바라보던 여자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여자 노예는 대담하게도 아델라이드의 소매 끝을 잡아당기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녀의 입술 옆 작은 점이 꽤 눈길을 끌었다.

“그럼, 좀 같이 털어 주실래요?”

그녀가 이불을 들어 올렸다. 아델라이드도 이불의 양쪽 끝을 잡고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둘이 동시에 힘껏 팔을 내렸다.

이불이 펴지며 팡 하는 소리가 났고, 둘은 한 박자씩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불을 털어 댔다. 그때마다 나부끼는 공기 중의 먼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여자 노예는 이불이 펄럭일 때마다 그 사이로 보이는 황제의 시중 노예를 관찰했다. 그녀는 지금 이 광경이 꽤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아델라이드도 마주 웃었다. 이 상황이 꽤 재밌어서 픽 하고 웃음이 흘렀다.

어느 정도 털었다 싶었을 때 아델라이드는 그녀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불의 양끝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 나서, 접힌 부분의 모서리를 잡아 다시 그녀에게 주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손이 닿았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흠칫거리며 아델라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델라이드는 그녀와는 다른 의미로 흠칫했다. 여자의 얼굴이 꽤 고운지라 그렇게 손이 거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가슴이 뭉클해진 아델라이드는 엄지로 그녀의 손등을 살짝 문질렀다.

“손빨래를 하면 반드시 손 연고를 발라야 해요. 겨울도 아닌데 이렇게 손이 갈라지잖아요.”

아델라이드는 여자가 민망해할까 봐 일부러 손빨래라고 말했다. 이 정도로 손이 거칠다면 필시 고된 노동을 도맡아 하는 처지일 것이 빤했다. 그렇기에 주변 사람들이 혹시라도 그들의 대화를 들어 그녀가 부끄러움을 느낄까 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괴감을 느낄까 봐 걱정되어 조심스레 돌려 말한 것이었다.

그녀에게서 이불을 빼앗아 옆에 내려놓은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병이었다.

“급한 대로 이거라도 발라요. 제가 바르는 건데 꽤 잘 들어요.”

병의 뚜껑을 열고 연고를 푹 퍼서 그녀의 손등 위에 얹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에 연고를 살살 문질러 주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그저 아델라이드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는 것이 무언가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고, 꽤나 얼떨떨해 보이기도 했다.

“연고 있어요?”

아델라이드가 그녀의 손등을 구석구석 세심하게 문지르며 상냥하게 물었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이거 발라요. 난 또 만들면 되니까.”

이불 위에 연고를 올려놓은 뒤 아델라이드는 막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녀가 다급하게 물었다.

“저, 저, 이름이? 전 힐다예요.”

“…에드가입니다.”

실은 이름을 알려 줘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먼저 이름을 알려 줬는데 대답을 하지 않으면 도리가 아닐 것 같았다. 그녀의 순수한 의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을 되뇌는 힐다를 본 아델라이드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목례했다. 그리고 황제의 막사 쪽으로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아델라이드는 막사 앞에 우글우글 몰려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그 사이로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는 존재가 보였다.

황제였다. 옆의 병사들에게 무어라 얘기를 하면서도 그 시선만은 아델라이드를 향하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무표정하지만 자신을 놓치지 않는 황제의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가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노예와 대화하는 소리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소드마스터답게 청력이 뛰어나다 보니 둘 사이의 묘한 긴장감도 알아챌 정도였다. 그 긴장감은 온전히 아델라이드 앞에 있는 여자가 조성하는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에드가 저 녀석은 완전 숙맥이군. 이렇게 멀리서도 여자의 호감이 느껴지는데 저 녀석은 어찌 저리 무심한가.’

에드가가 여자의 손등에 연고를 발라 주었을 때는 기가 찼다. 처음엔 교태 비슷한 것을 부리던 여자가, 그 순간부터는 감동한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니 그래도 사내라고 여자들을 홀리는군.’

베르톨트는 코웃음을 쳤다. 무언가 배알이 꼴렸다.

잠시 뒤 막사로 돌아오는 에드가와 시선이 부딪쳤다. 황제는 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녀석의 어떤 점에 여자들이 끌리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데다 녀석이 방금 전의 상황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설렜는지, 아쉬웠는지, 아무 느낌도 없었는지, 그런 것들이 알고 싶었다. 그래서 녀석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수작을 부리려던 거라면 약간이라도 들뜬 기색이 있을 터인데 녀석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 처연한 느낌이 얼굴 어딘가에 스며 있었다.

베르톨트는 바위 같은 묵직한 무언가가 자신의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힐다는 애송이 같은 한 남자를 어떻게 해 보려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황제의 시중 노예여서 매사 엄청나게 노련한 자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며칠 동안 그를 관찰한 결과, 그는 그녀의 예상과 전혀 다른 남자였다.

그는 항상 조신하고 조용하고 깔끔했다. 다른 이들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몸가짐도 단정해서 쓸데없이 타인의 시선을 끌지도 않았다. 아니, 이 청년 스스로가 타인의 눈에 띄길 거부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태도도 좋았지만 힐다는 무엇보다 청년의 외모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미모는 여자 노예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화젯거리였다.

시침 노예가 아니더라도, 그녀들은 때때로 마음을 동하게 하는 병사들의 품에 안기곤 했다. 그러니 힐다가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이 영 엉뚱한 일은 아니었다.

노예가 되기 전 거칠고 짐승 같은 남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지낸 힐다는 전장의 거친 남자들에게는 흥미가 돋지 않았다. 그 같은 타입은 이미 너무나 익숙했다.

그런 면에서 에드가는 신선했다.

이 청년은 고왔고 공손하며 단정했다. 그리고 무심했다. 그 자신은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 무심하리만치 깔끔한 태도가 그녀를 안달 나게 했다.

힐다는 그를 유혹해 볼 참이었다. 넘어오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청년의 고운 손길을 한번 느껴 보고 싶어서 접근했다.

그러나 어째선지 펄럭이는 이불 사이로 보이던 에드가의 작은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미소에 담긴 맑은 듯 처연한 무엇이 목구멍에 걸린 사탕처럼 힐다의 가슴을 막히게 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삼킬 수가 없었다.

무언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데다가 자신을 염려하며 연고를 발라 주던 그의 손길에 힐다의 마음은 그만 우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연고를 발라 주는 그의 하얀 손은 힐다의 가슴속에 깊숙이 박혀 한동안 쉽게 잊히지 않을 듯했다. 장난삼아 시작한 마음이 진지해져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물어봤다. 청년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에드가입니다.”

힐다는 돌아서 가는 에드가의 등을 바라보며 그 이름을 서너 번 되뇌었다.

* * *

막사 안에 들어서자 에드가가 탁자 위에 어지럽게 펼쳐져 있는 책과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베르톨트는 자신의 침상으로 가 앉았다.

그가 군화를 벗으려 몸을 숙였을 때, 언제 다가왔는지 에드가의 향이 느껴졌다. 곧이어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할까요?”

베르톨트는 군화의 끈을 잡으려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의 시선은 마치 정물과 같이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거슬려.’

고개를 숙이고 다시 군화 끈을 풀기 시작했다. 마음과 달리 베르톨트의 입에서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나왔다.

“됐다. 다른 일 봐.”

황제의 대답이 떨어지자 그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베르톨트는 허리를 펴고 그가 나간 자리를 쏘아보았다.

‘두 번 묻는 법이 없군.’

분명 자신이 원하던 시중 노예의 모습이건만 뭐가 이렇게 불편한 건지. 알 수 없는 마음이 답답하기만 했다.

다른 일을 보라는 황제의 말에 따라 막사 밖으로 나온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저녁 식사를 가지러 갔다가 힐다와 다시 마주쳤다. 그녀는 배식 막사 앞에서 아델라이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드가. 저녁 먹고 시간 있어요?”

“네. 조금이긴 하지만요.”

“그럼 우리 잠깐 볼래요? 매일 여자들과 수다 떠는 것도 지겹고….”

아델라이드는 거절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힐다의 눈빛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이다.

“폐하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정리를 해야 해서 9시쯤 잠깐 시간이 날 거 같아요.”

“좋아요. 그럼 우리 이따 가볍게 산책해요.”

“네, 힐다의 막사 앞으로 갈게요”

아델라이드의 말에 힐다가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여자였다. 처음 자신에게 다가올 때만 해도 눈빛은 자신을 쥐락펴락할 듯했고 태도는 능수능란해 보였는데, 지금은 마냥 소녀 같았다.

힐다와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에도 그녀의 수줍어하는 태도가 잔상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식판을 들고 막사에 돌아온 아델라이드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 때문에 황제의 식사를 준비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생각해 보니 힐다는 남자를 대하듯 자신을 대했다. 물론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이성으로서 접근하는 것이라면 거절해야만 한다. 그리고 거절은 어떤 식으로든 상처가 될 것이다.

크건 작건 상처는 아프다. 아델라이드는 아프다는 것이 끔찍이도 싫어서,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거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없으니까.

아델라이드는 어떻게 해야 그녀가 상처를 덜 받을 수 있을지를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 때문에 바로 앞에서 황제가 빤히 바라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고 할까? 하지만 그건 여유가 있다면 받아 줄 수 있다고 오해를 살 수 있잖아.’

이것도 아니고.

‘당신은 내 취향이 아니에요? 그럼 노력해 보자고 한다면?’

이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그래도 조금 만나 보자고 하면?’

이것도 아니었다.

베르톨트는 식사가 끝났는데도 탁자를 치우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저녁을 차릴 때부터 이런 상태다 보니 이제는 기가 막혔다.

“에드가.”

아델라이드의 귀에는 베르톨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물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조금 더 낮고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드가!”

그제야 화들짝 놀라 맞은편의 베르톨트를 바라보았다.

“네! 말씀하십시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거지?”

“아닙니다. 그저, 그, 죄송합니다.”

“고민이 있는 것이냐?”

“그것이….”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황제에게 남녀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게 의미가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연애라는 걸 해 본 경험이 없어서 고민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 황제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아델라이드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다물어 버렸다. 그 모습이 황제에게 불을 당겼다.

베르톨트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는 에드가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오기가 생겨 한 번 더 캐물었다.

“말해 보거라. 혹시 아느냐. 내가 꽤 좋은 해답을 줄지.”

하긴 저리 잘난 사람이니 그에게 대시하는 여자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그녀들을 물리쳐 봤던 경험이 있다면 생각보다 좋은 답이 나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델라이드는 약간의 기대를 안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도록 부드럽게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요?”

베르톨트는 순간 멈칫했다. 에드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의 표정이 잠시 멍했다가 이내 입매가 굳어졌다.

“고백을 받았더냐?”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까지 가기 전에 거절하려 합니다. 폐하께선 프러포즈를 많이 받아 보셨을 것이니 완곡한 거절 방법을 많이 알고 계실 테지요. 좀… 알려 주십시오.”

그가 진심이 담뿍 담긴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자신에게 무언가를 간곡히 바라는 그 얼굴이 꽤 귀여워 보였다.

베르톨트는 몇 번의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약간의 비장함을 더해 말했다.

“많이 받아 보았지. 그렇지만 아무리 태도와 말투가 예의 바르더라도 거절은 거절이다. 그저 솔직하게 진심을 전하는 방법밖에 없어. 그것이 서로를 가장 존중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모를 기대에 황제는 완벽하게 답했다. 그의 대답은 담백하고도 훌륭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보통은 상대를 배려한다는 명목하에, 또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솔직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생각과 행동에는 그렇듯 격차가 생긴다.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답변에 잠시 멍해졌다. 곧, 자신을 옭아매던 무엇인가가 툭 하고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체를 숨기고 남자로 위장을 하느라 자신을 잠시 잊고 있었다. 겉모습을 바꾸고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자신의 생각까지 숨기고 위장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델라이드의 눈이 반짝였다.

“폐하의 말씀이 정답이네요.”

“괜찮은 답변이 되었다니 다행이구나.”

베르톨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가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상대가 누구냐? 이렇게 고민하게 한 사람은….”

“아…, 그…, 아실 것 없습니다.”

상대가 누구인 것까지 알려 주긴 곤란했다. 힐다가 원하지도 않을 테고, 무엇보다 그는 황제였다. 괜히 알려 줘서 시중 노예의 상대에게까지 관심을 두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한, 별거 아닌 대답이었다.

“하아! 거기까지라는 거냐? 더 이상 관심은 갖지 말라?”

그런데 그 대답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황제의 눈초리가 차가워졌다. 아델라이드는 억지웃음을 띤 채 얼른 덧붙여 말했다.

“아, 아닙니다. 폐하께서 아랫것들의 사사로운 일에까지….”

“사사롭긴 하지. 하지만!”

황제가 갑자기 버럭 큰소리를 냈다. 아델라이드는 시선을 피하려다 말고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대답이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음이 분명했다. 서늘한 분노가 온몸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순간적이긴 하나 곁에 있던 자신이 약간 기가 질릴 정도였다.

새파랗게 변한 아델라이드의 얼굴을 본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괘, 괜찮습니다.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베르톨트는 이마로 내려온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잇새로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만 치워라.”

“예, 폐하.”

“나갔다 올 테니 늦어지거든 먼저 자거라.”

“예, 폐하.”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허리에 차고 막사를 나갔다. 아델라이드는 그가 먹다가 만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내 대답이 너무 불손했나?’

베르톨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에드가의 대답이, 당신은 알 필요 없으니 신경 끄라는 투로 들렸다. 조금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문밖으로 내쫓긴 기분이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분노를 밖으로 드러내 버렸다, 찰나였지만.

녀석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는 순간 놀라서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녀석의 말 한마디에 이렇듯 감정이 널을 뛰는 자신이 한심했다.

에드가의 눈에 비쳤던 두려움과 당혹감을 떠올렸다. 그렇잖아도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려 하지도, 멀어지려 하지도 않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까지 있었으니 앞으로는 자신을 더 어려워할 것이었다.

둘 사이에 쳐진 막이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베르톨트는 감정을 억누르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크게 화내지도 크게 슬퍼하지도 크게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래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그런 그에게 감정은 그저 사치스럽고 귀찮은 것에 속했다.

그런데 어째서 녀석의 행동이나 표정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이고 감정이 동요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녀석의 이상한 태도에 신경을 쓴 것부터가 자신답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관심도 없었다. 누가 고민을 하든, 어딘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든 알 게 무엇인가.

하지만 그 누군가가 에드가가 되니 신경이 그리로만 쏠렸다. 에드가가 자신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는 우쭐한 기분까지 들었다.

대답을 들은 녀석의 표정에서는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보였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고 더 알고 싶었다. 이야기를 이어 가고 싶어서 녀석에게 그 상대를 물었다.

그러나 곧이어 녀석이 누군가를 생각하고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짜증이 났다.

‘이 기분은 무엇인가.’

녀석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기분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마치 주인의 말 한마디에 안절부절못하는 개가 된 것 같았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야.’

시중 노예에 대해 궁금해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도 이 알 수 없는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 * *

저녁을 치운 아델라이드는 막사 안을 정리했다. 황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검을 들고 나갔으니 수련을 하고 올지도 몰랐다.

아델라이드는 욕조에 따끈한 물을 받아 놓고 식지 않도록 뚜껑을 닫았다. 남들보다 체온이 높은 황제에게는 두어 시간 정도 식혀 미지근해진 물이 알맞을 것 같았다.

욕조 가장자리에 비누와 향유, 작은 수건 하나를 가지런히 놓고 옷걸이에 목욕 가운을 걸었다. 그러고는 침상으로 돌아와 베개와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한 후 침대 불만 남겨 놓은 채 소등했다. 황제가 돌아왔을 때 혹시 자신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 놓은 것이었다.

일을 마치고 나니 힐다에게 말했던 9시가 거의 다 되었다.

아델라이드는 거울을 보며 두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맸다. 옆머리가 몇 가닥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제 나가야 했다.

시간으로는 한밤중이 되어 버렸지만 낮이 길어진 탓인지 아직 사람들이 막사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델라이드가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힐다는 이미 막사 앞에 나와 아델라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힐다가 방긋 웃었다.

“네. 갈까요?”

“전장에서는 제가 선배이니 산책로는 제가 안내할게요.”

그 말대로 힐다가 방향을 정하고 둘은 아무 말 없이 숲 쪽으로 난 길을 걸었다. 길이 잘 닦여 있어 걷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사이사이 풀벌레 우는 소리도 들려 꽤 정감 있는 밤이었다.

“전 계약 노예예요. 2년 계약이었는데 다음 주면 끝나요.”

“그래요?”

아델라이드에게는 조금 놀라운 이야기였다. 노예 생활을 자처하고 급여를 받는 제도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을 이리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다. 누가 노예 생활을 자처하나 했는데 그런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끝나면 가실 곳은 있나요?”

“그동안 돈을 꽤 모았어요. 전장이기 때문에 생명 수당까지 쳐주거든요. 세르비아로 돌아가면 여관을 차릴 거예요. 지방에서 여관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거예요.”

“대단하네요.”

“안 쓰고 안 먹고, 나름 절약하면서 살았어요.”

“힐다는 야무지군요.”

에드가의 칭찬에 힐다는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남자들은 자신을 억척스럽다고 얘기했지 야무지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힐다는 자신을 대하는 에드가의 태도가 좋았다. 에드가는 일개 노예인 자신을 마치 레이디처럼 대했다. 대답이 간결하지만 태도가 무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정중했다.

“에드가는 몇 살이에요?”

“스물한 살입니다.”

“앗, 제가 네 살 더 많군요. 전 스물다섯 살이에요.”

“그렇군요.”

둘은 계속 나란히 걸었다. 길은 두 사람이 걷기에 딱 좋은 폭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힐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에드가는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전, 찾을 사람이 있습니다.”

“찾을 사람이요?”

“네. 전쟁이 끝난 뒤 면천되면 그 사람을 찾으러 갈 겁니다.”

“아…. 연인인가요?”

“아닙니다. 가족이에요.”

“아! 죄송해요. 괜한 걸 물었군요….”

가족이라는 말을 꺼낸 순간 그의 말투가 가라앉은 게 느껴졌다. 그는 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노예 생활을 감내하고 있는 듯했다.

힐다는 자신의 물음이 그의 마음을 헤집어 놓은 것 같아 미안해졌다.

그가 자신을 너무 정중하게 대하자 자신도 덩달아 조심스러워졌다. 자신을 레이디처럼 대하는 남자. 그의 앞에서는 행동거지도 조신해지고 말투도 고와졌다.

한마디로 이 남자 앞에서는 자신도 레이디였다.

“힐다.”

“네, 에드가.”

힐다가 고개를 들어 아델라이드를 보았다. 두건 아래 귀 옆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서인지 순간 황금색으로 보였다.

“혹시, 저를….”

“네?”

“혹시 제게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 네. 관심 있어요.”

힐다는 주저했지만 아델라이드의 얼굴을 끝내 똑바로 쳐다보았다. 걸음을 멈추고 그 시선을 마주한 아델라이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제게 관심을 갖지 마세요. 전, 그럴 가치가 없습니다.”

“가치가 없다니요?”

“전 여자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진실이었다.

아델라이드는 여자를 좋아할 수가, 사랑할 수가 없었다. 아델라이드가 고심 끝에 떠올린 거절의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힐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에는 자신을 거절하기 위해 대충 둘러대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담담하고도  깊은 눈빛은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힐다는 입을 손으로 가렸다. 자신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정말이군요.”

“네. 진심입니다.”

힐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잠시지만 에드가를 마음에 두었다. 그런데 이성을 좋아할 수 없다면 자신이 어떻게 접근하든 자신과 잘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힐다.”

아델라이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 괜찮아요.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

한동안 아델라이드는 말없이 힐다를 고요히 바라보기만 했다. 힐다는 숨을 크게 한번 고르고 아델라이드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우리 친구… 할래요?”

아델라이드의 입술 끝이 살짝 떨렸다. 힐다의 눈꼬리에 맺혀 있는 이슬이 보였다.

“네. 친구, 해요. 우리.”

아델라이드의 대답에 힐다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잠시나마 즐거웠어요. 당신은… 꿈속에서 만난 사람 같았어요. 날 노예로 대하지 않았잖아요. 그런 건 처음이어서, 그래서 잠시 당신을 마음에 담았어요. 그 시간이 정말, 정말 짧았지만 너무 설렜어요. 평생 기억에 남을 거예요.”

“제가 더 고마워요. 힐다는 좋은 사람이에요.”

힐다의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기어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는 몰랐다. 지난 세월, 고단했던 그 시간 동안 이렇게 따스함을 느꼈던 적이 없어서일까.

낮에 이불을 같이 털어 줄 때부터 지금 밤 산책을 하는 시간까지, 그녀는 거의 하루 종일 에드가를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이상하게도, 빛바래고 낡아 버린 자신의 처지가 맑게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그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해 버린 것이었다.

서둘러 눈물을 훔치고 그에게 물었다.

“헤어지면, 우리 어떻게 연락할까요?”

“아….”

아델라이드는 에드가를 찾기 전까지는 한곳에 정착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힐다가 아델라이드를 찾기보다는 아델라이드가 힐다를 찾는 게 나았다.

“힐다. 제가 당신에게 연락할게요. 혹시 생각해 놓은 가게 이름이 있어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던 힐다가 고개를 들며 눈빛을 빛냈다.

“지금 지었어요.”

“뭐죠?”

“꿈속의 그대.”

아델라이드가 빙긋 웃었다.

그 후 힐다는 계약을 마치는 날까지 종종 아델라이드와 산책을 했다. 힐다에게는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소중하고 애틋했다.

아델라이드는 힐다가 떠나기 전날 밤, 그녀의 이마에 작별의 키스를 해 주었다. 그리고 물기 어린 목소리로 힐다에게 말했다.

“소중히 대해 줘서 고마워요. 아름다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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