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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거슬리는 존재 (5/39)

제4장. 거슬리는 존재

며칠 동안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시중 노예로서의 역할을 매우 훌륭하게 해냈다. 거슬리지도 않으면서 모나지도 않았다.

황제가 막사 안에서 생각에 잠길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때도 아델라이드는 있는 듯 없는 듯 했지만 황제가 전혀 불편하지 않게 그의 시중을 들었다.

황제를 보필하는 레니에는 간혹 아델라이드를 발견할 때마다 이상한 녀석이라는 생각에 그녀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기특함과 의심이 함께 묻어 있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곧 비가 올 것만 같은 날씨였다. 병사들은 막사 주위에 빗물이 흘러갈 물길을 만드느라 어수선했다.

레니에는 휴고를 시켜 황제의 시중 노예 에드가를 불렀다. 그에 따라 휴고가 아델라이드를 데리러 와 함께 레니에에게 가는 참이었다.

잠자코 휴고의 뒤를 따르던 아델라이드가 잠시 멈춰 섰다. 물길을 만드는 병사 사이에서 클리터스 부니에 대대장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클리터스는 아델라이드와 시선이 마주치자 아델라이드에게 반갑게 뛰어왔다.

“에드가.”

그 큰 덩치의 사내가 웬일인지 아델라이드를 상냥하고도 그윽하게 불렀다. 아델라이드는 허리를 숙여 세르비아 제국군의 제1대대 대대장에게 인사를 했다.

“대대장님. 그땐 미처 누구신지 몰라 결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처음 만났을 적 그저 스스럼없이 그와 함께 말을 타고 그에게 경어를 쓰지 않은 걸 사과했다. 그녀가 군인이었다면 벌써 목숨이 날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괜찮다. 몰랐으니 상관없어. 레니에 전하께서 부른 것이냐?”

“네. 에드가를 데리고 오라 하셨습니다.”

아델라이드 대신 옆에서 둘을 빤히 보고 있던 휴고가 대답했다. 클리터스는 그제야 휴고가 있다는 걸 안 모양이었다. 움찔 놀라며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 폐하의 시중을 드는 것은 힘들지 않고?”

“네. 괜찮습니다.”

“그래. 그, 음….”

“클리터스 경. 말씀 끝나셨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곁에서 클리터스를 계속 뚫어져라 바라보던 휴고는 특별한 볼일이 없는 것 같으니 그만 저희를 놔달라는 말을 에둘러 했다. 그 에둘러 한 말에도 클리터스는 왠지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래. 어, 어서 가 보거라.”

“수고하십시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클리터스는 휴고의 뒤를 따르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그녀가 간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왜 저 녀석이 궁금할까? 왜 저 녀석이 자꾸만 생각날까?’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가 깃털로 살살 간질이는 것 같았다. 클리터스는 가슴께로 손을 가져가 괜스레 벅벅 긁었다.

* * *

레니에는 자신이 내준 문서를 열심히 해독하는 노예를 보고 있었다. 라스문어로 쓰인 그 문서는 바이온 왕국의 한 전령이 가지고 있던 것을 제국군이 갈취한 것이었다. 한 음절, 한 음절 정독하여 문자를 읽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그 의미와 진의를 몰라 답답해하던 참에 라스문어에 능통한 노예를 발견한 것이었다.

첫날 그의 번역과 해독 실력을 높게 산 레니에는 오늘은 아예 그 문서의 전문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한동안 문서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아델라이드는 문서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휴고를 바라보았다. 퍼즐을 맞추듯 생각을 이어 가려면 무언가 쓸 게 필요했다.

“이 종이와 펜은 써도 되는 것입니까?”

“얼마든지.”

휴고에게서 예의 그 짤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델라이드는 문서 옆에 가지런히 종이를 놓고 펜을 집어 들었다. 문서를 읽다가 종이 위에 무언가를 쓰고, 다시 읽고 무언가를 쓰는 것을 꽤 오래도록 반복했다.

레니에가 보기에 그는 문서를 해독하는 일에 매우 집중하고 있었고 심지어 이 일을 즐기는 듯했다.

레니에는 자신과 휴고 앞에서 노예라고 위축되지 않고 문서에만 몰두하는 아델라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제나 좀 까칠한 휴고의 얼굴도 바라보았다. 휴고는 아델라이드가 하는 양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재미있군.’

레니에는 외양이 미소년 같은 두 사람을 보며 턱에 손을 괴었다.

아델라이드는 한참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하더니 마침내 고개를 들고 펜을 손에서 놓았다. 아델라이드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레니에는 놓치지 않았다.

“풀었더냐?”

“네.”

다소곳이 대답한 아델라이드는 종이에 써 놓은 것을 설명하려 입을 열었다.

그때 막사의 문이 젖혀지며 황제와 클리터스, 그리고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각 잡히고 고급스런 외양으로 보아 그 중년의 남자는 분명 높은 직급의 장군이 틀림없었다.

레니에는 일어나 황제에게 예를 갖췄고, 클리터스와 그 남자에게는 고개를 까딱하며 반대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아델라이드는 서열이 황제, 레니에, 클리터스, 이 남자의 순이고 클리터스와 남자는 비슷하거나 같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폐하. 오셨습니까.”

“둘을 데리고 왔네. 아무래도 같이 듣는 게 좋을 듯해서.”

“때맞춰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풀이가 끝났습니다. 에드가, 그럼 풀이를 시작해 보지.”

황제는 원형 탁자에서 의자를 빼 널찍이 자리 잡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들을 준비를 했다.

평소에는 군복을 간편하게 개량한 세미 정복을 주로 입던 황제가 오늘따라 검은 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는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하고 저렇게 다리를 꼬고 앉으니 황제의 긴 다리가 더더욱 길게 보였다. 그 모습이 풀어진 듯 보이면서도 우아했다.

황제가 착석하자 막사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다들 들을 준비가 되었음을 확인한 아델라이드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서신은 연서를 가장한 명령서입니다. 첫 단락은 초승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간을 의미합니다.

둘째 단락은, ‘은하수가 흐르는 눈동자는 평야 너머 만개한 소금밭을 향하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단락은 만고평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금밭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은유적으로 말한 것이고, 바이온에서 매년 거대하게 메밀꽃이 피는 곳은 만고평야이니까요.

세 번째 단락에는, ‘무정한 임은 오늘이 아닌 다음을 기약하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문장은 다시 시간을 말하고 있는데, 첫째 단락에서 말한 초승달이 뜨는 때가 바로 이번 달이 아니라 다음 달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임과 나의 마음이 삼만. 무수한 기대를 담아 언약의 그때 이루어지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걸 보시면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단락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임과 나의 마음이 삼만’이라는 구절은 바이온 군과 연합하는 세력이 3만 명에 이른다는 것을 뜻하는 걸 겁니다.

종합해 보면, 바이온과 연합 세력 3만이 다음 달 초승달이 뜨는 음력 3일경 바이온의 만고평야에서 집결한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났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는 동안 아델라이드는 시선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 테이블 위의 펜만 바라봤다. 이럴 땐 그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기에 시선을 편하게 둘 곳이 필요했다.

“에드가. 넌 너의 해석을 어느 정도 신뢰하느냐?”

황제의 낮은 목소리가 침묵을 가르고 아델라이드의 귀에 꽂혔다.

“신뢰하지 않습니다. 신뢰하고 말 것도 없는 사실이니까요. 휴고 비서관님께 이 연서는 바이온의 한 전령에게서 약 10일 전 발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전령은 이 연서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해 제국군에 맞서 싸웠다 하셨으니, 보이는 그대로 연서라고 치부하기엔 상황상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매우 중요한 밀서였기에 그리 치열하게 싸웠을 겁니다.

그렇다면 속뜻이 있을 것이고 그 속뜻은 해독의 수준을 거쳐야 알 수 있겠다 싶어 처음부터 해석이 아닌 해독을 했습니다. 또한 제게 이렇게 중요한 밀지를 보여 주신 것은 제 생명을 담보로 하신 것이겠지요. 이 해독에 거짓이나 모략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현재 전 황제 폐하의 노예이니 어느 때고 목숨을 거두시면 됩니다. 하지만 전 제 목숨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니 허투루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막사 안에 침묵이 흘렀다. 아델라이드의 말은 지극히 논리 정연했지만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것 같은 무언가, 분노와 비슷한 응어리가 느껴졌다.

황제의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유난히 낮은 음성이 뒤를 이었다.

“에드가. 너의 저의를 의심한 것은 아니야.”

“…네.”

“그만 나가 보아라.”

아델라이드는 크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막사를 잽싸게 빠져나갔다.

클리터스는 서슬 퍼런 젊은 황제가 누군가에게 저리 부드럽게 말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싸움이 끝나고 난 뒤 다치거나 지친 병사들을 위로하고 신경 써 주는 것은 보았어도 그 외에 저런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폐하. 저 아이의 말대로라면 다음 달 음력 3일경 만고 평야에서 대규모 군대가 집결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전에 그 연합을 깨야 합니다.”

말을 꺼낸 이는 지금까지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던 제2대대 대대장인 아른프리트였다.

클리터스가 젊고 힘 있는 장수라면, 아른프리트는 연륜 있는 노련한 장수였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엔 타고난 예리함과 전장에서 갈고닦은 통찰력이 있었다.

아른프리트는 황제의 시중 노예라는 이 어린 청년을 신뢰할 수 없었다. 신뢰하기에는 너무 갑자기 나타난 존재였고, 너무 고왔고, 너무 영민했다. 이런 이는 노예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른프리트는 방금 나간 저 아이의 말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군주인 베르톨트와 최고의 전략가라는 레니에가 까닭 없이 누군가를 곁에 둘 리가 없었다. 5년 넘게 황제와 함께 전장을 누빈 아른프리트는 단순히 시중만 드는 노예는 황제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레니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어 저 아이를 주군 옆에 둔 것이리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저 녀석의 말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른프리트 대장의 말이 맞습니다. 에드가가 잘못 해독하였더라도 반드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니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바이온 왕국의 전력은 무시할 수 없어. 군대보다는 지휘관이 훌륭하다고 들었다. 성질은 나쁘지만 꽤 머리를 쓸 줄 알고 용맹하다고 했으니 일단은 우리 쪽에서 간자를 침투시켜 그들의 전력을 상세히 알아보자고. 한 달가량 남았으니 시간이 많지 않아.”

베르톨트의 마지막 말은 클리터스를 향한 것이었다. 제1대대에서 적의 진영에 침투할 간자를 선택하여 보내라는 말이었다. 그것도 빠른 시일 안에.

클리터스는 황제의 의도를 알아들었다.

“오늘 출발시키겠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온의 밀서는 일단 간자의 소식을 듣고 다시 생각하지. 그들이 연합하려는 세력이 어디냐에 따라 우리의 전략도 달라질 테니.”

클리터스와 아른프리트가 절도 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황제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베르톨트는 휴고를 바라보며 말했다.

“휴고. 잠시 자리 좀 비켜 주게.”

“알겠습니다. 폐하.”

휴고가 나간 것을 확인한 베르톨트는 레니에에게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넌 에드가 저 녀석을 어쩔 셈이야? 그 녀석은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심부름꾼이 아냐. 그 녀석의 말투도 몸짓도 영민함도, 심지어 외모도!”

베르톨트는 화가 났다. 에드가에게는 감추려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우아함과 고고함이 있었다.

그런 그를 왜 자신의 노예로 곁에 두고자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가 감추려 하는 것을 왜 끄집어내려 하는 것일까. 어렸을 때부터 친구이지만 레니에의 심중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었다.

“왜 이리 화를 내십니까, 폐하.”

“화가 안 나게 생겼어? 네 녀석의 속셈을 모르겠다고!”

“정말 이상한 녀석이지 않습니까. 폐하의 말씀대로 본인은 감추려 해도 이렇듯 자신을 폴폴 풍기는 녀석이.”

“너… 일부러 이러는 거야?”

“조금 지켜보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도 있고요.”

베르톨트는 빙글빙글 웃고 있는 레니에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황제의 육감적인 입술이 뒤틀렸다.

“너, 남자에게도 취미 있냐?”

레니에는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막사가 떠나갈 듯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에드가를 그렇게 보는 게 아닙니다. 순수하게 인간적인 흥미입니다.”

베르톨트는 콧방귀를 뀌고 거칠게 레니에의 막사를 나왔다. 저벅저벅 큰 걸음으로 자신의 막사로 향하다가, 저 멀리 병사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에드가를 보았다.

‘저 녀석은 정말 둔하군. 저렇게 섞여 있어도 빛이 나는 걸 자신은 모른단 말인가.’

멀리서도 에드가의 하얗고 단정한 얼굴이 보였다. 맞은편에 있던 병사가 무어라 말하니 한일자로 꾹 다물어지는 붉은 입술도.

베르톨트는 자신의 막사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왜, 내 제안이 맘에 안 들어? 수락하면 매일 따뜻한 식사도 할 수 있는데.”

중간 장교로 보이는 자가 웃으며 말했다. 노골적으로 아델라이드를 훑는 시선에는 명백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당황스러워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현명하게 빠져나갈지 골몰했다.

그때 갑작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어떤 제안인가?”

“폐, 폐하!”

아델라이드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기립해 경례했다. 베르톨트는 경례를 받지도 않고 다시 물었다.

“답하라. 어떤 제안인가?”

“그, 저…. 밤을 함께 보내자 했습니다.”

강제로 취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제안을 한 것이어서 군법을 위반하지는 않았다. 만일 에드가가 수락하면 둘은 밤마다 파트너로 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표정이 얼음같이 싸늘해졌다.

“자네. 소속과 이름을 대라.”

“제1대대 2분단 소장 사일러스 마일런 루이입니다.”

“루이 소장. 이 아이는 나의 시중 노예다. 밤낮으로 나를 따라다니며 보필하기에 바쁘다. 밤에 그런 육체노동을 해서 내 시중을 드는 일에 소홀해진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난 모든 것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녀석의 목숨을 살리고자 한다면 그 제안은 철회하는 것이 좋아.”

얼음장 같은 눈초리와 굵고 낮은 엄중한 목소리는 병사들의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황제는 세르비아 제국의 최연소 소드마스터이자 최고의 무인이었다. 전장에서 싸우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보면 누구나 경외감을 가질 정도로 엄청난 검술 실력을 가진 존재였다.

그런 황제가 노예의 시중에 만족하지 못하여 화를 낸다면 그 노예의 앞날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 알겠습니다. 너! 내 제안은 못 들은 것으로 해라.”

아델라이드는 알겠다는 대답 대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에드가. 넌 나를 따라오너라.”

황제는 몸을 휙 돌려 자신의 막사 쪽으로 걸었다. 그의 보폭이 너무 커 아델라이드는 잰걸음으로 뒤따라야 했다.

베르톨트는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 왔다. 막사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의자에 털썩 하고 소리 내어 앉았다.

그는 앞에서 손을 고이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드가를 못마땅한 듯이 쳐다보았다.

“그렇게 여유가 있더냐?”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날 선 눈빛이 자신에게 꽂혀 있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의 심사가 왜 이렇게 틀어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회의가 끝났으면 곧장 이 막사로 오거나 취침 막사로 갈 것이지, 쓸데없이 왜 병사들과 말을 섞느냐. 할 일이 그렇게도 없다면….”

“폐하. 저는 노예입니다. 저보다 높은 신분의 누군가가 부르면 가야 합니다. 그러니 일이 없어 그분들과 노닥거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베르톨트의 짙고 검은 눈썹이 움찔거렸다. 좀 억울하다는 듯이 황제의 말에 끼어드는 것이 놀라웠다. 간혹 아주 약간씩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이 녀석이 의외였고 그럴 때마다 자신이 움찔거리는 것이 우스웠다.

“취침 숙소를 이리 옮겨라.”

“네?”

아델라이드는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순간 황제의 시리고 깊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눈동자가 자신을 쏘아보자 그녀는 다시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바로 전의 시중 노예도 나와 같은 막사에서 지냈다. 그러니 너도 그리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번잡스러우니.”

황제가 번잡스러울 게 무엇이 있는가. 번잡스럽고 번거롭다면 그것은 자신의 몫이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자니 저 강렬한 눈이 이미 결정을 내렸다고 말하고 있어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답답하고 당황스러워 그저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전에 있던 시중 노예도 그러했다 하니 딱히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근위병!”

황제의 부름에 밖에 서 있던 근위병 한 명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간이침대를 하나 설치해라. 오늘부터 시중 노예가 나와 함께 기거할 것이다.”

근위병은 알겠다며 예를 갖추곤 밖으로 나갔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들어 황제의 가슴께로 시선을 두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불편하시면 언제라도 말씀하십시오. 전 취침 막사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럴 일 없다. 침상 정리하고 저녁을 가져 오너라.”

“…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취침 막사로 돌아갈 여지를 남기려 했지만, 황제가 단호하게 ‘불가’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대하려 해도 그녀는 자꾸만 황제의 사정거리 안에 갇히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황제의 침대로 가서 침구를 정리했다.

이불과 베개를 팡팡 때려 주름을 펴고 모서리를 잡아당겨 가지런히 했다. 그러나 워낙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인지라 아무리 정리해도 별 티가 나지 않았다.

정리를 마친 아델라이드는 황제가 앉아 있는 의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저녁 식사를 가져 오겠습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델라이드는 막사 밖으로 나와 배식 막사로 향했다. 황제의 수통에 물을 채워 어깨에 사선으로 메고, 손에는 음식이 담긴 식판을 들고 돌아왔다.

막사 앞을 지키던 근위병 한 명이 그사이 안에 침대를 들여놓았다고 말했다.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어쩐지 좀 우울해졌다.

“폐하. 식사하시지요.”

“거기 탁자 위에 놓고 앉아.”

베르톨트는 셔츠 위에 가죽 전투복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는 등 뒤 사선으로 엉겨 있는 여밈 끈을 뒤허리께에서 잡아당겼다.

아델라이드는 탁자에 식판을 놓고 빠르게 황제의 뒤로 가서 그 여밈 끈을 빼앗아 들었다. 그 행위가 얼마나 자연스럽던지 베르톨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여밈 끈을 양보했다.

그녀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끈을 당겼다. 가죽이 다시 한 번 단단히 조여들었다.

몇 번 더 당기자 황제의 몸에 딱 달라붙어 이제야 전투 재킷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조이지는 않으시는지요?”

“음. 괜찮은 거 같다.”

“갑옷을 내올까요?”

“아니다. 잠시 제2대대 대대장과 근처를 살펴보고 올 테니 갑옷까진 필요 없어.”

베르톨트는 그가 자신의 등 뒤에서 야무진 손을 놀려 재킷을 여밀 때 왠지 불편하면서도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이 이상한 기분이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녀석이 가까이서 자신만을 신경 쓴다는 것이 썩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보살핌을 받아 보지 못해서 이런 작은 보살핌에도 감동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저 저녁 식사는 네가 나 대신 먹어야겠다.”

“지금 바로 나가십니까?”

“그래야 한밤중에라도 돌아올 수 있다.”

“그럼 식판은 치우겠습니다.”

“음식을 버릴 셈이냐?”

“일단 반납하면 취사병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그러면 그냥 네가 들거라. 어차피 너도 저녁을 먹어야 할 거 아니냐.”

아델라이드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때 황제가 갑자기 아델라이드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황제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흠칫 놀라며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에드가.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알았지?”

그의 검푸른 눈동자가 놀란 그녀를 꼼짝 못하게 옭아맸고, 그의 모양 좋은 붉은 입술이 나지막하면서도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를 했다.

아델라이드는 그 눈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잡힌 턱이 불에 댄 듯했고 몸이 또다시 떨려 왔다. 베르톨트가 아델라이드의 턱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그는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는 바람같이 막사를 나갔다.

아델라이드는 멈추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황제가 만진 것이 처음이라 급작스러워서이기도 했지만 남자와의 스킨십이라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었다. 그의 냉기 어린 눈빛을 보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예전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그녀는 자꾸만 고개를 내미는 과거의 기억을 지우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막사 밖으로 나온 베르톨트는 자신의 말이 있는 마구간을 향해 걸었다. 그 뒤를 병사 두 명이 따랐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신이 말할 때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녀석이 마음에 안 들었다. 순간 에드가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녀석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 살결이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워서 당황했다. 그래서 말이 다시 막무가내로 나갔다.

사실 시찰을 나가는 것은 식사 후에 해도 무방했다. 베르톨트는 시찰을 나가려고 밖에 나온 것이 아니라, 너무 마른 녀석에게 따끈하고 조금 더 좋은 식사를 먹게 하고 싶어서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이렇듯 본심은 거칠지 않은데, 왜 녀석에게 나가는 말이나 행동이 순간적으로 제어가 안 되는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베르톨트는 녀석의 턱을 잡고 올려 얼굴을 가까이 했을 때를 생각했다. 매우 아름다운 이목구비라는 생각이 들면서 녀석의 암갈색 눈동자가 순간 몽롱한 청회색으로 보였었다.

‘청회색이 더 어울릴 것 같아.’

문득 자신이 닿았을 때 경직하던 녀석의 반응이 생각나 미간이 일그러졌다.

마음에 들다가도 잠시 잠깐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는 녀석이었다.

아델라이드는 식사를 하고, 막사 안 공기를 환기시켰다. 그 후 황제의 침대와 자신의 침대를 다시 정리한 뒤 탁자 위 서류 뭉치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서류들은 어떤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어떤 것인지 몰라 흩어져 있는 것들을 그저 똑바로 놓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아델라이드는 국정 운영을 할 때 수많은 서류들을 읽고 결재했기 때문에 이것들도 훌륭히 정리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면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서류 쪽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서류들 틈에 작지만 두툼한 핸드북이 있었다. 그 핸드북은 대륙의 현자라고 불렸던 ‘루앙 보떼’의 《군주론》을 요약한 책이었다.

모든 정리를 마친 뒤 언제나처럼 막사 한쪽에 섰으나, 아델라이드는 핸드북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워낙 책을 좋아하다 보니 책장을 넘겨 보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하아. 황제가 돌아오기까진 시간이 좀 있으니 그때까지만 살짝 읽고.’

여기까지 생각한 아델라이드의 몸은 이미 탁자 앞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군주론》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영롱한 미소가 번졌다.

* * *

칠흑 같은 어둠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다. 하늘에는 검푸른 구름이 뭉쳐 있어 이상하리만큼 스산하고 축축한 날이었다.

“아른프리트.”

“네, 폐하.”

“루이사와 유니스를 제2대대의 부대장으로 승진시키려 하네.”

“루이사를요?”

“2대대에는 세르비아가 자랑하는 최정예 철갑 기마단이 있어. 기마단 1천 명과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나흘 뒤 만고평야로 출발하게. 기마단의 단장은 루이사로, 이곳에 남아 있는 2대대를 이끌 부대장은 유니스로 해. 아른프리트 그대는 루이사와 함께 만고평야로 가서 연합군이든 동맹군이든 반드시 저지하고!”

“폐하께서는 루이사를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하시는 겁니까?”

“루이사는 매우 뛰어난 기사야. 그렇게까지 자신을 연마하는 기사는 없어. 노력으로 치자면 나도 그녀를 따라잡지 못할 거야. 실력과 노력, 거기에 남자들이 갖고 있지 못하는 육감이 매우 발달해 있지. 노력이야 계속 거절하는 그대 곁에 지금까지도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아른프리트를 바라보았다. 노련한 군인인 아른프리트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아른프리트는 서른 살에 아내를 잃고 마흔한 살인 지금까지 혼자였다.

아내와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다. 그렇지만 딸아이를 낳다가 목숨을 잃은 아내에게 미안해하는 마음과 살아생전 잘해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깊었다. 그래서 아내가 죽은 이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 그에게 제국에서 손꼽히는 기사인 빨간 머리 루이사가 10년간이나 프러포즈를 해 오고 있었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며 거절했지만, 전장에서 전우이며 제국에서는 동료인 그녀에게 어느새 정이 쌓일 만큼 쌓였다. 게다가 적극적인 이 빨간 머리 기사가 아른프리트만 바라보다 혼기를 놓친 것에 일말의 책임감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상황들과 두 사람의 감정을 황제도 알고 있었다.

“이번에 바이온 왕국과의 전쟁만 끝나면 그만 둘이 합치게나. 루이사도 많이 기다렸어.”

“…폐하.”

“루이사를 더 기다리게 하면 황명으로 결혼하라 할 걸세. 그녀는 내게 누이와도 같아.”

아른프리트는 불타오르는 그 빨간 머리를 생각했다. 이번에 수에비 왕국을 속국으로 만들면서 그녀는 크게 다칠 뻔했다.

다행히 팔이 부러지는 부상에 그쳐 목숨을 건졌지만 아른프리트는 그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자신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는 것을.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래.”

“폐하도 어서 짝을 맞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후후. 난 좀 더 있다가, 제국이 편안해지면 그때.”

“곁에 누군가 있다면 그 지독한 외로움이 희석될 것입니다.”

“하하! 누가 할 소릴. 자네가 먼저 가야 우리들이 가지 않겠나.”

황제의 화통한 웃음소리가 눅진눅진한 공기 사이로 청량하게 퍼져 갔다. 베르톨트는 말머리를 세르비아 군대 진영으로 돌렸다.

“이제 그만 돌아가세.”

“네, 폐하.”

황제의 뒤로 아른프리트 장군을 비롯한 십여 명의 군사들과 보이지 않는 황제의 그림자가 따랐다. 아른프리트는 황제의 깊고도 깊은 뒷모습에서 자신이 나눠 가질 수 없는 엄청난 무게를 보았다.

벌써 15년째이다. 황제는 이 무게를 15년간이나 짊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무거워질지, 얼마나 더 짊어질지 몰랐다.

아른프리트는 자신의 군주가 조금이라도 편안해지길, 그리고 근심 없이 웃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늘에서 비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 막사로 돌아온 베르톨트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에드가를 생각했다. 그래서 막사에 들어가기 전, 비에 젖은 망토와 머리를 털었다. 물기를 대강 훔쳐 내자 망토를 팔에 걸고 조심스럽게 내문을 젖혔다.

순간 그는 막사 안의 광경에 놀라 숨을 멈추었다.

에드가는 탁자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베르톨트 자신이 매번 앉는 의자의 맞은편이었다.

밤이지만 막사 안을 밝히는 은은한 불빛 때문에 에드가의 얼굴이 잘 보였다.

두건을 벗은 이마가 둥글면서도 단아했다. 부드럽게 선을 그리는 눈썹과 길고 숱 많은 속눈썹이 그 아래에 곱게 자리하고 있었다. 활자를 읽으면서 무의식적으로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이 얼굴에 긴 음영을 만들며 춤을 추었다.

곧게 뻗은 코, 작지만 통통한 붉은 입술은 마치 꽃잎과 같았다. 그 꽃잎은 꼭 다물어져 있었고 무엇이 즐거운지 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은 너무나 우아해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막사 한쪽에 비친 긴 그림자도 그 주인과 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베르톨트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에드가.”

중저음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나왔다.

듣지 못했는지 녀석은 그림 같은 모습 그대로 있었다. 베르톨트는 한 번 더 녀석을 불러 보았다.

“에드가.”

아델라이드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황제가 비에 젖어 물기를 머금고 서 있었다.

기겁을 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황제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웠다.

“그렇게까지 놀랄 건 없잖아.”

아델라이드의 고개가 급히 떨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무엇이?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책을 읽은 것이? 아님 노예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주인 물건에 손댄 것이?”

“죄, 죄송합니다. 벌을 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황제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에드가. 나를 봐.”

“…….”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황제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두었다. 그랬더니 그의 모양 좋고 붉은 입술이 보였다. 더 당황스러웠다.

“넌 나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무엇이 그리 죄송하더냐?”

“폐하가 들어오신 것도 모르고 딴 곳에 한눈을 판 것도, 허락 없이 책을 읽은 것도….”

“에드가. 넌 너 자신을 좀 더 소중히 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아델라이드는 무슨 말인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노예는… 노예는 없어질 거다. 지금은 전시라 최소한으로만 유지하고 있지만 제국에 돌아가면 노예 제도를 없앨 거야. 그러니 그렇게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설설 기지 말고, 내 물건인 것처럼 스스로를 낮추지 말라는 말이다. 내 말에 깜짝깜짝 놀라는 것도 이제 그만하고.”

베르톨트는 무엇인가 할 말이 더 있었지만 에드가의 표정을 보니 지금 한 말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녀석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폐, 폐하.”

불렀으나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어찌할 바를 몰라 황제를 빤히 볼 뿐이었다.

베르톨트는 입을 조금 벌리고 자신을 말갛게 보는 녀석이 왠지 안쓰러웠다.

문득 저 가냘픈 어깨를 안아 주고 싶었다. 그러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고는 놀라 황급히 몸을 돌렸다.

“이제 그만 자야겠다.”

세숫물이 있는 곳으로 간 베르톨트는 얼굴을 씻고, 침대에 앉아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보이는 곳에서 황제가 훌렁훌렁 옷을 갈아입으니 아델라이드는 눈을 둘 곳이 없었다.

황제는 모를 테지만 촘촘한 근육으로 꽉 짜인 남자의 몸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그녀에게 생소한 동시에 두려운 일이었다. 아델라이드는 손끝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너도 어서 침대에 들거라.”

“네.”

황제의 말에 탁자 위의 불을 끈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맞은편에 있는 자신의 침상으로 와 앉았다. 익숙한 공간이므로 불을 꺼도 큰 어려움 없이 다닐 수 있었다.

“주무십시오.”

아델라이드는 돌아누운 황제의 뒤통수에 대고 고개를 숙여 말했다. 그러나 아무 말이 없었다. 등을 돌린 황제의 어깨는 조금도 들썩거리지 않았다.

벌써 잠이 들었나 싶기도 하고 그저 잠을 청하고 있나 싶기도 했다. 자신도 침의로 갈아입고 싶었지만 그 소리에 황제가 잠에서 깰까 봐 하루만 참기로 했다.

그녀는 황제처럼 등을 돌리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집단으로 쓰는 취침 막사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지만 어쩐지 그보다 훨씬 불편했다.

그리고 자신의 침상이 이렇게 황제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 자꾸만 마음을 이상하게 긁어 댔다. 무언가 자꾸 꼬여 갔다.

그녀의 생각이 깊어진 사이, 막사를 때리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있었다.

* * *

베르톨트는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깨었다. 원래 소드마스터들은 소리와 기척에 매우 민감했다.

그는 머리맡에 놔두었던 자신의 성검을 집어 들고 자리에 앉았다. 무척 빠르고 기민한 몸놀림이었다. 동시에 에드가가 누워 있는 옆 침상을 돌아보았다.

그 이상한 기척은 에드가가 낸 것이었다.

녀석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두 손을 꼭 쥔 채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에드가의 잔뜩 일그러진 입술이 열렸다.

“그, 그만. 제발. 그…만.”

고통으로 가득 찬 신음에 베르톨트는 에드가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에드가! 에드가!”

“가까이 오지 마!”

“에드ㄱ….”

“제발 오지 마!”

절규에 가까운 소리였다. 어둠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 않아도 고통과 공포로 에드가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파! 하지 마아. 제…발…!”

베르톨트는 미친 듯이 떨고 있는 에드가가 안쓰럽고 답답했다. 어서 이 끔찍한 꿈에서 깨어나길 바라며 에드가를 흔들었다.

“에드가! 에드가 정신 차려!”

무슨 꿈이기에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바짝바짝 타는 마음에 베르톨트는 거칠게 에드가를 흔들었다.

크게 흔들리던 녀석이 힘겹게 눈꺼풀을 올렸다. 어깨를 잡고 있는 베르톨트의 손등으로 축축한 것이 후드득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폐하?”

“그래.”

긴 한숨을 내쉰 베르톨트는 땀에 흠뻑 젖은 에드가의 몸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품에 들어온 어깨는 자신의 반쪽밖에 되지 않았다.

이 조그만 몸으로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확신이 들 정도로 아까 녀석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에드가는 시종장의 심부름꾼이었으니 혹 그 시종장이 에드가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짐작일 뿐, 지금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녀석을 위로해 주는 게 최선이었다.

그는 여전히 작게 떨리는 녀석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줬다. 누군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는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만큼 낯설고 어설펐지만,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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