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짐승을 죽이다
“왕비 마마! 어서 피하셔야…!”
침실 문이 벌컥 열리고 왕비의 전속 시녀 소니아가 들어왔다. 소니아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왕의 시체를 보더니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아델라이드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마마! 마마!”
아델라이드는 흠칫 놀라며 소니아를 마주 보았다.
“소니아. 내가, 내가 사람을 죽였어.”
여전히 풀린 눈을 한 아델라이드는 별거 아니었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소니아는 그녀를 부둥켜안으며 울먹였다.
“아니에요, 마마. 왕… 아니, 저건 사람도 아녜요. 제가 진작에 이리 해야 했는데, 결국엔 마마가 하셨네요. 죄송해요. 흐흐흑…. 아가씨!”
울먹거림이 점점 커지더니 나중엔 울음이 크게 터져 나왔다. 소니아는 아델라이드를 마마라고 했다가 아가씨라고 했다가 오락가락했다.
그럼에도 아델라이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시녀이자 동무이자 자매인 소니아의 등을 토닥였다.
발루아 가문에서부터 아델라이드를 따라온 소니아는 아델라이드의 유모였던 레베카의 딸로 아델라이드와 동갑이었다.
아델라이드는 젖먹이 때 자신에게 엄마와 젖을 양보한 소니아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소니아는 아델라이드와 제 어미가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않길 바라여 항상 밝고 씩씩하게 행동했기에 아델라이드도 항상 소니아를 챙겼고 진심으로 사랑했다.
둘은 늘 함께 다녔고 때로는 자매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사이가 좋았다. 물론 떠드는 쪽은 거의 소니아였지만 말이다.
아델라이드가 왕비로 간택되어 궁으로 가게 되자 소니아는 그녀의 시녀를 자청하여 함께 입궐하였다. 아델라이드는 왕의 성정이 잔인하고 황포하다는 것을 이미 들었던 터라 소니아의 입궁을 극구 말렸지만, 그녀는 아델라이드를 혼자 궁으로 보내기가 불안하다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아델라이드가 수에비 왕국의 왕비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던 처음 한 달간은 국왕 카이스턴도 조용했다. 그의 난폭함과 잔인함은 한 달 후 정식 혼례를 치른 첫날밤에 드러났다.
다음 날 아침, 국왕 부부의 잠자리를 정돈하기 위해 침실에 들어간 소니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고요히 침대에 누워 있는 아델라이드의 몸은 피투성이였고, 주변에는 채찍과 회초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왕비의 몸을 씻기면서 소니아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델라이드는 정신이 이미 반쯤 어디론가 나가 있었고 그녀의 하얀 나신은 왕이 만들어 놓은 선명한 상흔으로 가득했다.
소니아는 밤이면 시작되는 왕비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데다 왕이 너무나 두려워 왕비를 적극적으로 도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델라이드의 오라버니인 에드가 드 발루아에게 남몰래 서신을 보내는 것밖에 할 수 없었고, 그것은 곧 커다란 재앙을 불러왔다.
에드가는 아델라이드를 만나러 왔다가 왕실 기사단에게 잡혀 투옥되었다. 왕비 시해를 주도했다는 누명을 쓰고 한 달 동안 모진 추궁을 받았지만 에드가는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카이스턴은 에드가를 왕국에서 추방했고, 심한 고문을 당하다가 추방당한 에드가의 소식을 들은 아델라이드는 까무러쳤다.
그 이후의 순서는 발루아 가문의 멸문이었다.
아델라이드는 잔인한 변태 성욕자인 카이스턴의 손아귀에 있었고, 그녀를 구하려 했던 발루아 가문의 가주 에드가마저 추방당했으니 예정된 수순이었다.
나머지 발루안 가문의 식솔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서신을 전한 소니아 역시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아델라이드의 간청으로 그녀만은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한쪽 다리의 인대를 끊는 벌을 받아 결국 발을 절게 되었다.
이후 아델라이드는 소니아를 멀리했다. 카이스턴은 그녀들이 가까이 있는 것만 보아도 무슨 꿍꿍이를 또 꾸미려 하는 거냐며 소니아에게 체벌을 가했고 아델라이드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어쩔 수 없이 아델라이드는 소니아를 일시적으로 외궁에 보냈다. 그때부터 자신의 곁에는 더 이상 자신의 사람을 두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자신이 이리 되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아델라이드의 집안, 발루아 가문은 대대로 외교 대신들을 배출해 온 외교 명문가였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남매는 외교 명문가의 핏줄답게 외국어에 능통했다.
그리고 둘 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에드가는 은빛 머리에 진회색 눈동자를 가졌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마치 천사 같은 외모와 분위기를 지닌 남자였다. 아델라이드는 진한 벌꿀색의 금발에 청회색 눈동자를 가진 단아한 미인이었다.
남매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영지를 잘 다스려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하여 수에비 왕국에서 이 남매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카이스턴 국왕은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 아름다운 남매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에 반드시 흠집을 내야 하는 성정을 지닌 그는 발루아 가문의 남매가 자신보다 더 세간의 관심을 받는 것을 마뜩지 않아 했다. 그는 이 남매의 평온한 삶에 상처를 내고 싶었다.
아델라이드를 자신의 왕비로 간택하여 남매를 갈라놓은 게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꼬투리를 잡아 에드가를 고문하고 추방하여 아델라이드의 곁에서 영원히 떨어뜨려 놓았다. 자신의 왕비가 다른 남자와 조금도 가까이할 수 없도록. 그가 오라버니일지라도 말이다.
소니아를 토닥이다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힌 모양이었다. 잠시 가슴이 먹먹해졌던 아델라이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니아, 이러고 있을 새가 없어. 도망치자.”
“왕비 마마!”
“자, 일단 나를 대신할 시체가 필요해. 이리 와!”
아델라이드는 침실 문밖에 쓰러져 있는 하녀의 시체를 끌고 들어왔다. 소니아는 얼른 그 시체를 같이 끌었다.
“마마. 이 시체는…?”
“국왕이 죽였어. 나를 불렀는데 늦게 모시고 왔다고.”
짧은 한숨을 내뱉은 아델라이드는 화장대의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으로 손을 깊숙이 넣어 상자 하나를 꺼냈다. 꽤 크기가 있는 목재 상자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상자의 뚜껑을 여니 고운 자주색의 벨벳 주머니와 평민 남자들이 입는 평상복이 들어 있었다.
“마마, 어쩌시려고요?”
“소니아,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소니아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왕비 아델라이드 죠세파 로렌느 드 발루아는 죽었어. 그 왕비는 저 시체가 대신할 거야. 난 이제부터 남장을 하고 에드가를 찾아 나설 거야. 얼마 전 궁에 왔었던 세스앙 상단 알지? 그 상단에 있던 여자에게 들은 얘긴데, 은빛 머리의 젊고 아름다운 남자가 카롤링거 황제의 곁에 있대. 그 은발의 사내가 에드가인지 확인해야 해. 난 카롤링거 황제 진영의 노예로 들어갈 거야.”
“마마, 그건 너무 위험해요.”
“소니아, 서둘러. 곧 황제의 군사들이 들이닥칠 거야. 다행히 카롤링거 황제는 투항하는 시녀와 시종들은 죽이지 않고 군영의 노예로 쓰거나 귀족들에게 하사한대. 그러니 너와 난 시종과 시녀로 투항하면 돼.”
“마마. 하지만….”
아델라이드가 벨벳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꺼냈다. 소니아는 말을 멈추고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말로만 듣던 마력석이었다.
마력석은 에드가가 아델라이드에게 준 결혼 선물로, 대륙을 샅샅이 뒤져도 쉽사리 구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진귀한 물건이었다.
마력석에는 외모를 바꿀 수 있는 마력이 숨어 있었다. 카이스턴 국왕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이 있을 때 신변의 위험이 닥칠 것이니 그때 쓰라고 에드가가 구해 준 것이었다. 가장 강력히 마력을 일으키면 최장 2년간 외모를 위장할 수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마력석을 들고 에드가가 가르쳐 준 주문을 중얼중얼 외웠다.
그러자 금빛 머리가 붉은 갈색으로 변하고, 푸른빛이 도는 회색 눈동자는 암갈색으로 변했다. 제국에서 가장 흔한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이었다. 바꿀 수 있다면 피부 색깔도 좀 가무잡잡하게 바꾸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선에 제법 각진 턱 선이 더해졌다. 코의 선도 곧고 우아하기만 하던 것이 오뚝해지며 힘이 있어 보였다. 알게 모르게 무언가 변해 있었다.
또한, 볼록했던 가슴이 사라졌다. 마력석으로 바뀐 가슴은 남자의 납작한 가슴과 같은 모양이었다. 웃옷을 벗어도 영락없는 남자의 상체이므로 여자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이 평범하게 바뀌고 가슴이 없어졌다고 해도 뽀얗고 고운 피부와 정갈한 외모, 육체의 고운 선은 여전했다. 아직 덜 자란 미소년 같은 외모였다.
“마, 마마. 가슴이!”
“…….”
아델라이드는 말없이 희미하게 웃기만 하였다. 소니아는 놀라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움직이더니 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그럼… 아래…는요?”
“…생겼어.”
“그, 그게요?”
“응. 탄로 날 걱정은 하지 마.”
소니아는 얼떨떨한 마음에 눈만 깜빡였다.
“마력의 효능이 2년까지 지속된다고 했으니 2년이 지나면 원래의 육체로 돌아갈 거야. 그 전에 에드가를 찾아야 해.”
아델라이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녀는 사실 가슴이 지금처럼 없는 게 좋았다. 원래의 몸이었을 때 받았던 고통을 생각하면 아름다운 육체는 거추장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화장대의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빛을 받자 날이 번뜩이는, 가위였다. 머리를 한 움큼 쥐고는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 냈다.
“으흐흑… 마마….”
흔들림 없는 아델라이드에 비해 소니아는 어깨를 떨며 소리를 낮춰 울었다.
“소니아, 여기부터는 네가 해 줘야 해. 짧게 다듬어 줘.”
소니아는 소중하게 기른 머리카락을 잘라야 한다니 믿기지 않는다면서 무척이나 서럽게 훌쩍였다. 소니아가 짧게 잘라 주는 머리카락을 보며 아델라이드는 지난 2년의 모진 시간을 머리카락과 함께 버렸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쉽게 잘려 나가건만, 왜 그동안 가위를 들듯 검을 들지 못했는지 자조 섞인 웃음이 나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도 소니아는 평소처럼 능숙하게 머리카락을 잘랐다. 사내아이같이 머리가 짧아진 아델라이드는 드레스를 벗고 남자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마력석에 다시 주문을 넣어 죽은 시녀의 머리카락을 금발로 만들었다. 타국의 침입자들이 침실에 들어왔을 때, 이 남녀의 시체를 보고 왕과 왕비라 생각해 주기만을 빌었다. 소니아는 시녀에게 왕비의 드레스를 입혔다.
“자, 됐어. 소니아, 시녀와 시종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마마, 전 사람들이 시녀라고 알고 있지만 마마는 어쩌실 겁니까?”
“외성을 관리하는 시종들은 서로의 얼굴을 몰라. 그러니 외성 관리계 시종이라고 할 거야. 특히 외부 출입을 많이 하는 심부름꾼 시종이었다고 하면 크게 의심을 사지 않을 거야.”
소니아는 불안한 기색으로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소니아, 걱정 마. 다 잘될 거야. 그리고 나를 이제부터 에드가라고 불러. 난 소니아의 친구야. 우리 둘만 있을 때라도 절대 나를 마마라고 부르지 마. 아까 말했듯이 왕비는… 죽었어.”
소니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네. 당신은 죽었어요. 그런 삶을 계속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지요, 나의 아가씨.’
“알겠습니다, 에드가.”
“우린 친구야. 존대는 필요 없어.”
“…알겠어. 에드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소니아의 눈을 바라보며 아델라이드는 빙긋이 웃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친구의 눈물을 닦아 주곤 손을 꼭 잡았다.
“자, 이제 나가자! 소니아!”
아델라이드는 수에비 왕궁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