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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39)

프롤로그

왕은 밤마다 짐승이 되었다.

그가 달려들 때면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뜨거운 분노가 동시에 그녀를 엄습했다.

침실에 들어설 때마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숨도 쉬이 쉬지 못하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몸이 바들바들 떨려 왔지만 검을 쥔 손마디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검의 무게 때문인지, 나약한 몸뚱이 때문인지 마음과는 다르게 그녀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전하, 지금 이럴 때가 아니옵니다. 제발…. 전하!”

“오호, 지금이 어떨 때인데?”

“도성 밖에 적이 와 있다 하지 않습니까. 어서 궁의 사람들을…!”

“이 내가 도망가지 않는데 그 누가 도망간단 말이냐! 그리고 지금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는가.”

왕은 뒤틀린 입매에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검을 쥔 여인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그 모습에 여인은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전하. 전하의 뜻이 그러하다면 의연한 모습을 보이셔야 합니다. 일국의 왕답게 의연한….”

“네가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거냐! 네년의 그 고운 낯짝에 흉이라도 남겨 줘야 정신을 차릴 테지! 고 이쁜 입은 내 밑에 깔려서 울 때 빼곤 하등의 쓸데가 없어.”

“그, 그만하십시오.”

왕의 음산한 목소리는 그녀의 정신을 헤집었고, 끈적끈적한 시선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녀는 더럽고 치욕스러운 마음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 사람은 끝까지 왕답지 못하다. 사내답지 못하다. 남편도 아니다. 어느 한순간도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동물이고 짐승이다. 언제나 약하디약한 것들만 강하게 물어뜯어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고 하는, 비열하고 졸렬하기 짝이 없는 하이에나다.

왕은 그녀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킬킬거렸다.

“나와 함께 죽자! 넌 영원히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너도 그걸 알고 있지 않느냐. 네년에게 남자를 가르친 게 누군지, 육체의 쾌락을 가르친 게 누군지. 그러니 나를 잊을 수가 있겠느냐. 네가 살아 있어 봤자 적에게 잡혀 비루하게 몸을 굴리며 목숨을 구걸할 거 아니냐. 그러니… 자, 나에게 오너라. 우리 마지막을 함께 즐기고 가자꾸나.”

쾌락이라니.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비굴함을 안겨 놓고 쾌락이라니, 저놈은 미쳤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는 일국의 왕비. 너와 함께 죽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더 이상 너의 폭력에 굴복하고 싶지도 않다. 이젠 공포도 무엇도 없다. 폭력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너와의 관계는 여기서 끝이다.’

얼마나 많은 날을 치욕스럽고 무섭고 더러운 기분으로 보냈던가.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를 희롱하고,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며 악마처럼 즐거워하던 그였다. 그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날엔 침실에서 날 선 채찍질이 이어졌다. 그녀는 고문에 가까운 그 밤을 고스란히 버텨 내야 했다.

‘이제 그만 끝내자. 이 짐승을, 이 악마를 내 손으로 끝내자. 적의 손에 이 짐승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내가 끝내야 지옥에 가서도 이 끔찍한 기억이 나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검을 쥔 손을 고쳐 잡았다.

“적이 곧 왕궁에 옵니다. 저도, 전하도 죽겠지요. 그러나 전하는 그들 손이 아니라… 제 손에 죽을 것입니다.”

“하아. 그래? 네가 날 죽일 수 있다? 웃기는군. 난 너의 주인이다! 네년의 혀가 나를 주인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저 비틀린 입매를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의 이죽거림에 그녀는 항상 굴복해 왔다. 너도 어쩔 수 없을 거라는 그의 표정을 볼 때마다 나는 다르다고 외쳤으나 결국은 다르지 않았다. 폭력에 무릎을 꿇었고 잔인함에 굴복했다.

‘이젠 그런 삶을, 그런 순간을 거부하겠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년의 결혼 생활. 그동안 그녀의 내면은 거듭된 폭력으로 잘근잘근 짓이겨져 무너져 가고 있었다.

왕은 이제 그녀가 반항을 포기할 법도 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왕에게 검을 겨눴다. 검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왕비를 보며 왕이 히죽 웃었다.

“내 앞에서 나를 죽이겠다고 그 귀여운 이빨을 드러낸 것이냐? 적이 코앞에 왔으니 너와 사랑을 나누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 게다. 그러니 그 검을 내리고 이리 오너라.”

왕의 붉은 눈깔이 비정상적으로 번득였다.

‘진정 미쳤구나.’

지금 이 순간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왕을 보니 그녀는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전하. 먼저 가세요. 전 한순간도 당신과 함께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후들거리던 다리도, 부들부들 떨리던 팔도 그 떨림을 멈추었다. 눈앞의 악마를 없애야 한다는 결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올곧은 시선과 함께 그녀의 손이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가 정면을 향했다. 그의 심장을 향해.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는지 왕의 시선이 다급히 왕비를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주저하지 않았다.

검은 흔들림 없이 왕의 심장에 박혔다.

왕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왕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크흑. 큭!”

연신 피를 토해 내며 왕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것을…. 처음부터!”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턱 밑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목소리는 떨렸으나 그 영롱한 눈빛은 단호했다.

“가거라! 너 혼자 그 어두운 곳으로 가거라! 가서 네가 죽인 영혼들에게 죗값을 받아라!”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축적한 그 모든 힘을 끌어모아 그의 가슴팍에 꽂혀 있는 검을 뽑았다.

여자가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이 순간 그녀는 여자가 아니었다. 악마를 죽이는 존재일 뿐.

그녀가 검을 빼는 동안 왕이 손으로 검 날을 붙잡아 그녀를 저지하려 했으나 그의 힘이 그녀의 한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검이 완전히 뽑힌 순간, 왕의 입과 심장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아 나왔다. 그가 무릎을 질질 끌며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이를 저지하기라도 하듯,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왕의 몸뚱이를 사선으로 그었다. 피가 솟구쳐 왕의 눈동자에도 스며들었다.

“이…년! 모진… 년! 기어코 네 남편을….”

“닥쳐! 넌 남편도 왕도 아니야! 그저 미친 새끼지!”

주저앉은 그를 보며 이번엔 반대로 그녀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왕의 어깨를 발로 밀었다. 왕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그의 심장에서는 아직도 붉은 피가 흘러나왔고 위로 허옇게 뜬 눈은 감기지 않았다. 그녀는 위에서 그 감기지 않은 눈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죽으면 그저 한낱 몸뚱이일 뿐인 것을. 왜 그렇게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는지.’

그녀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저 지난 2년이 허망해서 뜨거운 눈물이 나왔다. 작게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급기야 미친 듯이 커져 왕의 침실을 울렸다.

죽였다.

내가.

이 악마를.

대륙년 564년.

수에비 왕국의 왕 카이스턴 브루나이 드 윈터스 2세.

51세의 나이로 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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