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87화 (187/187)

<187화>

-인간의 레어 따윌 왜 내가 탐험해야 된단 말이냐?

-그 인간이 테아마라스다.

-흥. 검을 든 인간이라면 몰라도 인간의 마도 따윈 인정하지 않는다.

-호오……?

역시 마법의 조종(祖宗)이라는 드래곤답게, 루인의 요청을 철저하게 무시하던 베리앙.

비셰리스마를 추적하는 일보다 드래곤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듯한 태도의 그였다.

그런 그에게 루인은 간단한 제안을 하나 했다.

-인간의 마도(魔道)에 패배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겠단 말이지?

-뭐라?

깜짝 놀라 달려온 생도들이 그런 루인의 목소리를 똑똑하게 듣고 말았다.

막돼먹은 루인이 감히 마법의 조종 드래곤을 향해 마도 대결을 신청해 버린 것.

-마장기를 믿고 까부는 것이냐?

-마장기를 꺼내 드는 순간 그건 마도 대결이 아니겠지. 지금 내 마도를 모독하려 드는 것인가?

-허……?

그래서 벌어진 지금의 상황.

사자성으로부터 약 5km 정도 떨어진 곳.

광활한 벧엘 분지의 중심에서 루인과 베리앙이 차가운 눈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대체 대공자는 무슨 생각일까요?”

소에느의 질문에 카젠은 답을 할 수 없었다.

홀로 드래곤과 맞상대하려 했던 기사(Knight)는 많았다.

실제로 역사 속의 영웅들 중에서 공식적인 드래곤 슬레이어로 기록된 기사만 해도 셋이나 됐으니까.

하지만 드래곤과 순수한 마법 대결을 벌였던 마법사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용언 마법은 인간의 백마법 체계보다 수만 년은 앞서 있는 상위의 권능.

인류의 문명이 마장기를 탄생시킨 시점부터 비록 드래곤 일족의 영향력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용언 마법이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루인…….’

카젠은 혼란스러웠다.

녀석이 대전사로 나섰던 기수 쟁탈전부터 왕립 무투대회의 우승, 태연하게 가문에 드러낸 마장기 등.

한데 이제는 드래곤과 마법 대결까지 벌이다니…….

평생을 비밀스럽게 살 것처럼 굴더니, 자신을 드러내겠다고 결심한 시점부터 루인의 행보는 모든 것이 파격적이었다.

이 일들이 베른 공작령을 넘어 주변 왕국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끼칠 사안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터.

왜 이런 엄청난 짓을 연속으로 벌이는지, 저 자그마한 머리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도대체가 파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일단 대결의 여파를 가늠할 수 없어요. 몰려든 가문의 혈족들과 기사들을 모두 물릴게요.”

벧엘 분지를 새까맣게 둘러싸고 있는 사자성의 기사들.

사자성의 수비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기사들이 지금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데 카젠의 반응은 의외였다.

“불허한다.”

“네?”

“루인을 잘 알지 않느냐. 아무런 생각 없이 이 정도 판을 깔 아이가 아니다.”

소에느가 표정을 굳혔다.

기사들의 생사를 책임져야 할 가주로서 할 대답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의 위험까지 대비해야 하는 것이 군주의 도리.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오라버니가 저 수천 명 기사들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일까?

아니. 루인을 향한 신뢰가 그만큼 지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갑작스럽게 들려온 시론의 외침 소리.

“루인의 마력 칼날이다!”

천천히 분지의 허공을 수놓고 있는 수천 개의 마력 칼날들.

그 압도적인 위용 앞에, 분지에 모여든 모든 기사들이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 * *

당황해하는 베리앙.

“고작 마력 칼날 따위로 이 비셰울리스를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감히 마법의 조종을 앞에 두고 2위계의 초급 절단 마법, 마력 칼날이라니.

“물론.”

“뭐……?”

지금까지 쭉 지켜만 보고 있던 쟈이로벨이 참지 못하고 루인을 말렸다.

-혈기왕성한 성체(成體) 시기의 용이다. 너무 자극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드래곤 일족 중 순수한 전투력은 가장 떨어진다고 알려진 백룡족.

하지만 그들의 용언 마법은 절대로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드래곤 특유의 브레스나 육체적인 능력을 배제한다면 가장 강한 적룡족(赤龍族)과 비견되는 용언 마법을 보유한 일족.

한데 그런 고고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백룡족의, 그것도 왕성한 용마력을 자랑하고 있는 에이션트 드래곤에게 루인은 지금 마력 칼날로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루인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은 아직 이번 생에서 강자라 불릴 만한 존재와 전투를 벌인 적이 없었다.

어설픈 초인을 이룩한 월켄은 사실 군단장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지.

그나마 악제의 사념이 직접 운용하던 브훌렌을 상대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 역시 과거에 상대했던 군단장들에 비할 수는 없었다.

악제가 아무리 강해도 사념체인 브훌렌 자체가 너무 약해 본체의 능력을 백분의 일도 발휘할 수 없었던 것.

하지만 성체에 이른 드래곤이라면 충분히 군단장급의 강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루인의 의도를 읽어 낸 쟈이로벨이 우려를 표시했다.

-무모한! 극단적인 방법으로 경지를 돌파하려 든다면 그 나약한 인간의 육체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다. 쟈이로벨.’

초대 사자왕 사홀이 자신에게 남긴 미지의 심상(心想).

사실 자신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이 마력 칼날은 대마도사였던 자신이 즐겨 쓰던 방식이 아니었다.

헤이로도스의 술식이 있었다지만, 이건 순전히 사홀이 남긴 심상의 영향.

이렇게 대규모로 마력 칼날을 운용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한 비효율이었다.

지금까지 루인이 이런 비효율적인 마도를 끝까지 유지했던 것은 사홀이 남긴 유산에 대한 일종의 존중이자 경의였던 것.

-죽음의 위기로 스스로를 몰아넣고 무의식의 기저(基底)를 꺼내 보겠다는 뜻이냐?

간혹 극단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초인적인 힘.

하지만 그건 마법사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선택이었다.

저 철두철미한 루인이 고작 확률에 기대는 방식을 선택할 줄이야.

-네놈답지 않은 무모함이군. 미리 말하겠다. 지금의 나에겐 널 부활시킬 진마력이 남아 있지 않다.

발카시어리어스의 존재감을 흉내 내기 위해 진마력을 모두 소모해 버린 상황.

이번 대결에서 죽는다면 더 이상 루인에게 남은 기회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루인은 결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저 백룡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그의 형제, 비셰리스마를 살해한 원흉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을 죽이진 못할 것이다.

인간에게 일족이 살해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드래곤 일족.

드래곤의 그런 습성을 잘 알고 있는 루인은 베리앙이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테아마라스의 유적.

그 위험한 미지(未知)를 살피기 전에 반드시 전생의 경지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이번 원정의 최소한의 요건.

그리고.

‘아버지.’

루인은 저 멀리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사자왕 카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라면 자신이 운용하는 마력 칼날의 움직임에서 초대 사자왕이 남긴 심득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아버지가 아니라도 상관은 없었다.

마법사인 자신보다는 저 사자성의 기사들에게 기회를 더 주고 싶었다.

물론 월켄에게도.

“너는 백룡 일족을 무시한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게 될 것이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베리앙.

곧 그의 주위로 엄청난 용마력이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드드드드드드-

거칠게 흔들리는 분지.

용마력 특유의 활성 파장이 사방을 휘몰아친다.

살갗이 저며 들 정도의 압박감 속에서도 루인은 희게 웃으며 마력 칼날을 통제했다.

이내 희뿌연 빛살에 휘감기는 루인의 전신.

극한으로 구동된 혈주투계, 그리고 예의 헤이스트(Haste)였다.

쏴아아아아아-

재빨리 활성 파장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루인이 모든 마력 칼날 하나하나에 자신의 염동력을 드리웠다.

흰자위가 모두 사라진, 새까맣게 변해 버린 루인의 두 눈.

염동력이 극한으로 구동되면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그 순간, 술법의 정체조차 알 수 없는 베리앙의 용언 마법이 현신한다.

원뿔 모양의 거대한 충격파가 분지의 땅거죽을 모조리 뒤집는다.

콰콰콰콰콰콰콰!

피할 방위조차 계산되지 않는 지각 해일.

루인의 모든 마력 칼날들이 일제히 화망(火網)을 이루어 한곳을 돌파한다.

푸확!

루인의 기다란 잔상이 지각 해일 뚫고 베리앙을 향해 짓쳐 든다.

어느새 마력 칼날들은 거대한 창살처럼 뭉쳐져 베리앙을 타격하고 있었다.

카아아아아아앙!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그야말로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에 분지에 모인 모든 기사들이 두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그 강도를 추측할 수 없는 강력한 배리어가 베리앙의 모든 방위를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막대한 충격파에 루인이 피를 한 움큼 토해 내며 물러나고 있었다.

“쿨럭!”

일제히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마력 칼날들.

루인이 악착같이 이를 깨물며 염동력을 드리웠다.

긴장감에 전율이 치민다.

자신이 아는 최고의 배리어계 마법은 ‘이벨루스의 방패’.

최후의 현자라고 불렸던 유클레아의 전매 특기인 그 마법은 인류 연합의 초인들을 몇 번이나 구해 준 절대적인 방호 마법이었다.

한데 이 정도라면 그런 이벨루스의 방패 이상.

흑마법과 백마법을 통합하여 완성시킨 융합 마력이 무슨 장난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날 도발한 것이냐?”

모든 방위에 배리어를 드리운 채 무심한 눈빛으로 서 있는 베리앙.

마장기라면 몰라도 인간의 마법은 여전히 미개했다.

고작 백 년여를 사는 인간의 마도로는 오천 년을 살아온 에이션트 드래곤의 마도를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법.

놈의 운명에 얼마나 거대한 기적과 우연이 겹쳐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 봤자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베리앙이 하나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내 베리앙의 눈빛에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한다.

찌직.

쩌저적.

서서히 균열하기 시작하는 배리어에 베리앙은 일시적으로 사고가 마비되어 버릴 정도로 경악했다.

술법, 아니 디스펠을 펼친 흔적조차 느끼지 못했다.

도저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이, 이게 무슨……?”

그제야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을 느끼기 시작한 베리앙이 전력으로 용마력을 운용한다.

가까스로 술식의 붕괴를 막은 베리앙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경악성을 외쳤다.

“인간. 설마 이건…… 염동력이냐?”

그것은 분명 술식을 파괴하는 디스펠의 운용이 아닌 순수한 염동력.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신의 회로를 자연스럽게 해체하던 그 힘은 분명한 염동(念動)의 힘이었다.

정말 말이 되질 않는다.

디스펠의 술식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그저 단순한 염동력으로 술식을 해체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건가?

게다가 이 배리어계 마법은 백룡 일족이 자랑하는 최고의 방호 술식, 백룡마벽(白龍魔壁).

한데, 이어진 기이한 감각에 하마터면 베리앙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흡!”

순식간에 상념 속을 파고드는 묘한 이질감.

천천히 자신의 정신을 해체하려 드는 그 나긋한 감각에 베리앙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정신 방벽을 점검했다.

“가, 감히……!”

수천 년을 갈고닦은 드래곤의 정신.

감히 그런 드래곤의 정신 방벽을 뚫겠다니?

아니 그것보다 인간이 어떻게 정신 마법을?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사악하게 웃고 있는 루인.

이내 그의 두 눈에 대마도사의 살기가 진득하게 어린다.

“날 시험하듯 상대하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거다.”

“뭐, 뭐라?”

본체가 아닌 폴리모프 상태에선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본래의 능력을 십분의 일도 발휘할 수 없는 법.

“계속 그 폴리모프를 유지할 생각이라면 좋아. 나로선 환영이지.”

씨익.

“그렇지 않아도 드래곤 하트를 한번 연구해 보고 싶었거든.”

대마도사의 괴이한 살기에.

베리앙은 선 채로 전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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