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최초의 사자왕 사홀과 평생토록 우정을 나눴던 반려, 비셰리스마.
하이베른가의 구성원이라면 그런 백룡의 전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갑작스레 하이베른가에 나타난 백룡은 그들이 역사에서 배운 비셰리스마와 한 치의 다름도 없는 아름다운 자태였다.
고귀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의 동체.
수천수만 개의 백린(白鱗)이, 강렬한 햇살 아래 반짝이는 그 광경은 그야말로 태초의 경이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내 가주 카젠과 그의 휘하 기사들이 나타났다.
하이베른의 전설적인 백룡이 나타난 판국이라 모든 혈족들이 한달음에 달려 나오고 있는 것이다.
방계와 봉신가의 기사들, 사자성의 수비대까지 한결같이 경외 어린 표정으로 대공자의 별장으로 모인 상황.
그때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울렸다.
쿠쿠쿠쿵!
<그 시건방진 대공자 놈은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이냐!>
새롭게 대공자의 별장에 세운 주춧돌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보다, 귓가에 울린 백룡의 첫마디 용언(龍言)이 카젠을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 하이베른의 사자성에서 대공자라 불릴 만한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
‘루인……?’
회귀의 사실, 초인 기사를 꺾은 마도, 알칸 제국에 비견되는 마장기들, 거기에 드래곤과의 인연도 있었단 말인가?
이제는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여겼건만 무슨 양파도 아니고 계속 아들의 엄청난 면모가 튀어나온다.
한데 문제는 저 미지의 백룡이 보여 주고 있는 태도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위대하신 존재이시여. 저는 하이베른가를 경영하는 자, 카젠이라고 합니다.”
극진한 예로 맞이하는 카젠.
한 국가의 존망마저 뒤흔들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드래곤이었다.
아무리 카젠이 대공가의 주인이었지만 그런 위대한 존재를 함부로 대할 순 없는 것.
<꽤나 예의 바른 귀족 인간이로군. 한데 가정 교육은 왜 그따위냐?>
“…….”
루인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사고는 허구한 날 녀석이 치는 것 같은 데 어쩐지 뒷수습은 모두 자신과 가문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카젠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유년 시절 내내 아팠던 아이입니다. 세상의 예절을 배우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한데 그때.
“어이가 없군. 센 척하길래 꽤 오래 산 고룡(古龍)인 줄 알았더니 이제 갓 에이션트에 들어선 애송이잖아?”
어느새 나타난 루인이 뒷짐을 진 채로 고아하게 백룡 비셰울리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에이션트 드래곤의 상징인 두갑(頭鉀)이 자라나고 있었으나 아직은 갈퀴에 불과한 모습에 실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다.
화아아아악!
거대한 비셰울리스의 동체가 눈부신 빛살에 휩싸이더니 이내 고아한 노인으로 화했다.
마탑의 가장 드높은 층계에 매달려 있는 초상화의 주인, 대현자 ‘베리앙 다에송’으로 폴리모프한 것이다.
소드 힐과 더불어 르마델의 또 다른 수호 집단 옴니션스 세이지(Omniscience Sage)의 수호 마도사.
그것이 비셰울리스가 인간으로 유희하고 있는 가상의 인물이었다.
백룡 비셰울리스, 아니 대현자 베리앙이 루인을 진득하게 노려봤다.
“넌 제롬에게 ‘대존재’를 불러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들었다.”
“제롬……?”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나 보아하니 소드 힐의 노인이 지닌 본명인 모양.
“그만한 마도(魔道)를 이뤘다면 마도의 맹약을 중히 여기는 마법사일 터. 한데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날렵한 눈매로 사자성의 이곳저곳을 훑고 있는 베리앙은 한눈에 봐도 경계하는 태가 역력했다.
피식.
“살펴봐도 대존재 같은 건 없다. 소환 따윈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런 루인의 대답에 베리앙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했다.
에이션트 드래곤을 바보로 취급해도 유분수지 설마하니 마왕급 이상의 마족이 지닌 존재감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데 왜 네가 왔지?”
그 말에 더욱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베리앙.
자신의 방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한 루인의 태도에 묘한 기시감을 느낀 것이다.
“인간. 설마 우릴 꾀어내려고?”
“꾀어내다니 섭섭하게. 마땅한 연락 수단이 없었을 뿐이야.”
분명 마왕, 아니 마신 이상의 존재감이었다.
파수꾼들이 먼저 확인했고 북부 전체를 울리던 광포한 힘의 본질을 자신 역시 분명하게 관찰했다.
루인의 말대로라면 그런 마계의 고위 존재를 고작 자신들과 연락하기 위해 수하처럼 부렸다는 뜻이지 않은가?
마계의 드높은 존재들은 드래곤보다도 더한 자존감으로 유명하다.
에이션트 드래곤이 지닌 상식과 지혜 체계로는 인과의 귀납(歸納)이 납득되지가 않는 것이다.
“인간! 설마 내가 마계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만해라. 용.”
하이베른가의 혈족들과 기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상황.
함부로 마계를 운운하는 베리앙이 못마땅했는지 루인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너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소드 힐…… 아니 제롬은 어디에 있지?”
아무리 유희를 오래했다고 해도 드래곤 특유의 사고 체계는 인간과는 확연히 달랐다.
매사에 고고한 자존감을 드러내는 드래곤은 상대하기가 까다롭기보다는 그냥 말을 섞기가 싫은 상대.
그때 카젠이 다가왔다.
“대공자는 언행과 몸가짐을 올곧게 하라.”
엄정한 아버지의 표정에 금방 착잡해지는 루인.
드래곤이 까다로운 것은 특유의 고아한 자아도 있었으나 그것보단 인간들에게 자리 잡은 숭배의식이 더 큰 문제였다.
아직도 대륙의 곳곳에서 몇몇 고룡들은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을 정도였다.
더욱이 이곳은 하이베른가.
베른가의 혈족들에게 백룡이란 초대 사자왕 사홀과 맞먹는 존재감으로 다가갈 터였다.
루인은 또 한 번 짜증이 치밀었다.
“에어라인에선 그렇게 신비롭게 굴더니 왜 여긴 본체로 찾아온 거지?”
“인간의 몸으로 위험한 전투 상황을 맞이하는 건 그야말로 바보 같은 선택이지.”
순간 루인은 소름이 돋았다.
하마터면 쟈이로벨이 이 무식한 드래곤 놈과 사자성에서 싸울 뻔한 것.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면 이 사자성이 초토화되고도 남음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내게 특별한 장소다. 비셰리스마의 수호 가문이니 내게는 남도 아니다.”
카젠의 동공이 급격하게 확장된다.
“혹 저희 가문의 수호룡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백룡은 극도로 희귀한 드래곤 일족.
어쩌면 눈앞의 드래곤이 하이베른가의 수호룡을 알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그를 더욱 친근하게 부르고 있었다.
“너희 인간과 우리는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 설명하기가 조금 곤란하군. 굳이 너희 식으로 말하자면 형제다. 같은 분에게서 나고 자랐지.”
마력으로 창조되는 드래곤은 혈연관계라는 개념이 희미했다. 가족보다는 동족의 개념이 조금 더 강한 것이다.
그래서 드래곤들은 자신을 창조해 준 존재를 어미룡보다는 존경하는 고룡으로 인식한다.
금방 희열의 감정으로 얼룩지는 카젠의 표정.
“……비셰리스마 님은 살아 계십니까?”
불행하게도 그 답은 비셰울리스도 알지 못했다.
이 르마델 왕국에서 지내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
지고룡 카알라고스 님에게 받은 임무도 있었지만 일족의 뛰어난 드래곤이자 장차 백룡족을 이끌 후보인 비셰리스마를 추적하기 위함이었다.
“모른다.”
함께 자랐지만 비셰리스마는 다소 괴팍하고 특이한 성격을 지닌 백룡이었다.
숨기로 작정했다면 신조차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었을 터.
베리앙은 그런 비셰리스마가 죽었다고 믿지는 않았다.
“…….”
베리앙의 좋지 않은 표정에서 카젠은 더 이상 희망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가장 가까운 백룡 일족조차 생사를 모른다면 세상의 어떤 존재도 비셰리스마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카젠은 곧이어 들려온 루인의 목소리에 석상처럼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을 모르고 있다니 의외로군.”
“뭐라……?”
“바, 방금 뭐라고 했느냐?”
동시에 루인을 쳐다보는 베리앙과 카젠.
루인의 담담한 눈빛이 차분하게 허공을 훑고 있었다.
“베스키아와 비셰리스마는 이미 살해당한 지 오래다.”
순간.
츠츠츠츠츠-
드래곤 특유의 독특한 마력 활성 파장, 용맥이 맥동한다.
용마력이라 불리는 이 힘은 인간과 드래곤을 구분 짓는 가장 명백한 증거.
루인이 자신의 주위에 드리워진 강력한 소음 차폐 공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인간.”
감히 드래곤 일족의 죽음을 함부로 입에 담았다.
일족의 죽음이 인간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상황은 드래곤들이 가장 민감하고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일.
“책임을 지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일어난 사실이니까.”
“알고 있는 걸 모두 말해라.”
베리앙에게서 고고한 태도마저 사라졌다.
가득 짓쳐 오는 가공할 살기.
수만 년 동안 베나스 대륙을 지배해 온 절대적인 존재, 세계의 주시자(注視者)가 루인을 향해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다.
“타이탄족은 멸족하지 않았다.”
뜬금없는 루인의 말에 베리앙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존재들, 즉 신과 닿아 있다는 점에서 드래곤 일족과 묘한 경쟁 관계에 놓여 있는 타이탄족.
그런 타이탄족은 드래곤 일족과는 오랜 앙숙 관계였다.
“당연한 일이다. 일족 중에서 그들의 멸족을 믿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의 손에 멸족당할 종족은 아니지.”
루인이 웃었다.
“그래서 놈들이 어디에 있는 줄은 파악하고 있고?”
그들이 어떤 몰락 과정을 겪었는지는 드래곤 일족들에게도 미스터리였다.
추측만 무성할 뿐 자세한 실체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혼혈 타이탄족이 몇 차례 등장했던 사실이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인간 문명의 틈에 섞여 본래의 혈통을 잃어버린 존재들.
그 옛날 드래곤 일족들 중에서도 그런 자들이 있었다.
인간과 사랑하여 섞여 버린 자들.
본래의 권능을 잃고 오래전에 인간화되어 버린, 그 옛날 용족이라 불렸던 그들은 섭리를 저버린 추악한 존재들이었다.
타이탄족도 인간화되었다면 그런 퇴화한 용족 따위와 다름없는 터.
베리앙의 얼굴에 수치심이 떠올랐다.
“하긴 어리석은 용족들의 전철을 밟고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멸족이라 할 수 있겠군. 그래서? 그들이 비셰리스마와 무슨 상관이지?”
뻗어 간 루인의 손이 아직 허공에 잔존하는 용마력을 움켜쥐었다.
“그들은 인간처럼 물과 음식을 섭취해서는 생명을 연장할 수 없다더군.”
“뭐……?”
“타이탄족의 영생에 가까운 수명을 담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 그게 바로 같은 신족(神族)의 피와 살이라던데.”
베리앙의 동공이 급격하게 확장된다.
“설마…… 그 미개한 놈들이 비셰리스마를 섭식했다는 뜻이냐?”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증언이 있었다.”
“그게 누구냐!”
그 증언자는 바로 초대 사자왕 사홀.
하지만 루인은 굳이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싶진 않았다.
답답했는지 다시 베리앙이 소리친다.
“비셰리스마를 섭식한 타이탄들은 지금 어딨느냐!”
“글쎄.”
하이렌시아가의 혈족 틈에 숨어 있다고 예상되는 타이탄들은 표면적으로 활동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루인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과거, 멸망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 타이탄족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머나먼 고대, 그들을 멸망으로 이끈 존재는 다름 아닌 테아마라스.
즉 그들 역시 악제의 적(敵)이라는 뜻이었다.
소드 힐과 같은 수호자 집단처럼, 타이탄족 역시 멸망의 때 이전에 악제에 의해 소탕되었을 확률이 높은 것이다.
“정말 알고 싶나?”
여전히 끈적한 눈빛을 빛내고 있는 베리앙.
“나와 던전 하나 탐험하자.”
“던전……?”
베리앙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을 때 루인이 예의 사악하게 웃었다.
“비셰리스마를 죽인 타이탄은 그 후에 말해 주겠다.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