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루인은 소드 힐의 노인을 만날 방법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많다면야 여러 방법들이 있겠지만 생도들이 마장기를 다루는 것에 익숙해지면 곧장 테아마라스의 유적으로 떠나야만 하는 상황.
또한 생도들이 언제 마력 폭주를 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가문을 비우는 것도 힘들었다.
-개운하군.
오랜만에 들려온 쟈이로벨의 영언.
정말 늘어지게 잔 듯 꽤 기분이 좋아 보인다.
벌레왕 아므카토가 황급히 반응했다.
-ѥѯ ҁҁҙѹӂ ӝғғҕѹѷ!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경배.
공용어로 해석하자면 ‘기침하셨습니까! 존귀한 군주이시여!’ 정도가 되겠다.
이제는 혈우 지대의 권속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쟈이로벨을 자신의 군주로 대하고 있는 것.
루인이 무시하고 상념을 이어 나가자 쟈이로벨의 예의 삐딱한 영언이 다시 들려왔다.
-아는 척도 안 하는 것이냐?
“비밀을 꽁꽁 감싸고 있는 놈이 누군데.”
루인은 아직도 마음이 풀리지가 않았다.
성녀와 있었던 일을 끝까지 비밀에 부치는 쟈이로벨의 행동은 배신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
-조급하게 굴지 마라.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모두 알게 될 일이다.
“어차피 알게 될 일? 그럼 미리 말해 주는 게 더 쉽지 않나?”
-본 마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계에 있는 이상, 나 역시 맹약에 묶이는 몸이니.
“……맹약?”
아르디아나를 만난 일에 맹약을 운운한다고?
쟈이로벨이 맹약을 언급한다는 건 존재들의 입김이 닿아 있는 사건이라는 뜻.
루인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은 악제에 의해 고통받는 인간들을 끝까지 외면했던 신들.
한데 아르디아나가 그들과 관련 있다니?
순간 루인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설마 렌시아가에 존재의 ‘현신’이 있었나?”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계속 침묵을 유지하는 쟈이로벨.
그러나 만 년 이상 쟈이로벨과 함께 지낸 루인은 그의 침묵에 담긴 의미를 곧장 읽어 낼 수 있었다.
“음…….”
지금 시점에서 존재들이 인간의 일에 얽혀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엄청난 정보.
“그들이 인간들의 일에 관심이 있었다니 의외로군.”
어떤 말을 해도 일체의 반응을 하지 않는 쟈이로벨이었다.
쟈이로벨이 이 정도로 조심할 정도라면 이번 일에 상당한 격(格)을 지닌 존재가 얽혀 있음이 틀림없었다.
일단은 이런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수확.
“더 이상 대화해 봤자 네게서 나올 대답은 없겠군.”
-이해해라.
다시 소드 힐의 노인을 만나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하는 루인.
-뭘 그리도 고민하는 것이냐?
루인이 앞으로의 계획을 간단하게 밝히자 쟈이로벨은 잠시 침묵했다.
-감이 없어졌군. 간단하게 해결될 일을 이리도 고민하고 있다니.
“방법이 있다는 거냐?”
-멍청한. 네놈이 벌였던 강마 의식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던 인간이다. 그 인간이 수호자 집단에 속해 있다면 이 북부 일대를 관장하는 파수꾼일 확률이 높지.
“그래서? 지금 나더러 뭐 강림 의식을 한 번 더 하라는 소리냐?”
소환자의 생명력을 절반이나 앗아 가는 강마(降魔)의 진.
융합 마력을 완성하지 못했을 때 혈주투계를 무리하게 운용해 왔던 것을 생각하면 30살까지도 버틸까 싶은 상황이었다.
그 전까지 과거의 경지를 되찾지 못한다면 평범한 인간의 절반도 살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이다.
고작 소드 힐의 노인을 부르기 위해서 그런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을 할 순 없었다.
-안 본 사이에 왜 이렇게 멍청해진 것이냐? 강마의 진에 인간의 생명력이 소모되는 건 애초에 진마력을 대체하기 위한 수단. 가짜에 불과한 네놈의 융합 마력은 소용없겠지만 이 마신의 진마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의식이다.
본인이 직접 강마의 진을 소환하겠다는 쟈이로벨.
그제야 루인은 녀석의 본심을 읽어 냈다.
이 빌어먹을 놈이 이 와중에도 강마의 진에 담긴 대악신 발카시어리어스의 지혜를 탐하고 있는 것이다.
예의 사악하게 웃는 루인.
“그래서? 강림한 발카시어리어스를 감당할 자신은 있고?”
마신들의 지배력 따위는 단숨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초현실적인 마계의 신격.
그런 발카시어리어스는 혈우 지대 따윈 권능 한 방으로 소멸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악신이었다.
자칫 그의 비위를 거슬렀다간 끔찍한 재앙을 맞이할 수도 있는 일.
-흥! 상의드릴 일이 있다!
피식.
“놈은 마신들의 분쟁에 관심이 없을 텐데? 생각 잘해. 너 그러다 혈우 지대가 통째로 날아가는 수가 있다.”
-어차피 절반이나 므드라 놈에게 빼앗긴 상황이다. 더 나빠질 것도 없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상황인데 쟈이로벨까지 성가시게 굴어 대니 짜증이 치밀었다.
루인이 의식을 닫기 위해 이미지에 빠져들자 이내 다급한 쟈이로벨의 영언이 이어졌다.
-내 마법부터 헬라게아까지! 이 쟈이로벨의 모든 것을 가져가 놓고 정작 네놈의 것은 왜 하나도 나누려고 하지 않는 것이냐!
순간, 루인의 눈빛이 시리도록 투명해졌다.
“넌 알 수 없겠지. 지쳐 병들어 가는 나를 네가 어떤 식으로 유혹하고 길들여 왔는지를.”
루인이 쟈이로벨에게 마음을 연 것은 악제와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서였다.
그 전까지는 결코 좋은 관계라 할 수 없었다.
한때 악제보다 더 증오했던 대상.
“과거를 알지 못하는 네놈에겐 안된 일이겠지만 불행히도 난 너의 모든 것들을 기억한다. 마음 같아선…… 됐다. 그만하지.”
루인의 광대한 영혼이 순간적으로 사나워졌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느껴지는 것은 분명 거대한 증오.
자신을 향한 애증의 단면을 읽은 쟈이로벨은 결국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뻔하다.
대가 없는 마신의 권능은 존재하지 않는 법.
루인이 자신과 계약했다면 늘 그랬듯 여느 재물처럼 다뤄졌을 터였다.
증오를 부추기고 영혼을 타락시키며 생명력을 탐닉하는 그 과정은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일.
그런 살벌한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었는지, 아므카토가 벌레들이 보내오는 정보를 설명하며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그때.
츠츠츠츠츠.
루인의 정수리 부근에서 보랏빛 귀화가 흘러나온다.
흉측하고 괴기스러운 마신의 강림체가 스스로 현신한 것.
한 차례 루인을 바라보던 쟈이로벨이 서서히 진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어차피 그 수호자 인간 놈이 느낀 건 강마의 진에서 흘러나오는 힘이 아니라 발카시어리어스 님의 존재감이지 않느냐.>
쟈이로벨의 의도를 읽어 낸 루인이 곧장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대악신의 존재감을 흉내 내 보겠다는 거야?”
<진마력의 소모가 막심하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피식 웃음이 터져 버린 루인.
꽤 미안한 모양이다.
비록 순간이라고 해도 우주적인 신격을 흉내 내는 일은 심각한 후유증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됐다. 고작 이 정도 일에 네 진마력을 소비하고 싶진 않아.”
그러나 쟈이로벨은 말없이 진마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뜨겁게 타오르며 가공할 열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촤아아아아-
별장 앞 호수가 순식간에 기화되며 바닥을 드러냈다.
쟈이로벨의 주변이 용암으로 들끓는다.
모래나 자갈 따위가 모조리 융해된 것이다.
비록 강림체였으나 극한으로 발휘된 혈우의 권능은 가공 그 자체였다.
-이, 이것이 혈우의 권능……!
비명 섞인 아므카토의 외침.
혈우 지대의 군주, 쟈이로벨의 권능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림체로 구현한 권능이 이 정도라면 마계의 본체로 발휘되는 권능은 어느 정도일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극한까지 구현된 마신의 존재감.
그 가공할 권능이 사자성을 넘어 몽델리아 산맥까지 뻗어 나갔을 때.
결국 쟈이로벨은 모든 진마력을 소진하고 루인의 영혼으로 되돌아갔다.
곧장 기겁한 표정의 카젠과 월켄, 몇몇 고위 기사들이 대공자의 별장으로 달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
“루인!”
“대공자님!”
끔찍한 것이라도 본 것마냥 아직도 전율하고 있는 카젠을 바라보며 루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손사래를 쳤다.
“별일 아닙니다.”
“뭐……?”
살면서 이런 거대한 존재감을 경험한 적이 없는 카젠으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
마치 신이 강림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는데 아무런 일도 아니라고?
“정말 별일이 아닙니다. 보세요. 제가 무사하지 않습니까?”
“허…….”
월켄이 별장의 이곳저곳을 살핀다.
“아무 일도 아닌 것치고는 주변이 너무 참혹하군.”
호수의 수차를 받치고 있던 거대한 암석이 통째로 녹아 흘러내려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직도 별장의 바깥쪽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암으로 뒤덮여 있는 상태.
기화된 호수 물 역시 별장 전체를 뜨거운 안개로 뒤덮고 있었다.
“네 마법인가?”
“……그런 셈이지.”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월켄은 굳이 묻지 않았다.
“너도 사람이군. 이 정도로 제어할 수 없다면 실전에서는 무용지물이겠지.”
카젠이 다시 반응했다.
“정말 그 존재감이 너였단 말이냐?”
“그렇게 됐습니다.”
사고를 치고 숨어 버린 쟈이로벨에게는 화가 났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훌륭했다.
식은땀이 절로 흐를 정도로, 순간이나마 재앙에 가까운 대악신의 존재감을 정말로 흉내 낸 것이다.
“네가 아무런 연유도 없이 이런 짓을 벌이진 않을 터. 이유라도 알려 주지 않겠느냐?”
소드 힐의 노인을 부르는 일은 숨길 수가 없었다.
쟈이로벨의 존재감에 경악했다면 어차피 이곳으로 득달같이 달려올 테니까.
루인의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 더욱 황당한 표정으로 굳어 버린 카젠.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소드 힐의 은퇴자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고의로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뜻이냐?”
“접촉하고 싶은데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무슨 황당한……!”
마법사의 권능을 무슨 신호탄처럼 활용했다고?
자신의 별장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가며?
대공자에게 이런 무모한 면이 있는 줄은 몰랐는지, 카젠은 당황스러운 속내를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애써 냉정을 되찾는 카젠.
“대공자라 할지라도 함부로 가문의 재산과 기물을 파손한다면 엄격한 가율을 피할 수는 없다.”
“처분에 따르겠습니다.”
“사흘간의 근신을 명한다.”
그야말로 솜방망이 같은 처벌에, 함께 도착한 하이베른가의 친위 기사 유카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처벌을 안 하느니만 못한 것 같습니다만.”
“시끄럽다! 유카인!”
* * *
그로부터 사흘 후.
펄럭펄럭.
거대한 무언가가 활강하는 소음에, 대공자의 별장을 복구하고 있던 이들이 동시에 하늘을 쳐다본다.
사자성 전체가 어둑해진다.
그것은 하늘을 까맣게 뒤덮고 있는 괴생명체의 거대한 양 날개였다.
새하얗고 미끈한 동체.
거대한 괴생명체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자.
내리쬐는 햇빛에 의해 은하와 같은 은백색의 비늘들이 사방으로 어지럽게 반짝였다.
극도로 아름다우며 압도적인 지상 최강의 생명체.
고고하게 사자성을 굽어보던 거대한 백룡(白龍)이 고아하게 착지하며 날개를 접는다.
철컹.
삽자루를 떨어뜨리는 데인.
“……비, 비셰리스마?”
하이베른가의 전설 속에 내려오는 수호룡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 모습.
한데.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지금 그 새끼는 어디에 있느냐?>
고아한 백룡의 입에서 처음으로 터진 창룡음(蒼龍音)은 놀랍게도 걸쭉한 욕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