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이제는 대공자의 정원이 된 유폐지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루인.
어지럽게 자란 수풀과 화초로 가득했던 호숫가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자신의 과거와 미래가 얽혀 있는 소중한 보금자리.
루인은 진실로 감회가 새로웠다.
“…….”
호숫가에 앉았다.
그리고 테아마라스의 유적에 대해 떠올렸다.
마법사의 레어(Lair).
악제와의 전쟁이 없었더라면 루인도 한때 그런 걸 만들 생각이 있었다.
대마도사의 모든 지혜와 체계를 정리하여 세상에 남기고 싶은 욕망.
마법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후일 것이다.
한데 테아마라스, 아니 악제는 대체 왜 그랬을까?
유물 추적자들을 막기 위해 가디언으로 보호하거나 마법 트랩, 마도 공학으로 레어를 보호하려는 행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한데 각국의 기사단조차 무력화시킬 정도로 극한의 방비를 해 둔 의미는 무엇일까?
자신의 지혜를 후대에 남기고자 하는, 그런 레어의 기본적인 역할에 충실했다면 그 정도로 위험한 방비까진 필요하지 않을 터.
미심쩍었다.
분명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뭔가가 숨어 있는데, 그 이유가 짐작되지 않으니 가슴이 끝없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가장 단순한 예상은 함정이라는 것이었다.
욕망을 탐하는 인간의 습성을 이용해, 끊임없이 유적으로 유인하고 그런 인간들의 힘을 소모시키려는 의도.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았다.
테아마라스의 유적이 처음 세상에 드러났을 때, 분명 각국의 왕실은 어떤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유적을 탐험했을 터.
그런 인간의 치밀한 탐욕을 생각한다면, 유적의 구조 하나하나, 가디언들의 속성, 트랩의 위치까지 모조리 밝혀져야 정상이었다.
알려진 것처럼, 그런 노력에도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면 생도들의 견학을 방치하는 것 또한 이해하기 힘든 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대체가 앞뒤가 연결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테아마라스의 유적이 가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가정에도 논리적인 허점은 많았다.
누군가가 테아마라스의 유적을 거짓으로 창조했다면 기만의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 목적 역시 희미한 것.
음모라는 것은 이익을 도출해 내기 위한 수단이고 또한 대상이 있게 마련인데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혼란스러운 건 자신의 전생에서는 테아마라스의 유적이라는 존재조차 몰랐다는 것.
이건 마치 어떤 알 수 없는 미지가 세상에 덩그러니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다른 모든 일들은 자신의 예측과 계획 속에 있었으나 오로지 테아마라스의 유적만큼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불안했다.
악제에게 행적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은밀히 유적을 탐험하겠다는 자신의 판단은 과연 옳은 것일까?
만약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럼 모든 게 끝장이다.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돌아온 자신의 운명도, 자신만 믿고 따라온 동료들의 운명도.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루인의 곁에 함께 앉았다. 월켄이었다.
조금 놀라는 루인.
“……강해졌군.”
월켄은 자신이 드리우고 있는 마력권에 감지되지 않았다.
쟈이로벨이 수면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의 영혼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겠지만 어차피 그건 마신의 힘.
“멀었다. 너에 비하면.”
월켄이 돌을 던지자 호수에 잔잔한 파문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녀석은 자신에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와는 잘 지내는 것 같더군.”
“그는 위대한 기사다.”
월켄의 두 눈에는 존경의 빛이 가득했다.
단순히 아버지의 강한 검술을 존경하는 건 아닌 듯했다.
아마도 녀석이 본 아버지의 단면은 기사의 자아(自我).
스승에게 배우지 못한 많은 것들을 아버지에게서 느끼고 있을 것이다.
“놀랍군. 네가 그런 눈도 할 수 있다니.”
“내 눈이 어때서?”
“두려움.”
공포.
악제를 상대하던 모든 이들이 매일매일 겪던 감정.
지금의 월켄이 그런 절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욱하고 치미는 감정을 자아냈다.
월켄의 고개가 기이한 각도로 비틀린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아. 왠지 짜증이 나서.”
지금의 월켄이 악제의 실체를 모른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분했다.
과거의 녀석이었다면 그저 어깨를 툭 치며 웃었을 것이다.
웃음으로 절망을 감추던 건 당시의 모두가 마찬가지였으니까.
한데.
툭-
“웃어라. 너답지 않아.”
루인이 자신의 어깨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미묘한 느낌.
그 아련한 감정에 하마터면 루인은 그 옛날의 검성으로 착각할 뻔했다.
피식.
“애송이 주제에.”
인류를 지키는 검, 위대한 검성.
그런 영웅을 흉내 내기엔 아직 녀석은 풋내기에 불과했다.
루인의 실소를 바라보며 월켄이 덩달아 마주 웃었다.
“웃으니 훨씬 낫군.”
월켄은 제법 성장한 듯 보였다.
단순히 경지의 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 자체가 좀 더 성숙된 느낌이었다. 과거의 검성으로 착각될 정도로.
“옛날에도 이렇게 홀로 견디는 걸 좋아했나?”
“…….”
대마도사 루인, 흑암의 공포가 지닌 장점이자 단점.
시련을 나누지 않고 홀로 감당하려 드는 자신의 심성을, 그 옛날의 검성도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스승님이 그러더군. 속이 썩어 버린 벙어리보단 쉴 새 없이 떠드는 주정뱅이가 살기는 더 편하다고.”
사람 좋게 웃는 월켄.
“나는 언제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결국 루인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과거의 검성, 그 아련한 잔재에 갇혀 있던 대마도사의 마음이 일시에 허물어진다.
변한 것은 낡고 풍화되어 버린 대마도사의 마음일 뿐 검성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과거의 그나 지금의 그나 늘 그 자리에서 있는 같은 검성일 뿐.
마치 루인은 오늘의 감정을 깨닫기 위해 수만 년을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테아마라스의 유적에 관한 일들을 늘어놓는 루인.
묵묵히 듣고 있던 월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넌 정말 바보로군. 넌 주위에 사람이 없나?”
월켄은 정말 당황스러웠다.
소름 끼치도록 치밀하고 철저한 대마도사의 단면을 꽤나 경험했기에, 이 모든 걸 홀로 감당하려는 루인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순간 맹렬해진 월켄의 눈빛.
“이제야 알 것 같군. 네 마음은 병들었다.”
“병……?”
“그래. 병. 트라우마. 어떤 희생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네 집착.”
“…….”
반쯤은 맞는 말.
테아마라스의 유적에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희생을 최소화하고 싶은 것이 자신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네 말대로 악제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면, 과연 한 치의 죽음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그 마음으로 끝까지 견뎌 낼 수 있을까?”
역시 이번 생에서도 검성의 잔소리는 듣기 싫었다.
“루인.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동료들의 죽음을 밟고 나아가야 하는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헛소리.
녀석은 기만자다.
마지막 전투.
동료들이 모두 죽어 나갔을 때, 대마도사보다 더 쉽게 무너졌던 건 바로 저 검성이었다.
“마법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철저한 실리를 따진다고 들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아. 활용할 수 있는 주변의 모든 것을 이용해라.”
피식 웃어 버린 루인.
“널 이용해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유적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널 원망하지 않겠다.”
“데려가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아니. 방금 당사자인 내가 결정했다.”
“…….”
하아.
마음 같아선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말해 주고 싶다.
남겨진 녀석이 얼마나 지옥 속에 살았는지, 얼마나 피폐해진 마음으로 과거를 후회했었는지 모두 이야기해 주고 싶다.
루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마도사는 사라져도 된다. 그러나 검성이 없는 세계는 결코 멸망을 막지 못한다.”
“미친 놈.”
“나는 결코 구심점이 될 수 없으니까.”
“이제 보니 바보가 아니라 그냥 머저리였군.”
“농담할 기분이 아니다. 월켄.”
한껏 심각해진 월켄의 어조.
“잘 들어. 이미 넌 이 하이베른가의 구심점이다. 그건 아카데미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이제는 저 귀족들의 구심점이 되어 가고 있다.”
“…….”
“네 과거 속의 내가, 너보다 더한 영웅이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지.”
그가 말하는 것들이 진실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하기는 싫었다.
인정한다면 마치 눈앞의 월켄을 잃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넌 과거와는 완벽히 다른 존재다. 세계의 멸망을 경험한 유일한 자다.”
“그만.”
“아니. 들어라 루인.”
그 옛날과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녀석의 행동에 루인은 당황스러웠다.
“지금의 너는 어딜 가든 구심점이 될 것이다. 세계의 멸망을 준비하는 자는 오직 너 하나다.”
마법사의 마도를 가르치는 모든 학파의 서두에서 항상 언급되는 그 말.
마법은 ‘준비하는 자’의 권능.
다른 모든 검성의 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오직 그 하나만큼은 듣기에 좋았다.
“과거의 나…… 아니 검성의 그늘에서 벗어나라. 루인.”
순간 루인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자신의 그늘을 벗어나라는 말을 저렇게 태연하게 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놀랍도록 그 얼굴이 뻔뻔하다.
“지금 묘하게 잘난 척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 그렇게 들렸나?”
그때, 저 멀리 연무장에서 마장기 하나가 기우뚱 기울어 가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쿠우우우웅!
답이 없다는 듯, 얼굴을 감싸 쥐는 루인.
“젠장…….”
저 시론이 해 먹은 마장기가 벌써 4기.
자신이 없을 때 함부로 마장기를 운용하는 건 극도로 위험했다.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또 사고를 친 것이다.
“저 녀석들의 구심점 역시 너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네게 매료된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
결국 루인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대체 누굴 더 데려가야 한단 말이지? 왕실이나 마탑의 지원은 안 돼. 그건 다른 문제다. 놈의 이목을 끌 순 없어.”
곰곰이 생각하던 월켄이 이내 희게 웃었다.
“저번에 만난 그 노인네는 어때?”
“노인네?”
월켄이 말한 자가 누구인지를 금방 깨달은 루인이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크게 놀랐다.
“……소드 힐?”
왕국의 수호자 집단 소드 힐.
그리고 현재 브훌렌으로 유희하고 있는 비셰울리스.
“그래. 그 노인은 분명 아득한 초인이었다. 그것도 꽤 상위 경지로 느껴졌어. 그런 분의 협력만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역시 검성이다! 넌 역시 천재다!”
웬만한 기사단 전력과는 비교가 무의미한 르마델의 수호자 집단.
게다가 소드 힐의 노인과 드래곤 비셰울리스라면 누구보다 든든하다.
특히 평생을 레어를 구축하고 지키는 일에 집착하는 드래곤 종족의 특성상, 이번 탐험에 큰 도움이 될 것이 확실했다.
“내가 천재가 아니라 네가 바보인 것이다.”
루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월켄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루인은 정말 자신이 바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