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루인이 남부의 귀족들과 협상을 이어 가던 그 순간.
“끄아아아아!”
결국 시론이 마장기의 마력핵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며 폭주를 일으켰다.
곧바로 등장한 건 역시 루인의 마력 칼날 다발이었다.
수백 개의 마력 칼날이 공기를 찢는 굉음을 내며 그대로 마장기의 마력핵을 강타한다.
쏴아아아아!
콰콰콰콰쾅!
역시 마력핵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에게몬드(Egemond)가 통째로 코팅되어 있는 마력핵의 외부 크리스탈은 7백만 파스칼 이상의 물리력을 방호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최소한 이스하르콘과 맞먹거나 그 이상의 강도를 자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그 수.
마력 칼날이 모두 소모될 때면 다시 수백 개씩 재생성되며 연속으로 마력핵을 강타한다.
결국 엄청난 마찰 계수를 감당하지 못하고 외부 크리스탈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광경을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카젠.
‘마력핵이…….’
마력핵은 마장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 기관이었기 때문에 마도 공학에서는 마력핵을 보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천문학적인 가격의 에게몬드를 각종 시약과 특수한 마도 공법으로 제련한 외부 크리스탈은 사실상 물리적인 파괴가 불가능한 것이다.
한데 그런 마력핵의 외부 크리스탈을 마찰열로 통째로 녹여 버리다니!
저렇게 간단하게 마력핵을 파괴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마장기가 세계의 질서가 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 터.
마침내 카젠은 깨달았다.
자신의 아들, 루인에게는 수도 없이 마장기를 파괴해 본 경험이 있을 거라는 것을.
주우우욱-
시뻘겋게 축 늘어진 크리스탈, 마력핵이 드러나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마력 휘광(輝光)이 사방을 집어삼켰다.
한데 이어진 루인의 행동이 더욱 놀라웠다.
스스스슥-
혈주투계를 운용해 곧바로 허공으로 솟구친 루인이 마력핵을 통째로 움켜쥔 것이다.
“루인!”
비록 카젠이 마도(魔道)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마장기의 마력핵이 품고 있는 마력이 초월적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위험한 권능이 담긴 물건을 통째로 움켜쥐었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다시 지상에 착지한 루인이 태연한 얼굴로 마력핵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술식이 마력핵에 얽혀 가자.
뿜어져 나오고 있던 강렬한 휘광이 힘을 점점 잃어버린다.
대체 무슨 수법으로 마력핵의 마력 폭주를 막은 건지 카젠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마력핵의 마력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허면 이제는 쓸모없어졌다는 뜻이냐?”
“새로운 마력핵으로 거듭나기 전까진 그런 셈이죠.”
“허…….”
결국 빛을 모두 잃어버린 마력핵.
저 조그마한 강마력 엔진을 제작하기 위해, 각국은 천문학적인 재원을 들여 마정을 매입한다.
수많은 마도학자들을 갈아 넣다시피 하여 탄생시킨 마도 공학의 첨단이 실시간으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마력 폭주에서 겨우 회복한 시론이 벼락같이 달려왔다.
“저, 정말 그걸 파괴한 거냐!”
씨익.
“마력 폭주를 지켜보지 않겠다고 했잖아.”
마력핵 따윈 수백 개를 소모시켜도 상관없었다.
루인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시론이 이번 기회로 얻은 것이 있느냐였다.
“어때? 직접 몸으로 마력핵을 경험한 소감은?”
“엄청났다!”
“감당할 수 있는 마력핵의 출력을 수치화할 수 있겠어?”
“어, 어느 정도는?”
흡족하게 웃는 루인.
“훌륭하다.”
지이이이잉-
헬라게아의 아공간이 드러나며 그대로 마력핵이 소모된 시론의 진네옴 투드라를 집어삼킨다.
그 순간.
더욱 기함할 장면이 이어진다.
쿠쿠쿠쿠쿠쿠-
서서히 육중한 동체를 드러내는 새로운 진네옴 투드라.
멀쩡한 마력핵의 크리스탈이 강렬한 햇살에 사방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루인이 천천히 중력 역전 필드를 해제하자.
쿠우우우웅-
사자성 전체가 울릴 정도의 충격파와 함께 새로운 진네옴 투드라가 시론의 전면에 자리를 잡는다.
이어 들려오는 루인의 무심한 목소리.
“다시 해. 이번에는 네가 가용할 출력을 정확하게 수치화해야 할 거야.”
마장기는 매우 민감한 마도 공학의 결정체.
혼전 상황에서 마력핵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새로 제작할 마장기의 마력핵은 의복처럼 정확하게 시론에게 맞아야 하는 것이다.
“루, 루인……?”
극도로 당황해하는 시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부담감이 그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기 싫어?”
세상에 이런 미친 방법으로 마장기의 오너가 될 기회가 다시 존재할 수 있을까?
결국 시론은 온몸에 돋아난 전율을 털어 내며 악착같이 이를 깨물었다.
“하겠다! 하겠다 루인!”
“시작해.”
루인이 다시 귀족들을 쳐다보자 그들은 마치 죄라도 지은 양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들은 눈앞의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인간의 사고(思考)라는 것은 엄연히 현실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인지력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나도 극한의 비현실.
루인도 그들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제 욕심이 너무 과했군요. 먼 길을 오시느라 여독이 만만치 않으실 텐데, 며칠 쉬고 다시 이야기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긱스 공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루인이 사람 좋게 웃었다.
“하이베른가의 식탁은 생각보다 매우 훌륭합니다. 북부라고 해서 무조건 거친 음식들만 먹는 건 아니지요.”
“화, 황송합니다. 대공자님!”
이어 루인이 집사 아길레를 불러 남부 귀족들에게 귀빈실을 내주었다.
그 와중에도 루인은 치밀함을 드러냈다.
귀족의 지위와 왕실에서의 위계, 귀족 사회에서의 영향력, 가문의 규모에 따라 철저하게 차등을 두어 귀빈실을 배정한 것.
카젠은 그런 루인의 일 처리가 놀라웠다.
귀족들은 자존감의 동물.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더 좋은 대접을 받는 것을 결코 참을 수 없는 종자들이었다.
애초에 잡음 따윈 허락하지 않겠다는,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는 루인의 일 처리에 카젠은 진심으로 탄복하고 있었다.
“왜 저들을 보낸 거야?”
소에느는 그런 루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심리적으로 완전히 흔들린 자들이었다.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협상의 우위를 계속 가져간다면 분명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많았을 터.
그러나 루인의 생각은 달랐다.
“고모는 내 마장기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지?”
“다행이라는…….”
대답하다가 말을 삼키고 마는 소에느.
어째서 루인이 마장기를 소유하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보단 먼저 소름이 돋았던 것.
만약 자신을 따랐던 일파와 봉신가들이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파멸(破滅).
저 마장기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을 자신의 영지를 생각하니 즉각적으로 안도하는 마음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 고모. 그게 인간이야. 저런 상태로는 나와 합리적인 대화를 나눌 수가 없지. 그냥 지금 이 순간이 두렵거든.”
“…….”
피식.
“난 그런 인간의 공포를 이용해 협상의 우위를 차지할 마음은 없어. 무엇보다 그런 굴종은 오래가지 않지.”
“끼야아아아아!”
이번엔 다프네가 폭주했다.
쏴아아아아-
무심한 눈으로 마력 칼날을 쏘아 내던 루인이 예의 마력핵을 회수했다.
다프네에게 새로운 마장기를 꺼내 주고 돌아온 루인에게 카젠이 물었다.
“도대체 마장기가 몇 개나 있는 것이냐?”
“확실히 구동되는 건 20기입니다. 완성하지 못한 것도 몇 개 더 있습니다.”
“20기?”
일개 개인이 소유한 마장기가 무려 알칸 제국이 운용하는 규모와 맞먹는다고?
더욱 멍해진 표정의 소에느.
“말도 안 돼…….”
루인이 그런 소에느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가문에 마법사가 나밖에 없으니 그저 빛 좋은 개살구지.”
마장기를 운용하려면 현자나 고위 마도학자급의 마법사가 필요하다.
그런 마법사들이라면 죄다 왕궁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르마델에는 마도사라 불릴 만한 마법사가 몇 명 없었다.
알칸 제국이 마장기 군단을 운용하는 것은 마도사급 마법사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었다.
욕망의 화신이었던 소에느답게,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탐욕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법사들을 초빙해 오겠어!”
마장기 20기를 운용하는 하이베른가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에느.
“안 돼. 뭘 믿고.”
마법사의 마도(魔道)는 기사도만큼이나 고고하다.
그런 자들을 한 가문에 귀속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마장기처럼 위험한 마도 병기를 함부로 외부의 인물에게 맡기는 것 또한 위험 부담이 컸다.
“뭔 소리야? 어브렐가라면 믿을 수 있잖아?”
“…….”
루인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새로운 봉신가로 결속된 가문이니 아예 외부의 인재들보단 나을 테니까.
하지만 어브렐가를 본격적으로 끌어들인다는 건 결국 자신의 비밀을 어느 정도 그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뜻.
아직은 어브렐가가 그 정도로 가깝게 느껴지진 않았다.
카젠 역시 그런 루인의 생각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과는 더 신뢰가 쌓여야 한다. 쉽게 맹약을 저버리진 않겠지만 그들의 본심을 아직은 모르지 않느냐.”
“제법 잘 따르고 있잖아요? 용병대들도 아직은 우리 명령에 잘 따라 주는 편이고.”
“부족하다.”
봉신가와의 신뢰 관계는 세월로 증명되는 법.
섣불리 함께 일을 도모했다가 배신이라도 하는 날엔 세상의 수모란 수모는 모두 감당해 내야 할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소에느는 입술을 삐죽이다 마정 더미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저 마정들은 얼마나 더 있어?”
“무한이라 생각하면 편해.”
“무한?”
마계의 마정이 특이한 것은 내버려 두면 증식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같은 자리에 마정을 모아 두면 시너지를 일으키는데, 지금도 처음보단 확실히 눈에 띄게 불어난 상태였다.
소에느의 조심스러운 질문이 이어졌다.
“……가문에 내어 줄 거야?”
저 마정들은 엄연히 루인의 소유.
아무리 그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지만 개인 소유의 물건이지 하이베른가의 것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파네옴 광산을 마정 광산이라 선포한 것은 다름 아닌 나야. 실제로 시장에 저 마정들을 모두 풀 거고.”
“왜……?”
보물은 독점해야 그 가치가 상승하는 법.
저 많은 양을 한꺼번에 시장에 풀어 버린다면 희귀성이 떨어져 가격이 폭락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강해져야 하거든.”
인간의 문명은 지금 단계에서 몇 번은 더 도약해야 한다.
미래에는 결국 무용지물이 될 마장기라도 당분간은 압도적인 수로 악제를 압박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보웬 공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이제는 어느 정도 구금을 받아들인 모양이야. 언젠가부터 석방을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지 않더라고.”
표정을 굳히던 루인이 이내 소에느를 다시 응시했다.
“이제 풀어 줘. 그를 잘 이용해 봐. 다리오네가는 북부 상권을 절반 이상 거머쥐고 있던 가문이야. 다리오네가의 유통망을 활용한다면 보다 쉽게 마정을 처분할 수 있을 거야.”
카젠이 우려를 표시했다.
“정말 저 마정들을 한꺼번에 풀 생각이냐?”
“네.”
마정의 급격한 공급.
세계에 충격과 공포를 선사할 루인의 계획은 이제 첫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