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카젠은 문득 아들이 살아온 과거가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저 무시무시한 마장기들과 엄청난 규모의 마정 더미를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취급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정도 마장기 부대라면 북부 왕국들을 통합할 수도 있는 압도적인 전력.
렌시아가의 남부 따윈 한나절 만에 밀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지켜보는 눈도 많거니와, 정작 루인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온다고 해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
‘루인…….’
대체 저 작은 머리 안에 무슨 생각과 계획이 들어 있을까?
아들이라기엔 이제는 너무 커 버린 것만 같았다.
“내, 내가 먼저다!”
“비켜요!”
마법 생도들이 신이 난 표정으로 각자의 마장기를 향해 뛰어갔다.
그들이 마력핵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마력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소에느의 예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해!”
뚱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루인.
“무슨 소리야?”
“모두 네가 차린 판이잖아! 이런 식으로 받아먹는 건 싫어!”
사자의 가문을 절반 이상 먹어 치웠던 철혈의 여인.
남이 차린 밥상에 놀아나기 싫은, 그런 소에느의 자존감이었다.
루인이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을 때 소에느가 연무장에서 멀어졌다.
한데 아버지의 곁에 있는 데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장기들을 바라보고 있는 데인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적의로 가득했다.
루인이 호기심에 물었다.
“왜 그러느냐?”
“……모두 저것 때문입니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데인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마장기(魔裝機).
기사의 나라, 르마델을 무력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흉.
대륙은 마장기가 등장한 시점부터 기사 중심에서 마탑으로 서서히 힘의 지형이 이동하고 있었다.
각국에서 우후죽순 등장하기 시작한 마탑들.
하이베른가가 몰락한 시점도 그와 비슷했다.
같은 검술 명가인 렌시아가가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마장기를 제작하고 있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
대륙의 질서와 권력 지형은 기사에서 마장기로 이미 확실하게 옮겨 간 상태였다.
루인은 그런 동생의 적대감을 지켜보는 것이 오히려 흡족했다.
분노와 증오는 때론 성장의 자양분이 되니까.
“검 하나로 마장기 포대를 부쉈던 기사를 알고 있다.”
“예……?”
폭풍처럼 흔들리는 데인의 눈빛.
그건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설사 마장기가 뿌려 대는 절대적인 마법들을 뚫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대부분의 마장기는 엄청난 방호력을 지니고 있었다.
검술의 극한이라는 스피릿 오러로도 이스하르콘을 뚫는다는 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값비싼 마장기는 그런 이스하르콘이 외부 장갑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불가능합니다!”
검의 최고 경지, 8성 이상의 초인이라고 해도 그런 위력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루인이 웃었다.
“미세한 착화점에 투기를 누적시키는 검의 기술이 있다. 이후에 일시적으로 투기를 폭발하여 강력한 힘을 얻어 내지.”
검의 천재답게 데인은 곧바로 그 엄청난 난이도에 경악해 버렸다.
“미세한 착화점에 투기를……?”
적과의 교전에서 상대는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
투로가 복잡하게 얽혀 가는 혼전 중에서 미세한 특정 부위에 투기를 중첩시킨다?
그게 가능하려면 대체 어떤 경지에 다다라야 할까?
“그 파괴력은 통상적인 스피릿 오러의 수십 배에 달하지. 그 기술을 완성한 기사는 그 기술의 이름을 ‘스피릿 스톰’이라 부르더군.”
멀리서 월켄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그제야 루인이 설명하고 있는 미지의 기사가 미래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정말 검술로 이스하르콘…… 아니 마장기를 파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겁니까?”
“물론.”
하지만 스피릿 스톰을 자유자재로 발휘하는 건 초인을 돌파한 초월자에게나 가능한 이야기.
당장은 그 희망을 앗아 가고 싶지 않은 루인이었다.
“염원하고 노력한다면 검으로 분명하게 닿을 수 있는 경지다.”
확고한 형님의 대답.
그 말에 데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검이!”
데인이 신이 난 표정으로 스르릉 검을 빼어 든다.
월켄이 다가왔다.
“함께 해 보겠나, 소년?”
“영광입니다! 형님!”
“하하!”
검술왕과 검성이 사이좋게 웃으며 멀어져 갔다.
카젠의 흐뭇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 녀석이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을 땐 머리에 허연 서리가 앉았을 때겠구나. 하하하!”
루인이 함께 웃었다.
“믿음 속에 나아가는 것과 불안함을 안고 버티는 것은 차이가 크지요.”
“그래. 동기 부여로써는 좋은 조언이구나.”
루인은 데인이 절망보단 희망을 먹고 자라는 기사가 되길 바랐다.
절망 속에서 버티던 녀석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지난 생에서 똑똑히 지켜보았으니까.
검성의 숙영지에 나타난 데인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타고 남은 재처럼,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허무한 눈으로 서 있던 검술왕.
당시의 데인은 기사가 아니라 검에 먹혀 버린 추악한 괴물 그 자체였다.
“저 마장기로 무얼 할 작정이냐.”
아버지의 질문에 다시 예의 무심하게 입을 여는 루인.
“르마델의 남부를 먹어 치울 겁니다.”
예전 같았으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일축했겠지만 마장기 부대를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마당.
카젠은 루인의 목적이 그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르마델을 제국으로 키워야겠죠.”
“키워서?”
뭐라 대답하려던 루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전에는 한사코 듣기 싫다고 하시더니 이젠 궁금해지신 모양입니다?”
피식하고 웃는 카젠.
“어쨌든 넌 내 아들이다. 이 하이베른가가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느냐?”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좀 더 진중해진 루인의 얼굴.
물론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다.
하지만 하이베른의 대공자로서 가주에게 개략적으로나마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제 목적은 각국의 역량 증진입니다. 전쟁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좋겠지요.”
“각국의 역량을 증진시킨다? 군비 경쟁을 유발하겠다는 뜻이냐?”
“그것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입니다. 베나스 대륙을 살아가는 인류 전체의 문명을 도약시킨다는 개념입니다.”
“허…….”
망상에 가까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대답에 카젠은 넋이 나가 버렸다.
역사에 존재해 온 그 어떤 위대한 사상가도 이런 광오한 이상향은 제시한 적이 없었다.
대체 인류 문명의 도약이라니…….
카젠의 두 눈이 끝없이 깊어진다.
“그때 본 그자가 그토록 무서운 존재더냐?”
“예.”
아들의 입에서 즉각적으로 흘러나온 대답.
순간적으로 루인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에 몸이 움츠러들 정도다.
“두렵구나. 누구도 아닌 네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악제(惡帝).
말 몇 마디로 결코 형용할 수 없는 세계의 재앙.
신들조차 두려움에 움츠러들게 만든 저주의 이름이자,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에게 공포 그 자체였던 존재.
“그자의 목적이 무엇이냐?”
“세계의 절멸입니다.”
“……절멸(絶滅)?”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는 끔찍한 단어.
인류의 역사 속에 무수한 패왕과 악인들이 있었으나 그와 같은 목적을 지닌 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의 절멸이라니?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계라면 어떤 지배도 군림도 존재할 수가 없다.
지배할 땅도 군림할 대상도 없는 세상에 홀로 남아 대체 무엇을 하겠단 말인가?
“철저하게 미친 자로군.”
한데 그런 미친 자가 루인이 두려워할 정도의 능력 역시 갖추고 있다는 뜻일 터.
“감히 일개 가문이 감당할 일이 아니구나.”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이 정도로 엄청난 스케일일지는 몰랐던 카젠.
“아버지.”
“응?”
루인의 두 눈에 잿빛이 내려앉는다.
“정말 다 죽었었습니다.”
들판에 뛰어놀던 아이들, 빵 굽는 연기로 뭉게뭉게 피어나던 굴뚝과 목말라 울던 가축들.
피에로들의 바람 잡는 소리, 하늘을 수놓는 폭죽, 상인들의 고함 소리…….
그런 모든 것들이 사라진 잿빛 세상.
절멸의 대지에서 홀로 남았던 루인의 기억은 일종의 지독한 트라우마였다.
“…….”
아들의 텅 비어 버린 얼굴 앞에서 카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절멸의 세계가 진짜 존재할 수 있다니!
그건 정말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목 놓아 부를 신들도 없었단 말이냐?”
“그들은 인간들이 절멸하기 전에 이미 소멸했습니다.”
“소멸?”
더욱 당황스러워하는 카젠.
대저 한 인간의 힘이 어떻게 세계를 창조한 주신(主神)의 권능을 능가할 수 있단 말인가?
들을수록 두려움이 증폭된다.
카젠은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정말 두렵구나. 한데 너는…….”
신들마저 소멸시킨 자를 상대해야만 하는 운명이라…….
비로소 루인의 운명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본질적으로 느낀 카젠.
저 위풍당당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마장기들조차 이제는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소에느가 귀족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역시나 귀족들은 거대한 마장기, 진네옴 투드라가 도열해 있는 압도적인 광경에 그대로 굳어 버린 상태.
너무 놀라 아예 주저앉는 이도 간간이 보였다.
“이 마장기들을 저들에게 드러내도 되겠느냐?”
“뭐. 그것도 괜찮겠네요.”
동료들을 마장기의 오너로 성장시키려면 어차피 진네옴 투드라의 공개가 필연적인 상황.
카젠이 루인을 따라 피식 웃었다.
“너로 인해 르마델이 한바탕 홍역을 치르겠구나.”
“홍역 정도로 되겠습니까?”
이죽거리며 걸어간 루인이 귀족들을 맞이했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를 알아본 몇몇 귀족들이 기함하며 허리를 숙였다.
“하, 하이베른가의 대, 대공자를 뵈옵니다!”
“대, 대공자님!”
곁에 있던 카젠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버젓이 옆에 왕국의 기수이자 사자왕이 있는데 저자들이?
“또 뵙는군요 긱스 가주님.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대공자께서 너그러운 제안을 주셨는데 어찌 바삐 걸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데 저 마장기들은……?”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루인에게 쏠린다.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루인.
“오래전부터 공을 들인 우리 하이베른가의 마장기들입니다. 어떤가요? 좀 괜찮아 보이십니까?”
“하, 하이베른가의 마장기!”
“오오!”
웅성웅성.
귀족들의 동요는 꽤나 대단했다.
왕국의 병권을 손에 쥐고 있는 왕국의 기수 가문 하이베른가.
그런 기수가의 병권도 무시무시한데 저런 압도적인 마장기 다섯 기라니!
하나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귀족들.
하이렌시아가와 척을 지는 것을 각오하고 이 먼 하이베른가에 찾아온 보람이 생긴 것이다.
세속적인 귀족들은 눈앞의 대공자가 굳이 마장기를 드러낸 이유를 곧바로 짐작했다.
“이, 이번 거래를 포기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귀족 하나가 소리쳤고.
“저 역시 저희만 일방적인 이득을 보는 상황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 벤허의 양심상 이런 거래는 할 수가 없습니다!”
경쟁하듯이 거래를 취소하는 귀족들!
분명 이 하이베른가와 다른 관계를 구축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마장기를 직접 목도한 마당에 그것은 당연한 판단.
“허허…….”
“호호.”
카젠과 소에느가 마주보며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깨달은 것이다.
이미 이 하이베른가는 저 루인의 영향력 아래 완벽하게 귀속되어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