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중력 역전 마법으로 천천히 하강하고 있는 루인과 목소리 생도들.
저 멀리 내성의 광장 쪽에서 거센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형니이이이이임!
온몸에 육중한 갑주를 걸친 채로 정신없이 뛰어오고 있는 데인.
연무장에 착지한 루인이 친구들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방정맞은 녀석. 이제 곧 성년인데.”
반가움보다 더한 황망함이 카젠의 두 눈에 얽힌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루인이 피식 웃었다.
“한사코 가문으로 돌아오라고 하실 때가 엊그제 같은데 반응이 좀 그러네요? 아버지?”
마주 미간을 찌푸리던 카젠이 월켄과 루인을 번갈아 응시했다.
“네 친구 녀석은 깊은 새벽에 성벽을 타고 넘어 날 당황스럽게 만들더군. 게다가 허구한 날 하늘에서 떨어지는 녀석이 있질 않나…… 우리 사자성의 방비를 이렇게 계속 무시해도 되겠느냐?”
“제 집입니다.”
카젠이 묘한 눈빛으로 웃었다.
“오냐. 계속 그렇게 나오겠다면 내 직접 가율로 경비대장을 잘라 주지.”
역시 창백한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오던 경비대장 하비아스가 그런 카젠의 말을 듣고는 더욱 혼비백산했다.
“가, 가주님!”
하비아스의 표정에는 억울한 속내가 가득 묻어 나오고 있었다.
대체 야밤에 은밀히 담벼락을 넘는 초인 기사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마법사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하하하하!”
호탕하게 웃던 카젠이 생도들을 천천히 훑었다.
“반가운 얼굴들이군.”
루인이 아카데미에서 사귄 생도들을 카젠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저 무뚝뚝하고 괴팍한 아들 녀석의 마음을 훔친 아이들.
저 치밀하고 냉철한 루인이 이렇게 가문에까지 데려왔다는 것은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와, 왕국의 기수이시여!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시론―”
“시론 마엔티 메데니아. 메데니아가의 소중한 아들이 아닌가.”
“헉! 절 어떻게…….”
“세베론 샤비엔. 리리아 드리미트 어브렐. 다프네 알렌시아나. 루이즈 리베잔느.”
목소리 생도들에게 차례로 이름을 불러 주던 카젠이 이내 푸근하게 웃었다.
“이미 자네들을 모두 알고 있으니 자기소개는 하지 않아도 무방하네.”
루인의 표정에서 금방 미묘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아들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
내내 무심한 척하시는 아버지.
하지만 그런 철혈의 사자왕이라는 이명이 무색할 만큼, 자신의 친구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자애로웠다.
철컥철컥!
“형님!”
데인이 얼굴에 한 아름 웃음꽃을 피운 채 루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동생의 키와 몸집을 가늠해 보던 루인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가 많이 컸구나.”
하루하루가 다른 시기.
가문을 떠나기 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 이제는 거의 성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하! 그런가요? 형님께서 그런 말을 해 주시니 잘 먹고 열심히 단련한 보람이 있습니다!”
루인은 데인의 머리를 헝클며 흙먼지 로 가득한 그의 찌그러진 갑주를 훑고 있었다.
“군열을 배우고 있는 것이냐.”
“예!”
하이베른가의 용맹한 기사라면 성년이 되기 전에 반드시 군열(軍列)을 익혀야 한다.
거기엔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군열을 배우지 않고서는 기사 조직, 군대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훌륭하다.”
짧은 한마디.
일견 흐트러져 보이지만 일정하게 유지되는 기세, 더욱 농밀해진 투기의 결을 읽어 내며 루인은 진심으로 흡족했다.
자신이 보고 싶었던 건 바로 이런 데인의 모습.
루인은 이제야 비로소 검술왕(劒術王) 데인이 진정한 기사로 거듭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눈시울을 붉히는 데인.
정말 너무나도 힘들었던 나날들이었다.
위대한 기사의 생애를 꿈꾸고 있으나 아직은 그도 소년에 불과한 나이.
하이베른가의 직계 혈족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참고 견뎌 왔을 뿐, 그 역시 지금까지의 수련이 힘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루인이 말없이 그런 동생의 등을 두드렸다.
“아무 이유 없이 친구들까지 데려오진 않았을 테지. 이번에는 어인 일이냐?”
“아카데미 생활을 관두려고요.”
“……그게 정말이냐?”
그동안 바라 왔던 일이었으나 카젠은 왠지 뜻 모를 불안함이 밀려왔다.
역시 그런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친구들과 고대 유적을 탐험하려고 합니다. 탐험에 앞서, 잠시 가문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 왔고요.”
“고대 유적? 무슨 유적 말이냐? 네 녀석 설마?”
반복된 전쟁으로 베나스 대륙에 유적이라 불릴 만한 곳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대부분 침입자에 의해 파괴되거나 극도의 위험성 때문에 폐쇄된 던전들이 대부분.
한데 마법사의 길을 걷고 있는 루인과 친구들이 탐험에 나설 만한 곳이라면…….
“테아마라스의 유적은 아니겠지?”
“역시 아버지십니다. 마치 제 마음을 들여다보신 것처럼 이야기하시는군요.”
황당하다는 듯 굳어지는 카젠.
무투대회에서 우승한 마법 생도들이라면 거의 대부분 테아마라스의 유적을 탐험하려 든다는 것을 카젠도 잘 알고 있었다.
매번 왕실의 요청으로 유적 탐험대를 지원해 왔던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카젠은 그때마다 잃은 기사들이 생각났다.
하나같이 용맹하고 뛰어난 기사들이었지만 지금까지 무수한 탐험대들이 복귀하지 못했다.
아카데미는 왕국의 보호라도 받지, 테아마라스의 유적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곳.
한데 이어진 루인의 대답은 더욱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저희 탐험대를 지원하실 생각은 접으십시오. 최대한 행적을 노출하지 않고 은밀히 탐험할 예정입니다.”
“뭐라……?”
고위 기사 여럿과 뛰어난 마도학자로 구성된 파티조차 돌아오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
한데 지금 그런 위험한 곳을 생도들끼리만 가겠다는 건가?
“불가! 그건 자살행위다!”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아버지의 반응에 루인은 무감한 얼굴로 서 있었다.
“당장 출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는 걸로 하지요.”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나는 분명 안 된다고 하였다!”
“돼요. 이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딨습니까?”
“너 이 녀석!”
소에느를 흘깃 쳐다보는 루인.
“고모는 또 표정이 왜 그래?”
이 와중에도 몰려든 남부 귀족들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고민하고 있던 소에느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피식.
자신의 일에 이 정도로 깊게 파고들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법.
루인은 더는 그녀의 역량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여튼 약삭빠른 놈들이군.”
남부의 가문들이 자신의 제안을 들은 건 이제 고작 열흘 남짓.
그 사이에 벌써 하이베른가로 모여들어 확답을 받으려고 저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문득 루인은 이런 난처한 상황을 맞이한 소에느의 계획이 궁금했다.
“성곽의 바깥까지 귀족가의 마차 행렬이 끝도 없던데 대체 무슨 일이지?”
“아, 그게…….”
그간의 일을 심각하게 설명하는 소에느.
이미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루인은 짐짓 놀란 얼굴을 했다.
“그래서 고모는 이제 어떡할 거지? 우리 가문이 저들과 거래할 재정의 여력이 있나?”
“없어. 이대로라면 축객령만이 답인데.”
하지만 뛰어난 책사, 가문의 고문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유리한 형국을 만들어 내는 것이 본분.
한자리에 모이기도 힘든 남부의 쟁쟁한 귀족들이, 이렇게 하이베른가에 직접 찾아온 마당인데 어떤 기회라도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소에느가 이토록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적당히 밥들 먹여서 돌려보내면 되겠구만 뭘.”
“그건 아니야. 렌시아가의 영향력 아래 있는 가문들과 접촉할 기회는 많지 않아. 잘하면 어브렐가와 접점이 있는 가문들을 중심으로 뭔가 일을 도모해 볼 수 있을 것만 같아.”
“어떤?”
“중부의 용병대가 우리 하이베른과 협력한다면 불안할 가문은 많을 테니까. 생각보다 용병대에 기대고 있는 가문이 많더라고.”
피식 웃었다.
“그럴 테지. 남부의 기사들이란 기사들은 죄다 렌시아가로 몰려가서 충성 서약을 해 버리니까. 나머지 가문들은 기사를 구경조차 하지 못할 테지.”
“네 말대로야. 생각보다 자체 병력을 운용하는 가문들이 몇 개 없었어. 그나마 기사들을 보유한 가문이라고 해도 빈약한 수준이고.”
“중부의 용병들을 지원받지 못한다면 산적에게도 털릴 수 있다는 건가?”
“실제로 그래. 특히 이맘때쯤엔 약탈이 극심해지니까. 게다가 용병들이 없으면 토벌단도 꾸릴 수 없잖아? 고매한 기사들이 매번 나설 수도 없는 일이고.”
듣고 있자니 루인은 짜증이 났다.
사실 역사적으로나 전통적으로나 토벌단은 왕실에서 지원을 해 왔다.
그런 지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이 나라 르마델은 병들어 있는 것이다.
나라 살림조차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판국에 알칸 제국을 상대하겠다니!
이대로 의미 없이 시간만 보낸다면 북부 왕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최약체 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엮을 작정이지?”
잠시 머뭇거리던 소에느가 신중히 대답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거래를 제시하는 이유부터 알아야겠지. 일단 어브렐가의 이름을 최대한 들먹이며 압박해서 적당한 구실이나 명분쯤은 잡아 둘 계획이야.”
“명분? 수틀리면 정말 중부의 용병대를 통제하겠다는 건가?”
“너 때문에 정신없이 봉신가 서약만 했지 실제로 어브렐가가가 우리에게 협력할지는 미지수잖아? 적당히 시늉만 내는 거지.”
“고작 시늉으로 되겠어? 아예 어브렐가에 기사 전력을 배치하지 그래?”
“이제 막 봉신가로 들어온 가문을 힘으로 통제하는 건 멍청한 판단이야. 그렇게 길들이는 건 단기적인 수지. 너 설마? 그들을 이용만 하고 버릴 셈이야?”
“하하하하!”
카젠이 그런 루인과 소에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둘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천연덕스럽게 봉신가의 위세를 이용하겠다는 자신의 여동생.
기사단을 배치하여 봉신가를 통제하자며 맞장구를 치는 루인.
둘 다 정상 같아 보이진 않았다.
“흠.”
반면 루인은 소에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과연 가문의 7할을 먹어 치웠던 여장부답게 매번 수를 쓰는 것이 범상치가 않았다.
이런 인재(?)에겐 칼을 쥐여 주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지이이이잉-
루인의 보물 창고, 아공간 헬라게아에서 막대한 양의 황금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일렬로 둥실거리며 흘러나온 황금 주괴들이 이내 차곡차곡 포개어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소에느.
“이, 이게 대체……?”
오는 길에 리네오 길드에서 몇 개의 마정을 더 처분하고 확보한 금괴의 개수는 무려 600여 개.
600만 리랑의 가치와 동일한 현물이 지금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쌓여 가고 있는 것이다.
“고모. 이걸로 저들의 요구대로 모두 매입해.”
“아, 아니 그것보다 이게 무슨 돈이냐고?”
씨익.
“벌었어.”
카젠이 신비로운 아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가문의 1년 재정보다 많은 금괴를 아공간에서 꺼내는 아들은.
초인보다 더 위대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