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가주께 검을 배우고자 왔습니다.
카젠은 월켄이 다시 찾아온 그날을 떠올렸다.
야수처럼 헝클어진 머리.
하지만 지독한 눈빛.
헤어진 지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았으나, 달빛 아래 서 있던 월켄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검을 쥔 손.
저절로 들어가는 힘.
한 기사를 마주 대하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을 느끼는 경험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왕국의 쟁쟁한 기사들에게도 느껴 보지 못한 기묘한 두려움.
카젠은 어쩌면 이 루인의 친구 녀석이, 생각보다 훨씬 위대한 거인(巨人)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마에 땀을 닦으며 자세를 푸는 월켄.
장장 세 시간.
검을 든 채로 일체의 미동도 하지 않으며 서 있다가 녀석이 처음으로 뱉은 한마디였다.
“뭐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씀하셨던 정중동(靜中動)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 사부께서 말씀하시길, 공방(攻防)에 앞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태세나 반격이 아닌 공격 그 자체라 하셨습니다. 한데 가주님의 검은…….”
“사자검은 태세 그 자체가 중요하지.”
“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피동적인 검입니다. 그런 수동적인 검으로는 적을 제압하는 것이…….”
“제압이 목적은 아니네.”
“예……?”
월켄의 열정적인 눈빛에 카젠은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엄청난 재능과는 달리, 검을 향한 마음만큼은 순수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아직 자네는 다양한 검술 유파를 경험하지 못한 것 같군.”
“맞습니다…….”
“유파가 추구하는 궁극은 저마다 다르네. 자네의 유파가 적을 제압하는 데 목적을 둔 일격필살의 검술을 추구한다면 우리 사자검은…….”
허공으로 높이 검을 치켜드는 카젠.
“그런 살상검술이 아니네.”
월켄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꺾는다.
“하지만 모든 검술의 근본은 적을 제압하는데 그 의의를 두는 것이 아닙니까?”
검이란 찌르고 베는 무기.
그런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검술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희미하게 웃고 있던 카젠은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산을 바라보게.”
곧 월켄이 카젠의 시선을 좇아 성곽의 바깥을 쳐다본다.
웅장한 산맥, 몽델리아.
월켄은 하늘로 굽이쳐 오르는 듯한 험준한 산봉우리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싸울 마음이 드는가?”
“예? 그게 무슨…….”
사람이 산과 싸우다니?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월켄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것이 우리 하이베른이 추구하는 궁극이네. 태세만으로 적을 제압하는 자존(自尊)의 검. 우리가 사자검이라 불리는 이유지.”
더욱 뜻 모를 심정으로 얼굴을 구기는 월켄.
그로서는 사자검이 추구하는 궁극을 아무리 생각에 골몰해 봐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마치 검술이 아니라 무슨 철학 놀음 같았다.
“태세만으로 상대로 하여금 전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검술이란 말입니까?”
“하하하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월켄의 반응에 카젠은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만은 없네. 직접 부딪쳐 보겠는가?”
순식간에 월켄의 얼굴이 밝아지며 핏기가 돌았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스피릿 오러는 접고 하지. 오시게.”
빛살처럼 쏘아지는 월켄의 검.
콰아아아앙!
월켄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린다.
그저 자신의 검을 가볍게 내쳤는데, 무슨 우레와 같은 굉음이 흘러나온다.
엄청난 충격에 손목이 찢어질 듯이 고통스러웠다.
이를 깨물며 다시 카젠을 향해 쇄도하는 월켄.
콰아아아앙!
이번에도 비슷했다.
한 수의 공방, 그리고 내리치는 단순한 연격.
한데 그런 연격을 막아 내는 순간, 또다시 상상도 할 수 없는 충격파가 온몸을 해체할 듯 집어삼켰다.
월켄이 검을 떨어뜨릴 뻔한 자신의 손을 매만지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카젠을 바라봤다.
분명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바위 같은 무생물.
아니 그것보다는…….
‘정말 산 같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태세.
이건 투기나 검술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야말로 처음 겪는 종류의 권능과도 같은 힘이었다.
카젠의 검, 한 수 한 수에 산사태와 같은 재해(災害)가 담겨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이런 걸 단순히 ‘검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월켄의 질문에서 카젠은 어린 치기를 느꼈다.
자신도 마찬가지로 초인인데, 어째서 이렇게 압도적으로 제압당할 수 있는가에 대한 치기 어린 상실감.
“그 말은 조금 모욕적이군.”
검을 회수한 카젠이 몽델리아 산맥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뛰어난 재능으로 단기간에 진입한 초인의 검. 하지만 이 카젠은 세월과 경험으로 완성한 초인의 검이지.”
“…….”
“직접 몸으로 겪고도 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면 실망이군. 그럼 조금은 직설적으로 말을 해 볼까.”
“경청하겠습니다.”
카젠이 묘하게 웃었다.
“무식한 투기와 스피릿 오러 세례를 제외하면 자네의 검에는 무엇이 남는가?”
“예?”
실제로 사부님이 보여 주었던 ‘혼돈의 검(劒)’은 그것이 다였다.
집채만 한 나무를 통째로 베어 넘기던 소드 브링어, 강력한 회전력으로 적을 분쇄하는 소드 스파이럴, 투기를 폭발하는 검 소드 스톰 라이저.
세상을 직선으로 베는 캘러미티 라인, 가공할 파괴력의 검기 폭풍 캘러미티 웨이브, 세상을 집어삼키는 광휘의 오러 캘러미티 블레이즈까지.
그야말로 투기와 오러가 전부다.
도대체 그걸 빼고 나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그때.
“치명적인 독이군. 자네의 스승에게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 지금의 자네에겐 독으로 작용하고 있네.”
더욱 묘해지는 월켄의 표정.
그러고 보니 전에도 카젠에게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자네의 스승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군.
전에는 그 말에 담긴 뜻을 구체적으로 느끼진 못했는데, 그의 검을 직접 겪고 나니 이제야 월켄은 절실하게 와닿았다.
당장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느꼈다는 것이 중요하다.
월켄은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도약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정중한 기사의 예.
카젠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자네에게 시간은 많네.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면 언제고 길을 내어 주는 것이 검이란 놈의 마성(魔性)이지.”
그때, 연무장 계단을 천천히 오르고 있는 소에느가 카젠의 시야에 들어왔다.
소에느는 자신이 연무장에 있을 때만큼은 좀처럼 방해하지 않는다.
분명 무언가 중요한 일이 생겼음이 틀림없었다.
“가주.”
정중한 사자가(獅子家)의 예법.
자신을 오라버니나 부르지 않고 가주로 불렀다는 것은 공적인 일로 찾아온 것이라는 뜻.
“고문은 기탄없이 말하라.”
“몇 시간 전부터 귀족가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밀려들고 있어요.”
“귀족가들?”
하이베른가는 고고한 대공가이나 메인 정치 무대에서 완벽하게 소외된 가문.
때문에 여느 귀족가가 방문하는 일은 연중행사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한데 한 가문도 아니고 무려 ‘귀족가들’이라니?
“놀라지 마세요. 우리 가문에 찾아온 자들은 모두 남부의 가문들이에요.”
“남부?”
북부 가문들이 몰려와도 희한한 일인 판국에 남부라니?
남부 가문들은 대부분이 렌시아가의 영향력 아래 귀속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방문 목적을 밝혔나?”
“우리와 거래를 희망하고 있어요.”
“……거래?”
“네. 자신들의 특산물을 거래하고 싶다던데요?”
당황스럽다.
하이베른가는 곤궁한 영지 사정은 물론이거니와 그들과 거래할 특산물이랄 것도 없었다.
“또 무슨 수작질이겠군.”
분명 그들을 통제하고 있는 렌시아가의 수작질이 틀림없을 터.
“그렇지 않아요. 그들의 태도가……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해요.”
“어떤 점에서?”
곰곰이 생각하던 소에느가 눈빛을 반짝였다.
“……지독하게 간절한 느낌? 이번 거래를 성사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차라리 죽겠다는 심정? 하나같이 그런 태도들이에요.”
카젠의 표정이 점점 누그러진다.
목적이 순수한 거래라면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조건만 좋다면 오히려 남부의 물자가 절실한 하이베른가로서는 기회로 작용할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풍족한 물자로 부유한 남부의 가문들이 대체 하이베른가의 무엇을 원하고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 저들이 원하는 것이 있었나?”
“기사 병력을 제외한다면 없겠죠.”
그러나 하이베른가는 왕명 없이 사적으로 기사단을 움직이는 불충한 가문이 아니다.
또한 남부는 렌시아가 아래 통합된 하나의 집단.
대규모 영지전 자체가 발생할 수 없는 구조다.
결국은 저들과 거래할 수단이 금화밖에 없다는 건데…….
“우리에게 지불할 금화가 있나?”
“없죠. 당장 춘궁기에 영지민들을 구휼할 재정도 부족한 마당인데.”
소에느가 고문으로 취임한 후로 철저한 영지 관리를 통해 사정이 조금은 나아진 편.
하지만 텅 비어 있던 곳간이 단숨에 채워지는 건 아니었다.
그때, 집사 아길레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고문 님. 남부 귀족가들이 요청한 거래 품목과 수량, 그리고 단가…… 입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아길레의 표정.
특히 ‘단가’를 언급할 때 그의 눈빛이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낚아채듯 서류를 빼앗은 소에느의 눈빛도 곧 그런 아길레와 비슷해졌다.
“아, 아니! 이, 이게 뭐야!”
“왜 그러느냐?”
황당하다는 듯이 서류를 카젠에게 내미는 소에느.
“미친놈들! 하나같이 시세의 3, 4배가 넘잖아요!”
“뭣이?”
서류를 살피던 카젠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눈에 띄는 품목 하나.
크리안 산맥의 특산물 오바움 나무.
그런 오바움 나무의 거래 요청 단가가 무려 시세의 세 배인 300리랑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아무리 경영에 눈이 어두운 카젠이라도 워낙 가격 차이가 심하다 보니 분명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뭔가 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이 남부의 후레자식들이 드디어 미쳐 버렸나? 아무리 우리가 호구로 보였기로서니 시세의 3배라니? 가주님! 당장 저것들을 눈에서 치워 버리죠!”
그때.
콰아아아아앙-
몽델리아 산맥 전체를 울려 오는 거대한 굉음.
하지만 왠지 뭔가 익숙한 느낌.
소에느가 소름이 돋은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 이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 어디서 많이 들은 것만 같은 느낌인데.”
월켄이 웃었다.
“녀석이 온 것 같습니다.”
황급히 소에느와 시선을 교환하던 카젠이 하늘을 바라본다.
그렇게 카젠이 묘한 심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까마득한 상공의 점(點)이 점점 추락하고 있었다.
“이 녀석!”
괴상한 괴물의 꼬리를 손에 들고 나타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어? 하나가 아니네?”
괴상한 꼬리를 잡고 있지 않은 루인의 반대 손.
그런 그의 손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생도들.
그렇게 불청객을 줄줄이 달고 나타난 루인이 씨익 하고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