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루인의 기상천외한 행동을 수도 없이 지켜본 시론으로서는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단계까지 이르러 있었다.
마장기를 소환해 거인을 향해 마력 포격을 날리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마당에 더 놀랄 것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루인에게 왜 왕국의 대귀족들을 협박했는지, 파네옴 광산은 왜 드러냈는지 따위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시론이 짜증이 나는 건 영광스러운 시상식이 흐지부지되었다는 것과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뿐이었다.
“개고생해서 우승했는데 이게 무슨 개같은 결과냐고!”
현자와 학부장, 1왕자가 떠나간 자리.
루인은 오히려 여유롭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네가 챙길 건 다 챙겼다 그거야?”
뿌드득 이를 가는 시론.
루인이 압도적으로 귀족 대신들을 굴복시켰던 과정을 미뤄 볼 때, 이미 저 녀석은 오래전부터 모든 계획을 짜 두었던 모양.
본인이야 목적을 달성했으니 저리도 여유롭겠지만 이쪽은 절대 아니란 말씀.
한데 뭔가가 이상했다.
테아마라스의 유적을 탐험하는 일은 어떤 친구들보다도 루인이 가장 집착하던 보상.
그런 포상이 물 건너갔음에도 저리도 여유로운 표정이니 다소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루인은 원하던 바를 놓치는 경우를 결코 용납하는 인물이 아니다.
결국 시론의 표정이 기이해졌다.
“또 뭔가 있는 거 같은데……?”
테아마라스의 유적을 탐험하길 고대했던 것은 다른 목소리 생도들도 모두 마찬가지.
생도들 모두가 루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루인의 여유로운 태도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나는 테아마라스 유적을 탐험할 거다.”
“뭐? 그게 진짜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시론.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테아마라스는 고대 던전 특유의 위험성으로 왕국과 마탑의 지원 없이는 결코 탐험할 수가 없었다.
루인이 당대의 국왕과 적대 관계라는 건 내빈실에서의 상황을 지켜본 자라면 누구나 유추할 수 있는 사실.
왕실로부터 어떤 포상도 약속받은 바가 없었기에 모두가 황당한 얼굴로 루인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전에-”
루인이 모두를 천천히 훑어본다.
“나는 아카데미를 그만 다닐 거다.”
“뭐?”
“이제 가문으로 돌아갈 시간이지.”
“가, 가문?”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루이즈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언제고 그 말이 나올 줄은 알고 있었어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루인의 선언에도 한 치의 당황함도 없는 루이즈를 시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다고?”
<이 아카데미에는 더 이상 루인 님이 원하는 게 없거든요.>
헤이로도스의 술식을 완성한 루인.
마법사가 현자의 위상에 걸맞은 마도를 구축했다면 그 이상의 경지는 지식이나 지혜의 영역이 아니었다.
마법사로서 최고의 환경인 마탑에서 평생을 보낸 현자 에기오스조차도 진정한 마도사의 영역을 밟지 못한 마당이었다.
마도사는 스스로 해답을 완성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위대한 경지.
그러므로 루인이 마법사로서 이 아카데미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가문으로 가면 넌…….”
하이베른가는 마법사로서 가장 극단적인 환경.
그 무식하고 드센 검술 명가보단 아카데미가 훨씬 나을 텐데 굳이?
일단 시론은 루인을 말려 보았다.
“2등위까지, 아니 1년만 함께 더 지내면 안 되겠냐?”
“왜지?”
“그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뭔가 섭섭하다.
녀석이 하이베른가로 돌아간다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를 기약할 수 없을 테니까.
그는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메데니아가의 후계자 따위로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까마득한 대귀족.
“너희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적어도 루이즈만큼은 루인이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내 생도복의 품에서 마탑의 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스크롤을 꺼낸 루인.
“이 스크롤에는 테아마라스의 유적으로 가는 좌표계가 있다. 마탑에서 직접 받은 거니 신뢰도는 높다고 할 수 있겠지.”
“유적 좌표!”
각국의 고위층과 일부 선택받은 마법사들만이 존재를 알고 있는 신비의 유적이 마침내 모두의 눈앞에 드러난 것.
다프네의 흔들리는 눈빛이 루인을 향했다.
“설마 당신…….”
루인의 투명한 눈빛이 그녀의 시선을 담담하게 맞이한다.
“그래. 나는 왕실의 어떤 지원 없이 비밀리에 유적을 탐험하고자 한다.”
비명을 지르는 세베론.
“미, 미쳤어!”
왕국의 드높은 기사들과 마도학자가 동행하는 탐험대들조차 수도 없이 실종된 바 있는 악명 높은 유적이었다.
특히 던전을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마법사가 마도학자 없이 탐험에 나선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던전 탐험은 마법의 경지 문제가 아니야! 던전을 모르는 마법사가 함부로 탐험한다면 십중팔구는 비참한 죽음에 이른다고!”
“그럴 테지.”
그러나 루인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공개적으로 왕국의 포상과 지원을 받으며 테아마라스의 유적을 탐험한다면 악제는 모든 걸 준비할 것이다.
그 유적이 진실로 놈의 레어(Lair)라면, 자신의 모든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공간에 이방인이 침입하는 걸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루인은 굳이 공개적인 포상을 원하지 않았다.
왕실이 주는 명예 따윈 자신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루인이 원하는 건 과연 악제가 그 오랜 시간 동안 무얼 준비했는지, 그 유적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갑자기 시론이 눈을 빛냈다.
“선택이라면…… 너 혹시……?”
“그래. 나는 너희들이 나와 함께 위험에 빠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루인은 마법 생도로서 꿈과 젊음을 누릴 수 있는 동료들의 특권을 앗아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너와 함께 유적을 탐험하겠다.”
그것은 지금까지 조용히 듣고만 있던 리리아의 첫마디였다.
무심하게 다시 입을 여는 루인.
“그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알고는 있는 건가?”
“더 이상은 마법 생도로 남을 수 없다는 뜻이겠지.”
조기 퇴교.
아카데미의 생도가 별다른 사유 없이 열흘 이상 무단으로 결석한다면 반드시 퇴교 처리를 당하는 것이 교칙.
하지만 유적 탐험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제야 루인이 말하고 있는 선택의 의미를 깨달은 생도들.
모두 하나같이 침중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유일하게 웃고 있는 생도는 역시 슈리에였다.
“전 여기까지가 인연의 끝인가 봐요.”
내내 일행에서 겉돌던 슈리에가 결국은 아카데미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사실 무투대회에 참여하지 않았던 그녀로서는 유적을 탐험할 권리도 없었다.
“존중하지.”
악수를 건네는 루인의 손을 슈리에는 웃으며 맞잡았다.
“좀 더 일찍 선택했어야 했어요. 저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슈리에는 자신의 마도와 맞지 않았다.
마법사의 역량보단 선천적으로 마음이 약한 사람은 자신의 방식을 따라오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너와의 만남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추억하지. 내가 처음으로 만난 마법 생도는 너니까.”
루인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던 슈리에가 풋 하고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루인이 이렇게까지 엄청난 인물인지를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정말 추억이네요.”
약간은 자조 섞인 웃음.
“그럼 저는…….”
마법사의 마도로 정중하게 예를 표하더니 이내 동굴 밖으로 멀어지는 슈리에.
“와 씨. 사람 인연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 저렇게 단칼에 자른다고?”
“제가 본 슈리에의 가장 강단 있는 모습이군요.”
<너무 그러지들 마세요.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민했을 거예요.>
멀어지는 슈리에를 침잠하게 쳐다보던 리리아가 다시 루인을 응시했다.
“네가 준 약을 마신 순간부터 난 맹세했다. 밀어낼 생각은 하지 말도록.”
피식.
“밀어낼 생각도 없다.”
이내 루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루이즈였다.
루인은 다른 누구보다도 루이즈의 선택이 가장 궁금했다.
<저도 가겠어요.>
결국 루인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사실 적요하는 마법사의 무시무시한 본 모습을 알고 있는 루인으로서는 그녀의 선택을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했었다.
이어 루인의 눈빛이 향한 곳은 다프네.
“그, 그렇게 보지 말아요! 아직 난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단 말이에요!”
아카데미를 관두는 것은 이미 현자의 수제자인 그녀에게만큼은 큰 불이익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런 지원도 없이 유적을 탐험하는 것이 문제였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죽음을 각오하기엔 아직 그녀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전…….”
그 순간 다프네의 뇌리 속엔 루인의 무시무시한 마도(魔道)와 마장기가 떠올랐다.
웬만한 국가 전력급 마도 병기를 아공간에 소지하고 다닐 수 있는 마법사.
거기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마도 경지.
드래곤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지혜와 심계까지.
어쩌면 그라면 자신을 지켜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미 그녀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그래. 허락하지.”
“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걸요?”
“그럼 말해.”
“…….”
피식 웃으며 다프네의 어깨를 툭 치는 시론.
“그렇게 겁이 많으면서도 정작 지금까지 루인의 방식을 가장 잘 따랐던 건 너다.”
세베론이 수군거렸다.
“역시 그 고백이 아예 마음에 없는 고백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럴지도.”
얼굴을 구기며 짜증을 내는 리리아.
“시끄럽다.”
다프네가 고개를 푹 숙인다.
“가겠어요…….”
결국 시론과 세베론만이 남았다.
루인은 그들이 대답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그들에게 선택을 종용할 수는 없었다.
저들이 목숨을 거는 일은 개인의 선택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 가문의 문제.
여생도들과는 달리 그들은 가문의 성(姓)을 이어야 하니까.
“먼저 아버지를 설득해야 한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시론도 마법사다.
경지를 향한 목마름이라면 여기에 있는 어떤 생도보다도 강렬한.
“젠장! 테아마라스의 유적을 어떻게 참냐고!”
인류 문명의 태동기에 탄생한 영웅.
그런 태초의 마법사가 남긴 모든 것들을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때, 이미 선택을 끝낸 듯 세베론이 루인의 곁에 섰다.
“난 형이 있어.”
시론은 그런 세베론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세베론과는 달리 자신은 메데니아가의 독자였으니까.
자신이 죽는다면 가문에 남겨지는 것은 무수한 여동생들뿐이었다.
“메데니아가의 가주께서 허락하실까?”
“절대…… 끝까지 무릎 꿇고 빈다면 아마 가문의 마도병단을 내어 주시겠지.”
“안 돼. 그건 불가하다.”
“대체 왜지? 왜 굳이 우리끼리 가야만 하는 거냐고!”
순간 루인은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눈빛이 되었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는 것이다.
자신의 동료들에게 태초의 마법사, 인류의 영웅을 앗아 가도 될 것인가를.
루이즈가 그런 루인의 감정을 읽었다.
<그만. 그 말은 하지 말아요. 루인.>
“뭐?”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루이즈의 반응에 소스라치게 놀란 루인이었다.
<저 역시 절대언령을……>
그제야 루인은 깨달았다.
브훌렌의 육체에 직접 현신한 악제의 사념을 그녀 역시 읽어 냈다는 것을.
악제의 절대언령의 파동을 그녀 역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악제와 나눈 당시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면 그녀 역시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일.
한데.
“너 설마? 브훌렌에 빙의한 악제란 놈이 테아마라스였다는 걸 우리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 거냐?”
“아니 본인이 말해 놓고 그걸 비밀로 하겠다고?”
-당신은 설마 테아마라스?
-수명은 어떻게 초월했나?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리는 루인.
자신에게만 향했던 악제의 절대언령을 듣지 못했다고 해도.
동료들은 자신의 음성을 똑똑히 들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