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77화 (177/187)

<177화>

폭풍과도 같은 내빈실 상황을 정리한 후.

생도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조용히 유적 동굴로 향한 루인 일행.

한데 목소리 생도들은 물론, 현자 에기오스와 헤데이안 학부장, 거기에 1왕자 아라혼까지 함께 유적 동굴에 도착해 있었다.

루인은 자신을 따라오는 그들을 굳이 막지는 않았는데, 이미 자신을 따라올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한 듯한 여유만만한 얼굴이었다.

루인이 묵묵히 마력 등불을 밝히자 아라혼이 가장 먼저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드러냈다.

“파네옴 광산의 마정…… 진짜는 아니겠지?”

아공간 헬라게아 속에 존재하는 엄청난 양의 마정을 직접 본 아라혼.

설사 파네옴 광산이 진짜 마정 광산이라고 해도, 루인에게는 그만한 양을 캐내 올 물리적인 시간이 없었다.

“진짜냐 가짜냐가 중요한 건 아니지.”

“이봐, 루인 대공자. 이건 정말 심각한 사안이다.”

하이베른가에게 파네옴 광산을 안겨 준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모든 공적인 책임이 왕국의 1왕자에게 있는 것이다.

이 일로 국왕과 왕실의 원로들이 자신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게 뻔한 상황.

어쩌면 이 일을 빌미로 왕세자의 일이 틀어질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인내하며 견뎌 온 모든 세월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그런 아라혼의 마음을 열어 보기라도 한 듯, 흔들리는 마력 등불에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루인의 얼굴이 미묘하게 웃고 있었다.

“벌써부터 얄팍한 마음이 자리 잡기라도 한 건가?”

“그게 무슨 소리지?”

“지금 네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누구로부터 비롯된 건지 잊지 말란 뜻이다.”

순간 아라혼은 오싹했다.

하이베른가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 대역 왕비의 포섭, 국왕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정치적인 우위까지.

그것들은 말 그대로 모두 저 루인이 자신에게 쥐여 준 것이었다.

고작 입장이 조금 난처해졌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말라는 뜻.

“왕세자로서의 내 입지가 흔들린다면 너도 좋을 것이 없지 않나?”

조심스럽게 입장을 피력해 보는 아라혼이었지만 여전히 루인은 조소만 짓고 있었다.

“생각보다 잔머리는 없는 편이군.”

전생에서 아라혼은 악제의 군단 내에서도 입지가 상당한 군단장이었다.

군단 서열 10위권 이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던 그라고는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정치적 식견.

“무슨 소리지?”

“고작 이 정도 사안에 흔들릴 왕세자라면 차라리 왕을 꿈꾸지 말란 뜻이다.”

“뭐……?”

다른 사안도 아닌 마정 광산이다.

활용하기에 따라 단숨에 알칸 제국의 위상에 도전할 수 있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규모의 전략 자원.

그 엄청난 전략 자산을 왕실 스스로가 대공가에 헌납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그 정치적인 책임의 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루인의 말처럼 ‘고작 이 정도 사안’으로 치부하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거대한 것이다.

“바보 같은. 널 통하지 않고는 하이베른가와 아무런 일도 도모할 수 없다고 그들로 하여금 믿게 만들어라. 완벽한 끈으로 거듭나란 말이다.”

“뭐……?”

“그동안 왕실은 우리 하이베른과 별다른 교분이 없었다. 우리가 왕실에 끈이 없었듯 그건 왕실도 마찬가지.”

씨익.

“나와 하이베른가는 오늘부터 1왕자를 제외한 어떤 왕실의 왕족과도 교류하지 않을 것이다. 협상이든 지원이든 협력이든, 베른헤네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 하나로 한정된다는 뜻이지.”

순간, 아라혼은 등줄기로부터 퍼져 나간 전율이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루인의 말에 압축되어 있는 함의(含意)를 읽어 낸 것이다.

엄청난 마정 광산을 손에 쥔 하이베른가.

분명 저 무시무시한 놈은 그런 압도적인 전략적 우위를 활용해 왕국을 손에 쥐고 쥐락펴락해 댈 것이다.

그런 하이베른의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이 오직 자신에게만 한정된다면?

그 권력, 그 정치적인 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대한 것이었다.

하이베른가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면 모든 왕족과 군소 귀족들이 자신에게 줄을 대야 하는 것이다.

입지가 불안정한 자신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인 것.

물론 그럼에도 아라혼은 웃을 수 없었다.

“너…….”

하지만 이 대공자 루인이 자신과의 끈을 놓아 버린다면?

그런 엄청난 권력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뜻.

비로소 아라혼은 자신에게 목줄이 채워졌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대업을 완성하여 국왕에 오른다고 해도 결코 그런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묘하게 웃고 있는 루인.

아라혼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

도대체 파네옴 광산 하나로 어떻게 이 많은 정치적인 것들을 계산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파네옴 광산은 하이베른가를 몰락시키기 위해 하이렌시아가가 은밀히 파 놓은 함정이었다.

그런 비열한 음모를 오히려 역이용해 이런 비현실적인 결과를 이끌어 낸 것.

아라혼은 이제 저 루인이 도무지 같은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건 마왕(魔王).

녀석의 비현실적인 마도보다 이런 초현실적인 지혜가 훨씬 두려웠다.

물론 그런 두려운 감정을 그 하나만 느낀 것은 아니었다.

‘허허…….’

현자 에기오스는 더 이상 루인을 생도로 여길 수가 없었다.

왕궁의 내빈실에서 경험한 루인의 모든 것, 그리고 1왕자를 압박하는 지금의 모습까지…….

저 어린 대공자는 북부의 사자왕, 아니 그 이상이었다.

루인으로 인해 하이베른가는 틀림없이 하이렌시아가를 압도하는 거대 가문, 아니 어쩌면…….

“대공자. 그대의 목표는 대체 무엇인가?”

에기오스는 질문하면서도 두려웠다.

어쩌면 루인이 상상하지도 못할 무언가를 늘어놓을까 봐.

그가 가진 꿈의 크기가 이 르마델을 넘어 대륙으로까지 뻗어 있다면?

왕국 자체가 그의 손아귀에서 활용될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

“말하면 제 편이 되어 주실 겁니까?”

“……편?”

“굳이 듣고 싶으시다면 현자님과 완벽한 신뢰 관계로 묶이고 싶습니다만.”

순간적인 소름.

그것은 정말이지 온몸의 솜털이 모두 일어날 정도로 두려운 전율이었다.

지금 듣는다면 왠지 목숨까지 걸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그다지 친하지 않은 저 헤데이안이 말려 올 정도다.

“에기오스. 뭘 그런 걸 궁금해하나? 아, 나 역시 별로 궁금하지 않다네.”

겨우 차갑게 가슴을 가라앉힌 에기오스가 천천히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대공자가 시키는 대로 하긴 했지만 당장이 문제네. 지원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해 주겠는가? 분명 하이렌시아는 다음 달부터 지원을 끊을 것이네.”

“얼마나 필요한데요?”

“……금액 말인가?”

당장 금액을 이야기하라는 듯한 루인의 태도에 멋쩍게 웃는 에기오스였다.

“알다시피 마탑에 딸린 마법사가 많네. 왕실의 지원이 있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하지. 연구에 필요한 재원만 해도…….”

“그러니까 제시하란 말입니다.”

왕국의 고고한 현자인 자신에게 이런 노골적인 ‘제시’라니.

현자이기에 앞서 에기오스도 귀족이었다.

고아한 귀족으로서는 마치 구걸하는 모양새가 치욕스럽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허엄! 큼!”

에기오스가 괜스레 헛기침만 하자 루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이라서 숫자 놀음은 하기가 싫다? 그러니 허구한 날 교활한 길드 놈들에게 당하는 겁니다. 그런 무시무시한 마법사 집단을 이끌면서도 별다른 이권도 이루지 못한 게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이권?”

“마도학자는 왜 전부 키워서 고스란히 왕실에 헌납합니까? 저라면 당장 마도 공방부터 신설하겠습니다.”

마탑이 키운 마법사들이 궁정마법사나 왕실 직속의 마도학자가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카데미부터 마탑까지, 왕국의 인재들을 키워 낸 주체가 왕실이기 때문.

그런 고귀한 인재들을 고작 돈을 버는 도구로 활용하라는 루인의 주장을 에기오스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네. 세상은 이익으로만 움직이지 않네. 대공자도 더욱 마도(魔道)를 알아 간다면 언젠가 이 나를 이해하게 될 걸세.”

“그래서 현실은요?”

루인이 피식 비웃었다.

“귀족가의 후원 없이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하면서 무슨 그런 한심한 말씀을. 왕실이 마탑을 온전히 운영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따로 살 방도를 마련해야죠. 언제까지 후원에 목맬 겁니까?”

한껏 진지해지는 표정의 루인.

“현자님이 얼마를 제시하든 반드시 그 금액 그대로 후원해 드리겠습니다. 단―”

“또 무슨 조건이 있단 말인가?”

씨익.

“제 지원은 일시적일 겁니다. 반드시 자생하세요. 분명하게 말하지만 우리 하이베른가는 또 다른 렌시아가가 되긴 싫습니다. 고작 후원 따위로 마탑을 통제하기 싫다는 뜻입니다.”

르마델 왕국이 유리한 지정학적 위치와 뛰어난 군사력을 지니고도 북부 왕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

그건 바로 북부인 특유의 고아(高雅)한 기질 때문이었다.

르마델의 귀족들은 길드(Guild)와 함께 똥밭에 구르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을 통제하거나 휘하에 두려고만 하지, 함께 이권 다툼을 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것이다.

인간이 이전투구에 능한 동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사람의 본성을 외면하는 것.

왕국의 저변에 깔린 이런 고질적인 문화가 바뀌지 않는 이상, 르마델은 결코 제국이 될 수 없었다.

‘…….’

에기오스가 현자라 불리는 이상, 루인의 말에 담긴 함의가 국가를 관통하는 철학의 문제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저 대공자 루인은 단지 힘의 우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왕국을 통째로 뜯어고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르마델의 어떤 왕도 해내지 못한 일.

비로소 르마델의 현자(賢者)는 루인의 목적이 왕국의 발전, 그 자체라는 것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대공자는 이 르마델을 제국(帝國)으로 키울 작정이신가?”

피식.

흑암의 공포의 목적이 고작 한 왕국의 발전에 국한될 리는 없었다.

인류 역량의 총체적 증진.

이 베나스 대륙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

그것이 악제를 상대하는 대마도사의 궁극적인 지향.

“경쟁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고아한 알껍질 따위는 깨고 나오시라는 말입니다.”

악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

인류는 최대한 서로 경쟁하며 발전해야 한다.

인류가 꽃피워 낼 문명의 총아(寵兒)가, 악제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어야 한다.

악제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만 있다면 루인은 헬라게아 속의 마장기를 전부 잃어도 아깝지 않았다.

루인이 기어코 자신의 목적을 드러낸다.

“아라혼.”

“어?”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루인을 화들짝 놀라며 바라보는 아라혼.

“널 황제로 만들어 주지. 북부 왕국을 통합하는 대제국을 일구어 알칸 제국과 경쟁해라.”

“……뭐?”

피식.

“물론 별로 좋을 건 없다. 너는 일평생을 투쟁하게 될 테니까.”

아라혼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평생토록 투쟁하는 삶.

“황제……?”

“이 거래가 손해는 아닐 거다. 가장 위대한 정복 군주로 역사에 남을 테니까. 너는 초대 국왕 소 로오보다, 초대 사자왕 사홀보다 더 거대한 이름이 될 것이다.”

북부 왕국을 모두 통합하고 대제국을 일궈 내라는 루인.

현자 에기오스와 헤데이안 학부장, 루인의 동료들이 모두 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루인의 두 동공에서 흔들리고 있는 마력 등불.

추측할 수 없는 심계, 초월적인 지혜의 아성, 거기에 거대한 목적까지.

그 압도적인 대마도사의 역량에.

모두가 숨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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