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76화 (176/187)

<176화>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세파이온.

더 이상은 분노할 힘도, 남아 있는 모멸감도 없었다.

가문이 은밀히 제작하고 있던 마장기가 공식 석상에서 드러났다.

지금도 저 교활한 사관이 미친 듯이 펜촉을 굴리고 있으니 이 모든 일은 역사로 기록될 터.

눈앞의 대공자는 이제 차후의 문제다.

여기서 이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다면 마장기를 통째로 왕실에 빼앗길 수도 있는 일.

일단은 시간을 최대한 끌어야 했다.

“……폐하. 아직은 연구 중인 단계이옵니다. 왕국의 위대한 마장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옵니다.”

“그대의 가문이 애를 써도 그러한가.”

“마장기는 본디 그런 물건이지 않사옵니까.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와중이라 뭐라 확답드리기가 힘드옵니다.”

“으음…….”

신중한 표정으로 고심하던 데오란츠 국왕이 이내 활짝 웃었다.

“허면 왕실의 지원을 약속하겠다. 필요하다면 마도학자들을 파견할 것이고, 마탑에도 협력 연구를 지시할 것이다. 다만 재원은 기존대로 그대들이 책임을 지라.”

이를 깨무는 세파이온.

‘저 기회주의자 놈이!’

지금까지 가만히 숨죽이고 있더니 이제 와서 숟가락을 얹겠다고?

뻔히 알고 있었던 주제에 꼴에 국왕이랍시고 발톱을 드러낸단 말인가?

세파이온이 데오란츠 국왕을 향해 이를 깨물며 더욱 허리를 숙였다.

“왕실이 개입한다면 이는 더 이상 비밀 연구가 아닌 공개 연구로 전환될 수밖에 없사옵니다. 본 왕국이 마장기를 추가로 확보하고 있다는 정보가 퍼져 나간다면 주변 왕국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마장기는 그만큼 민감한 전략 자산.

르마델 왕국이 마장기를 추가로 확보한다면 북부 왕국들의 결속이 초래되거나 제국을 자극할 수 있는 일.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한데.

“정말 웃겨 죽겠군. 닥소스가와 은밀히 협력하고 있는 주제에 다른 왕국이 이 일을 모르고 있을 것 같나?”

“너……!”

루인의 두 눈이 활처럼 휘어 있었다.

“사실상 알칸 제국에게 놀아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렌시아가는 그런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버렸고.”

“다, 닥쳐라!”

“추악한 욕망에 먹혀 버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주변 정세를 신경 쓰겠다니? 날 웃겨 죽일 셈인가?”

피식.

“적국의 귀족가에 힘을 실어 주어 내부를 무너뜨리려는 지극히 단순한 이간계(離間計)다. 이런 얄팍한 수작질에 넘어가는 자들이 남부의 대귀족이라니. 그래서? 이 에어라인에 마력 포격이라도 갈길 셈이었나?”

순간 세파이온의 낯빛이 눈에 띄게 창백해진다.

그동안 소울레스가의 가주 와이립은 마장기가 완성되는 즉시 왕실을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신은 왕실이 아예 사라지는 것까지는 원하지 않았다.

고대로부터 한 왕국의 정통성을 부수고 명분 없이 세워진 국가는 그 수명이 지극히 짧았다.

그런 위험 부담을 지는 것보단 지금처럼 은막의 권력을 유지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인 것이다.

자신은 그런 극단주의적인 와이립의 뜻을 말려 왔다.

중앙 정계에서 오랫동안 소외받은 소울레스가는 왕실을 향한 증오가 상당했던 것.

“왜 그런 표정이지?”

피식 웃고 있는 루인.

과거, 가장 먼저 왕국을 배신하고 악제의 군단에 합류한 가문은 소울레스가.

미래를 알고 있는 루인에게 애초부터 세파이온은 승리할 수가 없었다.

‘……대공자.’

그런 루인을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던 수호자는 확신하고 있었다.

역시 저 루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는 왕국의 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르마델을 지켜 내려 힘쓰는 자.

그렇게 드베이안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루인에 대한 경계심마저 모두 비워 낼 수 있었다.

확신이 섰다면 남은 것은 행동.

그것이 왕국의 수호자가 평생을 지켜 온 기사도.

“폐하. 소울레스가에 왕실의 수호기사단을 파견하겠사옵니다. 재가하여 주시옵소서.”

의외라는 듯 데오란츠 국왕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호기사단을? 이유가 무엇인가?”

“마장기가 새로 탄생한다면 이는 왕국의 운명과 닿아 있는 사안. 수호자는 본분대로 왕국의 미래를 지켜 낼 뿐이옵니다.”

세파이온의 얼굴이 썩어 간다.

마장기를 지켜 내겠다는 명분은 명백한 허울.

수호자의 본색이 너무 노골적이라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명한 바대로 마탑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사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소울레스가를 지원할 수 있도록 돌아가는 즉시 마도학자들을 소집하겠사옵니다.”

“가시기 전에 제가 한 번 마탑에 들리죠.”

“그러시게. 루인 생도.”

빙그레 웃으며 루인과 눈짓을 주고받고 있는 현자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세파이온.

그때.

지이이잉-

갑자기 공간을 왜곡하며 나타난 루인의 아공간.

기이한 미소로 쑥- 하고 팔을 집어넣은 루인이 곧장 커다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쿵-

쿵- 쿠쿵-

칙칙한 묵광(墨光).

하지만 강렬하게 반짝이는 커다란 보석.

어지럽게 얽혀 일렁이는 미세한 스파크.

마력 얽힘 현상을 자연계에서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물질.

그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마정(魔精)이었다.

현자 에기오스가 멍한 얼굴로 굳어졌다.

소울레스가의 가주 와이립도 두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설마 이게 정말 마정인가?”

“보시다시피 그렇습니다.”

헤데이안 학부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대, 대체 어떻게 이, 이런 크기와 순도가……!”

순도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지표는 얽히는 뇌전의 간격.

간헐적으로 일렁이는 스파크의 간격이 자신이 본 어떤 마정보다도 촘촘했다.

더욱이 그 커다란 크기 역시 말도 안 되는 수준.

저 정도 크기의 마정이라면 대체 값이 얼마나 나갈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한데, 그런 마정이 무려 6개.

씨익 하고 미소 짓던 루인이 소울레스가의 가주 와이립을 응시한다.

“현자님과 수호자님이 발 벗고 나서는데 하이베른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이 마정들을 대가 없이 무상으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마장기를 완성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란 마력핵을 제작하는 데 소요되는 무식한 마정석의 양.

지금까지 하이렌시아가와 소울레스가는 강마력 엔진을 완성하기 위해 시장에 있는 모든 마정을 사들였다.

장물을 거래하는 암거래상들의 것까지 모조리 매입해 온 것이다.

그렇게 소요된 예산은 웬만한 국가의 반년 재정과 맞먹는 수준.

한데, 지금 눈앞에 떨어진 마정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모아 온 마정과 비슷한,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양처럼 보였다.

그 정도로 엄청난 가치를 지닌 마정을 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지금 무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피식.

“하지만 생산지가 특별한 곳이라 평범한 방법으로는 추출할 수 없습니다. 리네오 길드의 일을 들으셨다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아시겠지요.”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와이립의 두 눈.

기억이 났다.

엄청난 가치의 마정을 확보한 리네오 길드가 제국의 마도학자를 동원하고도 마력을 추출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마정을 판매한 당사자.

오직 그만이 이 신비한 마정을 추출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고 얼마 전 리네오 길드로부터 전달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 신비한 마정이 도착하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 그 마정을 판매한 당사자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럼 그 놀라운 마정을 추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네. 이 마정들은 제가 없으면 아무런 쓸모도 없는 돌덩이란 뜻입니다.”

꿀꺽.

비로소 와이립은 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에게 자신의 목줄이 쥐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고작 길드 따위에게 이 귀한 마정을 팔았단 말인가!”

현자 에기오스의 외침에 루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에어라인에 입천하면서 돈이 필요했습니다. 배움의 아카데미가 무슨 돈을 그렇게 뜯어 대는지 원.”

“어허! 그렇다고 해도……!”

지켜보던 헤데이안 학부장이 묘한 눈빛을 번뜩인다.

“일전에 자네가 생도들의 연구실에서 마정을 추출하여 포션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네.”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럼 생도들에게 기증한 마정도 이 마정과 동일한 것인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요.”

이쯤에서 헤데이안을 괴롭히는 의문.

“도대체 이런 마정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 건가? 아니 그것보다 어디서 구한 건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루인.

“얼마 전 저희 가문은 파네옴 광산을 확보했죠.”

“하, 한데?”

씨익.

“탐색차에 조금만 파 보니 마정 밭이더라고요. 발에 차일 정도로 많던데요?”

“그, 그게 사실인가!”

“직접 보고 있지 않으십니까?”

의미심장한 표정의 루인과 아직도 마력 얽힘이 선명한 마정들을 번갈아 응시하는 헤데이안.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로 데오란츠 국왕이었다.

그 보잘것없는 광산이 그토록 무시무시한 가치를 지녔을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

하지만 이제 와서 왕명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이베른가는 왕국의 군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기수가.

왕명을 번복하고 파네옴 광산을 회수한다면 봉기하여 독립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집단인 것이다.

“…….”

“…….”

귀족 대신들도 경악스러운 건 마찬가지.

왕국의 군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대공가가 하이렌시아가를 능가하는 재물까지 거머쥔다?

하이베른가의 광산에 그토록 천문학적 자원이 잠들어 있다면 권력의 판도가 분명하게 달라질 터였다.

귀족 대신들의 두뇌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권력의 향방에 누구보다도 민감한 자들.

가장 먼저 판단을 내린 자는 소노옴가의 긱스 가주였다.

“대공자님! 아직도 하이베른가의 제안이 유효하다면 저희 소노옴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작황의 결과에 상관없이, 결당 2만 이랑으로 선계약해 주겠다는 루인의 제안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입니다. 대금은 수일 내로 치르도록 하죠. 이왕이면 단기가 아니라 5년 정도로 넉넉하게 계약하고 싶은데.”

“5년 치의 서, 선금을 주시겠다는 뜻입니까?”

“공의 영지 사정이 만만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당분간은 숨이 좀 트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야……!”

긱스 가주는 더 이상 하이렌시아가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지금까지 제공받던 어떠한 이득도, 곧 도래될 막대한 이익에 비해서는 초라한 수준이었으니까.

“저도 하이베른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도!”

“대, 대공자님! 저희 영지의 특산물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득달같이 달려드는 귀족 대신들!

하이베른가가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광산을 확보한 것이 드러난 이상, 그들의 제안을 거부한다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너…… 어쩌려고……?”

아라혼의 당황한 두 눈.

이번 일로 파네옴 광산이 마정 광산이라는 것을 전 왕국에 드러냈다.

이 소문이 번진다면 주변 왕국이 이빨을 드러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특히 알칸 제국은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한데.

“하하…….”

이내 아라혼은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떠오른 것이다.

저 루인의 아공간에서 본 모든 것들을.

왕국의 사자는 늙었다.

그러나.

그들이 낳은 새끼 사자가 성체(成體)가 되어, 르마델 왕국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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