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75화 (175/187)

<175화>

천천히 일어난 루인이 수호자를 지나 왕비와 아라혼의 곁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단지 걸어가 그들에 곁에 섰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모든 귀족 대신들이 경악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국의 수호자와 마탑의 현자.

헤데이안 학부장, 그리고 1왕자와 대역 왕비.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실질적인 권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왕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정통성과 상징성을 지닌 자들이라는 것.

특히 수호자와 현자.

수호자는 사자왕과 비견되는 명성을 지닌 왕국 최고의 기사였다. 모든 기사들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니는 파급력이란 상상을 불허했다.

만약 그가 활동적인 성향이었다면 반드시 거대한 기사들의 세력을 일구어 냈을 것이다.

더욱이 현자는 마탑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

특히 그는 왕국의 하나뿐인 마장기의 ‘오너 매지션’이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왕국에 무제한적으로 강짜를 부릴 수 있는 인물.

그런 그가 자신들의 적이 된다면 반드시 무서운 존재로 거듭날 터였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루인을 노려보고 있는 현인 세파이온.

모두가 긴장으로 침묵하고 있을 때, 루인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절대 왕권의 전통을 자랑하는 르마델 왕국이 일개 가문의 꼭두각시일 리가 없지요.”

아라혼을 쳐다보는 루인.

“하지만 현자님이나 학부장님의 반응을 보아하니 부정할 수만은 없겠군요. 회의 한 번 없이 운영위를 제멋대로 주무르는 게 정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 닥쳐라!”

피식.

“이건 뭐. 기수가의 정통을 잇고 있는 이 내가 당신의 눈에는 한낱 무뢰배에 지나지 않나 봅니다.”

“감히!”

순간, 루인의 눈빛이 야수처럼 사납게 번뜩였다.

“폐하의 안전이다. 어떤 작위도 직위도 없는 자가 계속 입을 놀리는 것도 놀라운데 감히 기수가의 대공자를 천민 취급한단 말인가.”

그것은 세파이온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

남부의 현인, 렌시아가의 지혜라는 이명은 분명 드높다.

하지만 그는 실질적인 작위나 직책이 없었다.

물론 핸드의 친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지금까지 왕실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쳐 온 것은 사실이었다.

세파이온이 악착같이 입매를 비튼다.

“왕국의 기수가? 사자의 가문? 감히 네놈들이 남부가 내어 주는 물자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

왕국의 북부는 그 강역의 규모에 비해 지극히 척박한 땅.

비옥한 남부의 생산력과는 비교조차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런 비효율적인 생산력을 무식하게 광활한 봉토의 영역이 그나마 메우고 있을 뿐.

고작 병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해마다 막대한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왕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건 왕실의 지원이 아니라 사실상 남부 귀족들의 지원.

“도대체 고작 대공자 따위가 무얼 믿고 이리도 설쳐 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고 있는 네놈을 정말 사자왕께서 용인하신 것이냐?”

막대한 남부의 부를 이용해 철저하게 왕국을 장악하고 있는 렌시아가의 자신감이 그의 두 눈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 남부의 공물? 그렇지. 꼬박꼬박 바쳐 오던 공물 공급이 갑자기 중단되면 제법 곤란하겠군.”

“……공물?”

공물(貢物).

살아남기 위해 강한 자에게 잘 보이겠다고 바치는 일종의 선물.

지금 저 하이베른가의 새끼 사자가 남부의 지원을 그런 굴종의 증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거…… 아주 제대로 미친 놈이군.”

분노가 극에 이르면 오히려 평정을 되찾는 법.

더 이상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이제는 발톱을 숨기지 않는 세파이온.

“오냐. 지금부터 정말로 지원을 중단해 주지. 이 일은 전적으로 네놈의 책임. 그리고 건방진 네놈의 행동을 반드시 사자왕께―”

삐딱하게 꺾이는 루인의 고개.

“남부의 현인이 아니라 남부의 바보인가? 굳이 바치지 않겠다면 사들이면 그만인 문제를 지금 그걸 협박이라고 하고 있나?”

병력을 유지하기도 벅찬, 게다가 기사들의 부정부패로 내부 사정마저 엉망인 병든 사자 놈들이 뭐?

재정을 풀어 물자를 사겠다고?

“크하하하하하!”

이건 진심으로 웃겼다.

허리까지 재껴 가며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세파이온.

그는 이내 대공자에게 가졌던 경계마저 풀었다.

꼴에 자존심이 상해 욱하고 내뱉은 말, 혹은 가문의 사정을 하나도 모르는 철부지에 불과한 놈이었다.

고작 이런 애송이와 지금까지 입씨름을 벌였다니!

순식간에 밀려드는 수치스러움과 모멸감.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세파이온이 데오란츠 국왕을 향해 뭐라 입을 열 그때였다.

“긱스 가주. 왕국의 건축가여. 그대의 영지가 올해 생산할 밀을 결(結)당 2만 리랑에 계약하고 싶습니다.”

“예……?”

또다시 흘러나오는 루인의 무심한 음성.

“벤허 공. 공의로운 백작가여. 그대의 영지에서 생산되는 담비 가죽을 앞으로 전량 매수할 의사가 있습니다. 본 대공가의 제안은 언제나 균일하게 온스당 600리랑입니다.”

“유, 육백 리랑……?”

루인이 시선을 옮기며 푸근하게 웃는다.

“헤럴드 공의 봉토에서 생산되는 오바움 나무도 질이 좋기로 유명하지요. 크리안 산맥에서 생산되는 목재의 절반 정도를 정기적으로 공급받고 싶습니다. 제가 제안할 금액은 온스당 300리랑입니다. 이 역시 시세 변동과 무관합니다.”

“대공자. 그게 정말입니까? 헙!”

세파이온의 날카로운 시선에 황급히 헛바람을 삼키는 헤럴드 남작.

하지만 그만큼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제안한 금액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모두 평균 시세의 최소 3배.

더욱이 풍작인지 흉작인지 가늠할 수 없는 미래의 수확량을 통째로 사겠다니?

그런 불확실한 생산량을 미리 정해진 가격에 매입한다는 건 가장 후한 거래 방식이었다.

그런 거래처를 만난다는 건 안정적인 영지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

세파이온이 더욱 미친놈 보듯이 루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것이냐?”

“아니. 너무 멀쩡하지.”

수확량을 알 수 없는 밀밭을 결당 2만 리랑에 선계약하고.

온스당 150리랑에 불과한 담비 가죽을 600리랑에 매입하겠다는 놈이 정상이라니?

하지만 무엇보다 이 거래에는 가장 중요한 하나가 빠져 있었다.

신뢰(信賴).

기수가의 명성만이 전부인 대공가에게, 과연 그런 엄청난 대금을 치를 능력이 있느냐에 관한 믿음의 문제.

이 르마델 왕국의 귀족이라면 늙고 병들어 버린 하이베른가의 곤궁한 사정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왕국의 가문비나무, 마도 가문 소울레스여.”

마도 가문 소울레스가의 가주, 와이립 공의 눈빛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권력과 풍모를 상징하는 가문비나무야말로 마도 가문 소울레스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깃발.

하지만 정말이지 오랫동안 들어 보지 못한 소울레스가의 옛 영명이었다.

왕국의 양대 마도 가문인 메데니아가와 어브렐가에 밀려 옛 명성을 잃어만 가고 있는 소울레스가인 것이다.

루인은 와이립 공의 그런 흔들리는 눈빛을 침잠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 도해(圖解)를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무슨……?”

“갑작스럽게 행운이 들이닥칠 때는 의심부터 하는 것이 원칙이지요. 놈들이 무슨 달콤한 말을 속삭였을지 충분히 눈에 그려집니다만 다시 생각하세요. 그 도해는 본 출력의 절반조차 발휘할 수 없는, 그것도 일회용 엔진입니다.”

와이립 공이 온몸을 떨고 있었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말하고 있는 ‘도해’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제야 명확하게 깨달은 것이다.

‘저 녀석이 어찌……?’

마장기의 핵심, 마력핵.

놈이 말하고 있는 건, 그 마력핵에 동력을 부여할 수 있는 강마력 엔진의 도해였다.

자신도 그 도해가 열화판 강마력 엔진의 도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알칸 제국이 온전한 강마력 엔진의 제작법을 그렇게 쉽게 넘길 리는 없을 테니까.

한데 이 사실은 알고 있다고 해도 결코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절대 권력을 지닌 하이렌시아가의 일이었다.

하이렌시아가가 마장기를 갖고 싶어 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

저 어린 사자가 지금 그 일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말만 하시오.”

“감당?”

피식거리던 루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일변했다.

“이봐요 와이립 공. 닥소스가를 잘 아십니까?”

알칸 제국의 마도 명가 닥소스가.

결국 저 빌어먹을 놈의 입에서 알칸 제국의 마도 가문까지 언급되고야 말았다.

세파이온이 참지 못하고 소리친다.

“이 건방진 녀석이!”

하지만 여전히 흔들림 없이 와이립을 직시하고 있는 루인.

“그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열화판 도해가 아닙니다. 불안정한 마력 흐름으로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는, 그건 그냥 폭탄입니다.”

루인은 이미 에어라인의 리네오 길드에서 닥소스가의 열화판 강마력 엔진 도해를 직접 살펴본 경험이 있었다.

지극히 불안정한, 몇 번 정도 구동되다가 결국엔 터져 버릴 시한폭탄.

그것도 모르고 소울레스가는 자신들이 탄생시킬 위대한 마도 병기, 마장기의 꿈에 부풀어 헛된 기대와 망상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와이립은 마도 명가의 가주답게 에어라인에서 들려오는 루인에 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다.

전설적인 헤이로도스 술식을 구현해 낸 세기의 마도 천재.

더욱이 현자에 근접한 마도(魔道)를 직접 베스키아 리움에서 확인까지 했었다.

“그게 정말 사실…….”

“열화판 도해의 모든 오류를 바로잡아 완성해 드리죠.”

“뭐? 방금 뭐라고 했소?”

루인이 웃었다.

“이 대공자가, 위대한 헤이로도스의 술식을 이어받은 마법사가, 그대들의 가문비나무를 다시 울창하게 가꾸는 동력이 되어 주겠단 뜻이지.”

와이립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울레스가가 마장기를 완성한다는 건, 하이렌시아가가 더욱 공고한 왕국의 지배자가 된다는 뜻.

늙은 사자의 가문은 더 이상 남부의 불새를 상대할 생각조차 품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이베른가가 왜 그런…….”

루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새로운 마장기의 출현은 르마델의 축복. 공의로우신 국왕 폐하께서 충분히 치하하실 일입니다.”

“대, 대공자!”

“왕실의 재산과 마탑의 지혜를 빌리지 않고서도 마장기를 개발한 것은 참으로 대견한 일입니다만. 설마하니 그대들이 사적으로 마장기를 개발한 것에 다른 뜻이 있었단 말입니까?”

충격적인 정적이 몰아치는 내빈실.

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지금 말 몇 마디로 소울레스가가 개발 중인 마장기를 왕국에 귀속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동안 하이렌시아가가 기울인 노력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

제국과의 치밀한 협상.

천문학적인 재원.

거기에 마도 명가 소울레스가의 전 역량을 갈아 넣은 마도공학의 예술을 지금 말 몇 마디로 앗아 가려는 것이다.

현자가 박수를 친다.

짝짝.

“불새의 가문에게 그런 놀라운 충정이 있는 줄은 몰랐소. 과연 이 나라의 대공가, 하이렌시아가다운 배포이오.”

검으로 멋들어진 예법을 펼쳐 보이는 수호자.

“과연 한낱 검수 따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구려. 르마델의 기사로서 그대와 그대의 가문이 해낸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헤데이안 학부장.

“허허, 우리 르마델이 제국(帝國)이 되는 것도 머지않은 듯하오.”

아라혼이 갑자기 데오란츠 국왕에게 허리를 숙인다.

“남부의 대공가, 하이렌시아가 놀라운 역량을 보여 주었습니다. 폐하께서 치하하여 주시옵소서.”

두 눈을 사납게 부릅뜨고 있는 세파이온.

그는 떨리는 손, 솟구치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고작 새끼 사자에게 우승의 영애를 빼앗으려 했다가 오히려 마장기를 빼앗기게 생긴 것이다.

“네놈! 지금 이 자리에서 저들 모두를 구워삶는다고 해도 어차피 중부를 지날 수는 없다! 중부는……!”

세파이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최근 남부를 충격으로 몰아간 소문을 그 역시 모두 보고받았기 때문이다.

루인이 배시시 웃었다.

“중부? 우리 충직한 봉신가 어브렐가 말인가?”

그 순간 세파이온은 깨달았다.

저 새끼 사자가.

이 날, 이 순간을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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