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세파이온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설마하니 가문의 방계 기사 따위가 훼방을 놓을지는 꿈에도 몰랐기 때문.
그렇게 세파이온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을 때 학장 베벤토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마법 생도들의 갑주가 그대들의 검술을 모두 무효화시키는 걸 분명 지켜보았네.”
“예. 하지만 저희도 안티 매직 아티펙트를 활용했습니다.”
“자네들의 것은 마도학자들에게 공인된 정식 마도구들이네. 출처가 불분명한 마도구들과는 비교를 불허하지.”
“…….”
“다시 말하지만,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면 무투대회에서 사용했던 마도구들을 공개하고 마도학자들의 검증을 받으면 그만인 일이네.”
루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끝까지 부정한 방법을 동원했다고 몰아갈 기세.
결국 대전 결과를 무효로 선언한 후 끝내는 몰수패로 결승전을 조작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술수를 부려 주면 오히려 고마운 일.
아직 저 세파이온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를 얕잡아 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때.
“국왕 폐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모든 귀족들이 놀란 얼굴로 데오란츠 국왕의 곁을 수행하고 있는 수호 기사를 쳐다본다.
수호자 드베이안 공.
그가 왕국의 행사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있었던가?
그는 국왕과 왕실, 그리고 르마델의 안위 외에는 어떤 관심도 없는 기사.
그가 이렇게 많은 귀족들이 모인 공개 석상에서 자신의 의견을 직접 표명하는 일은 거의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대가……?”
그가 어색한 것은 데오란츠 국왕도 마찬가지인 모양.
“허락하신다면 무투대회를 지켜본 르마델의 기사로서 신중히 의견을 표명하고자 합니다.”
국왕 데오란츠가 묘한 눈빛을 빛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겠다.”
“황공하옵니다.”
기사의 예를 표하고 있던 수호자 드베이안이 뒤를 돌아보자 귀족들의 표정이 일제히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기사단 전체 전력과 맞먹는 왕국의 초인.
그가 왕국의 공인된 초인이 된 지도 벌써 반백 년이 지났다.
이 자리엔 그런 수호자의 명성을 어렸을 때부터 흠모하며 자란 귀족들도 많았다.
만약 그가 국왕의 수호 기사가 아닌 권력 관계에 얽혀 있는 귀족이었다면.
르마델의 권력 판도는 결코 지금처럼 흘러가지 못했을 것이다.
“먼저, 나 역시 실력의 순수를 증명하는 왕립 무투대회가 온갖 마도구로 얼룩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소. 기사로서 그리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진 않소.”
무시무시한 초인의 눈빛.
내빈실에 무거운 적막이 내리깔린다.
“허나 기본적으로 결투는 실전의 증명. 전장에서 패배한 자가 마도구나 명검 때문에 승리를 놓쳤다고 핑계를 늘어놓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지. 아마도 이 점 때문에 무투대회를 설계한 당사자들께서도 굳이 규칙으로 막지 않으셨던 모양이오.”
드베이안의 담담한 음성이 이어질 때마다 세파이온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왕국의 수호자, 그 이전에 유일무이한 초인인 그의 말은 그 무게가 상당하다.
더욱이 직접 국왕에게 재가받은 발언권이라면 이는 왕국의 역사에 남는 기록.
저 교활한 사관이 묘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펜대를 굴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직접적인 증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호자의 발언을 계속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결국 세파이온이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미 베벤토 학장과 이 세파이온, 그리고 여기 모인 무수한 귀족 대신들, 무엇보다 국왕 폐하의 뜻을 함께 모아 내린 결정이오.”
“르마델은 법과 원칙이 지배하는 국가. 잘못이 있다면 미리 규칙을 설계하지 않은 운영위에 있소. 왕국이 저지른 실수를 저 어린 생도들에게 전가할 생각이외까.”
“……뭣이?”
왕국이 저지른 실수?
수호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말이었다.
설사 왕국의 체계가 미흡했다고 해도 결코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말.
신성시되는 국가의 체계와 권력을 왕국의 수호자가 스스로 부정한다고?
한데.
“남부의 현인, 하이렌시아의 지혜이시여. 한데 이 에기오스는 왜 그런 결정을 들어 보지 못한 것이오?”
“현자……?”
천천히 일어나 수호자의 곁에 선 인물은 다름 아닌 현자 에기오스.
“그게 무슨 말이오?”
“아니, 그렇지 않소? 귀족 대신들의 모든 중지를 모아 내린 결정이라 하셨는데 이 에기오스로서는 금시초문인 일인지라…….”
에기오스는 이 나라의 현자이자 마탑주이기 이전에 마도명가 메데니아가를 대표하는 대귀족.
그의 말에 담긴 무게 역시 저 수호자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한데 문제는 그가 하이렌시아가에게 막대한 후원을 받고 있는 마탑의 주인이라는 것.
마탑의 운영을 포기할 생각이 아니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내빈실에 모인 귀족들은 표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저 현명한 마탑주가 하이렌시아가의 일을 대놓고 훼방 놓는 장면을 대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분명 자신들이 모르는 일이 흘러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온갖 권력의 역학 관계 속에서도 치열하게 살아남은 귀족들.
그들은 갑작스러운 수호자와 현자의 태도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헤데이안 역시 이번 결정을 들어 보지 못했소이다. 이상한 일이군. 학부장인 내가 이토록 중요한 결정에 대해 보고받지 못하다니.”
학장 베벤토가 홱 하니 헤데이안 학부장을 쏘아본다.
제깟 놈이 언제부터 아카데미의 운영에 관심이 있었다고?
허구한 날 연구실에 틀어박혀 괴팍한 일만 일삼는 자가 이제 와서 저런 터무니없는 망발을 늘어놓다니!
“수천 명 군중들이 모두 지켜본 승리요. 이 일이 제대로 새어 나간다면 왕실은 틀림없이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헤데이안!”
화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 베벤토 학장을 향해 세파이온의 손짓이 날아들었다.
베벤토 학장이 가까스로 화를 삼키며 자리에 앉자 다소 가라앉은 세파이온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자신 있소이까……?”
수호자 드베이안, 현자 에기오스, 헤데이안 학부장을 천천히 시선으로 훑고 있는 세파이온.
이 르마델 왕국에서 하이렌시아가의 뜻을 거역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데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만한 인사들이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되묻고 있었다.
“무슨 자신 말씀이시오?”
“설마 지금 국왕 폐하께서 거하는 공간에서 우리를 협박하는 것이외까?”
점점 몸이 떨리기 시작하는 세파이온.
“감히 네놈들이!”
순간 수호자 드베이안의 전신에서 촘촘한 밀도의 투기가 흘러나왔다.
“감히?”
한데 그때.
“어어? 그만. 거기까지.”
모든 귀족들이 홱 하고 루인을 향해 뒤돌아본다.
루인이 수호자 드베이안을 쳐다보며 미묘하게 웃고 있었다.
“왕국의 안위를 지켜야 할 수호자께서 대신들을 겁박하면 되겠습니까.”
순간 씻은 듯이 사라지는 초인의 투기.
투기를 거둔 채 정중하고 공손한 몸짓으로 뒤로 물러나는 수호자를 모두가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귀족들은 갑작스레 닥친 현실을 잠시 머리로 연산하지 못했다.
대체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현자님과 학부장님도 그래요. 일을 하다 보면 보고가 누락되거나 사후 통보가 될 수도 있는 문제를 왜 그렇게 민감하게들 반응하시는 겁니까?”
“흠흠.”
“음…….”
귀족들의 고개가 묘하게 꺾어진다.
현자와 학부장 또한 뭔가 루인에게 주눅 들어 하는 태도가 역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합의도 하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전체 의결됐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럼 그동안은 왜 참으셨지요? 아마도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으셨을 텐데.”
“그, 그건…….”
피식.
“아, 뭐 됐습니다. 다시 뭐라고요?”
일체의 감정 없는 눈으로 자신을 직시해 오는 대공자의 눈빛.
노련한 현인답게 세파이온은 능글맞은 미소로 루인의 눈빛을 맞이했다.
“이런, 이런. 이제야 알겠네. 이제야 알겠어.”
처음엔 즉각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법학부의 학부장과 왕국의 고지식한 수호자, 저 지혜로운 현자가 하이렌시아가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
수치스러웠다.
고작 금린사자기 하나가 전부인 옛 영웅의 가문 따위를 믿고 저치들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다는 자체가.
땅에 떨어진 하이렌시아가의 위상, 이 모두가 빌어먹을 기수 쟁탈전 때문이었다.
대단한 아이임은 틀림없다.
비록 완성되지 않은 기사이지만 초인을 꺾은 건 사실이니까.
저 늙은이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결코 그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뿌드득-
기수 쟁탈전을 주장했던 가주를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무엇보다 하이베른가를 늙고 병든 사자라고 판단했던 자신부터 용서할 수 없었다.
한 번도 귀족 사회에 나타난 적이 없는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저런 무시무시한 놈이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
‘으음…….’
저 늙은이들 중에 현자 에기오스가 끼어 있다는 것이 꺼림칙했다.
그는 남부의 현인이라는 자신과 비견되는 ‘왕실의 지혜’.
표정 하나 몸짓 하나 허투루 소비하지 않는 것이 그의 철두철미한 평소 모습이었다.
그런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가 하이베른과 붙어먹었다면 틀림없이 무언가를 보았다는 의미일 터.
지금은 그것부터 알아야 했다.
“그래서 자네는 지금부터 어찌할 생각인가.”
“생각이라니요?”
루인의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세파이온은 자신의 뒤편에 앉아 있는 귀족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뜻이 충돌한다면 다수를 따르는 것이 왕국을 운영해 온 귀족들의 오랜 체계. 더욱이 이 일은 폐하께서도 재가하신 일이네.”
“다수라…….”
미묘하게 웃고 있는 루인.
루인의 두 눈이 긴장으로 가득한 귀족 대신들의 얼굴을 훑고 있었다.
왕국의 수호자와 현자까지 반대하고 나섰으니 그들로서도 혼란스러운 모양.
더욱이 아직 데오란츠 국왕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왕비께서 입장하시옵니다!”
라슈티아나 왕비를 보좌하는 시녀의 갑작스러운 외침.
라슈티아나 왕비의 등장은 귀족들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런 일을 처음 겪은 것은 왕비를 보좌하는 시녀도 마찬가지였는지, 핏기 하나 없는 시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 묻어 나오고 있었다.
“1왕자 저하……?”
라슈티아나 왕비와 함께 등장한 인물은 다름 아닌 1왕자 아라혼.
왕비의 진정한 정체, 왕실의 내밀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몇몇 귀족들로서는 그 장면이 실로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대역 왕비가 함께하는 공식 행사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몸을 드러낸 적이 없는 1왕자가 아닌가?
데오란츠 국왕의 보좌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던 라슈티아나 왕비가 귀족 대신들을 쏘아보았다.
“여러 귀족 대신들께서는 왜 이번 무투대회를 인정하지 않는 거죠?”
대표로 나서는 세파이온.
“이 일은 왕비께서 참견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왕국의 일이니 이만 물러가시옵소서.”
어린 왕의 섭정이 아닌 이상, 왕비는 왕국의 일에 참정(參政)할 수가 없다.
더욱이 배역에만 충실하면 되는 대역 주제에!
세파이온의 분노 섞인 눈빛이 그녀를 해부할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대들 렌시아 일파가 득세하기 전에는 그런 왕법이 존재하지 않았지.”
1왕자 아라혼의 목소리가 분명했지만, 세파이온은 잘못 들었나 싶어 몇 번이고 두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공식 석상에서 고작 1왕자 따위가 자신의 가문을 하이(High)로 예우하지 않는다고?
“1왕자……?”
아라혼이 태연하게 웃었다.
“왕실은 더 이상 렌시아가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루인을 바라보는 아라혼.
“그렇지 않은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루인이 그와 마주 웃으며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