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왕립 아카데미의 로비홀.
예복을 입고 기다리고 있는 목소리 생도들에게 날아든 것은 비공개 시상식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소식이었다.
“비공개……?”
“아니, 그게 말이 돼? 다시 확인해 봐요!”
황당하다는 듯한 시론과 세베론의 반응.
역대 무투대회의 시상식이 얼마나 화려한 영예였던가.
하지만 운영위에서 나온 직원은 연신 앵무새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번 시상식은 비공개로 결정되었습니다. 이의를 제기하실 거면 정식으로 운영위의 절차를 밟아 주십시오.”
꾸벅 인사를 건네더니 이내 사라져 버린 운영위 직원.
다프네의 얼굴이 차가워진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요.”
<어떤 불길함이죠?>
루이즈에게도 운영위의 이번 결정은 뜻밖이었다.
왕립 무투대회는 규모 면으로나 명성 면으로나 르마델 왕국의 제법 중요한 행사.
이미 수천 명이 지켜본 무투대회의 시상식을 비공개로 처리하는 건 도무지 상식 밖의 일이었다.
모두가 루인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 의외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루인 님도 짚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나요?>
루인이 피식 웃었다.
“아니. 너무 뻔한 일이라서 오히려 생각할 필요조차 없지.”
의심할 여지 따윈 없는 렌시아가의 술수.
하이베른가에게 돌아갈 영예를 빼앗고 싶은 건 이 르마델 왕국에서 렌시아가와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밖에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무리들 중에는 데오란츠 국왕도 포함되어 있었지.
루인이 자조적으로 웃자 루이즈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럴 리가…… 아무리 그래도 그들도 국왕님의 신하인데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아직 어린 자신의 동료들은 이 모든 일이 오히려 그 국왕과 관련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리리아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됐다. 어차피 포상만 제대로 받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시끄러운 것보다 오히려 좋아.”
<그래도…….>
이건 그런 현실보단 꿈의 문제.
전 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우승자의 영예를 거머쥐는 광경을 상상해 온 친구들에게는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기분으로 다가갈 것이다.
“어쨌든 가자.”
루인이 소파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또 무슨 수작을 부려 놨는지 궁금하기도 하군.”
루인을 따라나서는 목소리 생도들의 표정이 긴장감으로 물들고 있었다.
* * *
에어라인의 공중 왕실.
루인이 화려한 에메랄드로 치장되어 있는 내빈실을 담담한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예상대로 내빈실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죄다 렌시아가 계열의 귀족들이었다.
무엇보다 저 중앙 귀빈석, 불새 문양의 로브를 온몸에 드리운 자.
루인은 그를 보는 즉시 알 수 있었다.
그가 환상검제 레페이온의 동생, 렌시아가의 진정한 꾀주머니라는 세파이온의 젊은 모습이라는 것을.
렌시아가의 지혜.
남부의 현인(賢人).
사실상 렌시아가의 모든 입장과 전략은 저 남자의 머리에서 비롯되는 것.
렌시아가가 구가하고 있는 당대의 찬란함은 모두 저 남자의 지혜로 빚어낸 결과물일 것이다.
루인은 그런 세파이온의 눈빛과 잠시 얽혔다.
의외로 그는 자신을 보자마자 사람 좋게 활짝 웃고 있었다.
루인도 그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그러자 그는 목젖이 울렁거릴 정도로 호탕하게 웃더니 금방 안색을 바꾸었다.
루인의 표정이 굳었다.
곁에서 소곤거리는 시론.
“하이렌시아가의 귀족 같은데? 아는 사람이야?”
불새 문양의 로브를 몸에 드리울 수 있는 사람은 하이렌시아가의 고위 귀족들밖에 없었다.
“글쎄.”
전생을 말하는 거라면 아는 사람이었다.
인류 연합을 결성하기 전, 여러 항전 집단으로 나뉘어 있을 당시 그는 북부 왕국들의 지도자였다.
악제의 군단에 의해 처참하게 패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꽤 명성을 떨치던 장군이었다.
-놈의 영혼에서 신족(神族)의 냄새가 난다!
갑작스런 쟈이로벨의 반응은 루인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타이탄? 저자가?’
-순수한 신족은 아니다! 혼혈로 희석되었군! 아마도 모계나 부계의 조상 중에 타이탄족이 얽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쟈이로벨은 아직도 당황하는 중이었다.
신족이라 불리는 타이탄족이 인간의 가문과 얽혀 있다는 사실부터가 쟈이로벨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부딪치고 있었기 때문.
타이탄족들은 철저한 씨족 중심의 사회를 구성하는 존재들.
자신들의 순수성을 지켜 내기 위해 그들은 근친혼의 문화를 영구적으로 유지해 온 종족이었다.
‘이상하군. 내가 알기로…….’
-그래. 그들은 타 종족과 혈통이 얽히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종족이지. 정말 기이한 일이군.
아직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타이탄족이 렌시아가의 혈통 자체에 얽혀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정보.
-분명한 것은 그들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할 만한 대사건이 그들과 렌시아가 사이에 있었다는 것 정도겠지.
‘권능의 약화를 각오할 만한 사연이 있었다는 건가?’
대답 없이 다시 침묵하는 쟈이로벨.
평소에 하찮게만 생각했던, 머나먼 옛날에는 인간들을 작물처럼 섭식(攝食)했던 신의 종족.
그런 신의 종족이 스스로의 운명을 인간, 그것도 고작 한 가문에 걸었다라.
그때, 내빈실의 문이 열리며 데오란츠 국왕의 보좌가 들어와 소리쳤다.
“국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대신과 귀족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국왕을 맞이했다.
한데 국왕은 혼자 내빈실에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눈을 힐끔거리던 시론이 깜짝 놀랐다.
“크라울시스 대공자……?”
예복을 입고 국왕 데오란츠와 함께 내빈실에 등장하고 있는 생도들.
그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결승전 상대였던 크라울시스의 팀이었다.
뭔가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루인이 표정을 굳히고 있을 때.
세파이온의 과장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폐하께서 친히 저희 대공자와 함께 드실 줄은 몰랐사옵니다! 영광이옵니다!”
기다렸다는 듯한 그의 반응.
루인은 이 모든 게 연출이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푸근하게 웃고 있는 국왕 데오란츠.
“르마델을 짊어질 보배들이 큰 부상을 당했다길래 걱정돼서 찾아갔네만…… 다행히 별 탈이 없어서 다행일세.”
“황공하옵니다!”
“황공하옵니다!”
일제히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루인은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단순한 힘의 과시라니?
남부의 현인이라는 세파이온의 술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급하고 조잡했다.
이건 뭐 의도가 너무 훤히 보여서 차라리 귀여운 수준.
국왕의 곁에 선 세파이온은 시선으로 루인 일행을 가리켰다.
“예복을 입고 달려온 생도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왕국은 이번 무투대회의 대전 결과를 모두 무효로 정리하기로 했네.”
다프네의 당황한 심정이 고스란히 토해진다.
“……무효라니요?”
대답은 다른 인물에게서 흘러나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은 놀랍게도 베벤토 학장이었다.
“생도들의 순수한 실력을 가리고 왕국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 왕립 무투대회의 근본적인 목적. 허나 본 운영위는 금번 왕립 무투대회를 그런 순수성이 훼손된 대회라고 결론을 내렸소.”
어느덧 사납게 변한 다프네의 눈빛.
“오랜만에 뵙네요. 베벤토 학장님.”
“다시 보게 돼서 반갑네. 다프네 양.”
“운영위가 내린 결론의 근거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현자의 수제자답게, 국왕과 주요 귀족들 앞에서도 다프네는 당당했다.
베벤토 학장은 일체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준비해 온 말들을 다시 늘어놓기 시작했다.
“결승전에서 활용된 마도구의 문제네. 특히 자네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도구들을 너무 과하게 사용했네. 운영위는 그 일을 순수한 실력을 가리는 무투대회의 정신을 훼손한 행위로 판단하였네.”
다프네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무투대회의 어떤 규칙에도 마도구를 활용해선 안 된다는 조항은 없었어요! 게다가 먼저 마도구를 활용한 측은 저희 상대팀입니다!”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는 베벤토 학장.
“인정하네. 애초에 이건 규칙의 문제가 아니니까.”
“그럼 운영위의 결론이 말도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네요!”
“국왕 폐하께서 계신 자리네. 자중하게, 다프네 양.”
“아…… 하지만……!”
그때 국왕 데오란츠의 보좌가 움직였다.
이내 그가 세파이온 측이 건넨 자루를 받아 들더니 거꾸로 뒤집었다.
우르르르-
그것들은 루인 일행이 익히 알고 있는 아티펙트들이었다.
다름 아닌 크라울시스와 그의 팀원들이 착용했던 마도구들인 것이다.
다시 말을 이어 가는 베벤토 학장.
“더욱이 크라울시스 생도의 팀이 동원했던 마도구들은 모두 르마델 왕국 각지의 가문에서 빌리거나 양도받은, 한마디로 왕국의 마도학자들에게 검증된 아티펙트들일세.”
“…….”
“한데 자네들은 어떤가? 굳이 형평성을 따지고 싶다면 이 자리에서 검증해 줄 수 있겠는가?”
음흉하게 웃고 있는 세파이온을 바라보는 루인.
루인은 세파이온의 진정한 의도가 이것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놈에게도 마도학자가 붙어 있다면 시론과 세베론이 착용하고 있던 갑주들의 비범함을 이미 파악했을 터.
왕국의 안위를 위협할 저주받은 마도구, 혹은 함부로 에어라인에 반입한 사실을 문제 삼는다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중대한 사안으로 비화될 수가 있었다.
우승 포상은커녕 왕실 감옥에 갇힐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자네들이 왕국에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위험한 마도구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단순한 무투대회의 문제가 아닐세.”
입술을 깨물며 루인을 쳐다보는 다프네.
일체의 감정조차 배제된 차가운 미소가 루인의 입가에 비틀린다.
“꽤 따가운 지적이군요.”
어떤 것도 선택하기 힘든 상황.
만약 헬라게아에서 마도구를 꺼내 왕실 마도학자들의 검증을 받는다면 그 출처가 마계(魔界)라는 것이 반드시 드러날 테고.
마도구의 검증을 거부한다면 그 역시 운영위의 명령을 어긴 생도로 취급을 받을 테니 역시 우승 포상은 물 건너가는 것.
게다가 자신을 마도구도 공개하지 못하는 미심쩍은 인물로 낙인을 찍는 셈이니 정치적인 목적도 상당 부분 달성한다고 볼 수 있었다.
루인은 단순한 수라고 조롱했던 처음의 생각을 철회했다.
암, 이 정도는 해 줘야 현인(賢人)이라고 불릴 수 있는 거겠지.
“이미 그런 결론을 내리셨다면 우승자의 자격을 박탈한다고 통보하면 그만인 문제. 한데도 이렇게 부르셨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는 거겠지요.”
베스키아 리움.
수천 명의 군중이 모두 승자를 확인했다.
그렇게 쉽게 결론 내리기엔 이 문제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왕립 무투대회의 명성과 전통이 무너질 수도 있는 심각한 사안.
세파이온이 루인을 노려본다.
“두 가지를 제안하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며 비릿하게 웃고 있는 세파이온.
루인은 무감각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데오란츠 국왕을 바라보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게 무슨 왕국(王國)이란 말인가.
“제안해 주시죠.”
“첫 번째는 그대의 마도구들을 모두 검증받고 실력의 순수를 증명하는 것이네. 하지만 아마도 불가능할 테지?”
분명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마도학자를 통해 무언가를 알아낸 모양.
“남은 하나는 간단하네. 부정한 방법을 동원했다는 것을 스스로 시민들에게 고백하고 우승자의 권한을 내려놓으시게.”
이게 사실상 저 세파이온이 원하는 그림일 터.
한데 그렇게 외통수에 몰았다고 자신하고 있던 세파이온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루인의 미묘한 표정.
어딘가 모르게 여유로워 보이는 놈의 태도가 불길하다.
분명 그건 패배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글쎄요. 저 녀석들도 모두 동의한 건지? 명예로운 패배 또한 생도의 권리일 텐데 말입니다.”
그때.
“기사의 명예가 부끄럽지 않은 대결이었습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몇 번이고 눈을 껌뻑거리고 있는 세파이온.
“넌……?”
하이렌시아가의 방계 검수이자 랭킹 1위에 빛나는 이명 생도.
브훌렌 네시우스 니스할.
그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고 있었다.
“저 후배들의 마도를 철저하게 상대해 본 당사자로서, 운영위의 이번 결정을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브훌렌!”
벌떡 일어나며 브훌렌을 노려보고 있는 크라울시스 대공자.
아, 그쪽은 브훌렌이 아니라.
내가 심어 둔 용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