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최근의 쟈이로벨은 제법 이상했다.
그가 직접 강신체(降神體)로 인간계를 활보하는 건 수백 년 만의 일.
한데도 렌시아가에 다녀온 과정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벌써 몇 번을 재잘거려도 이상하지 않을 쟈이로벨이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것.
그와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 왔지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경우는 처음이라서 루인은 의구심만 끝없이 늘어 가는 중이었다.
“끝까지 말하지 않을 테냐?”
-…….
여전히 대답이 없다.
중간에서 눈치만 늘어 가고 있는 건 역시 아므카토.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아므카토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에게 쟈이로벨이란 자신이 모시는 광염 지대의 군주, 에오세타카와 비견되는 광대한 존재.
그런 하늘 같은 존재감을 지닌 마계의 군주와 같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에겐 계약한 숙주가 아닌 이렇게 아무런 율(律)도 정해지지 않은 인간의 영혼에 기생하는 것조차 처음 있는 일.
기숙사로 돌아온 루인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피식 웃었다.
“넌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괜히 쫄지 말라고. 안 그래도 적당한 때가 되면 정신 강화계 룬마법 하나 정도는 내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뭐 닳는 것도 아닌데 하나 정도는 전수해 줘도 상관없잖아?”
-미친!
마도구라면 몰라도 고유의 권능은 자식이나 권속에게도 나누지 않는다.
그것이 마계의 전통적인 가치관.
“인간계에서 활동하던 에오세타카의 권속들이 악제의 영혼 포집술에 모두 당해 버렸다면 어차피 열광 지대는 해체 수순이다. 이놈을 네 휘하에 받아들이는 건 어때?”
쟈이로벨의 영언에는 혐오의 감정이 가득 묻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이 미천한 놈을 왜 거둬야 하는 거지?
“서로 도우면서 살아. 너도 므드라에게 쫓기는 입장은 똑같잖아. 갈 곳이 없는 건 이놈도 마찬가지라고.”
인간계로 투신한 마족들의 목표는 뻔하다.
최후의 희망.
인간들의 영혼을 유혹해 권능 강화의 발판으로 삼고, 역전과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이기적인 인간 놈!
벌레왕 아므카토를 자신과 엮으려는 루인의 의도는 너무 뻔하고 노골적인 것이었다.
놈이 자신의 휘하로 들어온다면 맹약대로 혈우(血雨)의 권능을 나눠 줘야 했다.
에오세타카의 권능, ‘열광의 기운’을 받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아므카토가 그보다 더 강력한 자신의 권능을 나눠 받게 된다면 그 격(格)이 훨씬 올라가게 될 터.
결국 벌레 놈의 강화된 권능은 고스란히 저 루인이 부려 먹을 수 있게 된다.
루인은 여전히 벌레왕의 능력에 불만이 많은 눈치.
“여기서 스무 마리 정도만 더 늘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지.”
얼마 전, 르마델의 현자와 초인 일행에게 붙였던 벌레까지가 아므카토가 지닌 권능의 한계.
벌레를 더 늘렸다간 아므카토의 정신 체계가 붕괴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그 임계점의 경계에 서 있는 상태.
지금은 벌레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는 낮 시간이라 좀 덜하지만, 밤이 되면 아므카토는 또다시 처참한 고통의 신음을 흘려 댈 것이었다.
-지, 지금도 죽을 것 같습니다만……?
과거와 전혀 달라진 아므카토의 태도.
그는 이미 루인이 인간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마신 쟈이로벨의 아공간, 헬라게아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장면을 본 후로 그는 루인을 더 이상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아득하고 광활한 루인의 영혼을 직접 경험한 후.
“고작 남부의 가문 몇몇과 초인급 강자들에게 몇 마리 붙였다고 권능이 동이 나 버려? 아니 그래도 명색이 마장(魔將)인데 너무 한심한 거 아니냐?”
-…….
아므카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얼핏 보면 벌레를 다루는 자신의 권능이 한심해 보이겠지만 엄연히 에오세타카 님도 인정하셨던 권능.
정보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능하게 해 주는 이 권능이야말로 자신을 마장으로 이끈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더욱이 진영 내의 첩자나 배신자를 솎아 낼 때 역시 에오세타카 님이 가장 신뢰하던 권능이었다.
“쟈이로벨. 이놈을 마왕급으로 만들어 줘. 기운 조금 나눠 주는 건 일도 아니잖아?”
-닥쳐라!
“계속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시겠다……?”
루인의 묘한 어조에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쟈이로벨.
결국 울분이 터져 나왔다.
마치 마족에겐 없는 인간의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넌 내가 불쌍하지도 않은 것이냐?
회복되는 즉시 쪽쪽 빨리는 진마력.
그것으로도 모자라 므드라에게 패해 약해진 상황에서 혈우의 권능까지 저 빌어먹을 벌레 놈에게 나눠 주라니…….
-쟈, 쟈이로벨 님!
위대한 마신의 대사라곤 믿을 수 없는 한마디.
아므카토는 루인이 더욱 몸서리치도록 두려워졌다.
루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악제를 상대하는 게 그럼 쉬울 줄 알았냐?”
-…….
“그렇게 계속 나약하게 굴 거면 내 영혼에서 꺼져라. 아무리 너라도 도움도 되지 않는 마신 따위와 함께 일을 도모할 생각은 없으니까.”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쟈이로벨의 태도에 루인은 다소 화가 난 상태.
분명 뭔가가 녀석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는데, 정작 말을 해 주지 않으니 마음이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시간이 필요하다.
마신답지 않은 초초함이 느껴진다.
결국 루인은 그런 달라진 쟈이로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그때 아므카토의 조심스러운 영언이 들려왔다.
-정말 저희 권속들의 흔적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그렇다.
아므카토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에오세타카 님의 권능, 열광의 기운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는 광염 지대의 권속들은 대부분 인간계에 진입한 상태.
특히 르마델 왕국은 ‘존재’들의 입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권속들만 해도 상당수가 르마델 왕국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한 명도 추적하지 못했다고?
저 무시무시한 마신이?
신격(神格)에 이른 마족의 권능이 얼마나 광대무변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한 입장에서는 쉽게 믿기 힘든 말.
그런 의심은 루인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표정이 금방 묘하게 굳어졌다.
“정말 아무런 영격도 추적하지 못했다고?”
마신 쟈이로벨.
영혼을 다루는 능력에 관한 한 마계 제일의 능력을 지닌 신격.
미약한 흔적만으로도 끈질기게 영혼을 추적하던 쟈이로벨을 수도 없이 경험한 루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문의 지하 유적에서 단숨에 사홀의 사념을 찾아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여전히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 쟈이로벨.
루인이 짜증을 내며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도대체 성녀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지금으로선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루인이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한 심상 수련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 * *
마법학부에서 지급된 예복을 입고서 거울에 이리저리 자신을 비춰 보고 있는 시론.
그런 그의 얼굴엔 흡족한 미소가 가득했다.
“역시 옷이 날개군.”
예복의 화려함에 가슴이 부푼 것은 세베론 역시 마찬가지.
“아직 1등위 생도의 견장도 받지 못했는데 말로만 듣던 생도 예복을 입어 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생도가 아카데미의 예복을 지급받는 것은 일종의 훈장이나 포상 같은 의미.
뛰어난 연구 업적을 남기거나 타국의 생도와 겨뤄 왕국의 이름을 높이지 않은 이상, 결코 쉽게 받을 수 없는 진귀한 포상이었다.
왕립 무투대회의 우승은 그만큼 생도로서 대단한 업적인 것이다.
덜컹-
“준비 끝났어요?”
갑작스럽게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온 다프네.
시론과 세베론은 그녀를 쳐다보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다, 다프네……?”
“음? 왜요?”
그녀는 실로 빛이요 하늘이었다.
마치 이 비루한 남자 기숙사 내부가 순식간에 밝아진 것만 같은 느낌.
화려한 생도 예복을 입고 나타난 다프네는 인간의 언어적 수사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는 그녀가 말로만 듣던 요정인지 인간인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빨리 나와라.”
문 안으로 빼꼼히 내민 리리아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아하게 올린 머리, 간단한 화장만 했을 뿐인데도 평소와는 아예 다른 여자처럼 느껴질 정도.
게다가 생도 바지가 아닌 예복 드레스를 입고 있으니 그녀가 여자였다는 걸 비로소 실감하는 시론이었다.
“맞아. 너도 여자였어…….”
이마를 찡그리는 리리아.
“뭐라는 거냐. 빨리 안 나와? 다들 기다리고 있다.”
“루인은?”
창밖을 힐끗거리는 리리아.
“저기.”
그녀의 시선을 따라 시론이 복도의 창밖을 살폈다.
“뭐, 뭐야? 저게?”
루인이 엄청난 생도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저런 지 꽤 됐다.”
“허? 기사 생도 선배들이 죄다 몰려온 것 같은데?”
우람한 근육 덩치들이 고함을 지르며 루인에게 몰려드는 생도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황혼 선배들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거의 모든 아카데미 선배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가, 가 보자!”
“응!”
* * *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서 있었다.
화려한 금장 수실.
멋들어진 예복 망토.
아무렇게나 반쯤 흘러내린 머리, 감정 없이 희미하게 뜬 그의 눈빛은 신비롭기 짝이 없었다.
시론은 그런 루인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예복을 입고 나타난 그의 귀족적인 분위기는 대공자라는 이름에 너무나도 걸맞은 것이었다.
자신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현자의 손자인데 이건 뭐 아예 종(種) 자체가 다른 느낌.
“늦었군. 빨리 가지.”
“어? 어! 알겠다!”
그때, 두꺼운 몇 개의 손이 루인의 예복 자락을 부여잡았다.
“자, 잠깐! 잠깐만요!”
“대공자님!”
루인이 무심히 뒤를 돌아보았을 때, 몇몇 황혼의 생도가 짙은 열망의 눈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이베른가의 후원 생도가 되고 싶습니다…….”
“저도…….”
피식.
루인은 저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고고한 기사 생도로 군림하던, 아카데미의 포식자였던 놈들이 매일같이 청소부를 자처하며 마법학부의 정원과 마당을 가꾸고 있었다.
더욱이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황혼 녀석들의 악행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행실을 보겠다는, 갱생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자신의 말을 충실하게 이행한 것이다.
“구켄타, 그리고 넌 디라노였나.”
마법 생도들에게 정기적인 상납을 강요했던 구켄타와 여 마법 생도를 추행했던 디라노.
자신들을 기억하고 있는 루인에게 감동이라도 한 건지 구켄타와 디라노가 연신 허리를 숙여 댔다.
“예! 맞습니다! 대공자님! 제가 디라노입니다!”
“구켄타입니다!”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너희들의 유적으로 가서 기다려라. 시상식이 끝나면 찾아가도록 하지.”
환하게 밝아지는 구켄타의 얼굴.
“정말이십니까?”
“가, 감사합니다!”
문득 루인은 의문이 들었다.
“한데, 너희들의 리더 생도가 이 일에 대해 허락은 한 건가?”
그때.
스윽스윽-
저 멀리서 정원을 쓸던 소리가 잦아든다.
빗자루를 들고 헤- 하고 웃고 있는 기사 생도는 놀랍게도 ‘황혼의 야생마’ 올칸이었다.
포효하는 황혼의 리더 생도가 빗자루를?
“흐, 자, 잘 지냈지?”
아직도 루인에게 맞은 멍 자국이 선명한 그가 허연 이를 드러낸 채 가슴 근육을 씰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