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한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
자살이라는 그 자체의 행위는 의외로 작은 충동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런 충동에 이르기까지의 감정은 매우 복잡하며 처절한 고통의 시간.
대역 왕비 라슈티아나.
지금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수도 없이 그리고 있을 것이었다.
죽음으로써 되갚아 줄 수 있는 모든 통쾌함을 잠들기 전에 되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꿈에도 모른 채.
그녀의 죽음이 남긴 가장 잔인한 것은 아라혼의 영혼을 파멸로 이끈 것.
아버지와 그의 왕국을 향한 처참한 증오, 복수에 미친 살인광은 그렇게 탄생했었다.
영혼조차 느껴지지 않는 비어 버린 동공, 온갖 복잡한 감정으로 얼룩진 라슈티아나는 여전히 석상처럼 서 있었다.
모든 사고가 정지되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 루인의 침잠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제는 알겠지. 아라혼이 날 보낸 이유를.”
자신이 왕비 대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혹시 다른 대귀족들도……?
순간 라슈티아나는 모든 것이 미칠 듯이 두려워졌다.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루인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는 상태.
적어도 두려움 따위의 감정이 가슴에 남아 있다면 세상의 미련을 끊을 수는 없을 테니까.
“……어떻게 알았죠?”
풋 하고 웃음이 터진 루인.
이런 흔하고 고전적인 반응이라니.
“다시 말하지만 앉아.”
“네…….”
라슈티아나는 의외로 차분함을 되찾은 표정이었다.
대역의 비밀 앞에서도 이토록 빨리 평정을 되찾다니, 왕궁에서 보낸 그녀의 삶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 밝히실 건가요?”
“전혀.”
“왜죠?”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입술을 깨무는 라슈티아나.
“혹시 아라혼 왕자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요?”
“물론.”
“…….”
왕비를 향한 아라혼의 아련한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라슈티아나.
그녀의 눈빛이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생각보다 그리 나약한 녀석은 아니니까. 어디 가서 허술하게 말할 놈도 아니고.”
한참이나 감정을 추스르던 라슈티아나가 갑자기 루인을 쏘아본다.
“……애초에 두 분께서 비밀로 할 거였다면 왜 그 사실을 제게 말해 주는 거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루인.
“미리 알려 주려고. 왕국의 모든 귀족들 앞에서 보기 좋게 죽는다고 해도 결코 왕비로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왕족들은 끝까지 침묵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대역 왕비의 정체를 들켰을 때보다 더한 충격의 감정이 그녀의 얼굴을 얼룩지게 만들고 있었다.
“……복수도 꿈꿀 수 없다는 얘기군요.”
“그래.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지. 당신이 죽는 순간 나는 대역 왕비의 정체를 전 왕국에 알릴 거다.”
나직이 입술을 짓깨물던 라슈티아나는 이내 강한 의문을 두 눈에 드러냈다.
“제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피식.
비릿한 비웃음, 루인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온 광기에 순간 라슈티아나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의 눈빛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지.”
“내 눈빛이 어때서……?”
“날 보는 지금 이 순간조차 당신의 눈은 지극히 희극적이야. 내내 흔들리고 불안하지.”
“……궤변이군요.”
“솔직한 궤변이지.”
궤변이 솔직할 수가 있는 건가?
라슈티아나의 얼굴이 싸늘해진다.
위대한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레이디를 앞에 두고 고작 언어도단 따위를 늘어놓을 줄은 몰랐다.
“불쾌하군요.”
“의외로군. 귀족이었을 줄이야.”
말투와 표정, 그리고 귀족 특유의 고아한 자아.
평민에게 숨길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듯, 평생을 귀족의 예절 속에 살아온 귀족들에게도 반드시 특유의 기품이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대역 왕비는 의외로 평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귀족의 영애를 함부로 대역 왕비로 세울 순 없지. 데오란츠가 당신에게 무엇을 약속했지?”
라슈티아나가 무엇보다 놀란 것은 국왕을 호칭하는 루인의 태도였다.
왕국을 수호하는 금린사자기의 가문이 함부로 국왕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지극히 이질적인 것.
역적으로 몰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 대공자의 태도였다.
그 짧은 순간에 라슈티아나는 루인의 선명한 마음을 읽어 내고야 말았다.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태도라면…… 설마 당신……?”
루인이 섬뜩하게 웃는다.
“똑똑하군.”
라슈티아나는 살면서 오늘처럼 여러 번 당황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대역이라지만 엄연히 왕비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 당사자 앞에서 반역의 뜻이라니!
더욱이 그는 평범한 귀족이 아니었다.
르마델의 대공가.
사자의 가문이 품은 반역의 뜻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어떤 왕자를 차기 국왕으로 옹립할 생각인 거죠? 아니! 과연 성공 가능성은 있나요?”
그 순간, 그녀의 뇌리에 스치는 루인의 음성.
-걱정하지 마. 생각보다 그리 나약한 녀석은 아니니까.
라슈티아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설마 아라혼 왕자님을?”
“호오, 이건 기대 이상인데.”
루인은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단순히 인형 같은 대역 왕비라 생각했었는데 지혜가 보통이 아니었다.
대역 왕비가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자신의 계획을 어느 정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활용하기에 따라 대역 왕비는 자신에게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인물이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루인이 라슈티아나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실현이 불가능한 일인 것 같은가?”
“……터무니없어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
이건 단순히 왕실에 관한 사안이 아니라 왕국의 모든 귀족을 움직이고 있는 권력 지형에 관한 문제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데오란츠 국왕을 후원하고 있는 하이렌시아가나 그들을 따르고 있는 대귀족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거죠?”
경험하면 할수록 놀라운 대역 왕비의 심계.
루인이 흡족하게 웃었다.
“당신이 도와준다면 가능하지.”
“……제가요?”
미간을 찡그리며 루인에게서 조금 멀어지는 라슈티아나.
“절 이용할 생각이라면 거절하겠어요. 이젠 신물이 나니까.”
아버지의 간곡한 청, 그렇게 가문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도려내고 대역 왕비로 살아왔다.
또다시 누군가에게 이용당한다는 건, 정말이지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일.
루인은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당신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거래다.”
“역시 포장지는 예쁘겠죠.”
경계하는 태가 역력한 라슈티아나의 표정.
루인은 오히려 그런 그녀의 태도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거래의 조건을 한번 들어 보는 건 나쁘지 않잖아?”
“말해 봐요.”
루인의 무심한 시선이 저 멀리 희미한 에어라인의 흔적을 좇기 시작했다.
“언제고 때가 되었을 때 당신에게 증언을 요청한다.”
“증언이라면?”
“지금까지 데오란츠 국왕에게 당한 모든 객관적인 사실들.”
“미, 미, 미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욱 뒤로 물러서는 라슈티아나.
그 모진 성적 학대의 세월을 여자의 입으로 모두 증언을 해 달라니?
사실상 죽음보다 더한 명예 살인을 스스로 하란 뜻이 아닌가?
그러나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나 되는 인물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에 헛물이나 켜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일단 라슈티아나는 루인의 의도부터 읽고 싶었다.
“제가 얻게 되는 것은 뭐죠?”
씨익.
“데오란츠의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파멸.”
“…….”
그 순간 라슈티아나는 가슴 속에서 끈적한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루인은 그렇게 그녀의 얼굴에 얼룩져 가는 욕망의 감정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대공자의 이름으로 확언(確言)하지. 당신의 증언만 있다면 나는 내 모든 것을 걸고 그를 반드시 파멸로 이끌 것이다.”
“파멸…….”
“그래. 왕실은 그를 르마델의 역사에서 도려낼 거야.”
왕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후세의 평판.
허나 그런 평판조차 남기지 못하고 역사에서 지워지는 것은 왕으로서 죽음보다 더한 불명예일 것이다.
한데 의외로 라슈티아나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허탈함이었다.
“애초에 성사될 수 없는 거래였네요.”
“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루인의 반응.
과거, 그녀의 죽음에는 목적이 있었다.
왕실에 대한 복수의 감정.
또한 반드시 데오란츠의 파멸을 바랐을 것이다.
“왜지?”
“제가 대역 왕비가 되는 조건으로 그에게 약속받은 것이 있어요.”
“말해 봐.”
어느새 한 서린 자조가 그녀의 입가로 번지고 있었다.
“6왕자 케튜스. 제 동생이 그와 혼인하기로 되어 있어요.”
“…….”
루인은 그녀가 속한 가문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언니는 대역 왕비의 진창으로 던져 버리고 어린 여동생은 진짜 왕비로 살게 한다라…….”
사랑하는 딸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역설적이게도 다른 딸의 행복을 추구하다니.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빌어먹을 귀족들의 사고방식은 때론 하류층의 천민보다 더욱 천박하다.
“그래. 이제야 당신의 입장이 모두 이해가 되는군.”
그녀가 데오란츠 국왕에 대해 증언을 하고 1왕자 아라혼을 왕으로 만든다면.
대역 왕비로 지낸 지금까지의 모든 희생이 물거품이 되는 것.
케튜스 왕자는 지금 아라혼의 정적이나 다름없었다.
아라혼이 국왕이 된다면 케튜스 왕자와 그를 지지했던 귀족들을 남김없이 징치할 것이다.
그것이 냉정한 권력의 세계.
딸을 지옥으로 내몬 그녀의 가문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추락한 딸의 명예만이 전부일 것이다.
“모두 못 들은 걸로 하겠어요. 그래도 누군가 내 진실된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게 나쁘지만은 않네요.”
가문을 위해 살아온 인생을 모두 도려낸 여인.
그녀의 고귀한 희생을 루인은 감히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
루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시 예의 무심한 감정으로 라슈티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라혼을 어떻게 생각하지?”
“네……?”
“조금 이른 말이지만, 이 일은 르마델 왕실의 죄업을 감당해야 할 녀석의 무게이기도 하니까.”
“그게 무슨 말…….”
루인이 웃었다.
“나는 지금 당신의 동생의 짝으로 아라혼은 어떠냐고 묻고 있는 거다.”
“그, 그런!”
피식.
“모든 명예를 회복한 후에 당신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꼴을 보니 동생의 행복을 빼앗을 언니같이 보이진 않는군.”
“…….”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 얼룩진다.
루인은 추스를 그녀의 감정을 천천히 기다렸다.
“……정말 성공할 수 있나요?”
“그런 인간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모두에게 증명해 보이지.”
국왕 데오란츠의 파멸.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해내고 싶은 그 일을 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대신 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고요한 파도처럼 잔잔한, 끝 모를 정도로 깊고 깊은 대공자의 두 눈.
사자의 분노, 천 년 대공가의 의지가 그의 눈빛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라슈티아나가 일어났다.
그리고 당당히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거래를 승낙하겠어요.”
이제 지금부터 중요한 것은 신뢰.
“운명을 함께할 레이디님의 영명은?”
그녀가 루인을 향해 웃었다.
“브아즈린. 내 이름이에요.”
손을 내밀며 마주 웃는 루인.
“나는 루인. 함께 거사를 도모하게 돼서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