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루인이 기숙사에 돌아왔을 때 월켄은 깨어나 있었다.
그는 루인을 보고도 의외로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몸은 괜찮은 거냐?”
루인의 질문에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대답하는 월켄.
“투기를 조금 잃었다. 그 외에 별다른 외상은 없군. 아르디아나는? 함께 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널 치료하고 돌아갔다.”
“치료?”
아직 자신에게 닥친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는 듯한 월켄에게 루인의 미소가 날아들었다.
“악제의 청염(靑炎)을 치료했다.”
“……정말인가?”
자신의 자아와 의지를 잃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
그런 위험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 성녀를 찾아 나섰던 월켄이었다.
“아르디아나는 함부로 확언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녀가 치료를 확신했다면 나는 그 말을 무조건 신뢰한다.”
그보다 루인은 궁금한 것이 있었다.
월켄의 기억에서 아르디아나는 일개 하녀.
한데 지금 그의 반응은 아르디아나가 초월적인 성녀라는 사실을 이미 확신하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분명 렌시아가에서 어떤 특별한 일을 경험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르디아나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는 월켄.
루인이 얼굴이 한껏 진지해진다.
“렌시아가에서 그녀의 권능을 경험한 건가?”
“그건…….”
그걸 단순한 권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월켄의 얼굴은 복잡한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루인. 그는 지금 스스로 확신하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모든 감정을 정리하고 객관적인 확신이 끝났을 때, 그는 자신에게 모든 사실을 빠짐없이 털어놓을 것이다.
그의 신중하고 섬세한 성격을 다시 겪게 되니 오히려 루인은 가슴이 따뜻해졌다.
“아직 그날의 일에 대한 생각이 모두 정리되지 않았다. 내가 나중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
씨익.
“성녀의 말도 신뢰하지만.”
루인이 월켄의 검을 아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검성(劒聖)의 검은 그보다 더한 믿음 위에 있다.”
형용할 수 없는 격동이 몰아친다.
악제, 청염, 미래의 파멸.
갑작스럽게 닥친 운명에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루인의 그 한마디에 월켄은 마치 지친 영혼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고맙다.”
“별말씀을.”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는 월켄.
“이젠 뭘 해야 하지?”
청염이 제거된 상황에서 루인은 굳이 그의 행보를 통제하고 싶진 않았다.
악제의 끄나풀, 아니 직접 악제를 만난다고 해도 이제는 그를 군단장으로 만들 수는 없을 테니까.
청염은 일종의 계약 낙인.
동일한 영혼과 다시 계약할 수 없는 것은 세계의 인과율이 정한 섭리였다.
한데 월켄 스스로가 미래를 자신에게 묻고 있다.
그는 이렇게 수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루인은 그에게 닥친 혼란이 꽤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루인이 창밖의 북녘을 바라보았다.
“네 성장을 굳이 내 의지로 통제하고 싶진 않아. 월켄.”
검성은 언제고 스스로 길을 찾아갈 위대한 영웅.
오히려 자신의 개입이 부작용을 낳을까 루인은 두려웠다.
한데 월켄이 웃고 있었다.
“왜 웃는 거지?”
한참 동안 말없이 웃고 있던 월켄이 루인을 향해 핀잔을 늘어놓았다.
“이미 내 온 마음과 영혼이 네게 사로잡혀 있다.”
“…….”
“내게 세상의 미래까지 모두 털어놓은 주제에 뭐? 지금에 와서 각자 살아가자는 거냐?”
루인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이 복잡한 심정.
억겁을 돌아온 대마도사의 오랜 회한이 루인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냈다.
월켄의 말에 충격을 받거나 동요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을 뿐.
“난…….”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지?”
두렵다.
다시 실패할까 봐 두렵다.
오늘의 작은 선택이 모든 것을 망쳐 버릴까 두렵다.
자신 때문에 검성이 영웅이 되지 못한다면, 만약 그에게 다른 운명이 닥친다면…….
이 루인이, 대마도사가 무너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이제 보니 바보 같은 녀석이군.”
월켄이 검을 등에 멘다.
“내가 죽어 가며 남긴 말, 동료들의 염원에 먹혀 버릴 거라면 애초에 내게 네 과거를 말하지 말았어야지.”
“뭐……?”
월켄은 루인의 의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어디로 가려는 거지?”
그가 기숙사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로 물끄러미 뒤를 돌아본다.
그의 두 눈은 어느새 열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네 아버지를 만날 거다.”
“아버지?”
자신의 검을 툭툭 치는 월켄.
“이놈이 지금 그 사람을 만나라고 말하고 있거든.”
루인의 얼굴이 조금은 평화를 되찾아 갔다.
“검에 관한 한 넌 역시 변태가 맞다. 이젠 대화까지 하는 거냐?”
“당연한 소릴.”
척-
월켄이 다시 뒤돌아선다.
“두려움에 먹히지 마라. 대마도사.”
“…….”
“과거는 과거일 뿐이잖아.”
쾅.
노쇠한 대마도사는 검성이 떠나간 자리를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검성.
대마도사의 위대한 등불.
저렇게 월켄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그대로인데, 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했단 말인가.
월켄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과거에 먹히고 있었다.
대마도사의 철저한 계획, 온갖 변수를 악착같이 통제한다고 해도 과거에 매인 이상 나아갈 수는 없었다.
바람의 협곡에서 만났던 시르하.
자신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루이즈.
그리고 하이베른가로 떠나간 월켄.
바람의 대행자, 적요하는 마법사, 위대한 검성의 운명은 이미 자신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
“…….”
루인은 기억 너머 떠오르는 과거의 동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리고 뇌리 깊숙이 각인된 그들의 절규를 차례차례 지워 나갔다.
검성의 말대로 잊어야만 나아갈 수 있다.
두려움에 먹히지 말아야 이번 생을 살아갈 수 있다.
동료들을 향한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마저 잊어야만, 저 검성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모든 감정을 비워 냈을 때.
루인의 동공은 허무를 초월한 무한의 열정으로 채워져 있었다.
마법의 경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心).
지금 이 순간.
루인은 완전한 대마도사의 경지를 회복했다.
세계를 굽어보던 초월자, 흑암의 공포의 치열한 자아가 다시 되돌아온 순간이었다.
* * *
루인이 기숙사를 빠져나와 정원을 지나고 있을 때.
수풀 속에서 온몸을 검은 천으로 감싼 사내가 튀어나와 그를 막아섰다.
루인은 마력권으로 이미 그를 감지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어쌔신의 살기 따위의 어떤 적의도 그에게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대는 정중하게 몸을 숙이고 있었다.
“대공자를 뵙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하벨자임에서 온 건가.”
“……!”
왕실의 하벨자임 궁.
온몸을 검은 천으로 감싼 사내의 채취는 하벨자임 꽃향기로 가득했다.
채취를 지우지 못한 시점부터 사실, 검은 천으로 감싸는 행위 따윈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왕비님의 부름이라면 응해야겠지. 안내하라.”
이토록 허술한 자를 보낸 것만으로도 라슈티아나 왕비가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한데 그가 하벨자임 궁을 향한 안내 대신 품에서 좌표계가 적힌 마법 스크롤을 꺼내고 있었다.
마법 스크롤을 받아 든 루인이 금방 인상을 찡그렸다.
“어이가 없군.”
그가 내민 좌표계는 에어라인의 바깥, 즉 지상의 왕궁이었다.
에어라인의 보안 정책상 공간 이동진을 제외한 모든 탈출 행위는 불법.
“지금 나더러 불법을 저지르라는 건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왕비님께서는 이번 만남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싶어 하십니다.”
“…….”
라슈티아나 왕비가 왜 자신을 만나려고 하는지는 짐작되는 바는 있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그녀와 만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루인이 마법 스크롤을 그에게 건넸다.
“돌아가라.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전해.”
척-
루인이 다시 자신을 막아선 로브의 사내를 무심히 쳐다본다.
“한 번만 더 내 앞을 막아선다면 그땐 제압하겠다.”
“……부탁드립니다.”
로브 틈으로 드러난 사내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는 불안한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사내의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왕비님께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라슈티아나.
역사대로라면 다가오는 귀족제, 바라디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운명.
하지만 ‘바라디오’까진 아직 몇 년이 남았다.
다시 마법 스크롤을 루인에게 건네는 로브의 사내.
“제발 부탁드립니다.”
스크롤을 받아 든 루인이 융합 마력을 끌어올렸다.
“가까이.”
로브 사내가 범위 안에 들어오자 루인이 마법 스크롤을 단숨에 찢었다.
찌이익!
화아아아악!
천천히 빛살에 잠식되는 육체, 이내 시야마저 분해됐을 때 격렬한 소음이 들려온다.
고통에 신음하는 로브 사내를 위해 루인이 그에게도 반대위상의 고주파 술식을 둘러 주었다.
사방에서 풍겨 오는 싱그러운 꽃내음.
구 왕궁의 어딘가가 분명했지만 이 정원은 루인의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다.
힘겹게 정신을 차린 로브 사내가 깊숙이 몸을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이내 정원을 둘러보는 루인.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저 멀리 정원의 끝자락, 야외 테라스에 서 있는 라슈티아나 왕비.
루인을 발견한 그녀가 천천히 테라스에서 내려온다.
마주 걸어가는 루인.
라슈티아나 왕비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점점 시야에 차오르는 그녀는 기품이 흘러넘치는 왕비, 그 자체였다.
그녀가 얼마나 대역에 충실하려 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반가워요. 대공자.”
“…….”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루인.
르마델 왕국의 귀족인 이상 왕비에게 정중하게 예를 다해야 마땅했으나 루인은 결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미 모든 진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를 왜 보자고 한 거지?”
“……네?”
라슈티아나는 준비했던 말들, 그동안의 의문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을 이렇게 함부로 대한 사람이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
“그, 그건 1왕자가…….”
“아라혼이 무슨 말을 했길래?”
“당신을 만나 보라고…… 그럼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그런 알 수 없는 말들을…….”
피식.
“바보 같은.”
역시 짐작대로 아라혼 때문이었다.
녀석도 왕실의 구성원이라면 왕비의 일이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지 충분히 느끼고 있을 테니까.
왕비 라슈티아나를 살해한 국왕.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르마델은 처참한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대역 왕비를 제어하는 일은 왕실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일.
“괘씸한 놈. 감히 나를 부려 먹어?”
“……네?”
“앉아. 힘드니까.”
루인에게 오늘은 정말 긴 하루.
아무렇게나 정원의 바닥에 앉은 루인이 물끄러미 라슈티아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뚱한 표정만 짓지 말고 앉으라고.”
“너,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요!”
“내 앞에서 연기 따윈 안 해도 돼.”
“……!”
루인이 웃었다.
“당신이 왕비 대역이란 거 알고 있으니까.”
라슈티아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