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조용히 차를 음미하고 있는 루인.
역시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헤데이안이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냈다.
“……자네가 정말 마장기를 가지고 있는 건가?”
“…….”
“대규모 기억 조작 술식 역시 자네의 작품이 맞고?”
무감각한 얼굴로 차를 마시던 루인은 오히려 다른 화두를 꺼냈다.
“수호자 드베이안 공, 마도학자 네레스, 학부장님, 현자님. 그 밖에 정신 저항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더 있습니까.”
곰곰이 생각에 잠긴 현자 에기오스.
그가 이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현재까지는 그 넷이 전부네.”
씨익.
“왕실 근위기사단장이나 베벤토 학장 쪽은 아직인가 보군요. 역시 시간이 문제일 뿐 결국은 깨달을 예정이란 뜻이고.”
루인은 수호자 집단은 예외로 했다.
어차피 세상에 능동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자들.
더욱이 소드 힐의 노인과 비셰울리스는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고 기억 조작 역시 그들이 직접 저지른 일.
문제는 초인이거나 초인에 근접한 이들이었다.
강력한 정신력을 지닌 르마델 왕국의 강자들.
루인은 아직 마장기의 존재나 악제의 존재가 세상에 퍼져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혼란이 앞설수록 다양한 변수가 초래된다.
결국 자신의 대처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
루인이 결심한 듯 두 눈을 빛냈다.
“일단 이 자리에 드베이안 공과 마도학자 네레스 님을 불러 주시죠.”
당황한 에기오스와 헤데이안.
“……지금 말인가?”
“그들도 업무가 있네.”
루인이 웃었다.
“제가 마장기의 소유자라면 지금보다 더 중요한 순간은 없을 텐데요?”
달리 반박할 말이 없다.
루인이 직접 나타나 마장기를 운운하며 협박을 해 올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헤데이안의 눈빛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기다리게.”
스스스-
현자 에기오스가 좌표계를 열며 사라졌다.
헤데이안이 현자가 공간 이동으로 사라져 간 자리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루인 생도. 대체 어쩔 요량인가?”
루인이 찻잔을 내려놓는다.
“거창한 일은 아닙니다. 단지 제 할 말을 전할 거고 답을 들으면 그만인 일이죠.”
헤데이안은 심상에 빠져들었다.
마도사에 이른 마법사답게, 그의 사고는 금방 이후에 루인이 보일 행동을 예측해 냈다.
정말로 녀석이 기억 조작 술식의 당사자라면 자신의 비밀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무투대회에서 벌어졌던 진실을 함구해 달라는 요청인 것이다.
그렇다면 녀석은 무언갈 대가로 내놓아야 할 텐데, 과연 그것이 무엇일지 헤데이안은 금방 흥미로워졌다.
루인이 차를 모두 마시고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현자 에기오스가 수호자 드베이안, 마도학자 네레스와 함께 공간 이동 마법으로 나타났다.
육중한 갑주와 전투용 롱 소드, 투구까지 완전 무장으로 나타난 수호자 드베이안을 향해 루인의 미소가 날아들었다.
“마치 전장을 나서시는 것 같군요.”
투구 사이로 맹렬히 빛나고 있는 드베이안의 눈빛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자네를 아니까.”
르마델 왕국 최강의 기사.
초인의 무시무시한 투기가 허공에 아롱진다.
왕국의 기원제에서 벌어진 기수 쟁탈전.
그날 루인이 초인 기사를 꺾은 후로 왕국의 모든 정보기관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의 행보를 비밀리에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경계해야 할 대상인데 마장기를 소환하는 마법사라는 사실까지 드러난 마당.
도저히 현실로 인정하기 힘든 사실이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르마델 왕국이 맞이한 최대의 위협일 터였다.
“이해합니다.”
루인은 그의 마지막을 알고 있었다.
멸망의 순간, 그가 르마델 왕국에 보인 충정과 진심은 왕국의 수호자라는 이명에 충분히 걸맞은 것이었다.
루인은 그런 충직한 기사를 좋아했다.
“일단 다들 앉으시죠. 올려다보기가 힘들군요.”
“나는 그냥 서 있겠네. 보다시피 앉을 수가 없는 무장이라.”
“알겠습니다.”
당대의 마탑주와 왕국의 수호자, 그리고 최고의 마도학자.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기도 힘든 인물들.
드베이안을 제외한 이들이 차례로 자리에 앉자, 그들을 향해 루인이 예의 비틀린 입매로 입을 열었다.
“다 이해합니다. 어린 녀석이 마장기의 주인이라니 아마 제가 걸어 다니는 왕국의 재앙처럼 느껴지시겠죠.”
루인의 직설적인 화법에 모두가 놀란 얼굴을 했다.
“아마도 어떤 분께서는 벌써 하이베른가의 독립을 걱정하고 계실 수도 있지요. 인간은 언제나 상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험!”
“흠!”
현자와 학부장이 불편한 내색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역시 가장 황당한 눈빛을 드러내고 있는 이는 드베이안.
왕국의 수호자 앞에서 저리도 태연하게 왕국을 둘로 쪼개겠다는 말을 해 대다니!
침묵하고 있던 헤데이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루인 생도. 협상 전에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요량이라면 뜻을 접게. 지금 자네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왕국의 핵심 인물들일세. 고작 몇 마디 따위의 말로 중심이 흔들릴 사람들이 아니란 뜻이네.”
대답 없이 웃고만 있는 루인.
“보아하니 자네는 비밀을 지키고 싶어 하는 듯한데…… 그럴 수는 없네. 그날의 일은 정식으로 국왕에 보고될 것이며 왕국 대회의(大會議) 역시 이 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루게 될 것이네.”
대마도사, 흑암의 공포 루인은 그런 학부장이 귀여웠다.
지금 헤데이안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말씀이시군요. 설마 제가 부탁을 할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뭐?”
묘하게 웃고 있는 루인.
“학부장님께서는 아직도 제가 생도처럼 보이십니까?”
그 순간.
광활한 마력 파장이 맥동한다.
루인은 끌어올릴 수 있는 최대한의 융합 마력을 개방했다.
현자와 학부장 앞에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모든 마력을 개방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염동력에 의해 촘촘하게 얽히는 마력 줄기들이 사방을 수놓고 있었다.
이미 현자 에기오스와 헤데이안 학부장은 그대로 굳어져 버린 상황.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루인의 실체.
자신들에 비해 결코 모자람이 없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처럼 느껴지는 루인의 아득한 역량은 단순히 놀람으로 끝날 정도가 아니었다.
현자이기에, 학부장이기에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이 맥동하는 마력, 이 엄청난 염동력에 담긴 한 마법사의 초월적인 역량을.
루인이 입매를 비틀자 그의 융합 마력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사방으로 출렁거렸다.
“잘 들어요. 마장기 없이도 난 이미 이 나라의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르마델 왕국이 무사하다? 내게 이 왕국을 해할 의도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는 뜻입니다.”
드베이안의 검에서 흘러나온 초인의 투기가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멈추지 않는다면 사살하겠다.”
표표히 흩날리던 루인의 광활한 융합 마력이 모조리 마력 칼날로 화했다.
쏴아아아아-
일제히 드베이안을 조준하는 마력 칼날들.
이어 루인의 전방에 엄청난 강도의 마력 배리어가 겹겹이 소환된다.
우우우웅-
루인의 전신이 새하얀 빛살에 휘감긴다.
순식간에 자신에게 강화 헤이스트를 거는 루인.
지이이이잉-
중력 역전 필드로 모든 물체가 허공으로 솟구친다.
그것도 모자라 사방을 다중 일루전으로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굳어 버린 헤데이안.
망설임 없이 드러낸 대마도사의 마도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거대한 염동력으로 일으킨 갖가지 마법들.
무슨 술식이 초를 쪼개며 수도 없이 시전된다.
게다가 저런 엄청난 술식을 펼쳤음에도 집무실은 어느 한 곳도 파괴되지 않았다.
상상할 수 없는 술식 통제력!
콰아아아앙-
드베이안이 발을 구른다.
중력 역전 필드가 깨어지며 집무실의 모든 집기가 비처럼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현자 에기오스가 벌떡 일어나며 마나를 재배열했다.
“그만!”
츠츠츠츠츠-
루인의 중위계 술식들을 침착하게 디스펠하던 에기오스는 이내 강한 반탄력을 느끼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허억!”
“에기오스!”
스스스-
희미한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 루인.
시야를 교란하는 다중 일루전에 의해 루인을 놓쳐 버린 드베이안이 다급히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 순간 금속을 통째로 짓이기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가가가가각!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우그러지는 것처럼 드베이안의 갑주가 처참하게 짓이겨지고 있었다.
강화 헤이스트로 구현된 혈주투계.
이내 초인의 엄청난 투기가 밀집되더니 그대로 루인을 밀어낸다.
콰아아아아앙!
사라져 가는 다중 일루전.
사방이 이지러지며 가슴을 움켜쥔 루인이 드러났다.
피를 한 움큼 뱉어 낸 루인이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역시 진짜 초인은 다르군.”
배리어를 세 겹이나 둘렀는데도 단순한 투기의 여파에 모조리 박살이 났다.
월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경지.
하지만 정작 가장 놀란 사람은 드베이안이었다.
“…….”
왼쪽 가슴의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졌다.
마법도 아닌, 무투술이 투기의 벽과 갑주를 뚫고 자신의 몸에 타격을 준 것이다.
드베이안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루인의 광활한 마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태연하게 다시 자리에 앉는 루인.
마도학자 네레스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생도복의 소매로 입가를 닦던 루인이 무감하게 대답했다.
“호구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게 무슨…….”
“이 생도복을 입고 있다고 해서 자꾸만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말이죠.”
책상 옆에 쓰러져 있던 에기오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우리들의 입을 고작 힘으로 막겠다는 뜻인가?”
씨익.
“그럴 리가요.”
이어 울려 퍼지는 루인의 목소리.
그것은 거의 반협박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먼저 현자님께서는 지금부터 렌시아가와의 관계를 모두 정리하셔야 합니다.”
“뭐, 뭐라?”
마탑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엄청나다.
그 금액은 쉽게 말해 천문학적인 것.
지금까지 하이렌시아가의 후원이 없었다면 마탑은 결코 유지될 수 없었다.
한데 그런 하이렌시아가와의 관계를 끊으라니?
“그들이 정기적으로 마탑에 엄청난 규모의 후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후원 규모의 두 배를 우리 하이베른가가 약속드리죠.”
“……두 배?”
쉽게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이베른가의 영지 사정은 이미 왕국에 널리 알려진 사실.
곤궁한 재정 상황 때문에 영지민들의 유출도 막아 내지 못하고 있는 하이베른가였다.
“그게 하이베른가에게 가능한 일인가?”
“물론입니다. 제 말로 부족하다면 대공의 인으로 확약서를 써 드리죠.”
“…….”
이어 루인이 마도학자 네레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이 소울레스가에게 정기적으로 마정석을 공급하고 있는 걸 알고 있습니다.”
“무, 무슨 말을!”
이미 벌레들을 이용해 마도학자 네레스의 가문, 쟌틴가의 상황을 빠짐없이 살피고 있는 루인이었다.
“그렇게 계속 마정석을 공급하면 됩니다. 대신 공급 일시와 그 양을 제게 정기적으로 보고하세요.”
연신 눈알을 굴리며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네레스.
이 비밀이 새어 나간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세 번.”
“…….”
“제 뜻에 따라 준다면 제 마장기를 살필 세 번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순간, 네레스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저, 저, 정말인가!”
마장기를 살필 기회라니!
마도학자로서 그보다 더 가슴 뛰는 일은 없었다.
잠시 후 수호자 드베이안을 향해 루인이 내뱉은 말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제 마장기를 금린사자기에 귀속시키겠습니다.”
폭풍을 만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는 드베이안의 동공.
루인의 말에 담긴 의미는 그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금린사자기는 이 르마델의 군권을 상징했다.
지금 루인의 말은 자신의 마장기를 르마델 왕국에 귀속시키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진심인가?”
“대신.”
루인이 저 멀리 창밖의 공중 왕성을 응시한다.
“1왕자 아라혼의 후원자가 돼 주셔야 합니다.”
당황해하는 드베이안.
“후원자라면…….”
씨익.
“녀석을 국왕으로 만들어 달란 뜻입니다.”
금세 드베이안의 얼굴이 온갖 복잡한 빛으로 얼룩졌다.
무려 마장기를 왕국에 귀속시키는 조건.
알칸 제국의 위협을 상시적으로 받고 있는 르마델의 수호자로서는 반드시 얻어 내야만 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1왕자의 옹립을 도와 달라니.
그때 현자가 무거운 표정으로 루인을 바라본다.
터무니없는 강요에 이은 엄청난 대가들.
하지만 그 모든 거래 앞에는 하나의 문제가 선제적으로 해결되어야 했다.
“그 모든 거래의 앞에는 자네의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이 포함되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그날에 나타났던 거인과 마장기, 대규모 기억 조작을 왕국의 비밀로 하는 조건.
“우릴 어떻게 믿고 그런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단 말인가?”
그때.
위이이이잉-
몇 마리의 잠자리와 파리, 날벌레들이 집무실 내부로 날아든다.
루인이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오늘부터 이것들이 당신들의 주변을 배회할 겁니다. 죽이지 말고 그저 내버려 두세요.”
“그게 무슨……?”
루인이 웃었다.
“이 벌레들이 제 믿음의 근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