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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167화 (167/187)

<167화>

르마델 왕실이 왕국 전역에 왕립 무투대회의 우승자를 공표한 지 사흘 후.

헤데이안 학부장의 조교, 미그베는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애써 무심한 척하지만 연신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헤데이안 학부장. 기분이 좋을 때면 늘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뭐, 나쁘진 않군.”

지금도 각지에서 도착하고 있는 축하 서신들.

대륙 마법학회는 물론 각국의 마탑, 유명한 궁정 마법사들, 이름 높은 현자들의 마법 스크롤이 끊임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그만큼 목소리 생도들의 우승은 특별한 것이었다.

물론 마법 생도들이 우승한 적은 많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기사 생도들과 함께 조를 이루어 그들을 보조하는 들러리만 서 왔던 것.

이렇게 순수한 마법 생도 5명의 마도(魔道)로만 우승한 것은 아카데미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대는 무려 렌시아가의 대공자와 이명 랭킹 1위와 3위의 기사 생도들, 거기에 그들을 보조하는 쟁쟁한 4등위 마법 생도 둘까지.

그런 뛰어난 조합의 경쟁자들을 상대로 무등위 마법 생도들이 우승을 일궈 냈으니, 학부장 헤데이안의 위상도 덩달아 올라간 것이다.

똑똑-

누군가의 노크 소리에 조교 미그베가 학부장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혀, 현자님!”

현자 에기오스, 르마델 왕국의 마탑주가 무심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방문이 의외였는지 학부장 헤데이안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랑하고 싶었는데 제 발로 찾아오다니.

현자 에기오스가 겸연쩍게 웃었다.

“축하하네. 마법학부의 경사로군. 역사에 남을 만한 위업을 이루셨네.”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인재들이 송곳처럼 세상에 튀어나왔다고 해서, 그들을 가르쳤던 학부의 바탕이 사라지는 건 아닐세.”

“허허, 사람 참.”

휘둥그레 두 눈을 뜨고 있는 조교 미그베.

그의 오랜 조교 생활에서, 학부장님이 이토록 정겹게 현자님과 대화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던 것.

또 무슨 언쟁을 벌일까 내심 조마조마했던 미그베로서는 오히려 더한 불안에 휩싸였다.

“앉게.”

“그러지.”

현자 에기오스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심각해 보인다.

헤데이안은 그가 단순히 축하를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직감했다.

“질질 끄는 건 자네답지 않지.”

에기오스가 비스킷을 집어 먹고는 점잖이 수염을 터는 헤데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최근 자네의 심상은 괜찮은가?”

“심상?”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기오스.

헤데이안의 눈빛이 묘해졌다.

“또 무슨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게지? 논쟁을 벌일 거라면 지금은 타이밍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심상이나 환각, 꿈 따위의 이면(異面) 자아 상태에서 어떤 특이한 장면을 본 경험이 없냐고 묻고 있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헤데이안은 짜증이 났다.

꽤 오랜만에 맞이하는 마법학부의 경사였다.

이런 좋은 날에 또 무슨 수작으로 기분을 망치게 하려고!

역시 에기오스 놈에게 순수한 축하를 기대한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황당한 꿈을 꾼 적이 정말 없는가? 환각이 정말 없었단 말인가?”

“…….”

개꿈은 누구나 꾸는 것.

이 좋은 날에 놈의 꿈 해몽 따위를 듣기는 싫었다.

“그만하고 돌아가게. 업무 중이네.”

그러나 현자 에기오스는 헤데이안의 축객령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헤데이안. ‘거인’과 ‘마장기’를 정말 심상으로 마주치지 않았단 말인가?”

“……뭐?”

화폭처럼 굳어 버린 헤데이안.

그의 말대로 최근 반복되는 기이한 꿈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혀 다른 양상의 무투대회 결승전.

기사 생도 하나가 거대한 거인으로 변하고.

그런 거인을 루인 녀석이 마장기를 소환해 광선포로 물리치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개꿈이었다.

개꿈도 그런 개꿈이 없어서, 단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몇 번이고 실소가 터져 나왔었다.

평생을 심상에 매진하는 마법사의 꿈은 대게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황당한 꿈을 꿨다는 건 최근 무리한 업무의 결과일 터.

“…….”

현자의 논리 체계가 맥동한다.

저 에기오스가 자신이 꿨던 꿈을 정확히 알고 언급했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설마…… 자네도……?”

“짐작대로네. 나도 지금 자네와 똑같은 환각과 기면에 시달리고 있지.”

더욱 충격으로 굳어 버린 헤데이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에기오스의 말대로라면 그 꿈이 정신 마법에 당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

“……설마 그 꿈이 ‘정신 저항’이었단 말인가?”

정신 방벽이 두터운 마법사들은 정신 마법에 대항하는 저항 체계가 작동한다.

그건 꿈이나 환상, 심상으로 보여 주는 경고.

“나도 어제야 알았네. 수호자 드베이안 공께서 찾아왔었지.”

“드베이안 공?”

“그는 초인일세. 자신의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감각적으로 느끼셨던 게지.”

“……그, 그럴 수가.”

에기오스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명확했다.

그 거인과 마장기의 꿈이 정신 저항이라면…….

“그렇다네, 헤데이안. 우리가 꾸었던 꿈은 그날의 현실일세.”

“마, 마, 말도 안 돼!”

에기오스는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어제의 자신 역시 헤데이안 학부장과 똑같은 반응이었으니까.

“그,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일단 마장기를 꺼냈던 그 아공간부터가 말이 안 되네! 게다가 얼핏 느끼기에도 광선포의 위력은 측정 불가능의 영역이었어!”

“그렇지.”

“그 거인으로 변해 버린 기사 생도는 또 뭔가? 그런 권능이 인간으로서 가능하단 말인가?”

“게다가 그 거인으로 변한 기사 생도가 쓴 권능은 마법이었지. 9위계급 광화(光火) 마법이었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9위계급 광화 마법.

그 싯푸른 불꽃이 세계의 재앙이라는 드래곤의 브레스, 혹은 헬파이어급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이상?”

허면 루인은 드래곤의 브레스를 정통으로 처맞고도 무사했다는 뜻이 된다.

마도의 상식이 모조리 부정되는 느낌이었다.

“당황스러운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네. 나 역시 자네와 똑같이 반응했으니까.”

그때.

헤데이안의 동공이 극도로 수축되었다.

“자, 잠깐! 그렇다는 것은!”

헤데이안이 현자급 마도사인 이상, 그의 추론은 단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폭풍처럼 흔들리는 동공이 이내 에기오스를 향했다.

“정말 녀석이 수천 명 군중들의 기억을 한꺼번에 조작해 버린 것이란 말인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기오스.

“알다시피 지금으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네.”

“대체 어떻게 그런 마도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마도.

그런 경지에 도달한 인간 마도사라면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

아무리 상식을 벗어난 천재라고 해도 아직 마법 생도에 불과한 루인에게는 결코 가능한 경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녀석이 소환했던 마장기를 자세히 떠올려 보게.”

거대한 마력핵.

압도적인 크기의 동체와 마력 주포.

발광하며 외부 장갑을 덮고 있던 무수한 초고위 술식의 흔적.

알칸 제국의 전설적인 마장기, ‘알카리네우스’보다 훨씬 거대하고 장엄한 위용.

그러나 에기오스는 마탑주이기 이전에 르마델 왕국의 하나뿐인 마장기를 운용하는 라이더.

그는 헤데이안과 관점이 많이 달랐다.

“그 마장기의 외부 장갑은 금속이 아니었네.”

그것은 헤데이안이 미처 놓치고 있었던 부분.

그제야 그의 표정이 핼쑥해진다.

그건 적어도 현 시대의 마도공학에서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이스하르콘 합금 말고도 마력 주포의 열과 충격파를 견딜 수 있는 물질이 더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런 건 존재하지 않네.”

강철 주괴에 소량의 오리하르콘을 섞어 만드는 이스하르콘은 마장기의 구조적인 한계를 극복하게 만드는 유일한 재료.

엄청난 포열과 진동, 더욱이 외피에 회로를 그려 넣어야 하는 마장기의 특성상 마력 동조율이 뛰어난 이스하르콘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금속이 아니라면…….”

“돌이었네.”

“돌?”

황당하기 짝이 없는 대답.

금속이 아니라는 것도 당황스러운 마당인데 돌이라니?

그 복잡한 구조의 마장기를 돌로 만든다는 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네레스도 우리와 비슷한 정신 저항을 겪었지. 지금 만나고 오는 길이네.”

마도학자 네레스.

르마델이 보유한 마도학자 중에서 최고의 실력을 지닌 마도학자.

“네레스는 틀림없는 돌이라고 했네.”

“그게 가능하다면…….”

“그렇다네. 인류의 신기원을 개척하는 수준의 새로운 마도공학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 세계의 마장기가 아니란 뜻인가?”

“아직은 추측일세.”

마장기는 인간 문명 고유의 마도 병기.

드래곤 일족조차 인간의 마장기를 흉내 낼 수는 없었다.

마장기는 수많은 인간들의 합치된 노력이 전제되어야 탄생시킬 수 있는 마도공학의 결정체.

단일 개체로 활동하는 드래곤들은 결코 마장기를 제작할 수 없었다.

헤데이안은 사흘 전의 결승전을 다시 떠올렸다.

거대한 거인이 된 생도.

그런 거인을 마력 주포 한 방으로 날려 버린 루인.

자신들이 모르는 미지의 비밀, 세계의 숨은 이면(裏面)이 느껴진다.

헤데이안의 얼굴은 어느덧 에기오스와 비슷해져 있었다.

“이게 우리가…… 아니 왕국의 힘으로 조사할 수 있는 일인가?”

“불가능하지.”

측정 불가능한 위력의 마장기를 소환할 수 있는 마법 생도.

왕국의 정규군과 홀로 일전을 벌일 수 있는 존재.

더욱이 그런 대규모 기억 조작이 가능한 마도라면 본연의 권능 또한 얼마나 대단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루인…….’

더 이상 일개 생도로 생각할 수 없는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가만 생각하니 녀석이 에어라인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끔찍한 재앙이었다.

녀석의 기분에 따라 이 거대한 왕국의 공중 도시가 추락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

“일단 녀석을 에어라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급선무겠군.”

“동의하네. 수호자 드베이안 공의 불안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잠시 생각에 잠기던 헤데이안이 더욱 얼굴을 굳혔다.

“한데 녀석이 하이베른가에 돌아가도 문제가 아닌가?”

“그렇지.”

하이베른가가 그 거대한 마장기로 독립을 선언한다고 해도 르마델로서는 막을 수단이 없었다.

하이베른가와 대마장기전을 벌인다면 곧바로 알칸 제국이 움직일 터.

지금 르마델 왕국의 하나뿐인 마장기는 언제든지 알칸 제국을 상대할 수 있도록 남부 전선에 배치된 상태였다.

이 현자 에기오스도 봉화가 타오르면 곧바로 공간 이동진으로 남부로 향해야만 했다.

“조기 졸업이라도 시키게. 방법은 그것뿐이네. 일단 녀석을 에어라인에서 내보낸 다음 이후의 일을 생각하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갑자기 뇌리를 울려 오는 절대 언령.

이어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저벅저벅.

그 걸음걸음마다 헤데이안의 심장이 함께 고동친다.

이윽고 학부장실에 들어온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특유의 무심한 눈빛.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감한 표정.

“적당한 명분이 필요했는데 조기 졸업이라니 안성맞춤이군.”

루인이 두 현자를 향해 무료한 시선을 털어냈다.

“하지만 받을 건 받고 떠나야지.”

씨익.

“시상식 전에 잠시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습니까?”

루인의 묘한 미소.

학부장과 현자는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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