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66화 (166/187)

<166화>

아르디아나가 떠난 후.

시론과 다프네를 중심으로 맹렬한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루인은 묵묵히 그들의 질문을 모두 받아 주었다.

필요할 땐 자세하게, 민감한 미래에 관해서는 간결하게.

루인은 회귀의 비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실에 대해서 전달해 주었다.

생도들의 놀라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악제와 그를 따르는 비밀스러운 추종 집단이 존재한다는 건 어린 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럼 그 ‘군단장’이라는 놈들의 경지는 어느 정도지?”

“대부분이 상위 경지의 초인 이상. 중심인물들은 모두 초월자들이다.”

“초월자……?”

그것은 이름 모를 초인만 등장해도 왕국이 뒤집어지는 현실 속에 사는 생도들에게는 쉽게 와닿는 경지가 아니었다.

초월자(超越者).

천 년에 한 번 나타나기도 힘든 이름.

역사 속의 테아마라스나 헤이로도스와 같은 대마도사.

혹은 대륙의 전설적인 기사 패왕 바스더나 동쪽 대륙의 무신 ‘료칸’ 정도만이 다다른 세계를 초월한 경지.

심지어 르마델의 역사 속에서 신성시되는 이름, 가장 강력한 기사라고 평가받는 르마델의 초대 국왕 소 로오 르마델이나 초대 사자왕조차 초월자는 아니었다.

한데, 그런 역사 속의 영웅, 고대 위인과 같은 존재들이 군단 내에 수도 없이 포진되어 있다고?

시론은 너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동시대에 그렇게 많은 초월자들이 어떻게 탄생될 수 있는 거지?”

“악제의 청염이 가능케 한다.”

기이한 눈빛으로 정신을 잃고 있는 월켄을 바라보는 다프네.

“이 기사분이 그 청염이란 것에 당했던 거죠?”

“그래.”

세베론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도 초월자의 가능성이 생기는 건데…….”

강렬하게 타오르는 루인의 눈빛.

“헛소리. 무늬뿐인 초월자다. 자아가 사라진 인형으로 사는 것에는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

<고마워요. 모두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줘서. 하지만…… 두렵네요.>

적요(寂寥)하는 마법사가 군단장들의 진면목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니.

군단장들의 소스라치는 공포, 그 무시무시한 루이즈의 소싯적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루인이 조용히 웃고 있을 때 루이즈의 첫 질문이 이어졌다.

<그 마장기…… 혹시 루인 님이 직접 만든 건가요?>

고개를 흔드는 루인.

“아니. 아무리 나라도 그건 무리지.”

루이즈는 마치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내 허공에 술식 회로를 수놓는 루이즈.

루인의 얼굴에 놀라운 감정이 스쳤다.

그녀가 허공에 그린 회로가 쟈이로벨의 마장기 ‘진네옴 투드라’의 외부 장갑에 새겨진 술식의 일부였기 때문.

그렇게 루인이 허공에서 은은히 발광하고 있는 회로를 살피다가 루이즈를 응시했다.

“그 짧은 순간에 이 복잡한 술식을 모두 외웠다니…… 대단하군.”

무려 마신 쟈이로벨의 초고위 술식.

극도로 미세한 선들이 수도 없이 뻗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회로.

그 긴박한 상황에서 이 모든 걸 눈에 담았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까요.>

“충격적?”

항상 차분함을 유지하던 루이즈의 절대 언령이 떨리고 있었다.

<이 술식은…… 인간계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마왕의 유물이에요.>

루이즈는 무심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루인의 두 눈을 힘겹게 직시했다.

<말해 주세요. 고대의 인간계를 피로 물들인 마왕 발푸르카스의 ‘파멸 술식’이 어째서 그 마장기에 새겨져 있는 것인지…….>

그건 당연한 일이다.

쟈이로벨이 홀로 마장기를 만든 건 아니니까.

인간들의 마장기 설계도를 확보한 쟈이로벨은 몇몇 휘하 마왕들과 함께 협력하여 연구했다.

특히 전방 장갑에 새겨진 초질량 역전 필드의 술식 설계는 마왕 발푸르카스의 작품.

당연히 그 술식에는 그의 마도적 역량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루인은 먼저 궁금한 것이 있었다.

“고대에 강림했던 마왕의 술식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마왕 발푸르카스의 흔적이 아니라고 말할 생각이라면 그만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잠시 침묵하던 루이즈에게 충격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전 마헤달의 후손이에요.>

용사 마헤달.

마왕 발푸르카스와 최후까지 맞서 싸웠던 그 용감한 이름.

지금도 대륙 곳곳에 그의 동상이 남아 있을 정도로, 그의 희생과 투지, 영웅적인 위업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이 되어 주고 있었다.

이건 과거에도 그녀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사정.

이렇게 또 루이즈를 알아 간다.

그녀가 왜 그토록 치열하게 악제군과 맞서 싸웠는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시론이 충격적으로 굳어져 있었다.

“마, 마헤달의 후손이라고?”

마헤달은 패왕 바스더나 헤이로도스처럼, 한 왕국이나 특정 지역에 국한되는 영웅이 아니었다.

전 대륙적으로 유명한 위인.

시론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헤달의 가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막대한 명성을 얻을 수 있을 텐데도, 루이즈는 아카데미에서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

그녀의 착잡한 태도로 미뤄 보아 그녀와 그녀의 가문에 많은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루인은 짐작할 수 있었다.

침잠한 눈, 한참을 고민하던 루인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내 마장기의 출처는 마계, 쟈이로벨이라는 마족의 물건이다.”

역시 루이즈가 아닌 리리아가 가장 먼저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금까지 날 기만했단 말이냐!”

리리아뿐만이 아니다.

시론과 다프네, 루이즈와 슈리에 모두의 눈빛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들 역시 마계의 침공에 맞서 힘겹게 싸워 온 인간들의 후손.

그런 피의 역사를 소싯적부터 배워 온 혈기 왕성한 생도들이었다.

루인은 차분하게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막연한 적대감이 악제와 맞서 싸우는 데 큰 도움은 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저 이글거리는 감정들, 분노로 타오르고 있는 녀석들의 눈빛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오히려 루인은 기꺼웠다.

츠츠츠츠츠-

희미한 혈우의 구름이 너울거리는 핏빛 동체를 그려 낸다.

너무나도 잔혹하고 섬뜩한, 괴기스러운 표정으로 일그러진 쟈이로벨의 등장은 모두의 숨을 멎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쟈이로벨이 검붉은 피로 얼룩진 얼굴을 더욱 와락 구겼다.

<젠장! 도대체 언제까지 날 이렇게 귀찮게 할 셈이냐!>

“할 수 없잖아? 널 보여 주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

<이 쟈이로벨이 무슨 네놈의 증명 도장이란 말이냐? 너는 정말 해도 해도……!>

“이제 됐으니까 그만 들어가.”

<이런 개 같은!>

루인을 맹렬하게 노려보던 쟈이로벨이 그 악마 같은 얼굴로 생도들을 홱 하고 쳐다보았다.

<어이. 꼬맹이 녀석들아.>

“히이이익!”

“으아아!”

시론과 세베론이 기겁을 하며 뒤로 숨는 것과는 반대로, 리리아는 이미 타오르는 마력을 움켜쥔 채 강렬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기괴하게 웃고 있는 쟈이로벨.

그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수인을 맺던 리리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라. 이 루인 놈은 이 쟈이로벨과 계약 관계가 아니다. 너희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흑마법사 따위가 아니란 뜻이다.>

루이즈의 묘한 표정이 이어졌다.

<그럼 무슨 관계죠?>

쟈이로벨이 루인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그 역시 루인과의 관계를 정의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

계약 관계가 아니다.

그럼 단순한 동료? 휘하?

그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게 기괴하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쟈이로벨에게로 루인의 나직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친구다.”

<뭐?>

“그럼 뭐라고 말할 테냐?”

<…….>

딱히 반박할 수가 없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이 분노는 대체 왜일까?

“개소리. 마계의 마족들은 오직 인간을 제물로 여길 뿐이다. 그런 욕망 덩어리들이 인간을 자신과 동등하게 여긴다고?”

리리아를 무심히 쳐다보는 루인.

“엄밀히 말하자면 동등한 관계는 아니지.”

“역시……!”

“친구이자 내 부하거든.”

“……?”

리리아가 의문이 가득 담긴 눈빛이 되었을 때 쟈이로벨의 거친 일갈이 토해졌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보았나! 이 쟈이로벨이 어떻게 네놈의 휘하란 말이냐!>

이어진 한심하다는 듯한 루인의 반응.

“내 명령에 월켄을 구출해 온 게 누구지?”

<그, 그건!>

루인이 곧바로 헬라게아를 소환한다.

“평생 모은 재물을 내게 바친 놈은 다른 놈인가?”

<그, 그게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해석되는 거냐!>

억울하다는 듯한 쟈이로벨의 비굴한 태도에 모두의 표정이 멍하게 변해 갔다.

“앞으로 내가 다치면 친절하게 회복시켜 줄 거지?”

<……>

“내가 새로운 마도를 개척하면 함께 친절하게 연구해 줄 테고.”

<그만……!>

“벌레왕 아므카토처럼 건방진 마족 녀석들이 나타나도 계속 착실하게 처리해 주겠지.”

듣고 보니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었다.

그렇게 자괴감으로 몸부림치고 있던 쟈이로벨은 계속 여기 있어 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개 같은 인간 놈!>

스스스스스-

다시 희미한 핏빛 연기가 되어 루인의 정수리에 모두 스며든 쟈이로벨.

다프네가 멍한 표정으로 루인을 응시했다.

“그는…… 쟈이로벨은 마왕인가요?”

그건 모두의 의문이었다.

엄청난 마장기의 소유자, 게다가 저토록 무시무시한 위압감이라면 틀림없이 초고위 마족.

한데 생도들은 쟈이로벨이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마계에는 인간계로 치면 대륙, 총 열세 개의 대륙이 있다.”

“아……!”

“그 열세 개의 대륙은 수도 없이 주인이 바뀌지. 놈은 최근까지 ‘혈우 지대’를 정복했던 마계 군주다.”

무려 마계의 군주라니!

그렇다면 엄청난 마왕임이 틀림없었다.

“……대단한 마왕이겠군요.”

씨익.

“마계의 일정 영역을 정복한 군주는 마왕으로 부르지 않아.”

“그럼?”

“신(神). 놈은 마신으로 불리는 존재. 휘하에 스물 이상의 마왕을 거느린 마계의 군주다.”

마신(魔神)?

생도들에겐 그 개념조차 생소한 이름.

<마왕을 거느리는 존재…….>

그런 무시무시한 마계의 권력자를 루인이 부하로 부리고 있단 말인가?

루이즈는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흑마법사 따위가 아니다. 굳이 정의하자면…… 나는 마신을 거느린 대마도사다.”

그 오만하고 광오한 말에 모든 생도들은 숨이 멎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경험했던 루인의 엄청난 마도(魔道)의 단면.

그 진실된 실체를 눈앞에서 마주하고 나니 도무지 현실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그럼 네 영혼이 그에게 귀속되지 않았단 뜻인가?”

“귀속?”

루인이 리리아를 향해 섬뜩하게 웃고 있었다.

악제조차 청염으로 길들이기를 포기한 강대한 영혼.

수만 년을 지나온 대마도사의 자아를 고작 마신 따위가 길들일 수 있다는 건 넌센스에 가까웠다.

루인이 모두를 바라본다.

“이제 더는 날 의심하지 마라.”

어느새 그는 창밖의 머나먼 남녘을 응시했다.

이 어린 생도들과 자신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테아마라스…….”

테아마라스, 아니 악제의 유적.

이제 놈의 비밀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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