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오묘하게 반쯤 감긴 에메랄드빛 눈동자.
특유의 감정 없는 눈빛, 속을 알 수 없는 그녀만의 표정은 그 옛날 그대로였다.
아르디아나.
늙지 않는 성녀.
신의 의지와 이어진 유일한 인간.
인류의 절멸 앞에 스스로 몸을 내어 준 그 희생의 이름이, 그 위대한 성녀(聖女)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루인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는 방금 쟈이로벨의 그림자에서 솟아났다.
그녀가 왜 군단장들의 권능 중 하나인 그림자를 다루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녀가 악제의 군단장이라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굳이?
그렇게 루인은 모든 의문을 담아 쟈이로벨을 바라보았다.
“설명해.”
쟈이로벨이 생도들을 힐끔거렸다.
“이 아이들 앞에서 말이냐?”
“상관없다.”
목소리 생도들을 이번 생의 동료로 받아들였다.
그런 확신 이후 루인은 굳이 자신의 일들을 숨기지 않았다.
비셰울리스의 기억 조작 마법을 막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보는 그대로다. 월켄을 구출했고 아르디아나의 신변을 확보했다. 그녀는 친히 이 녀석의 청염을 없애 주겠다더군.”
쟈이로벨의 태도가 뭔가 이상했다.
그의 말대로 월켄과 아르디아나가 눈앞에 있었지만 뭔가를 숨기고 있는 태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아.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렇게 쉽게…….”
다름 아닌 렌시아가다.
월켄은 직계 성을 하사받은 렌시아가의 혈족.
쟈이로벨이 그런 혈족을 납치하려 들었을 땐 틀림없이 렌시아가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그를 막아섰을 것이다.
“너 설마 봉인을 풀고……?”
“이 쟈이로벨이 고작 인간 따위를 상대하는 일에 맹약까지 저버릴 거라 생각하는 거냐?”
적어도 쟈이로벨은 함부로 거짓을 일삼는 마족은 아니었다.
녀석의 드높은 자존감은 마신 그 이상이었으니까.
그런 쟈이로벨이 이렇게 뻔뻔하게 나온다는 것이 루인에게는 참으로 이질적인 감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허술한 거짓말이라니 너답지 않군.”
강렬한 눈빛의 루인이 이내 방 한편에 놓여 있는 궤짝을 응시하며 미묘하게 웃고 있었다.
한데 쟈이로벨은 의외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협박도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 나로선 어쩔 수 없다 루인. 이게 최선이다.”
“최선?”
므드라의 서사시 앞에서도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수가 있다고?
쟈이로벨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루인으로선 믿을 수 없는 일.
“그만. 난 쉬고 싶다.”
스스스스-
비스토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기운이 서서히 루인의 몸에 흡수되고 있었다.
다시 의식을 되찾은 비스토가 이내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아!”
쟈이로벨은 비스토의 육체를 마치 자신의 진마강체처럼 다루었다.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권능을 다루었으니 그 후유증은 참혹한 것이었다.
당연히 상상할 수 없는 격통이 그의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끄으으으…….”
결국 혼절해 버린 비스토와 그런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생도들.
말로만 듣던 흑마법이 바로 눈앞에서 재현되었다.
리리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루인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너에게 한 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리리아의 눈빛은 온갖 복잡한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너 흑마법사였나?”
리리아는 루인의 많은 것을 보았다.
하이베른가에서는 악제의 사념을 직접 보기까지 했으니까.
그런 걸 보았을 때도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은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것.
그것은 그녀가 흑마법을 극도로 증오하기 때문이었다.
대대로 어브렐가는 많은 혈족들이 멸화의 저주에 절망하며 흑마법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그런 비극의 역사를 배워 온 리리아는 누구보다 흑마법을 경계하는 마법사였다.
씨익.
“그래 보이나?”
“…….”
리리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절망하는 자, 욕망하는 자, 갈구하는 자.
마족들은 그런 인간들에게 찾아와 유혹하고 제물로 삼는다.
하지만 루인은…….
“반성이 되는군. 내가 마족의 인형으로 살아가는 마법사처럼 보였다니.”
아직도 리리아는 언니의 생명을 살리기를 염원했을 때 은밀하게 자신의 심상 세계를 침범한 불청객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은밀한 존재는 끈질기게 유혹을 속삭였다.
언니를 살려 주겠노라고, 너에게 힘을 주겠노라고.
그러나 그 대가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리리아는 그런 욕망의 존재를 끝까지 머나먼 의식 너머로 밀어냈다.
열한 살의 자신도 할 수 있었던 일을 저 무시무시한 루인이 해내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 시론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루인. 방금 건 누가 봐도…….”
“내 염동력은 이해가 되고?”
“그건…….”
“지금 너희들이 착용하고 있는 마도구들은?”
“…….”
“내 마장기는?”
그러고 보니 그의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
무시무시한 헤이로도스 술식과 염동력, 나이를 믿을 수 없는 마도사의 의식 체계, 미지의 아공간에서 쏟아지는 모든 것들이 그의 불가사의였다.
천천히 걸어간 루인이 아르디아나 앞에 멈춰 선다.
아무런 반응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성녀를 향해 루인은 그렇게 첫마디를 꺼냈다.
“월켄의 청염을 없애 준다고?”
역시 무표정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아르디아나.
“청염이 뭔지 알고는 있나?”
“멸망의 파편. 욕망의 사념.”
역시 정확하게 알고 있다.
끝없는 의문들이 뇌리를 맴돈다.
왜 굳이 하녀로 위장해서 렌시아가에 숨어들었는지, 군단장의 능력은 어떻게 쓸 수 있는 건지, 월켄과 접촉한 의도는 무엇인지…….
묻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그녀의 익숙한 남부식 사투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그래. 고맙군.”
결국 루인은 군단장의 능력을 쓰는 이유도 악제와의 관계도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그런 질문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녀는 언제나 해야 할 일만 하는 그런 사람.
지금은 단지 그녀의 마지막 미소를 추억하고 싶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지어 주던 성녀의 웃음.
인류를 위한 자기희생, 그 성결한 선택을 기억하는 이상, 루인은 함부로 그녀를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런 오묘한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시론이 다가왔다.
“루인. 누구지?”
대답은 아르디아나에게서 흘러나왔다.
“아르디아나.”
그렇게 대답하던 그녀가 월켄에게 다가가 그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두 눈을 감고 의식에 잠기던 아르디아나는 다시 루인을 무심히 응시했다.
“청염은 사라졌다.”
루인은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청염을 제거했다?
이토록 당황스러울 정도로 간단하게?
하지만 성녀는 허언을 하지 않는 사람.
그녀가 없앴다면 진짜 없어진 것이었다.
“이제 막 발아를 시작한 초기 청염. 굳이 나의 성광(聖光)까지 필요가 없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난 아르디아나는 곧장 뒤로 돌아섰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다.”
묘해지는 루인의 표정.
성광(聖光)을 익혔다면 그녀는 이미 전능의 영역에 다다라 있을 것이다.
월켄의 초기 청염을 치료하고자 했다면 지금처럼 간단하게 권능을 동원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럼에도 아르디아나는 굳이 이 먼 길까지 찾아왔다.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텐데 그 목적을 짐작할 수 없었다.
“렌시아가에 다시 가야만 되나?”
무심히 뒤돌아보는 아르디아나.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번에도 때가 되어 모든 인간들이 절망하고 있을 때 인류 연합 진영에 찾아오려는 건가?
그녀에게 어떤 질문도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루인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염을 치료하려는 목적뿐이었다면 왜 굳이 이 먼 곳을 찾아온 거지?”
역시 대답하지 않는 성녀.
그녀는 어떤 의문에도 대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 스스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지 않는 이상.
“그래. 알겠다. 다시 보는 날이 곧 오겠지.”
루인의 손 인사를 받고도 아르디아나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루인이 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을 때 놀랍게도 그녀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한 번 보고 싶었다.”
당혹한 루인의 얼굴.
“뭐?”
“그는 인간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니까.”
분명 쟈이로벨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정체까지 알고 있었다고?
“놈이 어디까지 말한 거지?”
쟈이로벨은 이미 자신의 영혼 깊숙이 숨어 버린 상황.
만약 쟈이로벨이 자신의 회귀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을 늘어놓았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자신의 회귀는 세계의 섭리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대사건.
이미 아버지와 데인이 눈치를 챈 것만으로도 극도로 불안한 지경이었다.
회귀의 비밀이 여기서 더 새어 나간다면 최악의 경우 멸망의 때가 더 앞당겨질 수도 있었다.
“…….”
말없이 루인의 시선을 외면하는 아르디아나.
텁.
루인이 그녀의 어깨를 잡는다.
“그래서 나를 본 소감은?”
루인과 시론, 그리고 동료들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르디아나가 짧게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뒤로 돌아섰다.
“조급해 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
모두를 찬찬히 훑어보는 아르디아나.
“그리고 기뻤다. 새로운 인연과 웃으며 어울리는 당신이. 아마도 모두가 바랐을 것이다.”
“아, 아르디아나?”
루인은 사고가 정지되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가 마치 자신의 과거를 아는 듯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
게다가 성녀의 태도는 단순히 자신의 과거를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자신과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듯한 뉘앙스.
그렇다면 성녀도…….
‘시간 회귀’를 했단 말인가?
“설마 당신……?”
예의 무심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아르디아나.
“나는 그대와 다르다.”
“……뭐가 다르다는 거지?”
순간,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아직은 말해 줄 수 없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
“더 이상은 날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언제나 인간을 사랑하니까. 그리고…….”
그녀의 모호하고 아득한 눈빛이 루인의 영혼 깊숙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드시 그를 지켜라. 어쩌면 그대보다 그가 우리의 더 큰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대도 알겠지만 청염(靑炎)은 어둠의 파편. ‘태초의 어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건 그들이다.”
아르디아나가 다시 뒤돌아섰다.
“렌시아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곳에 드리운 절대악의 파편은 이 아르디아나가 모두 도려낼 것이다.”
절대악, 태초의 어둠.
그녀는 한 번도 악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오직 발카시어리어스를 상징하는 단어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내가 아는 성녀가 맞다면 하나만…… 하나만 대답해 줘.”
대답 없이 걸어가는 아르디아나.
루인의 힘없는 음성이 그녀의 귓가로 날아들었다.
“……후회한 적은 없었어?”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흐릿하게 산화되어 가던,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아르디아나가 루인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한 번도.”
그녀의 어깨가 떨린다.
“후회 따윈 한 번도 없었다. 루인.”
루인.
성녀 아르디아나에게 처음 듣는 호칭.
그렇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루인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