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64화 (164/187)

<164화>

-잠깐! 경기 중단! 경기 중단입니다!

헬렌 교수의 다급한 목소리에 달려들던 목소리 생도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시론이 관중석의 상단부, 주최 측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경기 중단을 상징하는 백색의 깃발이 다급하게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방금, 전격계 마법에 적중당한 두 기사 생도들에게 심판 전원이 전투 불가 판정을 결정했습니다! 참고로 이미지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무등위 마법 생도에게도 전투 불가 판정이 내려졌었다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세베론의 얼굴이 점점 환해진다.

잊고 있던 무투대회의 규정이 떠오른 것이다.

“시론! 선배들 세 명이 전투 불가 판정을 받았어!”

“음?”

“루인과 함께 들것에 실려 나간 브훌렌 선배가 이미 전력 외, 즉 전투 불가 판정을 받은 상태잖아! 거기에 저 두 선배까지 포함된다면……!”

“전투 불가 판정이 셋?”

“그래! 전투 불가 판정이 셋이 되면 몰수패잖아!”

“오오오오!”

-왕립 무투대회의 규칙 제3조 1항에 의거, 생도들의 안전을 위해 크라울시스 생도의 백팀에게 몰수패를 선언합니다! 우승자는 청팀! 무등위 생도들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

약자를 응원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

아직 1등위 견장도 받지 못한 무등위 생도들이 정말로 우승을 해 버렸으니 관중들의 흥분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무려 하이렌시아가의 대공자와 최상위 랭커들을 상대로 루인이 없는 상황에서 승리를 따낸 것이었다.

그야말로 대이변!

“…….”

“…….”

연신 환호하고 있는 군중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타가옐.

늘 여유로웠던 유리우스 역시 처참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극도의 치욕.

마력권(魔力圈)을 떨친 것 외에는 뭐 하나 제대로 해 본 것이 없었다.

전략의 부재.

팀의 전술을 지휘했던 크라울시스가 모든 것을 망쳤다.

전방으로 나선 무등위 생도들을 가볍게 제압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그와 일리온이 처참하게 통구이가 된 채로 쓰러진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아무런 대비나 전략도 없이 소극적인 대응으로만 일관했던 빈약한 전술이었다.

반면 무등위 생도들은 철저하게 준비된 전략을 구사했다.

극한으로 활용된 마도구, 철저한 시간 계산, 모든 상황을 단숨에 뒤집어 버린 절대 권능 봉인, 마지막으로 메모라이징 탄환 마법으로 쐐기를 박는 대미까지…….

그야말로 무등위 생도들에게 제대로 손도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패배해 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마력권을 접고 조금만 더 일찍 전방으로 합류했다면 이렇게까지 허탈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 한 명만이라도 후방을 교란했다면!

절대 권능 봉인의 발동만 막을 수 있었다면!

차라리 크라울시스의 명령을 처음부터 무시했다면!

그의 머릿속에 온갖 미련이 어지럽게 맴돌았다.

“으아아아아!”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유리우스.

마도(魔道)를 향유하는 마법사로서, 전략적으로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다는 것이 너무나 수치스러웠던 것.

“우리가 해냈어요!”

“루인 없이 우리가 정말 이겼다구!”

반면 함께 얼싸안고 방방 뛰고 있는 무등위 생도들.

우승자의 영광을 품에 안고 아카데미의 대미를 장식하려고 했던 이명 랭커들은 관중을 향해 예도 보이지 않고 경기장 밖으로 걸어갔다.

“끄아아아아아!”

뒤늦게 깨어난 크라울시스의 울부짖는 소리가 한참 동안 베스키아 리움을 휘감았다.

* * *

인간의 육체를 회복하는 데 있어 최고의 효과를 보여 주는 권능은 일반적으로 신관들의 신성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흑마법을 모르는 인간들의 선입견.

억겁의 시간 동안 생명력에 담긴 힘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마족들은 육체를 복구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완성해 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마고수면(魔枯睡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만 유지하며, 다른 모든 에너지를 육체의 복구에만 쏟아붓는 다소 극단적인 치유법.

문제는 그런 마고수면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외부의 공격에 극도로 취약해지는 것.

다행히 이곳은 위험천만한 마계가 아니라 인간계였고, 마법 생도들의 기숙사 역시 함부로 방문하는 불청객이 없었다.

‘……어색하군.’

루인은 다소 기괴한 자세로 명상하고 있었다.

마족의 육체에 적용되던 마고수면을 인간이 펼칠 수 있도록 개량한 방법이니 불편한 자세는 어쩔 수 없었다.

‘더뎌.’

마고수면의 뛰어난 효과를 감안하면 회복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청염의 가공한 열기도 한몫했지만, 그보다는 갑작스런 급랭으로 인한 괴사가 더욱 정도가 심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청염의 잔열을 막아 내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자신이 빠진 팀의 상황은 어떤지.

검성과 쟈이로벨은 무사한지.

남부와 갈등을 벌이기 시작한 하이베른가는 잘 해내고 있는지.

갑작스럽게 많은 마정석을 확보하게 된 소울레스가의 반응은 어떨지.

1왕자 아라혼의 협박을 받고 있는 국왕 데오란츠는 어떤 타개책을 모색할지.

자신의 마장기를 파악한 은퇴 집단은 어떤 반응을 해 올지 등.

그야말로 온갖 상념이 어지럽게 어울려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한 번도 이 정도로 불안한 적은 없었는데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쟈이로벨…….’

상념의 끝에 찾아온 감정은 공허함이었다.

만 년 이상 함께한 녀석이 곁에 없다는 것.

자신에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루인은 웃고 말았다.

필멸자인 인간이 마신을 걱정한다는 건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래도 놈이 염려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놈이 마신이라 해도 혼자다.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강대한 세력, 대공가 렌시아가를 단독으로 방문한다는 건 극도로 위험하다.

더욱이 정찰이나 탐색이 아닌, 녀석의 임무는 검성과 성녀의 확보.

반드시 전투가 일어날 것이었다.

물론 녀석이 인간과의 전투에서 패배한다는 생각은 상상하지 않는다.

문제는 마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찾아올 존재들과 드래곤, 그리고 악제의 추종자들이었다.

인간계에서 마신 쟈이로벨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악제가 파악한다는 건 반드시 리스크로 돌아올 터였다.

상대는 인류의 모든 역사를 관찰해 온 태초의 마법사.

그런 무시무시한 대마도사에게 미리 정보를 내어 준다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모골이 송연해졌다.

자신 역시 만 년 이상을 지나온 대마도사였으나 그 시간의 대부분은 공허(空虛) 속에서의 명상.

하지만 악제의 생애는 차원이 달랐다.

전 생애를 인간들의 문명과 얽히며 살아온 존재.

인간이 굽이쳐 지나온 모든 영광과 몰락을 지켜본 초월자.

그런 악제의 경험은 단순히 상투적으로 ‘경험’이라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역사의 대변자이며 문명의 관찰자.

절대로 자신과 같은 수만 년을 살아온 대마도사, 동등한 위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절대적인 시간만으로 비교하기엔 경험의 간극이 너무나 큰 것이다.

전생의 악제가 막연한 두려움이었다면 이제는 그 실체가 명확해진 상황.

역시 드러난 악제의 진면목을 살피면 살필수록 내내 아득해지기만 했다.

대체 놈의 지혜는 어떤 수준이란 말인가?

놈이 집대성한 지혜, 놈의 완성된 자아를 감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마법사가 수명을 초월해 고작 백여 년 이상만 살아도 마도사로 불리는데, 놈은 인류의 역사 그 자체인 존재.

신(神)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미친 존재였다.

삐이- 삐이-

갑자기 기숙사 주변으로 펼쳐 놓은 알람 마법이 공명음을 일으킨다.

자신은 지금 일종의 반 가사(假死) 상태.

여기서 의식을 회복하고 마고수면을 풀면 한동안은 다시 마고수면을 할 수가 없었다.

회복이 그만큼 더뎌지는 것이다.

-의료진과 신관의 치료를 거부하고 돌아갔다면 벌써 모두 회복한 건가?

-아무리 루인 님이라고 해도 그건 무리지 않을까요? 그 푸른 불꽃…… 처음 보는 형태의 마법이었어요. 위력도 엄청난 것처럼 느껴졌고요.

-쉿! 조용해! 이미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구!

-힝! 빨리 소식을 알리고 싶은데…….

루인은 마고수면 자세를 풀고 가수면에서 깨어났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벗어났다.

동료의 방문을 물리칠 정도는 아닌 것이다.

“크으으으…….”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녀석들의 얼굴을 보자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루인!”

“괜찮아요?”

루인은 말없이 웃고 있었다.

밝은 얼굴들.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녀석들이, 아니 우리가 승리했다는 것을.

“이겼군.”

“네!”

“어, 어떻게 알았지?”

깜짝 놀래킬 작정으로 찾아온 시론은 다소 허탈한 표정.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내 얼굴에?”

“아니, 모두의 얼굴에.”

루인이 찬찬히 목소리 생도들 한 명 한 명을 응시하며 읊조리듯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다들.”

그 한마디에, 시론은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더없이 간결한, 감정 없는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그건 마치 그간의 지독한 고생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

<다 루인 님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루이즈가 다가가 루인을 향해 고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루인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말해 줘. 너희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아! 그건…….>

루이즈는 꽤 상세하게 전투 과정을 루인에게 말해 주었다.

루이즈의 절대영언이 이어질수록, 무심한 루인의 표정에 미묘한 빛이 번져 가고 있었다.

“음…….”

절대 권능 봉인과 같은 디 포스 계열의 술식은 마도사의 영역에서도 쉬운 마법이 아니었다.

루이즈의 발전 속도는 그야말로 무서울 지경.

어쩌면 그녀의 마도(魔道)가 과거와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보였다.

명백히 다른 시간선.

더 이상 루인은 역사의 개입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잘했다. 그리고 너희들도.”

시론이 어깨를 우쭐거리며 피식거렸다.

“오늘 왜 이렇게 칭찬이 잦아? 사람이 갑자기 달라지면 죽을…….”

“시끄러워요! 아픈 사람한테 그게 할 말이에요?”

“다, 다프네!”

그때, 루인의 축객령이 이어졌다.

“다들 돌아가라. 특히 루이즈는 한동안 모든 훈련에서 열외다. 단계를 뛰어넘는 마법을 펼쳤으니 한동안 상념을 모으는 게 힘들 거야.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알겠어요.>

시론이 방을 나가면서 말했다.

“시상식은 사흘 뒤다.”

“그래.”

한데 그 순간.

루인의 알람 마법에 또 다른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삐삐삐삐-

아까 전보다 훨씬 좁은 간격의 비프음.

마력 감응이 이 정도로 강하다면 방문자의 경지가 상당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루인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은 반가움으로 젖어 가고 있었다.

익숙한 마력의 파장.

“어? 너는?”

“비스토?”

비스토, 아니 쟈이로벨이 문을 열고 들어와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검산?”

그가 등에 업고 있는 이, 월켄이었다.

그제야 루인은 모든 불안을 떨쳐 내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검성의 안전이 다시 확보된 것이다.

그때 쟈이로벨이 자신의 등 뒤를 시선으로 가리켰다.

“반가운 얼굴을 데려왔다.”

피식.

“월켄을 여기 내 자리에 눕혀라.”

“이놈 말고 한 명 더.”

“뭐?”

스스스스-

촛불에 의해 흔들리던 쟈이로벨의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일어난다.

모든 기척과 자취를 감춘 채 모두를 지켜보고 있던 존재.

“……아르디아나!”

성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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