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62화 (162/187)

<162화>

이명 랭킹 3위에 빛나는 기사 생도, 일리온의 검술은 화려했다.

스스스슥!

환상처럼 번져 가는 검의 잔상이 세베론의 온몸을 휘감았다.

슉! 슈욱!

일리온은 자신의 검이 건방진 무등위 마법 생도의 몸에 깊숙이 박혔을 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고작 자신의 일검도 막지 못하는 후배들을 상대로 작전 운운했던 것이 치욕스러울 지경.

그러나.

고야드(ЖґѧҀѥ)의 뇌전 갑옷 앞에서는 한낱 잔망스러운 잔재주일 뿐.

“이, 이!”

검이 빠지지 않는다.

후배 놈의 갑옷이 뭔가 이상했다.

찌그러지거나 꿰뚫린 흔적이 없다.

금속제 갑옷 특유의 거친 표면도 보이지 않았다.

츠츠츠츠-

자세히 보니 그건 갑옷 같은 것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자욱한 연기가 갑옷 외피를 쉴 새 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한데 그 순간.

지직! 지지직!

검을 삼킨 연기 속에서 강렬한 뇌전이 일렁인다.

이내 그의 손아귀에 엄청난 고통이 번질 때쯤.

“크윽!”

뇌전 갑옷이 내뿜는 마력 뇌전이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역시 루이즈의 예상 그대로였다.

지지지직!

일리온의 가슴 부근에서 기묘한 공명이 일어남과 동시에 고야드의 뇌전 갑옷으로부터 흘러오고 있는 전류가 대부분 차단된 것.

물론 온몸을 해부하는 듯한 찌릿한 전류의 느낌은 한참 동안 사그라들지 않아서, 세베론을 바라보는 일리온의 눈빛은 처음과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내부의 투기가 순간적으로 와해될 정도의 강력한 전류.

하마터면 일리온은 검을 잡은 손을 놓을 뻔했다.

검을 놓친다는 건 기사로서 수치스로운 일이겠으나 투기를 모두 잃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

문득 일리온이 크라울시스 쪽을 힐끔 쳐다본다.

차앙! 차아앙!

푸스스스!

저쪽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였다.

저 현자의 손자라는 놈도 크라울시스의 환상검을 육탄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

단순히 막아 내는 수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끔씩 강렬한 잔풍계 마법을 펼쳐 역으로 압박하고 있는 모습에 기가 찰 지경.

몸놀림도 마법 생도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있다.

‘이놈들이……!’

하이렌시아가의 직계검술 환상검은 베른가의 사자검과 비견되는 초고위 검술.

게다가 크라울시스 대공자의 경지 역시 브훌렌 못지않다.

휘휘휘휙!

환상검의 궤적이 스치는 곳마다 강렬한 스피릿 오러가 번진다.

한데 그런 초고위 검술이 한낱 마법사의 몸을 꿰뚫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이놈들이 걸치고 있는 마도구의 정체가 뭐지?’

환상검을 무려 육탄 방어로 막아 내고 있는 기상천외한 광경.

저 허약한 마법 생도를 6성 기사와 근접전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무시무시한 마도구라니.

그런 엄청난 마도구가 실존한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크윽!”

콰아아앙!

세베론의 충격 마법이 일리온의 가슴에 작렬했다.

그의 특기인 화염 마법에 비하진 못하겠지만 워낙 가까운 거리에서 적중된 상황이라 그 충격이 적지 않았다.

“그 목걸이가 진동계 마법은 막아 내지 못하나 보네요. 선배님.”

“다, 닥쳐라!”

“부럽습니다. 한눈을 파실 여유도 있으셔서. 전 지금이 최선의 순간이거든요.”

세베론의 그 말에 일리온은 치욕스러운 감정이 피어올랐다.

기사의 검(劒)에 적을 앞에 두고 여유를 부리는 사치는 없다.

일리온은 마침내 후배들을 깔보는 감정을 내던졌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응하는 것이 기사.

“기대 이상이군.”

일리온의 눈빛에 강렬한 투지가 일렁인다.

이내 그의 고유 투기가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투기 하나만큼은 브훌렌보다도 더 강력하다고 평가받는, 그에게 ‘별의 기사’라는 이명을 선사한 강력한 투기, 광자성흔(光子星痕)이었다.

촤촤촤촤촤-

“투, 투기 폭풍!”

말로만 듣던 상위 기사의 경지.

실제로 투기 폭풍을 보는 건 처음인 세베론이었다.

투기 폭풍이 가능하다는 건 그가 6성의 끝자락에 서 있는 기사라는 뜻.

투기 폭풍은 공격 이외의 모든 불필요한 것을 포기하는, 그야말로 무(武)의 효율을 버리는 기술.

대신 짧은 순간이나마 평소의 몇 배에 달하는 투기를 운용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 말인즉, 저 무시무시한 이명 랭커가 무등위 마법 생도인 자신을 상대로 도박을 벌였다는 것.

세베론은 온몸이 떨려 왔다.

이명 랭커의 진심을 다한 최선은 그만큼 무시무시했다.

콰아아악!

눈에 보이지도 않는 궤적이 짓쳐 와 가슴께에 박힌다.

고야드의 뇌전 갑옷에서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소음이 들려온다.

꾸르르르릉!

그것은 격렬한 뇌성(雷聲).

동시에 엄청난 진동이 온몸을 휘감았다.

“크으으윽!”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 연속으로 밀려온다.

하지만 거기까지.

고야드의 뇌전 갑옷은 역시 훌륭하게 공격을 흡수하고 있었으나 근본적인 충격파까지 상쇄해 내진 못한 것.

파앙! 파아악!

일리온의 쉴 새 없는 연격에 마치 춤추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휘청이고 있는 세베론이었다.

연속되는 강력한 충격파에 금방 정신이 아득해진다.

휘우우우우우!

그 순간 좌측에서 날아온 강렬한 돌풍.

역시 일리온의 화려한 환검이 돌풍을 가볍게 막아 냈다.

그렇게 잠시 일리온의 공격이 멈추자 세베론은 황급히 쉴드 마법을 몸에 둘렀다.

콰아아아앙!

소름 돋을 정도의 충격음에, 그의 고개가 부서지듯 시론을 향해 꺾어졌다.

“시, 시론!”

저 무시무시한 크라울시스를 상대하고 있으면서, 자신에게 잔풍계 마법을 날려준 것이다. 그것도 적에게 등을 내주면서까지.

씨익.

시론이 등을 가격당한 채 웃고 있다.

충격이 상당한 듯 녀석의 입가에는 피가 흥건했다.

모든 물리적인 공격을 상쇄할 수 있으나 충격파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세베론.

이내 그가 악착같이 수인을 뻗자 하나의 술식이 허공에 맺혔다.

위잉! 위이잉!

극도의 어지러움, 누군가 귀를 통째로 뜯어내는 듯한 고통의 이명이 몰아친다.

정신 붕괴의 전형적인 전조 증상.

연속된 충격파의 후유증으로 염동력이 모이지 않는 상황에서 억지로 술식을 펼치자 정신에 무리가 온 것이다.

하지만 세베론은 부서져라 이를 깨물었다.

세상이 빙빙 돌고 시야마저 이지러졌으나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마침내 완성한 하나의 술식.

희뿌연 마력 빛살과 함께 허공에 드러난 것은 육중한 마력 해머였다.

그 광경에 뭔가 깨달은 듯한 시론이 시원하게 웃어 댔다.

“크하하하하!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구나! 세베론! 넌 역시 술식의 천재다!”

우우우우웅!

이어진 시론의 재빠른 수인.

이어 그의 전면에 드러난 것 역시 세베론의 것과 똑같은 마력 해머였다.

크라울시스가 눈살을 찌푸린다.

“네놈들…… 지금 뭐 하자는 거냐?”

저따위 허술한 마력 해머 따위가 6성 기사들의 검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력 해머 같은 초보적인 술식, 그 느릿느릿한 공격에 당할 기사가 대체 어디 있다고?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던 일리온이 재차 검을 움직인다.

촤아아아아-

일렁이는 빛살, 또다시 세베론의 가슴을 잔혹하게 꿰뚫어 버린 검.

이내 거센 충격파가 세베론을 휘감았을 때.

휘우우우우!

놀랍게도 거대한 마력 해머가 향한 곳은 세베론의 등이었다.

터어어어엉!

“큭!”

세베론의 잇새에서 잠시 고통스러운 비명이 흘러나왔지만 그 순간은 매우 짧았다.

속을 게워 낼 것처럼 비틀거리던 방금과는 달리 금방 충격파에서 벗어나 버린 것.

일리온의 두 눈이 극도의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뭐, 뭐야 이건?”

갑자기 거대 망치를 소환한 후배.

놈이 그렇게 자해를 시작했을 땐 경기를 포기했나 싶었다.

한데 이젠 오히려 자신의 공격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고 있었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충격파의 반대 파동으로 상쇄하는 마법입니다.”

“뭐?”

그것은 에어라인에 처음 올라왔을 때 공간이동의 부작용을 겪은 생도들이 루인에게 배웠던 술식 이론이었다.

특정 진동이나 파동의 일주기(一週期)와 전혀 반대되는 파동이 합쳐지면 깔끔하게 상쇄되는 법칙.

그런 반대위상(反對位相)의 법칙을, 마법을 모르는 기사 생도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 이딴 게…….”

일리온이 느끼기에 그건 그냥 어리석은 자해일 뿐이었다.

자신의 검에 적중되자마자 곧바로 스스로 망치질을 해 대는 것이 정상적으로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터어어어어엉!

그 황당한 짓은 저쪽도 마찬가지.

마력 해머에 적중당한 채 부르르 몸을 떨던 현자의 손자가 하늘을 쳐다보며 오만하게 웃어 댔다.

“크하하하하! 거 시원― 하다!”

광기로 비틀린 입.

미친놈처럼 번들거리는 두 눈.

‘이놈들…… 제정신이 아니야!’

처음으로 주춤 뒤로 물러나는 일리온.

투기 폭풍을 동원한 공격을 저토록 쉽게 막아 낸다면 남은 방법이 없었다.

실전이었다면 머리를 공격하면 간단하겠지만 지금은 무투대회.

머리를 공격하면 곧바로 실격패다.

“이 천한 것들이……!”

크라울시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대공자 루인을 들것에 실려 나가게 한 건 큰 수확이지만 그건 모두 브훌렌의 공.

그런 짜증 나는 상황에서 애송이들까지 거추장스럽게 굴자 크라울시스는 오만 짜증이 치밀었다.

이놈들과 계속 힘겨운 싸움을 이어 갔다간 하이렌시아가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터.

이내 그가 후방을 홱 하고 돌아본다.

“유리우스! 이따위 화염 장판일랑 집어치우고 합류해라! 타가옐 너도!”

시론과 세베론의 낯빛이 창백해진다.

유리우스와 타가옐의 마력권이 천천히 해체되고 있었기 때문.

그들은 이런 마력 해머 따위는 눈 감고 디스펠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마법사들이었다.

천적의 등장이었다.

천천히 산보하듯 걸어온 유리우스가 시론과 세베론을 향해 이죽거렸다.

“히야― 마력 해머 같은 하급 술식으로 반대위상의 충격파를 생성할 줄이야! 이래서 난 신입생이 좋아. 머리가 신선하게 돌아가잖아?”

츠츠츠츠츠-

그 어떤 시동어나 수인도 없이 마력 얽힘 현상이 일어난다.

오직 염동력만으로 일으킨 그의 디스펠 마법은 단숨에 시론과 세베론의 마력 해머를 해제시켰다.

마력 해머 자체는 너무나 초급 술식이라 디스펠이랄 것도 없었다.

“후배님들이 이해해. 어쩌겠어. 하필 지금은 무투대회잖아? 이 위험한 공간에선 선배의 아량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거야.”

한데 시론과 세베론이 묘하게 웃고 있었다.

점점 유리우스의 표정이 크라울시스와 비슷해져 갔다.

“……너희들 뭐냐?”

계속되는 기이한 반응.

더 이상 검술의 충격파를 상쇄할 수 없는 주제에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선배님들. 실수하셨어요.”

타가옐의 차가운 눈이 세베론을 응시한다.

“무슨 실수를 했다는 거지?”

대답은 시론이 했다.

씨익.

“보자마자 끝냈어야지.”

“뭐?”

띠디! 띠디! 띠디!

갑자기 알람 마법의 비프음 따위가 울려 오자 크라울시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것은 세베론이 미리 시전해 둔 알람 마법.

“뭔 소리이긴요. 10분이 다됐다는 소리죠.”

“10분?”

우우우우우우웅-

순식간에 경기장을 집어삼키는 불길한 공명음.

이내 모두의 뇌리 속에 루이즈의 강렬한 절대 언령이 들려왔다.

<절대 권능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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