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60화 (160/187)

<160화>

사람이 너무 황당한 것을 보면 사고가 정지되어 버린다.

백 년 이상을 살아오며 온갖 산전수전을 겪어 온 소드 힐의 노인이었지만 정말이지 오늘만큼 당황스러운 날은 없었다.

“어떻게…….”

음습한 아공간 내부.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몇 번이고 두 눈을 껌뻑이고 있었으나 그것은 틀림없는 거대한 마장기 군단이었다.

마장기 20기.

무려 알칸 제국이 보유한 마장기와 비슷한 규모.

역시 비셰울리스는 드래곤답게 마장기보다 루인의 아공간 자체에 대해 더욱 진한 의문을 드러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군. 현자 수준의 인간 마법사조차 공간을 왜곡할 수 있는 구조의 범위는 통상적으로 10배 내외. 한데 저 아공간은…….”

얼핏 살펴도 이 경기장보다 더 넓은 공간이 아공간 내부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공간의 왜곡 구조가 현실의 수천 배는 가볍게 상회하고 있는 것이다.

수천 배?

드래곤인 자신의 아공간도 현실의 50배를 넘지 못했다.

이건 마치 마도의 상식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

갑작스럽게 굳어지는 소드 힐의 노인.

비셰울리스가 마장기보다 마장기 군단을 보관할 수 있는 아공간 그 자체를 더 집중하고 있는 이유.

마침내 그 역시 그 이유를 깨달은 것이었다.

“그, 그런…….”

통상적으로 마장기는 그 육중한 무게와 거대한 부피, 마도 병기 특유의 민감한 성질 때문에 기동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마장기의 운용을 극비에 부치고 있었지만 아무리 은밀하게 기동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마장기의 배치만 살펴도 해당 국가가 구축하려는 전선을 파악할 수 있는 것.

한데, 그런 어마어마한 마장기를 무려 마법사의 아공간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

그건 단순한 전쟁 양상의 변화 따위가 아니었다.

저 아공간의 비밀만 밝힐 수 있다면 인간이 이룩한 문명 자체가 일대 변혁을 맞이할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소드 힐의 노인은 더 이상 그런 루인이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여행객으로 위장한 루인이 알칸 제국에 침입한다면?

제국의 수도에서 마장기 20기를 동시에 소환할 수 있는 인간.

그건 제국의 멸망을 뜻한다.

그렇게 비셰울리스와 소드 힐의 노인이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루인이 소리 없이 웃었다.

“상상력을 너무 발휘하지는 마. 아무리 나라도 3기 이상의 운용은 무리니까.”

소드 힐의 노인은 대부분의 왕국에서 현자가 최고 반열의 귀족으로 대우받는 이유를 그제야 생각해 냈다.

최고위 마도학자나 현자만이 마장기를 운용할 수 있었기 때문.

“인간. 도대체 그 아공간의 정체가 뭐지?”

마장기 3개는 무슨 장난인가?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중소 왕국 두세 곳의 전력을 합한 규모.

그런 엄청난 전력을 아공간에 넣어 다닐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전쟁사가 이룩한 모든 전략 전술이 무용지물로 변하는 일이었다.

루인이 태연하게 대답한다.

“마도사의 밑천을 함부로 묻는 건 실례다. 용.”

루인이 은밀히 왕국을 지켜 온 수호자 집단 앞에서도 한없이 당당한 이유를 이제야 절절하게 깨닫는 소드 힐의 노인.

이제 그의 눈에 루인은 걸어 다니는 국가 전력급 마도사였다.

“인간, 혹시 그 마장기들은 인간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건가?”

루인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마계 군주의 소유물이다.”

무려 마신 쟈이로벨의 작품.

혈우 지대를 재탈환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기울여 만든 희대의 역작.

하지만 어차피 악제의 ‘안티 매직 와이엄’이 등장하는 순간 이 세계의 모든 마장기는 고철 덩어리로 변한다.

악제가 아직 와이엄을 키워 내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루인은 최대한 이 마장기를 활용할 생각이었다.

물론 앞으로 마장기의 시대가 얼마나 더 이어질지 남아 있는 시간을 가늠하긴 힘들었다.

‘음…….’

검성이나 브훌렌의 사건으로 미뤄 볼 때 지금 놈은 악제군의 주요 군단장 후보들을 비밀리에 포섭 중인 상황으로 보인다.

놈이 저토록 은밀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단 하나.

아직 벌레, 와이엄을 탄생시키지 못한 것.

‘벌레가 태어나기 전까진 놈은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악제라고 해도 인간들의 마장기가 건재한 이상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을 터.

바로 지금이, 자신이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루인은 앞으로의 계획을 대폭 수정했다.

이미지를 통해 치밀한 검증을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경기장의 한복판.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 없었다.

지금까지는 혈주투계의 운용으로 신체의 통각을 모조리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절대영도에 가까운 결빙계 마법을 스스로 몸에 시전한 부작용이 거세게 들이닥칠 것이다.

그제야 비셰울리스도 루인의 하복부를 시선으로 가리켰다.

“인간. 그 몸으로 살 수는 있는 건가?”

상체의 절반이 결정화된 채로 서 있는 루인.

한눈에 봐도 보통의 결빙계 마법이 아니었다.

인간의 육체는 허약하다.

무시무시한 결빙계 마법에 십여 분 이상 노출되고도 멀쩡한 정신, 정상적으로 서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신경 쓰지 마. 그것보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루인.

루인은 이들에게 악제의 정체를 알려 주는 것이 맞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

인간들에게 너무나 드높고 거대한 이름.

과연 인간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마도의 역사, 아니 인간의 문명 자체가 부정되는 것.

허나 이들은 멸망의 당사자였다.

결국 루인의 허무한 두 눈이 소드 힐의 노인에게로 향했다.

“그는 테아마라스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를 파악하지 못해 소드 힐의 노인은 의구심 담긴 눈빛만을 빛내고 있었다.

“그게 무슨……?”

“그대들이 추적하고 있는 대상.”

그제야 점점 확장되기 시작하는 노인의 동공.

“테, 테아마라스?”

마도 문명의 창시자.

고대의 초월자, 그 태초의 이름에 소드 힐의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마, 말도 안 되네!”

흔들림 없이 차분한 루인의 눈빛.

루인이 일체의 감정 없이 무심하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자 소드 힐의 노인이 가까스로 전율을 떨쳐 냈다.

“도,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을…….”

무한존재(無限存在).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자체로 이미 신.

반면 드래곤 비셰울리스의 반응은 그보다 차분한 편이었다.

“허면 그 테아마라스라는 인간이 카알라고스 님과 동등한 반열에 올랐단 말인가?”

지고룡 카알라고스.

드래곤의 역사 그 자체를 상징하는 창세룡.

“그렇겠군. 어째서 그런 긴 수명이 가능한지는 나 역시 모르지만.”

이어 강한 의문을 드러내는 소드 힐의 노인.

“그가 테아마라스라면 도대체 왜 그런 짓을?”

그 고고한 초월자 테아마라스가 도대체 왜 각국의 주요 왕족들을 암살하고 국가 간의 분열을 획책하고 있단 말인가?

“놈은…….”

루인이 무표정하게 악제와의 대화를 전하고 있었다.

루인의 말이 모두 끝났을 때 소드 힐의 노인은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번영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세계의 불균형이라고?

약육강식은 이 세계를 지탱하는 기본적인 섭리였다.

야생의 포식자, 맹수를 세계의 불균형이라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건 대자연 자체를 부정하는 말.

전설적인 대마도사, 그 위대한 지혜의 상징이 구사하는 논리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더욱이 루인에게 그의 진정한 목적을 모두 들었을 때는…….

“인간이라는 종의 절멸(絶滅)……?”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불균형을 초래하는 모든 종(種). 놈의 멸절 범위에는 존재들, 그리고 창조신도 해당된다.”

드래곤 비셰울리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가능할 리가 없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거든.”

하지만 과거의 악제는 정말로 모든 존재들을 절멸시켰다.

인간의 신들을 모조리 사멸시킨 것이다.

“영원을 살아온 위대한 초월자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비틀린 마음을…….”

루인이 소드 힐의 노인을 힐끔 쳐다본다.

“인간의 신념이 맹신으로 변질되는 것은 시간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인간 자체의 문제지. 그리고 살아온 세월이 꼭 현명함과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는 태초의 마법사…….”

“달라지는 건 없다.”

악제가 테아마라스라고 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

오히려 적이 명확해진 건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역량의 실체가 너무 거대하다는 것뿐.

놈은 인간의 기나긴 역사를 모두 관조한 자.

오히려 신보다 더 까다로운, 인간의 지혜와 전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고대의 초월자였다.

루인의 시선이 이번엔 비셰울리스에게 향했다.

“전에 말했던 그 지고룡.”

“음?”

루인의 시선이 그림처럼 정지되어 있는 경기장 내부를 찬찬히 훑는다.

“지고룡 카알라고스가 내 가까운 주변에 있다는 것 말이다. 그게 누구지?”

이 정도로 어마어마한 정보를 내어놨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라는 뜻일 터.

하지만 비셰울리스는 지고룡의 맹약에 매인 몸이었다.

“그건 말할 수 없다. 그분의 뜻이 정해진다면 언제든 스스로 밝히실 것이다.”

루인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드래곤들의 맹약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허나 이 정도까지 중요한 정보를 얘기해 줬으니 조금은 기대했던 건 사실이었다.

서서히 한기가 밀려온다.

통각(痛覺)을 통제하고 있던 혈주투계의 권능이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쨌든 내 할 말은 모두 끝났다. 나는 오랫동안 정신을 잃을 거다.”

루인은 마신 쟈이로벨의 계약자였던 만큼 초보적이지만 마족들의 마고수면(魔枯睡眠)을 흉내 낼 수 있었다.

허나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제때에 쟈이로벨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었다.

곧 비셰울리스의 시선이 경기장의 군중들을 훑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어차피 나선 순간 동면을 각오했다.”

드래곤이 동면을 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힘을 잃었을 때.

서서히 드러나는 술식.

드래곤 특유의 용언 마법이 허공에 얽히다가 이내 상상할 수 없는 범위로 퍼져 나갔을 때 루인은 기가 차다는 반응이었다.

“이 대규모 군중들의 기억을 지우겠다고?”

대규모 시간 조작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기억 조작이라니?

‘기억 조작’은 그 위험하다는 군중 제어 마법을 몇 단계나 뛰어넘는 초고위계의 정신 마법이었다.

대마도사의 모든 역량을 동원한다면 자신도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제대로 정신 체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과연 에이션트 드래곤다운 배포.

루인이 피식 웃었다.

“대단한 유희로군.”

이 고룡은 지금 수호자 놀이 따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르마델 왕국을 지키는 일에 정말로 진심인 것이다.

그러나.

“저 아이들의 기억은 건들지 마라.”

이내 미간을 찡그리는 비셰울리스.

“왜지?”

“내 동료들이니까.”

동료.

새로운 인연.

그렇게 루인은 목소리 생도들을 이번 생의 동료로 인정하고 있었다.

“거절한다…… 라고 말하면 또 그 마장기를 꺼내겠지?”

어떤 후환도 남기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비셰울리스의 심정이었으나 이미 그는 루인의 마장기를 보고 말았다.

“알면서 왜 묻는 거냐. 용.”

점점 사방으로 퍼져 가는 용언의 숨결.

무심히 술식의 결을 살피던 루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드래곤의 정신이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도 이런 대규모 기억 조작은 목숨을 거는 일. 이 왕국을 왜 이렇게까지 지키고자 하는 거지?”

비셰울리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비셰리스마가 지키고자 했던 인간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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