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베스키아 리움의 최상단 관중석을 차지할 정도의 고위 귀족들이라면 르마델 왕국의 중추적인 인물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마장기를 직접 보는 것은 그들 대부분이 처음이었다.
마장기(魔裝機).
한 국가의 국력을 가늠하는 절대적인 척도이며, 보유 정도에 따라 국가 간의 전략 지형이 송두리째 바뀌는 마도 병기.
인류의 합치된 지성이 탄생시킨 신적인 마도 예술품.
그 고고한 드래곤들조차도 인류가 탄생시킨 마장기는 존중할 정도였다.
힘이라는 척도를 절대적인 가치로 삼는다면, 단연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그 위대한 마도 병기가 지금 모두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 마장기가…….”
국왕 데오란츠가 손을 떨고 있었다.
왕국의 모든 역량, 그 빛나는 천 년 역사의 저력을 모두 동원하고도 르마델이 보유한 마장기는 고작 1기였다.
홀로 성을 부수며 수만의 군대조차 감당할 수 있는 그 절대적인 마도 병기를 어떻게 일개 개인이 보유하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대체 저 거대함은……!”
현자 에기오스가 두 눈을 몇 번이고 껌뻑거린다.
하이베른가 대공자의 전면에 등장한 마장기.
그것은 가장 강력한 마장기를 보유한 국가, 알칸 제국의 그것보다도 적어도 세 배는 더 거대해 보였다.
마장기의 크기와 위력은 비례하는 법.
동체가 크다면 그 동체를 구동하는 마력핵도 당연히 커지게 된다.
마력핵의 출력이 높을수록, 마력광선휘광포(魔力光線輝光砲)의 위력은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다.
“뭐, 뭣들 하는가! 당장 저 마장기를 제압하라! 드베이안! 우리 르마델의 마장기는 지금 어디 있는가?”
국왕 데오란츠의 발작에 가까운 외침.
마장기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전략 자산이었다.
적국, 아니 동맹 관계의 국가가 소유한 마장기라고 해도 등장하는 즉시 모든 역량을 동원해 귀속시키거나 파괴해야 했다.
하지만 전시도 아닌 평시, 그것도 아카데미의 무투대회에서 마장기가 등장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왕국의 수호자 드베이안 공이 묵묵히 부복했다.
“현재, 하이렌시아가의 요구로 남부 국경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왕이시여. 이곳은 에어라인입니다.”
“으음…….”
잊고 있었다.
이곳이 에어라인의 블록 위라는 것을.
저 무시무시한 마장기의 포격 각도가 조금만 하방으로 기울어진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국왕 데오란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더욱이 광범위한 공간의 기사들을 한순간에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는 마장기의 ‘절대 구속’이라도 구동되는 날엔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대규모 인마 살상용 포격 ‘초질량 역전 필드’나 ‘무한 전류 증가’도 무서운 건 매한가지.
마장기는 결코 단순한 대포 따위가 아니었다.
초거대 마력핵으로 구동되는 절대적인 마법들은 현자급 마도사 스무 명의 협력 술식에 버금가는 위력을 발휘했다.
뿌득.
“베른가가 마장기를 숨기고 있었단 말이더냐!”
숭고한 기사도의 가문, 그 철혈의 상징 하이베른가가 일개 가문의 힘으로 마장기까지 보유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렇게 국왕 데오란츠가 이를 갈고 있을 때 현자 에기오스가 다가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왕이시여. 사자왕 카젠은 이 에기오스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는 왕국의 눈꺼풀 뒤에 숨어 모략을 꾸밀 자가 결코 아닙니다.”
“저기 서 있는 청년은 그의 대공자다! 그가 소환한 아공간에서 마장기가 나오는 장면을 이 짐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거늘!”
현자 에기오스의 눈빛이 한층 깊어진다.
“왕이시여. 하면 저 변해 버린 생도, 타이탄처럼 거대해진 저 청년은 설명될 수 있는 존재란 말이옵니까?”
“그것은!”
“저 역시 당황스러우나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세상의 일반적인 상리를 벗어나고 있사옵니다. 일단 지켜보시오소서.”
그때 수호자 드베이안이 국왕의 전면을 막아섰다.
“몸을 숙이시옵소서!”
이어진 세상을 사멸시킬 듯한 굉음.
콰아아아아아아앙-
경악한 시선들이 다시 경기장으로 몰렸다.
* * *
거대해진 광전사.
그가 반쯤 날아간 자신의 상체를 무심하게 응시했다.
<역시. 마장기의 포격을 피하기란 무리인가.>
시커먼 연기, 자욱한 포연 사이로 루인의 새하얀 치아가 고르게 빛났다.
루인은 확신하고 있었다.
‘악제에겐 아직 그 저주받은 벌레가 없다.’
안티 매직 와이엄(Anti Magic Warm).
악제가 탄생시킨 그 끔찍한 인공 생명체를 떠올릴 때면 루인은 지금도 구토가 치밀었다.
기다란 촉수를 드리운 채 공중을 천천히 선회하며 다가오는 안티 매직 와이엄은 인류 연합에겐 공포 그 자체.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흡수할 수 있는 그 추악한 괴물은 흡착하는 동시에 마장기를 순식간에 고철 덩어리로 만들었다.
상체가 절반이 날아가고도 꺼내질 않는 것을 보니 악제는 아직 그 괴물을 키워 내지 못했다.
“ѧѧѫѥ…….”
루인이 시동어를 외우자 다시 마장기의 포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역시 그것은 마계의 마장기인가.>
피식 웃는 루인.
마장기는 인류가 탄생시킨 마도 병기.
마계에 마장기가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인간의 마장기를 흥미롭게 여기고 그것을 연구한 쟈이로벨만 존재할 뿐.
자신을 철저하게 망가뜨린 므드라.
그를 향한 복수의 일념으로 완성한 마신의 마도 병기.
가장 강력하다는 알칸 제국의 마장기와 비교해도 열 배는 더 강한 미친 괴물이 바로 이 마신의 마장기 ‘진네옴 투드라’였다.
물론 쟈이로벨은 이 무식한 괴물을 활용도 해 보지 못하고 자신과 함께 공허(空虛)로 빨려 들어갔었지만.
<무서운 놈이구나.>
대마도사로서의 루인의 권능이나 마장기의 포격이 무서운 건 아니었다.
악제를 서늘하게 만든 건 정보의 부재.
그에겐 인간의 마장기가 마계에 존재한 사실도 금시초문이며, 그런 마장기를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사실은 더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 서늘한 것은 저 웃음, 저 광기에 담긴 자신감.
그야말로 악제는, 루인이 보여 준 지금까지의 역량조차 그의 전부인지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
상대가 마장기를 꺼낸 순간, 그를 포섭하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국가 권력의 정점, 마장기를 소유한 인간이었다.
이미 권력을 초월해 있는 자에게 저급한 욕망 따위가 남아 있을 리 없는 것.
놈에겐 가문의 번영, 귀족의 작위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청염(靑炎)이 아무리 치밀하고 끈질겨도 욕망이 들어서지 않는 영혼을 유혹할 수는 없었다.
<끝내 그대는 내 적이 되고 싶은 것인가.>
악제의 그 한마디에 묻어 나오는 감정은 짙은 아쉬움이었다.
자신처럼 인간을 초월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생(生)을 함께 걷고 싶은 자였다.
쿠쿠쿠쿠쿠-
마장기가 진동한다.
임계점까지 차오른 마장기의 광활한 마력이 포열에 새겨져 있는 초고위 술식으로 녹아든다.
루인이 비릿하게 웃었다.
“곧 뒈질 놈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래. 빨리 세상에 기어 나오고 싶다면 그 추악한 벌레나 열심히 만들라고.”
광전사의 거대한 얼굴이 기묘하게 구겨졌다.
지금까지 악제가 보여 준 가장 당혹한 표정이었다.
<정말 그대는―>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 광전사의 육편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강력한 폭발로 뒤늦게 주변 공기가 수축하며 광전사가 서 있던 빈자리에 가공한 돌풍이 일어났다.
후득- 후드득-
피를 뒤집어쓴 루인.
이어 그가 무심한 표정으로 아공간 헬라게아를 소환했을 때.
드래곤 비셰울리스와 소드 힐의 노인이 동시에 나타났다.
척-
루인이 군중석과 경기장의 생도들을 번갈아 살피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드디어 용께서 노망이 드셨나? 시간을 건드려?”
화폭처럼 멈춰 버린 사방.
굉음에 귀를 막으며 비명을 지르던 아이도, 쏟아지는 거인의 파편에 기겁을 하던 여인도 모두 잘 그린 그림처럼 정지되어 있었다.
이런 거대한 규모의 시공간 정지 마법이라니, 과연 고룡다운 절대적인 용언 마법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이런 위험한 짓을 하는 거지?”
시간선을 제멋대로 통제하는 건 차원 마법만큼이나 위험하다.
섭리와 인과율을 비트는 일이기 때문.
더구나 이런 광범위한 시간 조작은 반드시 ‘존재’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섭리를 지키는 것이 그들의 맹약인 만큼 비셰울리스, 아니 어쩌면 드래곤 종족 전체가 ‘존재의 형벌’, 즉 신벌(神罰)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한데, 오히려 비셰울리스가 더 황당한 표정을 했다.
“단순한 미친 인간은 아니군. 지금 네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정말 모르겠느냐?”
루인이 묘하게 고개만 비틀고 있자 소드 힐의 노인이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장기를 드러내는 건 선을 넘은 짓이었네. 에어라인에 다양한 국적의 첩자가 활동하고 있는 만큼 이 일이 주변 왕국과 알칸 제국으로 퍼져 나가는 건 이제 시간문제일세.”
“그래서?”
“…….”
퉁명하게 되묻는 루인의 반응에 소드 힐의 노인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까지 지켜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는 누구보다도 명석한 두뇌와 치밀한 심계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라면 충분히 앞으로 벌어질 상황과 정세 변화를 유추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인간. 이 일이 퍼져 나가면 더 이상 이 왕국은 존속할 수가 없다. 르마델의 마장기가 2기 이상이라면 북부의 왕국들은 틀림없이 연합을 구축하거나 알칸 제국의 병력과 합세하여 르마델을 없애려고 들 것이다. 너의 마장기는 북부 왕국들의 균형을 깨는 단초다.”
“그렇게들 움직이겠지.”
“응? 뭐라고 했나?”
왕국의 파멸적인 상황 앞에서, 다름 아닌 르마델의 대귀족이 저런 무신경한 반응이라니!
오랜 세월 유희의 삶을 살아온 고룡답게, 르마델을 향한 그의 애국심은 거의 진심에 가까웠다.
“그런 무시무시한 마장기를 주변 왕국이 탐을 안 낼 것 같나?”
“이 크고 우람한 걸 어떻게 참아? 봤다면 군침을 흘리며 쳐들어오겠지.”
“당연하다. 응? 뭐라고?”
그걸 아는 놈이?
소드 힐의 노인이 멍해진 표정으로 되묻는다.
루인이 마신을 소환할 수 있는 존재인 만큼 그는 평소에도 루인에게 예의를 잃진 않았는데 어쩐지 오늘은 더욱 예의가 발랐다.
“대체 그 무시무시한 마장기의 출처는 어디인가?”
역사에 존재해 온 그 어떤 영웅도 단신으로 마장기를 운용한 예는 없었다.
그것도 무려 아공간에서 꺼내다니!
대체 저 아공간이 얼마나 넓길래?
현자급 마도사의 아공간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무려 마장기를 집어넣을 수 있는 아공간은 금시초문이었다.
“전에도 말했을 텐데. 당신들이 전달하는 정보의 질을 가늠한 후에야 협력할 생각을 정하겠다고.”
“아, 그거라면!”
소드 힐의 노인은 이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와 눈치 싸움할 생각을 버렸다.
마장기의 소유자.
그 압도적인 서술 앞에는 소드 힐의 비밀도 은퇴자들의 율법도 무용지물이었다.
한데 그때.
스스스스스-
부유하는 마장기의 거대한 동체.
아공간의 틈으로 사라져 가는 그 사이로 그는 보고 말았다.
“마, 마, 마, 마장기가……!”
1왕자, 아라혼과 같은 것을 보고 만 소드 힐의 노인.
그의 시선을 좇던 비셰울리스의 두 눈도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대체 저것들이 다……?”
짙은 어둠이 내리깔린 음습한 아공간.
그곳에는.
아공간 속으로 사라져 가는 마장기와 똑같은 모양의 마장기가…….
무려 20기가 가지런히 도열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