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테아마라스.
마법을 추앙하는 마법사들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위대한 위인으로 칭송받는 영웅.
태초의 마법사라는 이명의 무게는 그만큼 드높고 무거웠다.
그의 마법으로 인해 인류는 사실상의 문명을 열게 되었다.
물론 인간들은 마법으로 그치지 않았다.
마나에 영혼과 의지를 더해 투기(鬪氣)를 다루는 법을 깨달은 인간들.
속속 출현하는 초인들을 통해 인류의 영역은 역사에 존재해 온 모든 종족을 초월하며 넓어졌다.
오크와 요정은 숲을 잃었고 거인족들은 머나먼 북쪽의 영구 동토로 추방되었다.
수만 년간 가장 강력한 영역을 구축하며 살아온 수인족 역시 요정과 더불어 인간들의 눈요깃거리로 전락했다.
심지어 신의 힘을 대리한다는 용족, 드래곤들은 인간들에 의해 사냥당하기에 이르렀다.
드래곤 슬레이어.
최초로 출현한 그런 인간의 이명은 모든 종족을 초월한 포식자로서의 첫 선언이었다.
마침내 탄생한 인류 마법 문명의 최종 장, 마장기(魔裝機).
초월적인 지성체, 드래곤마저 일격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위대한 마도 병기를 탄생시킨 인류.
이제 그런 마장기를 보유한 인간들과 단일 종족, 아니 어떤 문명도 경쟁할 수가 없었다.
가장 나약했던 인류를 돕기 위한 테아마라스의 마음이 순수한 선의(善意)가 아니었다면.
태초신의 섭리마저 부정하는 철저한 균형론자로서의 철학이었다면.
지금의 세계는 그에게 가장 불완전한 곳, 오직 불균형이라는 파멸만이 가득한 지옥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불균형의 업보(業報)가 자신이 인간에게 전한 마법의 힘이라 여길 것이다.
그렇게.
모든 걸 추론하게 된 루인이었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자신이 지나온 처절한 멸망의 역사가 고작 한 인간의 그릇된 철학으로 비롯된 일이라니.
루인은 분노조차 끓어오르지 않았다.
이내 그의 무감한 음성이 어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수명은 어떻게 초월했나.”
초월자의 마지막 페이지, ‘존재(存在)’에 근접했던 그 옛날의 자신조차 신의 설계, 섭리를 초월할 수는 없었다.
비약적으로 늘어난 초월자의 시간 역시 고작 수명을 늘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필멸(必滅), 즉 죽음 자체를 초월한 것은 아닌 것이다.
인간에게 수명이란 종으로서의 숙명.
<그대는 정말 특이하다.>
루인이 특별한 것은 에어라인을 송두리째 집어삼킨 어둠도, 광전사의 진실된 힘을 마주하고도 담대하기만 한 저 두 눈도 아니었다.
그가 특별한 건 치밀한 자아, 진실에 다가가는 저 고유의 시야.
고작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자신조차 잊고 있던 머나먼 옛 이름을 곧바로 유추한다.
동시에, 영원을 살아가는 자신의 권능까지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저열한 인간에게 왜 이렇게 말을 많이 늘어놓는지를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악제, 아니 광전사는 자신의 마음에 탐욕이 들어섰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저 치열하고도 순수한 자아는, 동시에 인간의 정신 체계를 초월한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무한을 살면서도 자신 이외의 그런 인간은 처음.
얻고 싶은 자, 탐욕으로 온 마음이 들끓었으나 청염(靑炎)으로 그의 영혼을 오염시키기는 싫었다.
일단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부터 물었다.
<그대는 마치 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군. 이건 예언자의 눈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듯한 눈빛.
자신을 대비하고 있는 것만 같은 존재.
인간들 중에서 미래를 보는 특별한 예지자는 있을 수 있어도, 이토록 완벽하게 자신을 관조할 수는 없다.
더욱이.
<왜 날 증오하는 거지?>
한눈에 느낄 수 있는 무한한 증오.
찌릿찌릿한 저주와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그의 두 눈, 그 비틀린 광기는 인간의 그것이라 믿기엔 너무나 처절하고 지독한 것이었다.
“…….”
루인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악제의 정체를 알게 된 건 큰 수확이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츠츠츠츠츠-
카가르간의 진멸이 권능을 드러낸다.
마신의 힘, 쟈이로벨의 혈주투계는 이 카가르간의 진멸로 완성된다.
짧은 순간이나마 루인을 마신의 진마강체(眞魔强體)에 버금가는 육체로 탈바꿈시킬 것이다.
그런 마신의 육체라면 광전사와도 충분히 해볼 만했다.
순간 악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루인이 창의 권능을 드러낸 순간 거대한 의지들이 이곳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놈들의 시선을 모을 정도라…….>
인류가 탄생시킨 몇 안 되는 갓 핸드급 아티펙트, 그리고 몇몇 신(神)의 유물들.
지금 루인이 손에 들고 있는 저 무기가 그런 초월적인 유물들과 필적하는 마도구라는 뜻이었다.
<두렵지도 않은가? 너희의 신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일일 텐데.>
“전혀.”
루인은 이미 학습했다.
어차피 ‘존재’들은 세상이 멸망에 이른다 해도 관여하지 않는 자들.
투우우웅-
어둠이 진멸한다.
이내 광전사를 집어삼키는 광기의 혈우.
이미 금속화된 루인의 육체에서 기괴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터어어어엉-
광전사의 육체를 휘감고 있던 핏빛 기운이 더욱 붉게 타오른다.
루인의 주먹을 쥐고 있었으나 힘을 모두 상쇄하진 못했다.
광전사의 등 뒤로 막대한 충격의 여파가 퍼져 나간 것이다.
콰콰콰콰콰콰-
결박당한 채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크라울시스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일격에 그 광활했던 경기장의 반이 날아갔다.
이런 건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음…….>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광전사.
곧 그의 타오르는 붉은 눈이 묘한 빛을 머금었다.
<마족……?>
이건 인간의 투기나 마력,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힘.
강렬한 힘의 파동, 이 전율적인 느낌은 틀림없는 마계, 그것도 초고위 존재의 권능에 가까웠다.
분명 예전에 놈의 영혼 결계진과 정신 구속진 따위를 겪었다.
하지만 그건 마족과 계약한 인간이라면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힘.
하지만 이런 순수한 힘의 파동은 마족이 뿜어내는 힘, 그 자체였다.
광전사의 눈에서 참을 수 없는 의문이 뿜어져 나온다.
<인간이 어떻게 순수한 마족의 힘을?>
이건 불가능하다.
인간이 마족의 힘을 잠시 빌려 쓸 수는 있어도 마족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미 루인의 육탄 공격, 무지막지한 마신의 혈주투계가 쉴 새 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터어엉! 까깡!
소름 돋는 불꽃, 맹렬한 굉음이 연이어 터져 나온다.
광전사와의 싸움은 길어질수록 손해였다.
더욱이 인간계에서 카가르간의 진멸의 위력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진마강체에 가깝게 변모한 육체의 유지 시간은 고작 몇 분 남짓.
루인은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쏴아아아아!
광전사가 육탄 공격을 막기에 정신없을 때, 루인의 마력 칼날 수천 개가 허공에 소환되었다.
루인이 모든 융합 마력을 쏟아부었기에 마력 칼날 하나하나가 모두 소드 스피릿 오러에 버금가는 강성을 지니고 있었다.
마침내 광전사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감히!>
쿠구구구구구-
경기장의 모든 군중들이 경악했다.
그 전엔 루인의 다크니스 필드로 인해 경기를 살필 수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어둠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광전사의 거대한 동체.
광전사의 거대화(巨大化).
마치 전설 속의 타이탄과 같은 그 거대한 위용에 군중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까가가가가강!
수천 개의 마력 칼날이 광전사의 몸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힘없이 우수수 떨어진다.
재빨리 마력 칼날을 회수한 루인이 이를 악물며 융합 마력을 재배열했다.
츠츠츠츠츠-
술식에 의해 합쳐진 열 개의 마력 칼날.
그런 루인의 술식 변환에 광전사가 더욱 호기심을 드러냈다.
<헤이로도스?>
그 순간 광전사는 죽음을 갈구하는 핏빛 광기의 힘을 남김없이 마력으로 치환했다.
광전사의 거대한 손이 기괴한 호선을 그린다.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선형(線形)들.
그 고아한 동작, 일체의 군더더기 없는 광전사의 수인(手引)에 루인의 두 눈이 지극한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뭐……?’
광기의 지배자, 처절한 죽음을 상징하는 광전사가 마법을 시전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저것은 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의 초월적인 스펠(Spell).
그것은 파이어볼이었다.
화르르르르-
하지만 그것은 절대 단순한 파이어볼이 아니었다.
창백하리만치 푸른 빛, 하지만 살인적인 밝기.
마치 태양보다 더한 광구(光球)가 짓쳐 든다.
염동 통제, 화염 약화, 술식 파괴, 동운동 치환 등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디스펠적인 역량으로 맞대응하려 했으나.
술식의 결은 물론 마력의 깊이와 성질까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역시 이건 그 무시무시했던 악제의 청염(靑炎)이었다.
이내 기다란 푸른 선이 그어진다.
루인의 시야에서 그것은 마치 점멸 마법.
물리력의 한계를 넘나드는 상상 밖의 속도, 루인이 자신의 가슴에서 불타고 있는 푸른 화염을 발견한 건 그야말로 찰나였다.
화르르르르르-
마신의 진마강체가 저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이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통각을 아득히 상회하는 작열감이 루인의 온몸을 휘어 감았다.
“크아아아아아!”
루인을 감싸고 있던 카가르간의 진멸이 순식간에 떨어져 나와 평범한 쇳덩이가 되었다.
심각한 타격을 입고 회복을 위해 자가 수면에 빠져든 것이다.
루인이 모든 염동력을 동원해 언령(言靈)을 외운다.
츠츠츠츠츠-
촘촘하게 얽히는 전위 파장.
루인이 술식을 창조했지만 아직 이름을 짓지 않은 결빙계 마법.
절대 온도를 넘나드는 엄청난 한기가 타다 못해 소멸되어 버린 루인의 옆구리에 스며들었다.
대마도사의 초월적인 정신이 아니었다면 이미 몇 번은 혼절했을 치명상이었다.
거대해진 광전사가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루인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정말 가치 있는 날이로군. 나의 청염(靑炎)을 막아 내는 인간이 존재할 줄이야.>
비틀거리는 루인.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는다.
하지만 이건 막아 낸 것이 아니었다.
놈의 청염에 담긴 열기의 잔열을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모든 염동력이 소진됐다.
청염(靑炎).
지금까지 악제가 군단장을 통해 본체의 권능을 구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군단장을 사멸시키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 틀림없이 놈은 광전사의 모든 힘을 자신의 마력으로 치환했을 터였다.
이제 광전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사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화르르르르-
위력적인 악제의 청염 수십 개가 허공에 드러났을 때, 루인의 눈빛에서 처음으로 절망이 서렸다.
그가 존재들의 이목까지 무시하고 마신의 마도구를 동원해 혈주투계를 운용했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신살자(神殺者).
섭리를 초월한 자.
이 무시무시한 청염조차 악제의 작은 단면에 불과했다.
광전사라면 모르겠으나, 군단장급 수하를 사멸시켜 가면서까지 본체의 능력을 발휘한다면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지금은 자신을 되살릴 수 있는 쟈이로벨마저도 없는 상황.
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츠츠츠츠츠-
소환된 헬라게아.
찢어진 공간의 틈, 루인의 부유 마법으로 천천히 드러나는 거대하고도 무시무시한 동체.
그 순간, 핏빛으로 물든 광전사의 두 눈에 처음으로 당혹의 빛이 서렸다.
<……!>
황당함으로 가득한 눈빛.
경기장을 지켜보고 있던 르마델의 왕족과 귀족들이 일제히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마장기(魔裝機)?>
무시무시한 세월의 흔적.
연식조차 알 수 없는 고대의 마장기가 루인의 전면에 커다란 산처럼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