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어둠(Darkness).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인간이 지닌 공포심을 자극하는 가장 단순한 현상.
특히 전투 상황에서 시야가 제약되어 버린 상황은 여느 때보다 더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천천히 주변을 먹어 치우던 어둠에 시야마저 잠식당했을 때, 크라울시스는 하마터면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미칠 듯한 암흑, 그 순수한 어둠의 기운이 자신의 움직임마저 봉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상념이 붕괴되는 듯한 충격이었다.
어둠은 이렇게 물리적인 힘을 동반할 수 없는 그저 현상(現像).
한데도 강대한 투기를 운용하는 6성 기사의 움직임을 봉쇄할 정도로 어둠은 주변의 모든 것을 구속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읽어 온 모든 역사와 전설 속에서도 이런 터무니없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마치, 이 인간들의 세계에 존재할 수도, 존재해서도 안 되는 신적인 권능.
-크아아아아악!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비명 소리.
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결국 크라울시스는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떤 자존감의 저항도 없이 흘러내리는 순수한 공포.
-아직도 숨을 곳을 찾고 있나.
뇌리를 울려 오는 놈의 음성.
그렇게 압도적인 공포심에 의해 온 마음이 해체되고 있을 때, 별안간 크라울시스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의 정체가 떠올랐다.
악타시온의 검(Axtarsyonn’s Sword).
렌시아가를 하이(High)의 반석 위로 올려놓은 가문 역사상 최고의 기사.
그의 위대한 정신이 이어지고 있는 이 검의 권능이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이에 크라울시스는 거의 울부짖는 심정으로 악타시온의 검에 자신의 의지를 불어넣었다.
‘…….’
한데.
공명(共鳴)하지 않는다.
-좋아. 죽여 주지.
더욱 필사적으로 의지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언제나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며 호응하던 악타시온의 검이 역시 일체의 반응도 하지 않는다.
찌르르르르-
악타시온의 검은 스스로 울고 있었다.
아니 운다기보단 떨고 있었다.
느껴지는 건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아, 악타시온이……!’
하이렌시아가의 위대한 성검(聖劒).
악타시온은 스스로 의지를 품고 있는 에고 소드(Ego Sword)이자, 초인급 기사가 펼치는 스피릿 오러와 맞먹는 위력의 웨폰 오러(Weapon Aura)를 발출할 수 있는 절대 명검이었다.
그 도도하고 고집 센 악타시온이, 상대와 검 한 번 섞어 보지도 않고 두려움에 떤다는 것을 크라울시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악타시온이 상대의 격(格)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뜻.
‘악타시온이 이 정도라면……!’
다른 이명 랭커들의 마도구들도 모조리 능력이 봉인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남부 귀족가들이 자랑하는 모든 유명한 에고(Ego) 마도구들이 이 빌어먹을 어둠에 모조리 겁을 집어삼킨 것이다.
‘제, 제길!’
옴짝달싹할 수 없는 육체.
겁에 질려 침묵하는 성검.
더욱 진절머리가 나는 것은 패배의 불안보다도 이 순수한 어둠에 대한 공포가 더 크게 다가온다는 것.
그렇게 크라울시스가 처연한 심정으로 불안하게 웃고 있을 때.
콰아아아아앙-!
갑작스럽게 들려온 귀청을 찢는 듯한 굉음.
크라울시스가 황급히 굉음이 들려온 쪽을 향해 눈알을 굴렸을 때.
스르르르르…….
그는 그대로 굳어 버린다.
-호오, 이제야 결심한 건가.
이 어둠과 맞먹는 공포가 너울거리고 있다.
핏빛으로 불타고 있는 한 쌍의 눈.
뇌전의 기사, 브훌렌이었다.
* * *
브훌렌의 주위가 점점 검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루인이 전력을 다해 펼친 다크니스 필드(darkness Field).
그런 다크니스 필드가 검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감당할 수 있는 물리력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의미였다.
지지직!
지지지직!
마치 깨져 가는 유리처럼 균열하기 시작한 어둠.
루인이 더욱 이를 깨물며 대마도사의 마력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다크니스 필드의 임계점을 넘나드는 거대한 힘을 끝내 막을 수는 없었다.
촤아아아아-
어둠이 걷히고 핏빛 세계가 너울거린다.
세상의 모든 부정한 것들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거대한 악의(惡意).
그 치밀하고 촘촘한 증오, 모든 처절한 감정의 편린들이 브훌렌의 눈을 통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세계의 광기(狂氣).
모든 미친 자들의 지배자.
광전사(Berserk), 루인은 보자마자 그를 확신하고 있었다.
일체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은 무감한 음성이 루인의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광전사.”
이번 생 최초로 조우한 악제군의 군단장.
브훌렌, 아니 혈광의 거대 광전사는 천천히 어둠 속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 역시 그 갑주군.”
모든 황금 도금이 벗겨져 드러난 피처럼 붉은 갑주.
갑주의 중심, 차분하게 불그스름했던 마력핵은 어느덧 붉은 태양처럼 광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저 혈광의 갑주야말로 광전사를 상징하는 원천적인 힘.
꽈아아아악.
그의 혈광갑(血光鉀)이 수축을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푸우우- 뿜어져 나오는 피보라.
그러나 광전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듯, 자신의 주위로 물결치고 있는 피보라를 흘깃거리며 묘하게 웃고 있었다.
혈광갑이 광전사의 피보라를 흡수하며 인간의 생명력을 게걸스럽게 탐닉하고 있을 때.
그의 입에서 첫마디가 흘러나왔다.
<전에도 느꼈지만 마치 넌…… 날 알고 있는 것 같군.>
그 순간 루인은 깨달았다.
브훌렌에게서 악제의 청염(靑炎)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를.
브훌렌은 이미 청염에 의해 완벽하게 영혼이 잠식된 상태였던 것이다.
인간의 자아를 생명이라고 봤을 때, 그는 사실상의 죽은 인간.
어쩐지 모든 갈등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 하던 그의 태도가 열정적인 생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브훌렌은 이미 오래전부터 악제의 사념체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묻겠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아니, 묻지 마라.”
쏴아아아아-
거대한 혈우의 폭풍이 흑암과 어울린다.
마신의 강대한 영혼 제령술, 베다수마(Ӕѹӆӻ)였다.
광전사의 핏빛 혈광, 그의 두 눈이 더욱 음침한 호선을 그렸다.
<이러니 내가 더욱 묻지 않을 수가 없지.>
광전사의 가장 기본적인 권능.
주변의 모든 영혼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며 광기의 검무를 이어 가는 고유 능력, ‘영혼 마비’를 놈은 분명 미리 알고 있었다.
저 마계의 마법, 베다수마는 정확히 영혼 마비의 카운터였으니까.
“난 네놈에게 먹힌 인간을 생명체로 취급하지 않아.”
광전사가 악제와 다른 인격처럼 느껴지더라도 그건 착각에 불과하다.
그저 브훌렌의 기억을 지닌 악제의 인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형과 입씨름을 하는 건 내 체질이 아니라서.”
그러면서도 루인은 광활한 염동 마력을 드리워 에어라인의 타일 곳곳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본체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하게 자신의 사념체가 된 제물이라면 놈은 수천 킬로 거리에서도 통제할 수 있었다.
<이 광기의 실체를 눈앞에 두고도 날 찾고 있단 말인가? 넌 정말 볼수록 기이하군.>
하지만 정작 더욱 기이함을 느끼는 건 루인이었다.
자신의 기억 속 악제는 이렇게 말이 많은 존재가 아니었다.
악제가 한 대상에게 이토록 많은 흥미를 보였던 기억은 자신에게 없었다.
자신이 경험한 악제는 그저 인간을 향한 무제한적인 증오심이 다였다.
<너로 인해 브훌렌이라는 중요한 배역(配役) 하나를 잃었다.>
루인의 입가에서 점차 살기가 배어 나온다.
물론 놈의 입장에선 하이렌시아가의 방계 검수로서 장차 르마델의 중추적인 기사가 될 인물을 잃은 꼴일 것이다.
하나 한 인간의 영혼을 사멸시켜 차지하고 더욱이 한낱 배역으로 취급하는 놈의 태도는 역시 악마 그 자체였다.
<그러니 대답하라,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나는 이 시간을 반드시 귀히 써야 한다.>
이 와중에도 시간의 효율을 운운하는 악제의 태도에 루인의 눈빛이 기이함으로 물들었다.
과연 자신이 아는 악제가 맞나 싶을 정도.
하지만 루인은 방심하지 않았다.
마신의 제령술, 베다수마의 기운이 더욱 진한 빛을 머금었다.
“말해.”
피와 살을 갈구하는 광전사와 무려 입씨름을 하게 될 줄이야.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금방 일그러지는 루인의 얼굴.
놈의 질문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캐묻거나 앞으로의 의도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내게 네놈의 철학을 가르치려는 것이냐?”
<전혀. 오히려 그 반대다.>
“반대?”
<그렇다. 나는 네가 지닌 관념을 알고 싶다.>
마치 학자 같은 악제의 태도는 루인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악제가 철학 토론이라니.
이내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루인.
생각해 보니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인류 진영을 이끄는 자로서 내내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껴 온 루인.
악제에겐 이유가 없었다.
어떤 이유도 밝히지 않고 맹목적으로 인류의 멸절(滅絶)을 강요하던 재앙 그 자체였던 자.
어쩌면 지금이 그런 악제의 가치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루인이 너울거리는 광전사의 혈광을 차갑게 응시했다.
“인간은 생명(生命)이다. 거창하게 따로 가치를 둘 필요조차 없는 그 자체로서의 생명. 모든 생명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루인의 대답에 광전사는 한동안 말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광전사의 혈광이 스스스 흩어졌다.
<생각보다 낭만적인 자로군. 생명으로서의 살아갈 가치라. 하지만 그건 가치라기보단 창조자가 설계한 인위적인 섭리에 가깝다.>
순간 루인은 소름이 돋았다.
어찌 보면 평범하고 단순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무척 위험한 논리였기 때문.
그러나 루인은 내색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을 이어 나갔다.
“생명이 창조자의 인위적인 섭리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래서? 그런 인위적인 섭리에 순응하는 인간의 삶이 하찮게 느껴진다면 방관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한데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인간들의 삶에 관여하는 거지? 무엇을 바라길래?”
광전사의 혈광이 격렬하게 너울거린다.
그의 두 눈이 광기로 비틀리고 있었다.
<그랬었다.>
만 년 이상을 살아온 대마도사였기에, 악제의 대답에서 묻어 나오는 장구한 세월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문득 루인은 어쩌면 악제가 영원을 살아가는 무한존재(無限存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이여. 그 창조자의 섭리는 왜 차등을 두는 거지? 이 세계를 살아가기엔 인간은 너무도 나약하다. 용족 드래곤, 신족 타이탄, 수인, 요정…… 창조자가 탄생시킨 종족 중에서 인간보다 나약한 종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자의 순수, 절대적인 섭리라고 치부하기에 이 세계의 섭리는 균형적이지가 않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에 존재해 온 모든 철학가들의 의문이었다.
루인은 이 단순하고도 오래된 인류의 난제를 악제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거대하고도 불길한 기분이 엄습한다.
대마도사의 초월적인 상념과 추론들이 순식간에 얽히고설켰다.
세계의 균형을 추구하는 자.
그런 자의 생각이라면…….
“그래서 인간들에게 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살아갈 힘을 전했나?”
<그랬지.>
순간.
루인의 모든 사고가 정지된다.
<하지만 인간은 그 힘으로 또 다른 불균형을 초래했다. 저주받은 창조자. 그놈을 내내 닮아 가기만 했다. 그것이 인간이 쌓아 온 역사.>
도출된 예측.
“당신은 설마…….”
인간에게 마법을 전한 최초의 마법사.
인류를 무한히 사랑하여 신의 종족, 타이탄을 단신으로 정벌했던 고대의 초월자.
“테아마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