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56화 (156/187)

<156화>

왕립 무투대회의 결승전.

루인이 최전방에서 나서며 파티의 방패를 담당하자, 크라울시스와 이명 랭커들의 표정엔 일제히 황당함이 서렸다.

저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초인 기사를 물리친 루인이야말로 무등위 생도들에겐 유일한 희망이었다.

분명 그런 루인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작전을 펼치리라 생각했는데 반대로 그를 가장 전면에 내세워 버린 것이다.

크라울시스가 비릿하게 웃었다.

“황당한 놈들이로군. 아껴야 할 비밀 무기를 대놓고 희생시키다니.”

브훌렌이 검을 치켜든다.

“우리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이렇게 되면 훨씬 손쉬워지지.”

“잠깐만!”

후방에 서 있던 타가옐이 차가운 눈을 빛내며 브훌렌에게 다가온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다.”

“꿍꿍이?”

유리우스도 의견을 보탰다.

“너도 랭커전을 지켜봐서 알잖아. 저놈은 절대 아무런 대비 없이 일을 벌이는 성격이 아니야.”

“으음…….”

브훌렌이 고심에 잠기자 다시 타가옐이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의 꿍꿍이가 드러나기 전까진 유리우스와 내가 탐색전을 펼치겠다. 놈이 다짜고짜 정신계 마법을 펼칠 수도 있으니 한 명만 우리를 엄호해 줘.”

“그건 내가 맡지.”

마법 랭커들의 수호 기사로 나선 건 이명 랭킹 3위의 일리온.

이번 작전이 성공하려면 유리우스와 타가옐은 절대로 정신계 마법에 당해서는 안 됐다.

예선전을 올라오며 드러난 목소리 생도들의 마도가 그만큼 무시할 수 없었던 것.

상대는 마법 생도 5명.

일대일 전투는 기사가 유리하다지만 다대다 전투는 마법사들 쪽이 훨씬 유리했다.

그런 놈들이 위력을 알 수 없는 아티펙트들까지 중무장하고 있는 상황.

아무리 랭커들이라도 마법을 보조할 수 있는 유리우스와 타가옐 없이는 섣불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유리우스! 폭열(暴熱)의 결계를 펼쳐라!”

“알겠다!”

화르르르르르-

유리우스의 독특한 마력권(魔力圈) ‘폭열의 결계.’

모든 화염 마법을 무력화하는 디스펠 구역이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다.

실로 어마어마한 범위!

이내 타가옐의 광활한 마력이 맥동한다.

츠츠츠츠츠츠-

투명한 서리가 허공에서 몽글거린다.

폭열의 결계 위로 그의 ‘혹한의 서리 지대’가 덧씌워진 것이다.

거의 경기장 절반을 뒤덮어 버린 그들의 마력권에 금방 크라울시스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건 뭐지?”

지난 1개월 동안의 연습 과정과 긴 예선전을 통과하면서도 한 번도 드러나지 않았던 유리우스와 타가옐의 역량이었다.

거의 평생을 가문에서만 지낸 크라울시스는 마법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브훌렌이 설명을 대신했다.

“6위계 이상의 상위 마법사들부터는 자신만의 마력권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그걸 디스펠 구역이라고 하는데…….”

일리온이 끼어든다.

“지금부터 저놈들의 화염 마법과 결빙계 마법은 모조리 봉쇄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놈들이 7위계가 아니라면요.”

고개를 끄덕이는 크라울시스.

“그런 거라면 우리의 전투가 방해받진 않겠군.”

원소 마법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화염 마법과 결빙계 마법.

이로써 상대는 양팔이 봉인됐다.

반면 세 명의 기사 생도를 보유한 크라울시스의 파티는 어떤 장애도 없는 상황.

이런 것이 바로 마법사가 보조하는 파티의 위력이었다.

그런데 그때.

루인이 서 있던 곳의 주변에서 강렬한 마력이 얽힌다.

이내 쭈욱 찢어지며 벌어지는 공간의 틈.

츠츠츠츠츠-

타가옐이 다급히 수인을 뻗으며 동요했다.

저 대공자 루인의 빌어먹을 아공간은 이 왕립 아카데미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미스터리.

무슨 아공간 따위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력으로 맥동하는 것도 기이했지만.

그것보다는 대공자 루인이 그 속에서 꺼내는 내용물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것이 더 문제였다.

역시 이번에도 마찬가지.

“……저게 뭐지?”

“검인가?”

“검이라고 보기엔 너무…….”

굳이 설명하자면 그건 검(Sword)과 창(Spear)의 중간 형태라고 할 수 있었다.

검이라기 너무 길고 날이 무뎠다.

하지만 창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자루가 없는 형태, 즉 기다란 부분이 모두 금속으로 보였기 때문.

폴암(Pole arm)처럼 특별하게 날붙이가 추가된 형태도 아닌, 그저 단순하고 투박한 직선적인 형태의 냉병기.

분명한 것은 마법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기라는 것이었다.

“양대 원소 마법이 봉인되어 버렸으니 본인의 특기인 무투술로 승부를 보려는 건가?”

“잠깐.”

일리온의 목울대가 울렁거린다.

“놈이 온다.”

루인이 천천히 경기장의 중심으로 산보하듯 걸어 나오고 있었다.

* * *

우우우웅-

“Жѽѭжѓ Ѯѱѹѫ…….”

루인은 당황해하는 ‘카가르간의 진멸’을 달래고 있었다.

녀석에겐 오랜만에 맞이한 세상이 마계가 아닌 인간계라는 것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또한 자신의 동체를 통제하고 있는 존재가 ‘마신 쟈이로벨’이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도 이젠 인지하고 있을 터.

역시 카가르간의 진멸은 강렬한 적개심과 거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무튀튀하던 금속체가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순식간에 용암처럼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지만 루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부유 마법을 이용해 녀석을 허공에 띄울 뿐이었다.

그리고.

“Ѯљѥѣѡ!”

루인의 술식이 혈우 지대의 정복 군주, 마신 쟈이로벨의 권능으로 치환된다.

비록 융합 마력이라 이질적이겠지만 권능 자체의 결은 주인의 것으로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다시 카가르간의 진멸이 잠잠해지자.

루인이 전방을 쓸어 보았다.

예상대로 유리우스와 타가옐이 자신을 맞이했다.

마도는 마도가 상대하는 것이 탐색전에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터.

“…….”

자신의 발밑을 감싸고 있는 푸르스름한 한기와 뜨거운 열기.

확실히 생도 수준이 펼치는 마력권이라고 보기엔 그 위력이 놀라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저 브훌렌을 미래의 군단장 후보, ‘마지막 그림자’로 판단한 이상 이런 잔재주와 어울릴 생각은 없었다.

그가 마지막 그림자가 확실하다면 이 자리에서 신속하게 사살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은 아카데미의 생도가 아니라 ‘흑암의 공포’.

쿵-

루인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이명 랭커들.

관중석의 군중들.

심사석의 교수들까지.

그들은 하나같이 뭔가가 쿵 하고 무너지는 감각을 느꼈다.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본능적으로 외면해 온 인간 본연의 공포심이 일제히 자극된 것이다.

사회를 맡고 있던 헬렌 교수 역시 지극히 당황스러웠다.

‘……대체 이건?’

특별히 잔인한 장면을 봤다든가 압도적인 위력을 접한 것도 아닌데 이런 무시무시한 공포심이라니!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

온몸의 감각을 자극해 오는 모든 정보들이 명백한 두려움과 공포, 처절한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스스스스스-

갑자기 어두워지는 주변.

관중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분명 해는 떠 있었다.

하지만 천천히 자신들의 주변으로 증식하고 있는 어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기상천외한 현상에 관중들이 일제히 루인을 쳐다봤다.

기다랗고 기괴한 형태의 ‘무엇’을 손에 든 채 그는 그저 서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 모든 어둠(Darkness)의 근원이라는 것을.

점점 그의 형체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단 그 자체로 그는 어둠이자 공포였다.

흑암(黑暗).

이 세상 모든 어둠의 지배자.

모든 공포스러운 것들의 군주.

마침내 대마도사 루인은 머나먼 시간을 돌아와 다시금 흑암의 공포로서의 위엄을 세상에 드러냈다.

선배들이 펼친 마력권의 영역을 벗어나 서둘러 마력 결계를 시전하던 시론이 멍하니 루인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게 뭐지……?”

“…….”

다프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마탑에서 배우고 경험해 온 어떤 지혜로도 지금의 현상을 해석하거나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헤이로도스의 술식?

이건 그런 ‘인간의 마법’ 따위가 아니었다.

분명 차원이 다른, 지금까지의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명백한 미지(未知)였다.

“대마도사…….”

그는 늘 자신을 대마도사라고 했다.

이제야 그녀는 그런 루인의 장담을 피부로 절감하고 있었다.

“……진짜였어.”

원소가 아닌 자연 현상, 즉 현상계의 어둠을 통제하는 마법사라니!

이런 초자연적인 위력을 한낱 인간의 몸으로 어떻게 발휘할 수 있는지 다프네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어둠이 무슨 작용을 하는 거지?”

“그건 저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건 마법, 즉 술식이 아니었다.

마력은 분명한데, 그 마력을 구동한 체계를 읽을 수 없었다.

회로가 맺힌 흔적이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 루인의 광활한 염동력도 느낄 수 없었다.

이건 어둠이라는 현상 자체가 화인처럼 대지에 내려앉은 듯했다. 마치 자연적인 현상처럼.

“……마법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여, 역시 그렇지?”

그런데 그때.

-저, 저리 가!

갑작스레 들려온 비명에 가까운 외침.

어둠으로 시야가 잠식되자, 다른 모든 감각들을 동원해 날렵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던 일리온.

그가 겁에 질려 도망가고 있었다.

한데.

스스스스스-

일리온, 그리고 그가 보호하고 있던 유리우스와 타가옐의 움직임이 그림처럼 멎어 버렸다.

“크으으윽!”

“으흡!”

촉수처럼 그들을 감싸고 있는 어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그림자, 천천히 자신의 육체를 잠식해 나가는 공포에 타가옐이 거칠게 소리쳤다.

“으아아아아! 율라드의 빛!”

처절하게 깨문 입술, 가까스로 그린 수인에 의해 구현된 발광 마법.

하지만 세상을 물들인 공포, 칠흑 같은 어둠에 의해 타가옐의 발광 마법은 곧바로 사멸되었다.

“……!”

“……!”

그러나 모두 볼 수 있었다.

이 모든 어둠의 중심, 자신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한 쌍의 눈동자를.

타가옐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현상에 불과한 어둠이 물리적인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다는 건 어떤 마법의 체계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

평생을 마법사로 살아왔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마도(魔道)가 존재할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분명 인간의 마법이란 경험의 산물.

저 루인이라는 놈은 도대체 무슨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마도가 가능한 거지?

아직도 허공에 흐릿하게 얽혀 있는 발광 마법의 잔재.

타가옐이 재빠르게 동료들이 있던 자리를 훑었다.

“크라울시스 님! 브훌렌!”

하지만 이미 어둠이 그들을 완벽히 먹어 치웠다.

그들의 흔적을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때.

<아직도 숨을 곳을 찾고 있나.>

머릿속을 울려 오는 녀석의 목소리, 절대언령이었다.

<좋아. 죽여 주지.>

군단장을 상대하는 이상, 루인의 마도에 여흥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쐐애애애애액!

카가르간의 진멸이 쇄도한다.

어둠 속에 파묻힌 루인의 입은 웃고 있었다.

놈이 악제의 군단장, 그 옛날의 광전사라면 이것까지 참을 리는 없을 테니까.

콰아아아앙!

세상을 짓이기는 파멸적인 굉음이 순식간에 경기장을 집어삼킨다.

<호오. 이제야 결심한 건가.>

어둠이 물러난 자리.

그곳에 한 쌍의 눈이 핏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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