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혈광의 거대 광전사.
사실 루인의 기억 속에서 희미한 이름이었다.
광전사(Berserk)는 악제군과의 전쟁 초기에 활약했던 군단장.
검성이 사령관으로 출정해 치른 최초의 대전, ‘오비와드 늪지대 전쟁’.
당시 검성과 백 명의 결사대가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며 광전사를 처치했던 것.
역시 그 사건은 검성의 최고 업적 중 하나였다.
그때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광전사가 계속 악제군의 군단장으로 활동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광전사는 실질적인 무력도 무력이지만 아군의 사기 저하라는 측면에서 인류 연합에게 치명적인 존재였다.
전장에 나설 때마다 특유의 압도적인 광기로 아군 수백, 수천 명을 분 단위로 베어 넘겨 버리니 대열이 유지될 리가 없는 것이다.
만약 그가 계속 살아서 날뛰었다면 ‘혈광의 거대 광전사’ 따위의 급조된 이명이 아니라 훨씬 파괴적인 이명으로 불렸을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
문제는 그런 광전사와 브훌렌이 전혀 매치가 안 된다는 점이었다.
깔끔하고 절도 있는 기사 생도 그 자체인 브훌렌.
그에게서 거대화된 육체, 흉포하게 날뛰며 미친 듯이 피를 갈구하는 무시무시한 광전사를 상상하기엔 조금은 무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도구, 황금 갑옷에 새겨진 마력회로가 너무 노골적인 증거였다.
만 년 이상을 대마도사로 살아온 자신조차 제대로 읽을 수 없는 흑마법 술식.
쟈이로벨과 비슷한 반열의 마신들의 주문과 술식이라면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거기에 백마법 고유의 체계는 더더욱 아니었다.
결국 남는 건 악제의 계약자로 추정되는 절대적인 존재.
대마도사 루인에게 미지로 남아 있는 유일한 마법 체계는 바로 절대악 발카시어리어스의 그것이었다.
악제와 그의 군단은 발카시어리어스의 권능을 활용해 인류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렇게 생각이 이어질수록 루인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루인의 시선이 생도들을 훑었다.
“결승전에서 너희들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뒤로 빠져 있어라.”
인상을 찡그리는 시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브훌렌이 미래에 군단장이 될 악제군의 하수인이라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이번 무투대회는 생도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리리아 역시 굳은 얼굴로 루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명 랭커 선배들이 두렵지만 피할 생각은 없다.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일 거다.”
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루인은 금방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회귀의 비밀을 친구들에게 고스란히 까발리는 꼴이었고, 무턱대고 빠지라고 하기에도 그들의 자존감에 상처가 되는 일.
결국은 강압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리리아. 이번 결승전에서 너는 빠진다. 대신 세베론이 참가한다.”
“뭐?”
황당해하던 리리아가 이내 사납게 루인을 노려봤다.
“왜 이제 와서 그딴 소리를 늘어놓는 거지?”
“조율은 거부한다. 처음부터 이 파티의 지휘 권한, 즉 작전권은 내게 귀속되어 있었다. 그것이 내가 무투대회에 참여하는 조건이었어.”
“하지만!”
루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가 너를 봉신가의 일원으로 대하길 바라나?”
하이베른가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한 어브렐가.
리리아는 결국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나는 듯했지만 역시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이번 결승전에 나보다 세베론이 전략적으로 합당한 이유와 근거는?”
“세베론은 너희들 중 체술에 가장 능하다. 또한 그의 아티펙트, 고야드의 뇌전 갑옷이 이번 전투에는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대신 난……!”
“리리아.”
하는 수 없이 브훌렌을 시선으로 가리키는 루인.
“브훌렌을 봐라.”
리리아가 맹렬하게 루인의 시선을 좇는다.
“넌 월켄이 변하는 걸 직접 보았지.”
“…….”
“저 브훌렌은 그때보다 더한 악마로 변할 수 있다.”
하이베른가에서의 그 일.
루인의 모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의문스러웠던 미지(未知).
“뭐……?”
다프네와 시론도 동요했다.
“브훌렌 선배가 변하다니요?”
“그가 괴물이라도 된다는 거냐?”
끄덕끄덕.
“괴물보다 더하지. 오직 피를 갈구하는 광기의 전사. 그런 괴물을 상대할 때는 세베론의 체술과 고야드의 뇌전 갑옷이 훨씬 유리할 뿐이다.”
루이즈의 절대 언령이 들려온다.
<그럼 그가 지금보다 더욱 강해진다는 뜻인가요?>
루인이 루이즈를 바라보며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강해진다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그칠 정도가 아니다. 만약 그가 변한다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다른 존재요?>
“그래. 그때를 철저하게 대비해야 돼. 진형도 다시 짠다. 세베론. 시론. 너희들도 내가 명령하기 전까진 후방에서 다프네와 루이즈를 보호하는 임무에만 전념한다.”
시론과 세베론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사실상 루인이 파티의 최전선을 단독으로 맡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지금 우리더러 네 들러리나 하라는 뜻이냐?”
시론의 얼굴엔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세베론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초인을 이긴 너라도 저런 무시무시한 아티펙트로 중무장한 이명 랭커 다섯을 단독으로 상대하는 건 너무 위험해. 차라리 함께 전방을…….”
“너희들. 한 번이라도 내가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
“…….”
침묵하는 생도들.
루인의 진정한 마도를 모두 보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생도는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어디까지가 그의 한계인지를 짐작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난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하지만 만약.
지금 이 시점에서 브훌렌이 광전사의 권능을 그대로 재현해 낼 수 있다면.
흑암의 공포 본연의 경지를 모두 회복했다면 무리 없이 제압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자신조차 생존을 담보할 수 없었다.
상위 초인의 경지를 돌파하고 초월자가 된 검성, 그리고 전원이 7성 이상의 기사로 구성된 그의 결사대가 큰 희생을 각오하고 겨우 사살했을 정도니까.
지금으로선 아직 그가 군단장급의 역량을 지니고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얼마나 강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확실하게 언급을 해 주세요. 저희들이 루인 님의 동료라면 물을 권리가 있어요.>
루인은 끝내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이 생도들에게 했던 말을 루이즈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더없이 강렬해진 루인의 눈빛.
“전에도 말했지만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내 진실된 위계를 측량할 수 없다.”
그건 모두 알고 있었다.
고작 5개의 고리로 현자급의 마도(魔道)를 구현해 내는 것이 루인의 괴이한 능력이었으니까.
시론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 복잡하게 말해 봐야 난 모르겠고. 대충 우리 할아버지보다 더 강하는 거지?”
현자 에기오스라…….
루인이 씨익 웃었다.
“현자급, 혹은 그 이상의 마도사 다섯 정도는 동시에 상대할 수 있다.”
“뭐?”
도대체가 하는 말들이 죄다 상식에 반하는 말들뿐이니 생도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하…….”
백마법의 역사를 모조리 뒤져 봐도 그런 비상식적인 마도를 구현해 내는 이는 단 두 명뿐이었다.
최초의 마법사 테아마라스.
그리고 술식의 창조자 헤이로도스.
지금 루인은 스스로 자신을…….
“난 대마도사다.”
자신을 표현하는 단 한마디.
하지만 결코 허풍이나 거짓으로 들리진 않는다.
“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
시론이 세베론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난 다프네를 맡지. 넌 루이즈를 보호해라.”
“……정말 루인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제길! 본인이 대마도사님이라잖아!”
그렇게 루인 일행의 합의가 모두 끝났을 때.
무대에 설치된 음성 증폭기에서 헬렌 교수의 기대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 드디어 이 생도들의 대결을 볼 수 있겠군요!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등위 생도들! 목소리 그룹의 생도들은 서둘러 경기장으로 입장하시기 바랍니다!
쿵쿵-
모두의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이명 랭커 선배들과의 결전인 것이다.
루인과 시론, 다프네 등이 차례로 경기장에 오르자.
와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와 베스키아 리움을 가득 메웠다.
마법 생도이면서도 강력한 무투술을 구사하며 파죽지세로 예선을 통과한 루인의 팀은 예상대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특히 루인만큼이나 다프네의 인기도 대단했는데, 벌써 팬클럽이라도 생겨난 듯 관중석의 이곳저곳에서 플래카드가 발광하고 있었다.
그녀의 엄청난 미모는 이미 에어라인 전체에 소문이 자자했다.
-눈빛들이 무시무시하네요! 대단한 대결이 될 것 같습니다!
막 경기를 끝낸 크라울시스와 그의 팀원들이 일제히 루인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생동하는 화염 유리우스와 그림자 혹한 타가옐이 천천히 경기장의 중심으로 걸어왔다.
이내 루인 앞에 멈춰 서는 그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후배. 기권해.”
유리우스의 진심 어린 충고.
“넌 괜찮겠지. 네 마도라면 우리를 상대하기에 충분하니까. 하지만 나머지 친구들이 과연 이번 대결을 감당할 수 있을까? 다치거나 심하면 폐인이 될 수도 있어.”
유리우스는 평소 루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가 통 크게 마정석을 마법학부에 기증한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모든 마법 생도들에게 마정석을 연구할 기회를 거리낌 없이 제공한다는 건, 그가 마도(魔道)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증거였다.
“글쎄. 당신의 친구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두 눈에 끈적한 열기로 가득한 타가옐.
그는 당장이라도 자신을 상대해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유리우스가 피식 웃었다.
“나 역시 너와 겨뤄 보고 싶어. 하지만 녀석이 내 얘기에 별다른 말이 없는 건 녀석도 마법학부를 아끼기 때문이야.”
“개소리하지 마라. 유리우스.”
냉랭한 타가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루인이 그를 무심히 응시했다.
“이해가 잘 안 되는군. 너와 난 그다지 접점이 없는 것 같은데.”
대공자 크라울시스나 브훌렌은 이해가 되지만 타가옐은 자신을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와 얽힌 사건도 없었고, 오히려 마법학부의 선배들은 거의 모두가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다.
루인의 등장으로, 마법학부가 하이베른가라는 강력한 대공 가문의 후원을 받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실제로 루인이 마정석을 마법학부에 기증하면서 그런 호감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안녕하세요. 타가옐 오빠.”
살짝 무릎을 굽히며 다프네가 인사하자 타가옐의 얼굴이 금방 붉어졌다.
“오, 오랜만이다.”
루인의 표정이 묘해진다.
“아는 사이인가?”
싱긋.
“아, 제가 얘기를 안 했었나요? 타가옐 오빠는 한때 저와 함께 마탑에서 지낸 적이 있어요. 오빠도 저와 함께 스승님의 제자 후보였거든요.”
“제자 탈락생?”
“오호!”
시론과 세베론이 호기심을 드러낸다.
옛 추억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듯 타가옐이 표정을 구겼다.
“시끄럽다 다프네.”
“아, 알겠어요!”
다프네를 바라보는 타가옐의 묘한 분위기.
지켜보던 루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놈. 설마…….’
다프네가 자신에게 접근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고백을 한 일은 지금까지도 거추장스러운 소문을 양산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민 루인이 다짜고짜 대마도사의 마도를 강렬하게 드러냈다.
루인의 거대한 융합 마력이 순식간에 경기장을 집어삼킨다.
츠츠츠츠츠!
파아아아앙!
이어진 무심한 대공자의 음성.
“물러가서 시합 준비나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