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모두가 예상했던 것처럼, 르마델 왕국의 양대 대공자인 루인과 크라울시스의 팀이 파죽지세처럼 예선을 통과하고 있었다.
특히 전원이 무등위 생도들로 구성된 목소리 생도들의 전투법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당당히 전면에 나선 시론이 모든 기사 생도들의 검을 육탄으로 막아 냈다.
마왕 발푸르카스의 ‘베리알의 뼈갑옷’을 착용함으로써 기사 생도들의 강력한 검술 앞에서도 무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곧바로 이어지는 루이즈의 초광역 침묵 마법에 의해 스펠을 외우던 마법 생도들은 모조리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멀뚱히 서 있던 생도들이 맞이한 것은 역시 루인의 무차별 주먹세례.
극단적으로 단조로운 이런 전투 방식을 극복해 내는 팀이 단 한 팀도 없었다.
단순무식하지만 효율만큼은 무자비했던 것.
더욱이 고랭킹의 이명 생도 중에서는 크라울시스의 파티를 제외하곤 거의 참여를 포기한 상태였다.
참가에 의의를 두는 팀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마땅히 루인과 크라울시스의 팀을 견제할 만한 팀이 없었던 것이다.
헬렌 교수가 예측했던 것처럼, 사실상 대공자들의 싸움이었다.
“…….”
하지만 루인은 아무리 실력이 낮은 팀들의 전투라고 해도 빠짐없이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우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투대회에 참여를 하겠다는 뜻인가?
-좀 솔직해지지 그래? 은밀히 숨어 있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 놈들이 갑자기 무투대회에 참여할 만한 동기가 없잖아?
-…….
-이번 무투대회에 이변이란 게 있다면 나밖에 없는데 역시 놈들의 목적은 내가 아닐까? 그럼 내가 참여를 유지하는 게 놈들을 끌어내는 데 훨씬 효과적일 텐데?
-인간. 하지만 위험하다. 카알라고스 님이 예측한 ‘마지막 그림자’라는 인간들의 권능은…….
-그 위험을 내가 감당할 수 있다면?
-그건…….
-너라면 대충이나마 느낄 수 있을 텐데? 내 진실된 힘을?
-그럼 부탁한다 인간. 만약 네가 극도의 위험에 노출된다면 이 비셰울리스가 개입하겠다.
-그럴 일은 없다, 용.
지고룡이 사자 비셰울리스를 보내 경고를 해 온 마당.
너울거리는 그림자에 소속된 자들, 그중에서도 ‘마지막 그림자’급 이상의 요원이 참가한 게 확실하다면.
저들 중 누가 마지막 그림자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철저하게 감추는 은밀함.
인간 진영의 영웅들은 군단장들의 그런 교활함에 치를 떨었었다.
‘마지막 그림자’는 미래에 결성될 악제군(惡帝軍)의 군단장이 될 가장 강력한 후보들이었다.
역시 루인은 이미 상대를 군단장급으로 상정하고 관찰하고 있었다.
‘역시 쉽게 꼬리를 잡히진 않는군.’
우당탕 넘어지고 머리를 긁적이는 기사 생도.
술식이 꼬여 부끄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마법 생도 등.
출전자들은 하나같이 경험 부족한 아카데미의 생도들 그 자체였다.
누구도 마지막 그림자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아! 또 경기장이 얼었어요!”
“이번에도 ‘바할라의 서리 혹한’인가!”
와아아아아!
또다시 관중들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그림자 혹한 타가옐의 인기는 대단했다.
외모가 빼어난 것도 있었지만 그의 대단위 결빙계 마법 자체가 굉장히 멋들어진 연출을 자아냈던 것.
역시 상대팀들은 재빨리 경기장 아래로 피하기에 급급했다.
경기장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은 기권의 의미.
때문에 매번 애꿎은 경기장 바닥만 계속 얼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베스키아 리움의 관리자들은 죽을 맛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화염 마법과 각종 복구 마법으로 보조해 주고 있다지만, 이런 과정이 계속 반복된다면 바닥의 내구성은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생도들이 시합 외적인 요소에 의해 다치게 된다면 모두 그들의 책임.
‘융통성이 없군.’
고등위 생도라면 뻔히 이런 사정을 알 텐데도 타가옐은 굳이 마력의 막대한 소모까지 감수해 가며 대단위 결빙계 마법만 고집하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시합을 끝내려는 조급함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분명 그의 마도(魔道)는 효율을 추구하는 마법사답지가 않았다.
‘설마 시선을 즐기는 건가?’
마법사가 고작 인기를 위해 마법의 효율을 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분명 뭔가 다른 의도가 있을 텐데 당장으로선 짐작되는 것이 없었다.
“이제 우리 차례예요!”
“가자!”
그렇게 예선전과 8강, 4강이 연이어 끝났을 때.
“드디어 만났군.”
뜨거운 열기의 선수 대기실.
가볍게 승리를 따내고 돌아온 루인의 팀을 맞이한 건 크라울시스였다.
루인이 그의 눈빛에 얽힌 살기를 읽더니 피식 웃었다.
“죽이고 싶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군. 하지만 여긴 아카데미다.”
“상관없다.”
사고로 위장하든 거리낌 없이 죽이든 반드시 루인을 죽여 없애겠다는 크라울시스의 각오가 느껴졌다.
“약속하지.”
“뭘?”
“넌 이번에도 병신처럼 기절할 거다.”
그 순간 크라울시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그로서는 기수 쟁탈전에서 루인에게 당했던 수모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이내 크라울시스가 홱 하니 돌아서더니 자신의 캠프로 돌아갔다.
이명 랭킹 1위, 뇌전의 기사 브훌렌이 무심하게 루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례하군.”
루인의 눈빛이 이채로 물든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라는 걸 밝힌 상황에서 예전처럼 반말로 일관하는 생도는 브훌렌이 처음이었다.
“대공가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건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의 브훌렌.
“어차피 지금에 와서 가까워질 수도 없는 노릇이지.”
“포기가 빠르군.”
루인으로선 브훌렌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지녔는지를 아직 관찰한 바가 없었다.
물론 이명 랭킹 1위에 빛나는 기사 생도답게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인은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계산만 하는 이를 싫어했다.
브훌렌은 갈등이나 위기를 자신의 힘으로 돌파하기보단 주변의 상황을 이용하거나 타인을 억압하여 풀려고만 했다.
루인이 바라본 브훌렌은 기사라기보단 정치꾼이나 전략가에 가까웠다.
그가 크라울시스의 위세와 권력에 기생하고 있는 것 또한 루인의 혐오를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넌 절대로 기사(Knight)가 되지 못할 것이다.”
“…….”
기사 생도 입장에서는 충분히 치욕적일 텐데도 브훌렌은 루인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로서는 우스운 말이었다.
이미 하이렌시아가의 방계 검수로서 기사의 지위가 보장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에게는 할 말이 아닌 것이다.
피식.
“저주 마법인가?”
처음으로 웃는 브훌렌.
마법사를 깔아 보는 마음이 기저에 깔려 있는 그의 대답에 루인이 마주 웃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일찍이 멸망을 겪어 본 루인은 이런 부류의 인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멸망이 도래했을 때 놈은 반드시 악제군이 될 것이다.
그게 자신의 미래에 훨씬 도움이 될 테니까.
이런 놈은 일찍 싹을 잘라 내는 편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옳았다.
“황혼의 덩어리 몇 놈을 상대해 봤다고 마치 기사 생도들을 모두 아는 것처럼 객기를 부리는군.”
포효하는 황혼의 기사 생도들은 인류의 멸망 앞에 누구보다 인류를 지키기 위해 살아갈 청년들.
그들에겐 검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있었다.
루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그는 브훌렌을 생도로 생각하지 않았다.
“내 객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브훌렌.”
루인의 눈빛과 분위기는 무시무시했지만 브훌렌은 한 치의 두려움도 없어 보였다.
루인은 초인 기사를 이긴 마법사였으나 역시 그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어디 그 잘난 헤이로도스의 마법을 마음껏 발휘해 봐라.”
그가 걸치고 있는 망토 안의 흉갑을 무심히 바라보는 루인.
“…….”
브훌렌의 금빛 흉갑.
불그스름한 마력핵(魔力核)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미세한 회로들의 흔적.
루인이 미묘하고 복잡하게 얽힌 그런 회로를 끈질기게 살피고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그것은 대마도사의 경험으로도 이치를 파악할 수 없는 수준의 고위 룬마법이었다.
분명 초고위 백마법, 그것도 고대의 주문 같았다.
하지만 마신 쟈이로벨의 마법 체계,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겪은 모든 지혜로도 해석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크라울시스의 ‘천령의 안식’보다 더욱 대단한 아티펙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브훌렌이 멀어지자 시론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의 흉갑은 정체가 뭘까? 엄청나 보이는데.”
역시 다른 생도들도 모두 궁금했던 모양.
지금까지 크라울시스의 팀원들은 한 번도 아티펙트의 능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다프네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저도 몇 번이고 그의 흉갑에 새겨져 있는 룬마법을 살피려고 해 봤는데…….”
“기이한 형식의 술식 회로다. 얼핏 보면 마력 융합(融合) 현상을 이끌어 내기 위한 술식 같아 보이는데―”
“그건 아니에요. 회로 수열이 너무 불규칙해요.”
“그래. 그게 문제지. 반응 범위가 너무 넓어. 불안정한 수열이 생산하는 마력의 힘을 예측할 수가 없다.”
“확실한 건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마도구는 아니란 거예요.”
루인이 가볍게 놀랐다.
다프네가 저 미묘한 회로를 거기까지 읽어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럼 뭐라고 생각하지?”
“갑주라기보단 차라리 무기에 가까워요.”
“무기?”
기본적으로 갑주의 형태를 하고 있는 마도구들은 방어적인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 제작된다.
쉴드나 배리어계 마법이 룬마법으로 새겨져 있거나 안티 샤프니스(Anti sharpness), 안티 피지컬 포스(Anti Physical Force) 등 물리적인 힘을 상쇄하는 마법이 갑주를 보조하는 것이다.
원래 갑주란 그런 방어적인 용도.
한데 다프네는 그런 일반적인 상식과 전혀 궤가 다른 해석을 늘어놓은 것이었다.
“나 원 참. 검이나 지팡이도 아니고 갑옷으로 공격한다는 건 또 신선한 얘기네.”
다프네를 쳐다보며 핀잔을 늘어놓는 시론.
하지만 루인의 표정은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
루인의 기억 속엔 그런 갑옷이 있었다.
혈광의 거대 광전사(Berserk).
피보다 붉은 갑주를 몸에 두르고 미친 듯이 수백 명씩을 베어 넘기던 악제군의 악마적인 존재가 떠오른 것이다.
루인의 굳은 얼굴이 다시 다프네에게 향했다.
“마나가 아니라 피(血)라면.”
“네?”
“투기나 마나를 재료로 소모하는 게 아니라 생명력이 담긴 피를 먹으며 성장하는 갑주가 있다.”
“그건…… 설마 흑마법을 말하는 건가요?”
루인이 저 멀리 상대 캠프에 서 있는 브훌렌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럼 불안정한 회로가 모두 설명이 된다. 광기(狂氣)란 그런 거니까.”
“아!”
저 황금빛 갑주가 위장이라면.
저 황금이 갑주의 겉에 칠한 도금(鍍金)이라면.
루인의 눈빛이 무한의 증오로 타오른다.
‘혈광의 거대 광전사.’
거대화된 육체.
인간 진영을 처참하게 유린하던 광기의 살인마.
그렇다면 브훌렌이 바로 너울거리는 그림자의 ‘마지막 그림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