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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153화 (153/187)

<153화>

헬렌 교수가 과장스럽게 놀라는 표정을 했다.

-우아…… 학자로서 이건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네요.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크라울시스 생도가 착용하고 있는 갑주는 역시 ‘천령의 안식’이 맞나요?

씨익.

대답 없이 웃고만 있는 크라울시스.

인정하는 듯한 태도였기에 헬렌 교수의 입이 더욱 벌어졌다.

-정말로 칠백 년 전의 전설적인 마도학자 나스란 님께서 남기신 희대의 걸작이 맞다면 이건 진짜 놀라운 일이네요! 백여 년 전에 자취를 감춘 아티펙트인데! 마음 같아선 당장 연구실로 가져가서 뜯어보고 싶을 지경이랍니다! 호호!

천령의 안식.

몇 번의 전쟁을 통해 엄청난 효과가 입증된 전설적인 대마법 방어 갑주.

7위계 이하의 모든 술식을 막아 낼 수 있는 이 천령의 안식은 상대하는 마법사에겐 마치 사형 선고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아티펙트였다.

더욱이 안티 샤프니스 마법 또한 보조하고 있어 날카로운 창칼을 방어하는 데도 엄청난 효과를 보장했다.

또한 7위계를 능가하는 상위의 술식 역시 완벽하게 막아 내진 못하지만 위력을 현저하게 감소시킬 수 있었다.

현자급을 상회하는 마도사만 만나지 않는다면 기사가 착용하는 즉시 모든 마법사들의 천적이 되는 것이다.

-잠시 이미지해 봤는데 정말 끔찍하네요. 안 그래도 기사를 상대하기가 버거운데 천령의 안식이라…… 정말 전의가 상실될 정도겠어요.

말꼬리를 흩어 내며 이내 루인을 바라보는 헬렌 교수.

“어, 어쩌지?”

“이건 졌어…….”

“정말 너무해…….”

시론과 생도들의 낯빛이 하나같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공자 크라울시스의 천령의 안식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명 랭커들이 걸치고 있는 아티펙트들도 그에 못지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건 자신들의 모든 마법이 봉쇄당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한데 루인이 그런 이명 랭커들을 비웃고 있었다.

여유로운 그의 태도에 시론이 한껏 의문을 드러냈다.

“넌 이 와중에도 아무렇지 않은 거냐? 넌 어떻게든 선배들을 상대할 수 있다 해도 우리들은…….”

“아, 너무 우스워서 말이지.”

“뭐?”

씨익.

“그래도 명색이 나와 같은 반열의 대공자이거늘. 고작 생각해 낸 것이 아티펙트 떡칠이라니.”

그때 뭔가가 생각난 듯 시론이 묘한 표정을 했다.

“너…… 설마 혹시…….”

“이러면 나도 거리낄 것이 없어지잖나?”

츠츠츠츠츠-

소환된 헬라게아.

시커먼 공간으로 팔을 쑥 집어넣은 루인이 생도들을 훑어보았다.

천천히 생도들의 체형을 가늠하는 듯했다.

쿵-

루인이 첫 번째로 헬라게아에서 꺼낸 것.

그것은 검붉은 빛을 띠고 있는 기괴한 형태의 갑주였다.

한데 일반적인 금속의 느낌이 아니었다.

표면이 거칠기 짝이 없는 것이, 마치 몬스터의 뼈나 외피를 통째로 가공해서 제작한 느낌.

“그, 그게 뭐죠?”

다프네의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루인은 그저 무심히 시론에게 붉은 갑주를 건네고 있었다.

“네 거다.”

“어? 어.”

어색하게 붉은 갑주를 받아 든 시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

놀랍게도 검붉은 갑주는 일반적인 섬유질의 의복보다도 가벼웠다.

“착용해라.”

“이건 무슨 갑주지?”

“스피릿 오러 따위는 가볍게 막아 낼 수 있는 갑주.”

“뭐?”

“오러뿐만이 아니다. 상쇄할 수 있는 물리력의 한계값이 무한에 가깝다. 모든 유체 정지 압력(Hydrostatic Pressure) 또한 상쇄시킬 수 있다. 즉 초고밀도의 유체 내에서도 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지.”

“그, 그게 무슨 뜻이야?”

피식.

“수천 미터 깊이의 물이나 용암 내부에서도 갑옷이 찌그러지지 않는다는 소리다.”

이 갑주는 쟈이로벨의 휘하 마왕 발푸르카스가 생전에 즐겨 입던 ‘베리알의 뼈갑옷’.

마계 역사의 초창기, 혈우 지대는 진마룡 베리알의 영역이었다.

마신 쟈이로벨과 그의 휘하들이 진마룡 베리알을 처치하고 그의 뼈를 전리품으로 취했던 것이다.

마계 최강의 생명체인 진마룡 베리알의 뼈를 쟈이로벨의 마력으로 빚어 만들어 낸 최강의 갑주.

그런 베리알의 뼈갑옷은 마계에서도 최상위권의 보물이자 아티펙트.

쟈이로벨은 이 강력한 갑옷을 가장 아끼는 휘하인 마왕 발푸르카스에게 하사했었다.

그가 므드라와의 대전에서 전사하자 다시 쟈이로벨에게 되돌아온 것이었다.

시론이 고개를 갸웃했다.

“금속으로 만든 것 같진 않은데…….”

인간계 최강의 생명체인 드래곤의 뼈는 어떤 금속보다도 단단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데 진마룡의 뼈는 그런 드래곤 본(Dragon Bone)보다도 몇 배나 더 강력했다.

마계와 인간계를 모두 통틀어도 진마룡의 뼈보다 더 강력한 강도의 물질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뼈로 만든 갑주다. 현존하는 어떤 금속보다도 단단하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데?”

대부분의 물질은 무게와 강도가 정비례하는 법.

시론은 이 가볍기 짝이 없는 갑주가 소드 스피릿 오러조차 막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 갑주엔 초고위 경량화 술식이 녹아 있다. 만약 경량화 술식이 없었다면 넌 그걸 들고 서 있지도 못할 거다.”

“아!”

퉁-

루인이 두 번째로 꺼낸 것은 가느다란 뿔이었다.

루인이 그런 새하얀 빛깔의 뿔을 리리아에게 건넸다.

“이건 네 거다.”

“…….”

무표정한 얼굴로 뿔을 받아 드는 리리아.

의외로 리리아는 루인을 향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뎀아올카의 뿔이다.”

“설명은 필요 없다. 쓰는 법만.”

리리아는 가타부타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건 루인을 향한 믿음.

루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냥 가볍게 쥐면 된다. 효과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야.”

뎀아올카의 뿔 역시 마왕 샤피룬의 애장품.

베리알의 뼈갑옷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은 마계의 절대적인 아티펙트였다.

“이건 루타므의 영체 투구.”

다프네에게 건넨 것은 자신의 거대 군집 무리를 자유자재로 통제하던 영적 생명체 ‘루타므’의 뇌로 만든 투구였다.

호기심이 많은 다프네는 루타므의 영체 투구를 받아 들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머리에 썼다.

“……어!”

순간적으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엄청난 정보량.

인간에겐 허락되지 않은 감각, 영적인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제3의 감각이 다프네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펼쳐진다.

그녀가 자신의 주위로 일렁이는 아지랑이와 같은 신비로운 물결을 손으로 쓸었다.

“루인 님? 설마 이건……?”

“그래. 마나 그 자체다.”

믿을 수 없었다.

언령과 수인, 염동력 한 번 일으키지 않고 즉각적으로 마나를 읽을 수 있는 아티펙트라니!

이런 게 가능하다면 술식을 형성하는 과정의 자유도가 엄청나게 상승하게 될 것이다.

복잡한 회로를 만들어 마나에 특정한 힘을 부여하는 과정, 즉 술식의 초단부(初段部)를 생략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인즉.

“설마 이 투구는…….”

“그래. 마력의 소모를 비약적으로 줄여 주는 것은 물론 시전자의 연산력 자체를 강화시킨다. 이미지 속에서만 가능했던 이론상의 술식도 구현이 가능할 정도지.”

“아!”

“특히 메모라이징이 특기인 너에게는 안성맞춤일 거다.”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다프네의 연산력이 여기서 더 강화가 된다니?

세베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도대체 메모라이징 마법을 몇 개나 동시에 소환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잠시 생각하던 루인이 퉁명하게 대답했다.

“다프네의 최근 수련 성과를 보면 최소 20개. 어쩌면 더. 하지만 마력의 문제가 있으니 그렇게 극단적으로 활용할 필요는 없지.”

“헐…….”

“실질적인 효과는 역시 시전 속도의 엄청난 단축이다. 캐스팅 과정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지.”

세베론의 두 눈이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내 건! 내 건 없냐고!”

“있다.”

턱-

루인이 세베론에게 내민 아티펙트는 볼품없어 보이는 검은 돌이었다.

다른 생도에게는 엄청난 아티펙트를 줬으면서 자신에게는 길가에 흔하게 돌아다니는 평범한 돌이라니!

세베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와 씨! 난 예비 멤버라 이거지? 아티펙트까지 차별인 거야?”

“바보 같은.”

저 평범해 보이는 돌이 얼마나 엄청난 아티펙트인지 세베론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꽉 쥐어 봐.”

우우우웅-

세베론이 검은 돌을 쥐자 돌에서 칙칙한 마력이 흘러나와 그의 전신을 감쌌다.

스르르르르-

짙은 연기를 마치 갑주처럼 두르고 있는 세베론의 모습에 시론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저건 또 뭐지?”

“고야드(ЖґѧҀѥ)의 뇌전 갑옷이다.”

“고야드? 뇌전 갑옷?”

“이건 설명할 필요도 없지.”

갑자기 뇌전 갑옷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루인.

츠츠츠츠츠-

이내 검은 연기가 루인의 주먹에 흡착되듯 달라붙더니.

곧장 강렬한 뇌전이 일렁이며 루인의 주먹을 거세게 밀어냈다.

루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전류의 잔재를 털었다.

“뇌전의 힘으로 물리력을 상쇄한다. 효과는 베리알의 뼈갑옷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

“내 거보다 더 좋다고?”

“그래.”

바람과 뇌전의 마왕 고야드는 서풍 지대의 군주 므드라의 휘하.

쟈이로벨이 그런 고야드를 직접 처치하고 빼앗은 수준 높은 전리품이었다.

고야드는 므드라의 휘하 마왕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마왕이었다.

“너무들 좋아하지 마라. 무투대회가 끝나면 모두 회수할 거니까.”

생도들의 눈빛에 짙은 아쉬움이 스쳤다.

대충 설명만 들어 봐도 결코 크라울시스의 ‘천령의 안식’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루인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마계의 마왕급 마족이 사용하던 아티펙트를 이렇게 드러낸 것만으로도 ‘존재’들의 이목을 끄는 일.

이런 엄청난 아티펙트들이 계속 인간계를 활보한다면 ‘존재’들이 세계의 균형을 깨는 일이라 여기고 개입할 여지가 있었다.

멸망의 때라면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평화의 시대였다.

<전…….>

아쉬움이 가득한 루이즈의 눈빛에 루인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에겐 진노하는 침묵의 영언자가 있다. 마나 재밍(Mana Jamming)의 힘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너에겐 과해.”

아티펙트가 만능은 아니다.

자칫 역량을 돕기는커녕 마법사를 망칠 수가 있었다.

진노하는 침묵의 영언자 역시 아카데미의 창립자인 마도사 슈레이터의 걸작.

그녀에겐 그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그때.

-와! 저게 다 뭐죠? 무등위 생도들도 아공간에서 아티펙트들을 꺼냈군요!

시론의 검붉은 갑주.

칙칙한 검은 연기에 휩싸인 세베론.

기묘한 형태의 뿔을 쥐고 있는 리리아.

거기에 루이즈의 영체 투구까지.

모든 관중들이 루인 일행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루인 일행이 착용하고 있는 아티펙트의 정체를 유추해 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헬렌 교수도 마찬가지.

-대체 저 아티펙트들의 정체가 뭘까요? 저 역시 학자로서 정말 궁금하답니다!

이를 깨무는 크라울시스.

그 역시 루인 일행이 갑자기 소환한 아티펙트들의 정체를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 심상치 않았다.

가장 거슬리는 건 저 자신만만한 대공자 루인의 표정이었다.

“바보 같은 놈.”

자신을 쳐다보며 이를 갈고 있는 크라울시스.

루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작은 네가 먼저였다.”

감히 마신 쟈이로벨이 평생을 일구어 온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대마도사에게 아티펙트로 도발질을 하다니.

재물, 혹은 아티펙트로 루인을 도발하는 건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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