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52화 (152/187)

<152화>

-이미 그대의 가까운 곳에 계시지.

혼란스러운 한마디를 남기고 떠나간 왕국의 비밀 수호자들.

이미 루인은 자신의 감각을 모조리 차단한 채 이미지에 빠져든 상태였다.

‘대체 누구지?’

물론 유희의 삶에 오랜 세월 익숙해진 드래곤이라면 완벽에 가깝게 인간으로 위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영혼의 본질을 살필 수 있는 쟈이로벨과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해 왔다.

자신의 주변에서 드래곤이 활동했다면 드래곤 특유의 강대한 영혼을 쟈이로벨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물론 카알라고스가 그냥 드래곤은 아니었다.

신화 속의 창세룡인 그에게 마신 쟈이로벨의 감각조차 속일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권능이 있을 수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루인은 모두가 의심스러웠다.

전생의 인연이었던 적요하는 마법사 루이즈와 검성 월켄은 확실히 제외할 수 있는 인물들.

하지만 그 외의 리리아와 다프네, 시론, 세베론, 슈리에…….

헤데이안 학부장과 마탑주 에기오스, 아카데미의 모든 고등위 생도들, 심지어 가문의 혈족들과 방계의 구성원들까지.

그렇게 전생의 인연들을 제외하면 자신이 지금까지 만났던 거의 모든 인물들을 용의선상에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그가 왜 나를…….’

지고룡, 또는 창세룡이라 불리는 신화적인 드래곤이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을까?

루인이 유추해 낸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

절대악 발카시어리어스를 소환한 일이 창세룡의 이목을 끌었거나, 두 번째는 자신의 회귀의 비밀, 즉 미래를 아는 존재라는 것.

첫 번째는 적당히 대처하면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회귀의 비밀을 아는 것은 꽤 심각한 문제였다.

지금까지 세워 둔 계획의 전면 수정이 불가피한 것이다.

자신의 일에 창세룡이 개입한다?

분명 무수한 변수가 출현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한 치의 변수도 용납하고 싶지 않은 것이 대마도사인 루인의 치열한 본성.

그런 루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번 무투대회에 개입한 ‘너울거리는 그림자’보다 창세룡을 찾는 일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너울거리는 그림자를 찾는 일 또한 그리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미치겠군…….’

어쩐지 지금까지 너무 순탄하게 모든 일이 척척 진행된다 싶더라니 마침내 계획이 하나씩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검성이 성녀를 찾아 나선 후로 자꾸만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가 속속들이 튀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출전자 캠프로 다시 들어온 시론이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루인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루인?”

상념에서 깨어난 루인이 무심히 시론을 응시한다.

시론은 어딘가 모르게 묘한 루인의 눈초리에 괜히 위축됐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아니다.”

아무리 인간으로 위장해서 자신의 주위를 살피고 싶었다고 해도 저 시론이 창세룡은 아닐 것이다.

시론은 고고한 드래곤의 자아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 사람들은 누구였지?”

다음으로 캠프에 들어온 생도는 리리아.

‘리리아라…….’

리리아가 창세룡의 유희체(遊戲體)라면 그것도 그것대로 놀라운 일이었다.

무려 드래곤이 자신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느꼈다는 뜻이니까.

“뭐, 뭐예요?”

무턱대고 아래위를 훑어 대는 루인의 치밀한 시선에 황급히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는 다프네.

“가, 갑자기 왜 그런 식으로 보는 거죠?”

루인이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렇게 순진한 생도들을 대체 어떻게 창세룡이라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와아아아아아아!

갑작스레 들려온 함성.

관중석으로부터 캠프가 흔들거릴 정도의 열광이 터져 나온 것이다.

<예선이 시작된 것 같아요.>

루인이 캠프의 입구에 걸려 있는 대진표를 바라봤다.

“그놈들이 첫 번째군.”

이명 랭킹 1위의 뇌전의 기사 브훌렌이 속해 있는 파티.

생동하는 화염 유리우스와 그림자 혹한 타가옐의 바로 그 파티가 첫 번째로 예선전을 치르는 그룹이었다.

아카데미의 소식에 어두운 사람들도 그들이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저런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온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유리한 상황이다! 선배들의 훈련 성과를 미리 가늠할 수 있잖아!”

“우리도 구경 가요!”

“좋아!”

시론과 다프네가 서둘러 캠프를 나가자 리리아의 무심한 시선이 루인을 향했다.

“캠프에 남아 있을 건가.”

“아니. 함께 가지.”

악제를 추종하는 너울거리는 그림자가 이번 무투대회에 출현했다면 화려한 이명 랭커들 틈에 섞여 있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수세에 몰렸을 때 군단장의 역량을 드러내기 가장 좋은 환경을 선호할 테니까.

<귀빈석 근처에 좋은 자리를 봐 뒀어요.>

캠프를 나서던 루인이 루이즈를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적요하는 마법사의 순진했던 시절을 경험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리리아가 루이즈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렇게 좋은 자리는 이미 임자가 있을 거다. 귀빈석 근처니까 학장님과 교수님들의 자리겠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세베론.

“오오! 학장님이시라면!”

왕립 아카데미의 수장 ‘베벤토 학장’.

르마델이 자랑하는 초인, 수호자 드베이안 공과 더불어 왕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기사의 이름이었다.

그런 베벤토 학장의 명성은 조금은 묘한 감이 있었다.

한 번도 실력이 드러난 적은 없지만 왕국의 모든 백성들은 그를 수호자 드베이안 공이나 하이베른가의 사자왕에 버금가는 기사라 믿고 있었다.

대대로 아카데미의 학장은 왕국에서 가장 드높은 경지의 기사나 마법사가 맡아 왔기 때문.

그것은 마도사 슈레이터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라서 왕국의 누구도 베벤토 학장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수호자 드베이안.

베벤토 학장.

왕국의 기수, 사자왕 카젠.

환상검제 레페이온.

이 강력한 기사들이 바로 알칸 제국의 압력에도 르마델 왕국이 버틸 수 있는 진정한 원동력인 것이다.

당연히 생도들은 들뜰 수밖에 없었다.

루인이 세베론을 향해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지?”

“넌 안 떨려? 학부장님들은 많이 봤어도 학장님을 보는 건 처음이잖아!”

학장 베벤토.

최후의 때에 이르렀을 때 가장 먼저 1왕자 아라혼과 손을 잡은 인간.

그는 악제군 제17군단장 아라혼과 함께 누구보다 잔인하게 르마델 왕국을 파괴했던 인물이었다.

처음 아라혼을 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루인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심정이었다.

전생의 악연들을 다시 만나는 건 늘 불쾌한 기분을 동반했다.

‘…….’

분명 1왕자 아라혼에게는 르마델 왕가를 적대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랜 세월 데오란츠 국왕에게 정신적인 학대를 받아 온 것이다.

더욱이 그는 그런 아버지가 친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을 자기방어적으로 부정하며 살아왔다.

한데 대역 왕비마저 파티장에서 목을 매단 채 자살해 버린 광경을 직접 보기까지 했으니…….

‘놈은 아니었지.’

그와는 반대로 베벤토 학장에겐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최후의 때가 다가오기 전의 그는 그저 조용히 아카데미에서 지냈다.

학장은 귀족과 왕실의 영향력에서 가장 자유로운 신분.

덕분에 그는 더러운 권력의 암투에 한 번도 얽힌 적이 없었다.

반드시 주시해야 할 인물.

어쩌면 그가 르마델에 드리운 모든 흑막의 주인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루인이 캠프를 나왔을 때.

와아아아아아!

또다시 거센 함성이 들려왔다.

광대들이 절묘한 묘기를 부리며 입장한 것이다.

화려한 마법 아티펙트들을 활용하는 광대들의 묘기는 무투대회의 흥을 돋우는 데는 최고였다.

“하, 학장님이에요!”

“저분이!”

아카데미를 상징하는 새하얀 백합 문양의 깃발 아래, 베벤토 학장이 베스키아 리움에 입장하고 있었다.

관중들의 뜨거운 환영에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화답하는 그의 행동에 루인이 싸늘하게 웃었다.

‘가증스러운 놈.’

저 푸근한 웃음 뒤에 감추고 있는 짓눌린 마음은 과연 무엇일까.

대체 무슨 악독한 마음으로 살기에 그렇게 많은 르마델의 백성들을 처참하게 죽일 수 있는 걸까.

귀빈석의 최상층, 국왕 데오란츠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던 그는 수십여 명의 교수들과 함께 빈자리에 앉았다.

역시 루이즈가 봐 둔 자리였다.

광대들의 화려한 묘기가 삼십 분쯤 이어졌을 때 베스키아 리움에 격렬한 음악이 퍼져 나갔다.

르마델 왕국을 개국한 영웅들의 서사시가 담겨 있는 르마델의 국가, ‘칼과 영웅들의 정의(正義)’였다.

격렬한 리듬이 이어질 때마다 베스키아 리움의 모든 관중들이 함께 발을 구른다.

두두둥! 두두두!

관중들의 발을 구르는 소리가 마치 해일처럼 베스키아 리움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격렬하게 들끓는 군중 심리, 가슴으로부터 번져 오는 열광의 감정에 시론은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천 년 르마델, 드래곤들이 수호하는 왕국!

반면 그런 생도들과는 달리 루인은 무심히 베벤토 학장 쪽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르마델의 국가가 끝나자 사회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목소리 생도들도 본 적이 있는 마도학 개론의 헬렌 교수였다.

곧 그녀가 음성 증폭 술식이 새겨져 있는 새카만 박스 안으로 입을 가져다 댔을 때.

-아아. 잘 들리시나요?

네에에에!

관중석의 어린아이들과 생도들의 광기 서린 대답이 화음으로 터져 나왔다.

헬렌 교수가 흡족하게 웃었다.

-이번 무투대회의 진행을 맡게 된 헬렌 교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와아아아아아!

헬렌 교수가 웃으며 손을 들자 단번에 함성 소리가 잦아들었다.

-개최에 앞서, 이번 무투대회를 허락하시고 후원해 주신 데오란츠 국왕님께 먼저 깊은 경의와 존경을 드리는 바입니다.

그녀가 마법사의 마도, 고아한 수인으로 귀빈석의 최상층을 향해 멋들어지게 인사하자.

데오란츠 국왕이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몇 차례 함성이 더 터져 나왔지만 그때마다 헬렌 교수가 관중들을 제지시키며 깔끔하게 사회를 진행했다. 교수답게 노련한 진행이었다.

-팀 소개는 최대한 간략하게 하겠습니다.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경기를 이어 가는 것을 훨씬 좋아하시겠죠?

그때 갑자기 헬렌 교수가 루인 일행 쪽을 바라봤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번 무투대회는 굉장히 특별합니다. 우리 마법학부의 무등위 생도 하나가 기원제에서 역량을 드러낸 후로 오랫동안 무투대회를 준비해 온 여러 파티가 참가를 포기해 버렸죠.

루인으로선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긴 좌절감을 느낄 만도 했다. 초인 기사를 꺾어 버린 자신의 역량은 생도들이 감당하기엔 충분히 버거울 테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파티들이 우승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하지만 실망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그 무시무시한 무등위 생도를 상대하기 위해 특별한 생도가 이번에 새로 보결로 입학했으니까요.

첫 번째 출전자 캠프에 매달려 있던 붉은 커튼이 촤라락 아래로 쏟아진다.

동시에 화려한 마법 조명이 강렬한 빛을 발산했다.

-첫 번째 출전자를 지금 바로 소개해 드리죠. 크라울시스 생도와 그의 파티원들입니다.

하이렌시아가의 대공자 크라울시스가 천천히 걸어 나온다.

그의 뒤로 이명 랭킹 1위의 브훌렌, 생동하는 화염 유리우스, 그림자 혹한 타가옐이 차례로 등장했다.

“저, 저게 다 뭐야?”

입을 쩌억 벌리며 황당해하는 시론.

“……아티펙트?”

온몸을 화려한 대마법 방어 아티펙트로 중무장한 크라울시스.

그의 파티원 전원이 엄청난 아티펙트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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