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51화 (151/187)

<151화>

“권력을 탐한다라…….”

의외로 소드 힐의 노인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루인의 질문을 곱씹는 듯한 표정.

루인의 무심한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정답은 간단해. 숭고하다고 믿는 당신들의 의지에 아무런 욕망이 없었느냐에 관한 간단한 성찰의 문제거든.”

이 문제는 루인에게 굉장히 중요한 관점이었다.

대답의 여하에 따라 소드 힐이라는 단체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었으니까.

인간의 ‘순수’와 ‘욕망’을 나누는 관점은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의외로 단순하다.

오직 살아남고자 했던 것이 결성한 이유의 전부였던 인류 연합은 후대를 남기고자 하는 자연적인 종(種)의 본능, 즉 ‘순수’였다.

그래서 그 시대를 살았던 영웅들은 누구도 욕망을 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희생은 설명할 수 없는 숭고함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소드 힐이 이런 자신의 가치와 함께 나아갈 수 없다면 여기서 인연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들이 아무리 특별하고 대단한 역량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특히 당신들은 노인들이니 말이야.”

인간이 나이를 먹다 보면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가치를 더욱 추구하게 된다.

역사가 평가할 자신들의 삶을 더욱 신경 쓰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역사의 평가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명예욕을 낳게 된다.

명예도 엄연히 욕망에 속하는 인간의 특성.

자신의 이름과 가문, 혹은 특정 집단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것이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인간의 본성이었다.

“우리의 수호(守護)에 아무런 욕망도 없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겠군. 하지만 대공자, 그대 역시 화려한 대관식을 통해 전 왕국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았는가.”

소드 힐의 노인이 주장하는 논리는 간단했다.

명예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순수’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고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당연한 심리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리는 역시 인간의 관점.

루인이 굳이 왕국의 대규모 기원제에서 검성을 꺾은 것은 앞으로의 행보를 설계하는 효율적인 과정에 불과했다.

이왕 드러날 거라면 철저하게 계산된 연출을 통해 하이베른가와 자신의 명성을 최대한 드높인 것이다.

르마델을 장악하고 있는 기성 귀족들에게 압박과 혼란을 선사하고.

렌시아가의 폭정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귀족들에게 하이베른가가 구심점으로 등장하는 철저하게 계획된 연출.

단언컨대, 거기에는 루인의 어떤 사적 감정이나 욕망이 섞여 있지 않았다.

‘…….’

분노로 몸을 떨던 베리앙도 점점 이들의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화가 거듭될수록 드러나는 루인의 사고방식이 그만큼 기이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文明)은 그 자체가 욕망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성.

그들은 수를 늘리기 위해 대륙의 곳곳을 개간했고 그런 땅을 넓히고자 전쟁을 벌였다.

편하게 살기 위해 마법과 기술을 발달시켰고, 종의 영원한 안녕을 위해 후손들에게 지식을 전승했다.

인간, 특히 마도를 걷고 있는 마법사가 그런 인간의 역사를 부정한다는 것은 실로 우스운 일.

마법사들은 마도의 명예와 지식의 전승에 목숨까지 거는 족속들이다.

“실로 웃긴 인간이로군. 마법이야말로 거대한 욕망의 산물. 그런 욕망을 덕지덕지 몸에 두르고 있는 인간 주제에 감히 순수를 논하느냐? 나 역시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늘.”

루인은 그저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욕망의 시대.

멸망의 때에 이르렀을 때, 인간, 아니 모든 종족들은 오직 살아남고자 하는 종의 순수로 되돌아갔다.

욕망으로 쌓아 올린 문명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뼈저리게 경험한 루인.

‘……또 한 번 헛짓을 했군.’

처절한 멸망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거나 설득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바뀌어야 할 것은 저들이 아니라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허탈하게 웃고 있던 루인이 소드 힐의 노인을 쳐다봤다.

“그래. 나를 찾은 목적이 그거 하나뿐이야?”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왕실의 일에 개입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드래곤까지 데려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드래곤이 아무리 유희에 집착하고 호기심이 왕성하다지만 시간의 낭비를 극도로 혐오하는 종족이기도 했으니까.

“이번 무투대회의 참가를 허락하지 않겠네.”

“응?”

황당해진 루인의 두 눈.

“불사(不死)의 육체를 운운하며 우리를 협박해도 이번에는 소용없네. 이 일은 ‘카알라고스’ 님의 의지이기도 하니까.”

“……카알라고스?”

루인의 눈빛이 더욱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소드 힐의 노인이 언급한 대상 ‘카알라고스’는 ‘존재’들과 비견되는 이름, 지고룡(地古龍)의 전설적인 이름이었으니까.

“그가 살아 있단 뜻인가?”

“실존하신다.”

놀라운 말이었다.

지고룡은 단순한 드래곤이 아니다.

드래곤 종족의 신화 속에 존재하는 창세룡(創世龍).

지금 이 소드 힐의 노인이 하는 말은 인간의 문명으로 치면 ‘최초의 인간’이 살아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농담이 지나치군.”

드래곤은 마계의 마족처럼 무한을 살아가는 생명체가 아니었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드래곤의 활동 시대는 수만 년에 이른다.

그런 역사를 열었던 신화 속의 장본인이 지금까지 존재한다?

그 말은 그가 단순한 드래곤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만약 그가 신적인 존재라서 지금까지 살아 있다고 해도, 한낱 인간 귀족에 불과한 자신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은 농담같이 들릴 뿐이었다.

“거짓이 아니다 인간. 이 비셰울리스의 이름으로 지고룡님의 생존을 보증하지.”

드래곤의 이름으로 지고룡의 생존을 보증했다.

드래곤 종족도 마족과 비슷해서 이름을 거는 맹세에 굉장한 의미를 두는 종족이었다.

루인의 황당한 표정이 점점 누그러진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군.”

지금까지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이들이 지고룡 카알라고스의 사자(使者)라는 뜻.

자신의 행동을 제지하는 지고룡의 의도는 궁금했다.

하지만 인간 종족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중소 왕국의 은퇴자 집단과 지고룡이 무슨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더욱 의문스러웠다.

루인이 다시 눈을 빛냈다.

“혹시 당신들은 단순히 국가가 아니라 종족의 수호자 집단과도 연대하고 있나?”

루인의 질문에 베리앙, 아니 드래곤 비셰울리스의 대답이 이어졌다.

“수호자 동맹은 꽤 오래된 연맹이지.”

각 종족을 수호하는 자들의 연맹체가 있었다고?

그것도 드래곤들까지 포함한?

‘말이 안 돼.’

르마델 왕국을 수호하는 소드 힐의 노인만 해도 상위 경지의 초인이었다.

그렇다는 건 각국의 수호자 집단에도 초인들이 즐비하다는 뜻.

더욱이 각각의 종족을 수호하는 이종족들, 거기에 지고룡으로 대표되는 드래곤 종족의 수호 집단까지 합세했다라…….

그것은 오히려 과거의 인류 연합보다 훨씬 강력한 연합이라 할 수 있었다.

과거에도 이런 집단이 있었다면 세계의 멸망 앞에 한 번도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미래를 겪지 않은 자들에게 도대체 어디 있었냐고 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군.’

인류 연합이 그토록 처절하게 악제의 군단에 저항할 때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자들.

일단 루인은 자신의 출전을 막는 이유부터 물었다.

“이 무투대회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소드 힐의 노인이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그대는 ‘너울거리는 그림자’를 알고 있네. 혹시 그들의 주인이 누군지도 알고 있는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인.

“악제(惡帝).”

“……악제?”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드 힐의 노인.

각국의 수호자 집단이 오랜 세월 그를 추적해 왔지만, 아직 누구도 그를 인식하거나 지칭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한데도 이 하이베른가의 대공자는 명확하게 그를 호칭하고 있는 것이다.

“자, 자네가 그를 알고 있었다고?”

무한한 광기와 분노, 처절한 살의가 루인의 입가를 맴돌았다.

드래곤인 비셰울리스가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

한낱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밀도 높은 적개심이었다.

“알지.”

“……그, 그런!”

지금도 모든 수호자 집단이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실체에 다가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루인이 그를 호칭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꾸 옆길로 새지 말고 본론만 말해. 이 에어라인에 악제 놈이 출현하기라도 했나?”

“……이번 무투대회에 그 ‘너울거리는 그림자’에 소속된 자가 참가했네.”

“뭐?”

후일 악제의 군단으로 탈바꿈될 ‘너울거리는 그림자’에는 무수한 군단장의 후보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번 무투대회에 출전한다는 건 생도라는 뜻.

하지만 그런 악제의 군단장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루인은 한 번도 아카데미에서 그들의 존재를 인식한 적이 없었다.

“확실한 정보인가?”

“내 명예를 걸겠네.”

명예에 집착하는 노인이 명예를 걸었다.

루인이 다시 노인을 무심히 응시했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굳이 내 출전을 막는 이유는?”

“그대가 지킬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다시 루인이 피식 웃는다.

이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산전수전을 다 겪은 루인이 노인의 음흉한 속내에 놀아날 리가 없었다.

“내 역량을 뻔히 알면서 나를 보호하겠다고?”

“그대의 역량을 완벽하게 확인한 건 아니지 않은가?”

앞서 루인은 소드 힐의 노인에게 마신 쟈이로벨의 존재를 드러냈다.

거기에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다는 비밀까지 언급했다.

당시에는 아무런 마법적 역량이 없었기에 그런 식으로 협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초인의 강짜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초월자의 영역에 발을 들인 군단장이 벌써 출현했다는 뜻인가?”

“……군단장?”

헤이로도스의 술식.

마신 쟈이로벨의 마법.

거기에 진마력을 초월한 융합 마력과 만 년 이상의 이미지로 단련된 염동력을 종합해 볼 때 초월자가 아니고선 자신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즉, 이 평화의 시대에는 대마도사의 역량을 맞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악제의 수하를 일컫는 말이다. 질문에나 대답해. 너울거리는 그림자 놈들 중에 초월자가, 아니 상위 경지의 초인이라도 있나?”

쾌검술에 특화된 상위 경지의 기사 초인도 아직은 위험했다. 쾌검술의 초인은 모든 마법사의 마도와 상극이었다.

“그건 모르네.”

인상을 찡그리는 루인.

“그런데도 내가 위험하다고?”

“불확실한 미지(未知)는 언제나 위험하지.”

“쓸데없는.”

쯧 하고 혀를 차던 루인이 비셰울리스를 쳐다봤다.

“정말 이게 지고룡의 뜻이라고?”

“그렇다.”

드래곤, 그것도 신에 근접한 존재라면 한낱 인간의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자신을 주목했다면 그건 단 하나의 의미.

“혹시 그가 미래를 읽을 수도 있나?”

비셰울리스의 눈빛이 한층 깊어진다.

“모른다. 하지만 그분의 지혜는 감히 누구도 추측할 수 없다.”

피식.

“날 알고 있는 것도 지혜의 영역인가?”

“그분 역시 인간으로 활동하신다.”

“뭐?”

비셰울리스가 웃었다.

“이미 그대의 가까운 곳에 계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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