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에어라인의 중앙 블록에 위치한 원형 경기장 베스키아 리움(Besskea Leeum).
그 거대한 경기장에, 왕실의 청룡 문양이 아닌 아카데미의 백합 문양이 설치되어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블록 전체가 흔들거릴 정도의 열기.
무투대회를 관람하기 위해 방문한 왕실의 고위 왕족들, 재학 중인 생도들과 그들의 친인척들, 아카데미를 꿈꾸는 예비 꿈나무들, 새로운 후원자를 물색하는 귀족들과 상인들 등.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얗게 질려 버린 세베론.
예비 멤버로 등록한 자신도 이렇게 긴장이 되는데 직접 출전하는 친구들은 얼마나 떨릴까?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처음 경험하는 것은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출전자 캠프의 구석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다프네가 루인을 바라봤다.
“루인 님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요?”
피식 웃는 루인.
“너무 떨지만 않는다면 적당한 긴장감도 경기에 도움이 되지.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 꼭 나쁜 건 아니다.”
이렇게 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모여 자신들만 바라보고 있는데…….
정말 저놈은 사람이 맞단 말인가?
시론은 이 와중에도 충고와 조언을 늘어놓는 루인에게 한마디로 질려 버렸다.
“다프네가 그걸 물었냐고! 넌 안 떨리는지 묻고 있잖아!”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경기가 힘들 정도라면 관중석을 비워 달라고 정중하게 무투대회 집행위에 요청하든가.”
“그건 안 된다.”
아내의 손을 잡고 아이를 목에 태운 아버지들을 바라보며 리리아가 웃고 있었다.
에어라인의 한 블록에 3천 명 이상 모이는 건 왕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일.
과부하로 마정석이 버티지 못하고 부유 마법이 깨져 버리면 블록 전체가 추락의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베스키아 리움에 입장한 이들은 철저한 추첨으로 선정된 행운아들.
“저 사람들이 어떻게 잡은 행운인데.”
왕립 아카데미의 무투대회를 관람했다는 사실은 저들의 평생 자랑거리.
“그, 그게 더 무섭지. 여기서 실수하면 저들의 평생 술안주 거리가 되는 거잖아.”
<너무 무리하지 않으면 돼요.>
루이즈를 날카롭게 쏘아보는 시론.
시간이 흐를수록 루이즈도 점점 루인과 닮아 간다.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출전자들은 모두 고등위 생도들.
랭커를 상대하는 게 말이야 쉽지 무리하지 않고 어떻게 이길 수가 있단 말인가?
“국왕께서 입장하고 계세요!”
다프네의 외침에 모두가 귀빈석을 바라본다.
데오란츠 국왕과 대역 왕비, 그들을 따라 여섯 명의 왕자들, 그리고 세 명의 공주들이 차례로 귀빈석의 최상층에 입장하고 있었다.
어린 왕자와 공주들을 바라보는 루인의 눈빛이 금방 측은해졌다.
죽은 라슈티아나 왕비는 르마델 왕가의 역사에서 보기 드문 다산(多産)의 왕비.
국왕과 왕실에게 그토록 커다란 선물을 안겨 준 왕비를 데오란츠 국왕은 고작 성적 유희에 장단을 맞춰 주지 않는다고 무참하게 살해해 버린 것이다.
국왕이라 부를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국왕 가족을 훑어보던 루인의 시선이 아라혼에서 멈춰 섰다.
‘그에게 없었던 자신감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국왕 데오란츠 앞에서도 위풍당당했다.
아버지의 정을 갈구하던 어린 왕자가 마침내 왕의 길, 노련한 정치인의 삶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데오란츠를 상대로 정치적 우위를 점한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이 알려 준 방식대로.
그 순간 그와 시선이 마주 닿았다.
꽤 먼 거리였지만 아라혼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거리에서 정확히 자신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은 기사로서의 그의 실력도 만만치 않게 늘었다는 뜻일 터.
왠지 루인은 흐뭇해지는 심정이었다.
‘이게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인가.’
아버지가 된 적은 없지만 아마 이건 그런 감정과 비슷할 것 같았다.
“지금 시대의 왕실이 역사상 최고의 대가족이라더니 과연 엄청나군.”
무심한 리리아의 목소리.
국왕 일가로만 귀빈석의 상층을 다 채워 버리는 위용 앞에 그녀는 신기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한데 그때.
스스스스-
루인이 매섭게 눈을 빛내며 수인을 뻗는다.
출전자 캠프로 접근하는 은밀한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그만두게. 날세.”
출전자 캠프로 은밀하게 들어온 자는 은막의 수호자 집단 소드 힐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나이의 노인이었으나 전혀 다른 분위기를 지닌 존재.
루인은 그 노인이 기사(Knight)가 아니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봤다.
“마탑의 은퇴자로군.”
옴니션스 세이지(Omniscience Sage).
르마델 왕국의 또 다른 은퇴자들이자 수호자 집단.
숨은 마탑의 저력이 드디어 자신 앞에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루인이 친구들을 돌아봤다.
“잠시 나가들 있어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응? 갑자기 어디로?”
“그냥 나가요.”
다프네가 시론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다 그를 끌고 나갔다.
옴니션스 세이지의 마법사가 등장한 순간 그녀는 숨이 멎을 뻔했다.
마탑의 가장 드높은 층계에서 모든 입탑 마법사들을 굽어보던 초상화의 주인공이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초상화를 향해 무릎을 꿇은 채로 내내 영접하길 고대하던 스승님의 오랜 숭배 대상.
스승 에기오스가 대현자(大賢者)로 칭송하던 역사 속의 절대적인 마법사.
그는 틀림없는 마탑의 전대 현자 ‘베리앙’이었다.
다프네는 그가 역사가 아니라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루인의 친구들이 모두 캠프에서 나가자 루인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함부로 다른 인물을 데려오는 건 우리 협상에 없던 일인데.”
“사과하지. 그만큼 이 친구가 막무가내였네.”
전대 마탑주, 베리앙이 싱긋 웃었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정말 대단한 놈이군. 발걸음이 무의미하진 않았어.”
상대는 마치 자신의 숨은 역량을 모두 읽은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내 루인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이런 마법사가 초기에 죽었다고?’
눈앞에 서 있는 마법사의 역량은 그만큼 놀라웠다.
전생의 동료였던 적요하는 마법사 루이즈, 광휘의 마법사 헤스론, 최후의 현자 유클레아는 백마법의 역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높은 경지를 이룩한 마법사들.
한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베리앙 역시 그런 엄청난 마법사들에 비해서도 절대 경지가 낮게 느껴지지 않았다.
악제의 군단장들 중에서도 중위권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자였다.
“놀라움은 내 쪽이 더 큰 것 같은데.”
베리앙이 휘둥그레 눈을 떴다.
“내 경지를 가늠했다는 뜻이냐?”
“태연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몰라본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인상을 찡그리는 베리앙.
“말투는 왜 그렇게 건방진 것이냐?”
피식.
마도(魔道)의 세계에서 위계란 곧 실력, 즉 지닌 경지였다.
꼴에 마도사의 영역에 발을 들였답시고 목에 힘 좀 주려나 본데 이쪽은 그 마도사의 서술 앞에 ‘대(大)’ 자가 하나 더 붙는 몸이라서.
루인이 망설임 없이 융합 마력을 천천히 흩뿌렸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 실체와 현상은 직접 가늠하기 전에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마도의 이치.”
츠츠츠츠-
가공스러운 위력의 융합 마력, 측량할 수 없는 염동력이 촘촘한 밀도로 짓쳐 오자.
베리앙이 바삐 손을 휘저어 루인의 마법을 힘겹게 막아 냈다.
복잡하고 오묘한 술식, 수많은 이치가 녹아 있는 루인의 회로 구현력에 베리앙이 경악의 얼굴을 했다.
“이, 이게…….”
자신이 가늠했던 경지는 눈앞의 소년이 지닌 진정한 경지가 아니었던 것.
“이게 헤이로도스의 술식인가?”
한없이 진지한 표정.
루인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열정으로 불타는 그의 눈빛 앞에서 거짓을 말하진 않았다.
“기본은 헤이로도스의 술식 구현법. 거기에 나만의 마도가 녹아 있다.”
저 어린 나이에 감히 마도(魔道)를 입에 올리면서도 한 치의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그 태도가 어색하진 않았다.
그의 확고한 단언처럼 백마법의 체계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미지의 술식 구현력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 어린 소년에게 어떻게 저런 가공한 마도가 가능한지 베리앙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존재’인가?”
루인이 깜짝 놀랐다.
“인간들에게는 신일 텐데?”
인간들은 신을 결코 경지로 구분하지 않는다.
위대한 신들을 ‘존재(存在)’로 칭하는 이들은 인간들 중에서도 극소수였다.
그 말은 눈앞의 노인이 타 종족, 특히 드래곤들과도 충분한 교류를 하고 있는 뛰어난 인간, 혹은…….
순간 루인의 눈빛이 기이해진다.
“호오, 이제 보니…….”
어쩐지 인간 백마법사의 마력치고는 활성력이 독특하더라니.
이 정도로 독특한 활성 파장을 지닌 마력은 가만 생각하니 단 하나밖에 없었다.
용맥(龍脈).
다른 말로는 용마력.
오직 드래곤, 그것도 성체까지 자란 드래곤만이 보유할 수 있는 특유의 마력이었다.
“나는 너희들의 같잖은 유희에 놀아나는 한가로운 사람이 아니다. 할 말이 있다면 연기 따윈 집어치우고 다시 찾아와라.”
그것은 폴리모프(Polymorph) 따위로 정체를 숨기지 말고 본체로 다시 찾아오라는 의미.
분명 드래곤의 유희 따윈 상대하지 않겠다는 대마도사의 단호한 선언이었다.
순간 베리앙의 두 눈에 모호한 빛이 담긴다.
인간의 옛 역사로부터 ‘위대한 존재’로 불려 온 에이션트 드래곤인 자신을 단숨에 알아보는 인간이라니.
한데 알아보는 건 둘째 치고라도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걸 안 인간이 이토록 건방지게 반응을 해 온다고?
“감히 내가 본체로 와도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이냐?”
“못할 것도 없지.”
루인의 전생.
인연으로 얽혔던 드래곤들은 몇 마리 없었지만 루인은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고고한 드래곤을 굴복시키는 일은 대마도사의 가장 중요했던 임무 중 하나.
“감히!”
순간 베리앙은 지금까지의 유희의 삶을 끊어 내 버릴 뻔했다.
베리앙이라는 인물은 그가 오랜 세월 공들인 유희의 완성.
한데도 순간의 분노에 사로잡혀 폴리모프를 해제할 뻔한 것이다.
말없이 지켜보던 소드 힐의 노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이러실 줄 알고 그동안 제가 한사코 말린 겁니다.”
소드 힐의 노인은 루인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신을 소환할 수 있는 인간이 드래곤을 위대한 존재로 예우할 리가 없는 것이다.
루인이 소드 힐의 노인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미리 말도 없이 용은 왜 데려온 거지? 싸움이라도 붙일 작정인가?”
“……대체 왜 그랬나?”
“응? 뭘?”
더욱 한숨을 내쉬는 소드 힐의 노인.
“1왕자가 대역 왕비의 정체를 볼모로 국왕을 협박하고 있네. 그 일에 자네가 개입되어 있다는 걸 알고 왔지.”
“그게 어때서?”
내내 잔잔한 마음을 유지하던 소드 힐의 노인도 지금만큼은 참지 못했다.
“아라혼이 왕이 된다면 너무 큰 혼란이 초래되네! 왕가의 역사에서 공고한 기득권이 단숨에 무력화된 예가 존재하는가!”
루인은 대답 없이 소드 힐의 노인을 무심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야 왕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저 노인들의 음흉한 속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랬군.”
역사에 개입 혹은 간섭하는 일을, 고작 기득권을 보호하는 짓 따위를 감히 수호(守護)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다니.
“이제 보니 개같은 늙은이들이었군.”
루인이 투툭 목을 풀었다.
“왜 우리 연합에 얼굴 한 번 비치지도 않고 모조리 죽어 버린지를 이제야 알겠어.”
“그게 무슨 말인가!”
씨익.
루인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너희들. 혹시 왕국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탐하나?”
권력, 이권, 욕망, 탐욕.
악제(惡帝)는 그런 부정한 것들을 탐하는 인간들을 누구보다 손쉽게 유혹할 수 있는 악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