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49화 (149/187)

<149화>

진마강체로 펼치는 혈주신(血珠身)은 아니었다.

비록 인간의 몸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육신을 구동하는 주체는 마신 쟈이로벨.

쿠쿠쿠쿠쿠쿠―

하이렌시아가의 거대한 성채, 피닉스 타워가 주춧돌까지 흔들리고 있다.

혈우 지대의 정복자, 마신의 쟈이로벨의 광활한 마(魔)의 권능.

투기를 몸에 새기고 있는 기사들조차 난생처음으로 경험하는 상상 밖의 힘.

그 엄청난 힘에 하이렌시아가의 실바릴이 온몸을 떨고 있었다.

기사로서의 명성으로만 따진다면 가주 레페이온보다도 더욱 드높은 기사.

언제나 동요 없이 무심하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던 위대한 기사가 단숨에 두려움에 물든 것이다.

스으으으…….

쟈이로벨을 중심으로 뻗어 나간 자줏빛 마기.

마치 자신의 촉수를 다루듯, 자유자재로 마기를 다루던 쟈이로벨이 씨익 웃으며 모든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이런 이런.”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들을 훑어보는 쟈이로벨의 시선에, 기사들이 일제히 정신을 차리며 검을 고쳐 잡았다.

“표정들이 확연하게 달라졌군. 역시 인간들은 말이지. 힘을 보여 줘야 얌전해지지.”

뱀의 혀처럼 너울거리던 쟈이로벨의 마기가 모든 기사들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쟈이로벨이 실바릴을 응시했다.

“어때? 초인 기사? 네놈 같은 경지의 인간이 열 명쯤은 덤벼야 가능하지 않겠나?”

실바릴은 온몸이 땀으로 젖고 있었다.

투기와 의념(意念)을 봉인하고 철저하게 실력을 감춰 온 세월이 이십여 년.

상대는 가주 레페이온은 물론 하이렌시아가의 어떤 고위 기사도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의 진정한 실력을 단숨에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하이렌시아가가 자랑하는 위대한 기사, ‘궁구하는 자’ 실바릴답게 그는 마침내 냉정을 되찾았다.

“당신은 어떤 존재이십니까.”

실바릴의 질문에는 인간이 아닐 것이라는 함의가 담겨 있었다.

불길하고 광활한 자줏빛 권능.

이 측량할 수 없는 힘이,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역량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은 날 협박하기 전에 했어야 했다.”

“…….”

씨익.

“감히 신(神)을 향해 참람되게 죽음을 입에 담았다면―”

촤아아아아!

그물처럼 뻗어 나간 마신의 마기.

“커헉!”

“크아아아악!”

마기에 의해 둥실 떠오른 몇몇 기사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압착되듯, 순식간에 강철 갑주와 함께 오그라지며 점(點)처럼 변해 버린다.

사람의 형체가 점으로 변하며 후드득 흘러내리는 핏물.

갑작스레 펼쳐진 지옥도, 그 기괴하고 소름 돋는 광경에 기사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굳어 버렸다.

“대가는 이런 것이지.”

죽은 자들은 실바릴의 명령에 가장 먼저 반응하며 검을 치켜들었던 선두의 기사들.

감히 마신을 살해하겠다는 의지를 품었으니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한 것이었다.

마침내 쟈이로벨은 그런 명령을 내린 주체, 실바릴을 향해 산보를 하듯 걸어갔다.

물론 실바릴은 가만히 서서 당하진 않았다.

그가 이십 년 이상 품어 온 봉인을 해제한다.

본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광활한 투기가 그의 주위로 뻗어 나간다.

콰아아아앙!

쟈이로벨의 두 눈이 이채를 머금었다.

실바릴의 투기에 의해 성곽 외부가 순식간에 땅거죽을 드러낸 것이다.

그건 마치 지각 해일.

“호오. 놀랍군.”

검술을 수련한 인간 기사라면 질릴 정도로 많이 지켜봐 온 쟈이로벨.

이 정도 수준이라면 탈초인을 눈앞에 둔 자였다.

알칸 제국도 아닌 르마델 왕국에 초월자에 근접한 자가 숨어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깨달음을 얻고 몇 발자국만 더 나아간다면 르마델의 건국왕이나 초대 사자왕 사홀 같은 괴물이 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런 존재가 제 실력을 감추고 하이렌시아가의 권속으로 살고 있었다.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음흉한 놈이로군.”

쟈이로벨의 음침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실바릴은 마치 자신의 본질이 꿰뚫린 것만 같았다.

상대의 분위기에 더 휘말렸다간 기사의 검의(劒意)가 흐트러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실바릴이 억세게 검을 움켜잡는다.

유형화된 투기가 거대한 투석기처럼 쟈이로벨을 향해 쏘아진다.

스피릿 오러의 상위 단계, 스피릿 오러 블레이드(Spirit Aura Blade)야말로 명백한 초인의 상징.

콰아아아앙!

집채만 한 크기의 스피릿 오러 블레이드가 무참히 작렬하며 쟈이로벨의 주변으로 자욱한 먼지가 일어난다.

푸스스스스―

먼지가 가라앉는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검성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아직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경지인 ‘스피릿 오러 블레이드’도 놀라웠지만, 상처 하나 없이 웃고 있는 쟈이로벨이 더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 초인의 스피릿 오러 블레이드를 물리적으로 막을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계에 존재하는 모든 단단한 금속들을 무처럼 벨 수 있는 위대한 경지.

현자의 경지인 9위계의 배리어 마법으로도 막을 수 없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초인의 검이었다.

드래곤의 비늘마저 뚫을 수 있다는 그런 위대한 초인의 검을 도대체 무슨 수법으로 막아 냈단 말인가?

상위 초인의 경지인 스피릿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하는 기사는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 세계의 재앙이었다.

절대병기 마장기(魔裝機)를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기 때문.

스피릿 오러 블레이드를 정복한 기사가 국가의 전략 자산으로 취급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놀람이 당사자보다 더할까?

“대체 무슨 수법을……?”

극도로 당황해하는 실바릴.

분명 검 끝에 걸리는 감각, 어떤 저항감도 없었다.

마법사의 술식흔(術式痕)도, 투기 고유의 파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저 눈 녹듯이 스피릿 오러 블레이드의 거대한 파괴력이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흐음. 역시 인간들인가. 시공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군.”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고 있는 쟈이로벨.

마신의 권능을 인간들이 해석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공격이 아무리 강력해도 시공을 이해하는 초월자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못하는 이상 자신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스피릿 오러 블레이드의 물리력을 주변 공간의 틈을 벌려 모조리 그곳으로 밀어 넣어 버린 것이다.

“지겹군. 이만 끝내지.”

이 자리의 어떤 인간도 자신의 흥미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오랜만에 마신의 권능을 드러냈지만 실로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전투.

한데 그때.

“그는 죽어선 안 될 존재다.”

하녀 아르디아나, 아니 미래에 성녀가 될 ‘존재’가 나서서 실바릴의 전면을 막아서고 있었다.

“호오, 나야 반갑지.”

다시 흥미가 인 듯, 쟈이로벨이 비릿하게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녀가 자신을 막아섰다는 건 본래의 신격을 드러내겠다는 의지의 항변이었으니까.

-혈우(血雨)의 군주. 더 이상 인간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느니.

그것은 인간의 언어 체계에 속하는 절대언령도 음성전송술도 아니었다.

신의 의지 자체가 그대로 영혼에 전달되는 ‘존재들’의 신언(神言).

그녀가 신성(神性)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였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이 혈우 지대의 정복 군주, 마신 쟈이로벨이라는 것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보자마자 마신의 존재감을 읽어 낼 수 있다는 건, ‘존재들’ 사이에서도 지위가 상당히 높다는 뜻.

또한 마신 쟈이로벨이 아는 ‘존재’일 확률이 높았다.

“누구지? 이알스토? 헤타르아? 고르만? 엘세스?”

직접적으로 대면한 적이 있는 ‘존재’들을 모두 읊어 대기 시작하는 쟈이로벨.

그 순간 기사들이 일제히 하녀 아르디아나를 바라본다.

실바릴의 검을 간단하게 막아 낸 주인공이 한낱 하녀의 신분을 신으로 유추하고 있었기 때문.

대장장이 신 이알스토.

전쟁의 신 헤타르아.

천둥의 신 고르만.

미의 여신 엘세스.

그들 모두가 영적인 존재였으며 유사 이래 인간들이 추앙해 온 초월적인 신격들이었다.

아르디아나가 계속 침묵하자 쟈이로벨이 인상을 찡그린다.

“날 막아설 작정이라면 신격을 드러내겠다는 뜻이 아니었나? 어차피 여기에 있는 인간들의 기억은 지울 수 있을 텐데?”

아르디아나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뭔가 포기한 듯한 그녀의 표정.

“듣던 대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아이군.”

“아이?”

자신을 ‘아이’로 지칭했다는 충격보다 서두의 ‘듣던 대로’라는 표현이 쟈이로벨은 더욱 소름이 돋았다.

그 말은 자신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고서도 마신의 권능을 읽어 냈다는 뜻.

쟈이로벨이 아는 한 그런 능력을 가진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본질을 읽어 내는 존재.

태초신의 근원에 닿아 있는 자.

하지만 그 신비의 존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 세계에 현신(現身)한 적이 없었다.

마계에 ‘태초의 어둠’ 발카시어리어스가 있다면.

“설마 알테이아?”

드래곤을 수도 없이 거느린, 태초신과 함께 세계의 창조에 관여한 신들의 신.

주신(主神), 알테이아.

쟈이로벨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신성을 언급하는 순간 기사들의 낯빛은 금세 창백해졌다.

“주신 알테이아……!”

“아, 아르디아나가?”

알테이아.

주신의 현신.

대륙 몇몇 교국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불사조의 성은 당장 성지가 될 것이다.

수백만 교국 신민들이 울부짖으며 찬양하는 신의 대지가 되는 것이다.

갑작스레 닥친 극도의 비현실.

아르디아나가 주신 알테이아라는 사실은 실바릴의 검을 아무런 저항 없이 막아 낸 눈앞의 초월자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사실이라면 지금 이 순간은 앞으로 영원히 기록될 역사의 현장.

“그 아이에게 돌아가라.”

쟈이로벨이 더욱 호기심 어린 표정을 했다.

대상을 지칭하진 않았으나 알테이아는 명백히 루인을 인지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

-이곳은 걱정하지 말라. 결국 막을 순 없겠으나 악의 발아(發芽)는 최대한 늦출 것이니.

쟈이로벨이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다.

“놈의 과거를 알고 있는 건가?”

아르디아나의 얼굴에서 말할 수 없는 슬픈 빛이 떠올랐다.

그런 그녀의 표정만으로도 쟈이로벨은 즉각적으로 모든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녀가 루인의 모든 생애를 알고 있다는 것을.

주신 알테이아.

창조신의 권능을 이어받은 이 세계 최고의 신격.

그런 존재라면 어쩌면 루인을 과거로 보낸 일에 그녀가 개입되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때가 되면 다시 만날 것이다. 그랬던 것처럼……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나를 다시 만나겠지.

그때.

털썩. 털썩.

주변의 기사들이 볏짚 쓰러지듯 우르르 쓰러졌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이 광경을 지켜본 모든 인간들의 기억이 사라진 것이다.

쟈이로벨이 무심하게 쓰러져 있는 실바릴을 바라봤다.

“저놈은 아무리 봐도 인간이 아닌데. 짐작대로 당신들의 ‘아이들’인가?”

쟈이로벨은 실바릴을 통해 하이렌시아가를 움직이는 비밀스러운 힘의 일부를 엿보았다.

저 초월자에 근접한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다.

신들의 후손, 타이탄족.

쟈이로벨은 그들의 정체를 그들의 어머니에게 직접 묻고 있는 것이었다.

-……불행하고 가여운 아이들이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쟈이로벨.

검성 월켄을 둘러업고 서서히 멀어지던 그가 문득 아르디아나를 향해 돌아봤다.

“이번에는 악제 따위에게 먹히진 않겠지?”

“…….”

주신 알테이아, 성녀 아르디아나는 그저 처연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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