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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베른가의 대공자-148화 (148/187)

<148화>

평생을 강력한 진마강신(眞魔剛身)으로 살아온 쟈이로벨에게 인간의 몸이란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더우면 땀을 흘려 체온을 낮춰야 하고 추위에는 두꺼운 외투를 걸쳐야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나약한 육체.

각종 감각의 민감도 또한 마찬가지.

고파장이나 저감도의 음파를 구분할 수 없는 청각의 비루함이나 어두운 공간에서 극히 제한되는 시야는 동물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대체 이런 비루한 육체로 어떻게 모든 이종족을 몰아내고 이 세계의 지배종이 될 수 있었는지가 의문스러울 정도.

며칠이나 걸었다고 벌써 탈이 나기 시작한 비스토의 한심한 육체에 쟈이로벨은 신경질적으로 멈춰 섰다.

“정말 병신 같은 육체군.”

-마, 마신님! 어떤 인간도 사흘 이상 잠 한숨 안 자고 걷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네 정신처럼 한심하다는 것이다.”

쟈이로벨은 루인의 육체에 깃들어 있던 때처럼 영혼에 머무르며 관조하는 방식을 버렸다.

그랬다간 비스토의 정신이 마신의 광대한 격(格)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비스토의 몸을 통제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인간의 비루한 육체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것.

더욱이.

“넌 정말 처참함 그대로의 인간이구나.”

심장을 휘돌고 있는 미약한 마력.

무슨 마력이, 술식 하나 구동하기도 벅찬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모기 눈물 같은 마력에 쟈이로벨은 웃음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래. 이 정도가 인간의 평균이겠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게 정상, 이게 인간이었다. 오직 루인이 돌연변이이자 괴물인 것이다.

그렇게 쟈이로벨은 마신의 술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루인이 새삼 미친놈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결국 도착했군.”

멀리 보이기 시작한 뾰족한 성.

광활한 평원 위로 첨탑처럼 우뚝 솟아오른 특이한 형태의 저 성은 틀림없는 불사조의 성일 것이다.

휘우우우우…….

평원의 바람이 잔잔하게 몰아친다.

뾰족이 솟아오른 첨탑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양 날개.

하이렌시아가 자랑하는 특이한 형태의 망루, 불새의 눈(Eyes of the phoenix)이었다.

저 드높은 망루에 서면 무려 알칸 제국의 영토까지 바라볼 수 있다고 전해진다.

“음…….”

악제의 영혼 포집술에 의해 희생당한 에오세타카의 권속들을 추적하기에 앞서 더 시급하게 살펴야 할 것은 검성 월켄의 안전.

하지만 막상 하이렌시아가에 잠입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여차하면 강림체로 현신해서 마신의 신위를 드러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최후의 방법.

일단은 비스토의 신분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 좋은 방법을 생각해 봐라.”

-하, 하이렌시아가입니다! 마법 생도 따위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을 겁니다!

하이렌시아가는 르마델 왕국의 모든 귀족들을 대표하는 초거대 가문.

마탑의 일원이라면 모를까, 아카데미의 생도 따위를 그들이 손님으로 예우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콰아아아앙-

평원에 거대한 폭발음이 일었다.

하이렌시아가가 자랑하는 왼 날개의 거대한 망루 하나가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 광경을 더욱 자세하게 바라보는 쟈이로벨.

거대한 망루, 불새의 눈을 박살 내 버린 것은 틀림없는 기사의 투기(鬪氣)였다.

쟈이로벨도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는 월켄의 투기, 혼돈의 오러.

“거기서 더 발전한 건가.”

하이베른가에서 수련할 때보다 투기의 파괴력이 더욱 짙어진 듯 보였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

하지만 뭔가 일이 생겼음이 확실했다.

“네 육체가 조금 망가질 것이다.”

-네? 어, 얼마나……?

“글쎄. 네놈의 육체가 너무 연약해서 예측하기가 힘들군. 혈주신의 열기에 전신에 화상을 입거나 어쩌면 불구가 될지도.”

-부, 불구라뇨? 아, 안 됩니다! 마신님!

“어차피 네놈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우드드득!

순식간에 마신의 분노가 비스토의 육체를 집어삼킨다.

강제로 혈주신(血珠身)을 구동한 것이다.

주르르륵-

시뻘건 핏물이 온몸의 모공에서 뿜어져 나왔다.

상상하기 힘든 고통에 비스토가 처참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아아!

고작 이런 게 무슨 고통이라고 저렇게까지 비명을 내지르다니.

그런 비스토의 연약한 정신력에 불쾌했는지 쟈이로벨이 비릿하게 웃으며 감각의 공유를 끊어 냈다.

이제 비스토는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채 어두운 정신의 공간에서 내내 부유할 것이다.

“으음…….”

아무래도 강제로 혈주신으로 만들다 보니 육체에 많은 무리가 간 듯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비루했던 감각이 더욱 무뎌진 느낌.

하지만 역시 혈주(血珠)로 강화된 활력만큼은 이전보다 수십 배 강화되었다.

탓!

모든 장애물을 무시하고 직선으로 달리기 시작한 쟈이로벨.

나뭇가지, 돌부리와 같은 장애물에 온몸에 피가 튀었지만 쟈이로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놀라운 속도로 불사조의 성에 근접한 쟈이로벨이 무너져 내린 망루의 아래를 바라본다.

역시, 망루의 주변으로 모여든 하이렌시아가의 기사들이 월켄을 물샐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의 뒤편.

평범한 하녀복을 걸친 어린 소녀의 두 눈과 마주하는 순간.

쟈이로벨의 눈빛에 기이한 빛이 감돌았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영혼의 근원을 살필 수 있는 마신의 권능.

분명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영혼의 본질이 어딘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끝없이 모호한 느낌.

쟈이로벨은 그녀가 루인이 말하던 성녀 아르디아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런 존재가 순백(純白)의 성녀라고?’

성스럽고 고결한 느낌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끝없이 모호하고 신비한 느낌은 들었지만, 저런 의뭉스러운 존재가 영혼마저 치유할 수 있는 성결함을 지녔다고는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악제?’

하지만 악제도 아니었다.

이미 검성의 몸에 사념으로 침투한 악제를 느낀 바 있는 쟈이로벨.

마치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영혼의 공허.

그런 광대무변한 존재감과는 분명 거리가 멀었다.

마치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으하하하하하!”

순간 광소를 터뜨리는 쟈이로벨.

드디어 그녀의 실체를 추측해 낸 것이다.

‘존재!’

인간들에겐 신(神)이라 불리는 절대적인 이름.

제법 철두철미하게 인간을 흉내 내고 있었지만 틀림없었다.

저 여자는 마계의 대척점에 서 있는 위대한 존재(存在)였다.

“크흐흐흐. 어쩐지.”

신들은 절대로 인간의 일에 개입해선 안 된다.

그것은 섭리를 거스르는 일.

그 사실이 쟈이로벨은 재미있었다.

그 고귀한 ‘존재’들이 섭리를 무시하고 인간들의 일에 휘말리다니.

‘그만큼 악제란 놈이 대단하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루인의 과거가 단순히 인간들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

악제의 군단과 인류 연합의 전쟁 자체가 신들이 개입된 결과란 뜻이었다.

퍼즐이 맞추어진다.

루인은 분명 ‘존재’들이 철저하게 인간의 멸망을 방관했다고 했다.

하지만 벌써부터 인간들의 틈에서 뭔가 일을 도모하고 있다면 그것은 방관이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이 일은 무한을 살아가는 마신의 권태를 잊을 만큼 흥미로운 일이었다.

일단 쟈이로벨은 검성을 살폈다.

월켄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심각한 상태였다.

먼저 가슴을 깊게 파고든 검상.

‘호오, 저 상태로도 서 있을 수 있다니.’

피를 저만큼이나 흘리고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 쟈이로벨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처절한 투기,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혼돈의 오러는 더 심각해 보였다.

무리하게 한계를 넘나들어 폭주 직전의 상태에 놓인 것이다.

그가 얼마나 처절하게 사투를 벌여 왔는지를 단숨에 느낄 수 있었다.

저벅저벅.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몇 명의 기사들이 쟈이로벨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넌 누구냐!”

“거기 서라!”

허물어진 망루의 잔해를 태연하게 넘으며 걸어오는 소년.

“여어, 검성 잘 지냈나?”

기사들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던 월켄이 힐끔 쟈이로벨을 쳐다본다.

웬 어린 소년이 자신을 친근하게 부르니 그도 당황한 것이다.

게다가 검성?

자신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루인.

그의 비밀, 회귀(回歸)의 사실을 모른다면 결코 언급할 수 없는 칭호였다.

눈앞의 소년이 루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뜻.

“음. 역시 괜찮지 못해 보이는군. 저 존재…… 아니 성녀의 확보가 여의치 않았던 건가?”

이번엔 아르디아나의 두 눈이 폭풍을 만난 것처럼 흔들거린다.

한껏 동요한 아르디아나의 눈빛이 쟈이로벨에게 향했다.

“…….”

분명 정확히 자신을 지칭하며 존재(存在)라고 언급했다.

정체를 철저하게 감추고 있음에도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난 인간들의 갈등에는 관심이 없다.”

쟈이로벨의 손가락이 향해 있는 곳.

“검성을 이쪽으로 보내라.”

기사들을 지휘하고 있던 하이렌시아가의 위대한 기사, 실바릴이 물었다.

“도대체 검성이 누구지? 어처구니가 없는 놈이군.”

어린놈의 말투가 너무 묘하다.

마치 만물을 깔아 보는 느낌.

알칸 제국의 황제도 저놈보다는 덜 오만할 것이다.

“그 복장은 아카데미의 생도복인 것 같은데. 먼저 이름과 신분을 밝혀라. 생도.”

쟈이로벨이 기이하게 웃었다.

“이름과 신분? 밝히면 저 월켄을 내어 줄 건가?”

“이제 보니 미친놈이군.”

더 말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 실바릴이 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저 소년을 제압하라. 반항한다면 사살해도 좋다.”

“사살?”

흐음- 하며 심드렁하게 기사들을 훑어보는 쟈이로벨.

“굳이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씨익.

오히려 반갑다.

인간의 미약한 육체였지만 어쨌든 전투.

그래도 루인의 당부도 있는데, 양심상 한 번은 더 물어봐야 했다.

“마지막으로 묻지. 정말로 나와 싸울 셈이냐?”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실바릴이 고개를 외면했을 때.

“좋아.”

쿠쿠쿠쿠쿠쿠쿠-

흉포한 마신의 잔상이.

비스토의 육체를 통해 환상처럼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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