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훈련장 주변의 모든 생도들이 멍하니 푸른빛의 거대 괴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론 역시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이 도저히 현실로 믿기지가 않았다.
“……정령인가?”
홀린 듯이 중얼거리는 다프네.
“마, 말도 안 돼요! 저렇게 흉악하게 생긴 정령은 들어 보지도 못했어요!”
기본적으로 정령들은 모두 아름답다.
가장 포악한 성격을 지닌 불의 정령들조차 그 아름다운 외향에 넋이 나갈 정도라고 하니까.
한데 루인이 소환한 건 그런 정령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거대 괴물이었다.
한눈에 봐도 이 인간계에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기괴한 형태의 푸른 괴수.
그 흉악한 모습은 마치, 인간들이 막연히 상상해 온 마계의 생명체 같았다.
푸아아아악!
거대한 불기둥을 모두 삼킨 거대 괴수의 입 주변으로 희뿌연 수증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괴수는 두려운 눈으로 한 차례 루인을 바라보더니 이내 마력 증기가 되어 천천히 산화되어 갔다.
푸스스스스-
환상처럼 마력의 잔향만 남기고 허물어지는 거대 괴수.
담담히 마력권까지 모두 회수한 루인이 냉랭하게 생도들을 노려보았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생도들.
시론의 얼굴엔 아직도 황당한 기색이 가득했다.
“도대체 방금 그 괴물은 뭐야?”
“…….”
루인은 설명할 수 없었다.
백마법엔 이런 체계가 없으니까.
시전자의 의식과 마력을 투영하여 현상계에 의지를 가진 생명체를 잠시 구현할 수 있는 레메옴 자타르(ѓЄЂԅѳѫ ѥѱґґѧ)는 마신(魔神)의 술식.
굳이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의식의 인형’이라는 뜻인데, 애써 설명해 봤자 그 이치를 살피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내 마법이다.”
“아, 아니 그게 무슨 마법!”
리리아의 냉랭한 목소리가 끼어든다.
“헤이로도스의 술식이겠지.”
“응? 헤이로도스 님의 마법에 이런 소환술이 있었다고?”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는 다프네.
“그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헤이로도스의 술식을 제대로 해석한 마법사가 지금까지 없었으니까요.”
당대의 마탑들은 물론 역사 속의 위대한 마법사들도 헤이로도스의 술식을 모두 이해하진 못했다.
그래서 헤이로도스의 술식을 구현해 낸 루인에게 르마델의 현자까지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정령 소환술의 일종인가요?>
정령 소환술은 요정족의 특권.
그러나 간혹, 자연과 교감하는 재능이 뛰어나 정령 소환이 가능한 마법사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일은 매우 희귀한 사례였다.
“아니. 정령하고는 달라.”
정령은 엄연히 현상계에 살아 있는 존재, 즉 실체가 있었다.
하지만 ‘레메옴 자타르’는 자신의 의식과 마력으로 새롭게 창조해 낸 즉, 의식 구현에 가까웠다.
<그럼…… 방금의 그 괴물이 루인 님의 ‘종속체’였나요?>
루인의 두 눈이 한껏 동요하고 있었다.
“그걸 느낀 건가?”
<아! 그렇다면 마력으로 시전자의 의식을 구현하는 방식…….>
정말 놀라웠다.
고작 한 번 본 것만으로 루이즈는 레메옴 자타르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방금 그 괴물은 루인 님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요. 소환술이 아니라면 루인 님의 의식으로 구현한 종속체의 반응이겠죠. 정말 놀라워요. 그게 가능한 거였다니…….>
시전자의 의식과 마력을 실체적인 존재로 구현해 낼 수 있는 경지.
그것은 ‘그런 경지가 존재할 것이다’라는 막연한 상상, 즉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경지였다.
<저도 배우고 싶어요!>
루인은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루이즈를 향해 나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마법의 실력보단 의식의 깊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르친다고 해서 쉽게 가능한 것이 아니야.”
<의식 자체를 수련해야 하는 문제인가요?>
“수련?”
대마도사의 의식이 생도의 수련으로 가능할 리가 없었다.
루인이 활짝 웃으며 루이즈의 머리를 헝클었다.
“성급하구나. 한 사람의 마도란 그렇게 급하다고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아…….>
갑자기 리리아가 루인의 팔을 움켜잡는다.
“이거. 함부로 하지 말랬지 내가.”
“음?”
그제야 아차 싶은 루인.
흐뭇하고 귀여운 마음에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은 손녀를 바라보는 심정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리리아는 그런 자신의 행동을 각별한 의미로 여기는 것 같았다.
루이즈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루인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루인의 눈빛이 금방 차가워졌다.
“어쨌든 너희들의 해법은 틀린 것 같군. 시도는 좋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상위 마법사의 마력권을 뚫을 수가 없다.”
“아니, 그건 그냥 네가 사기잖아?”
시론의 볼멘소리.
아무리 마법학부의 랭커들이 강하다고 해도 마법으로 시전자의 의식까지 구현할 수 있는 루인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력권을 운용하는 상태만으로도 모든 염동력과 마력이 소모되지 않을까요?”
루인이 다프네를 응시하며 피식 웃었다.
“너희들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네?”
“루이즈의 절대언령과 너의 메모라이즈 능력, 시론의 원소 친화력, 리리아의 사멸 마력을 왜 너희들의 전유물로만 생각하는 거지?”
“아…… 그건…….”
“정말 놈들은 바보일까? 마력권을 운용하니까 다른 술식을 펼치지 못할 거라는 편견을 버려라. 놈들도 너희들 못지않은 천재 생도들이다. 충분히 다른 넘치는 재능을 지니고 있을 거다.”
“…….”
다프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루인의 말이 맞았기 때문.
그들도 충분히 메모라이징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세베론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아니.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닐 거야.”
아직도 세베론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루인이 소환한 거대 괴수.
그런 전율적인 권능이란 르마델 왕국의 현자라고 해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바보 같은 놈들. 당장은 아득하더라도 날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나의 마도를 겪을 수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 감히 너희들은…….”
끝내 루인은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대마도사인 자신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마법 생도 단계는 손쉽게 추월할 수 있을 터.
비단 마법사뿐만이 아니라 경지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의 목표는 가장 드높은 곳을 향하는 것이 옳았다.
이들이 진정으로 대비해야 할 것은 고작 무투대회 따위가 아니었다.
또다시 도래할 멸망의 순간.
언젠가 목소리의 생도들 역시 악제의 파멸적인 권능을 온몸으로 막아 내야만 할 것이다.
“흥. 대공자의 정체를 드러내더니 이젠 잘난 척이 너무 자연스러워졌군.”
쳇 하며 고개를 돌리는 시론.
루인이 무심하게 수인을 뻗는다.
우우우웅-
순식간에 다시 드러난 광활한 마력권.
생도들이 일제히 동그랗게 눈을 떴다.
루인이 드리운 디스펠 구역이 두 배나 더 넓어졌기 때문.
다프네가 자신의 발밑으로 푸르게 일렁이고 있는 루인의 마력권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마력권을 넓힐 수 있는 거예요?”
곰곰이 생각하던 루인이 무심하게 말했다.
“최대로 뻗는다면 지금 범위의 세 배 정도.”
“네……?”
씨익.
“다시 해. 전략을 짤 시간은 충분히 주겠다.”
어깨가 축 처진 채로 마력권 바깥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생도들.
맹렬하게 투지를 불태우는 건 역시 리리아뿐이었다.
* * *
청룡의 정원.
르마델 왕가의 왕족 중에서도 오직 당대의 왕과 왕세자에게만 허락된 성스러운 공간.
르마델의 수호룡, 거대한 베스키아의 청동상 아래 1왕자 아라혼이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데오란츠 국왕의 수호 기사가 그런 아라혼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차앙-
“마지막 경고입니다. 물러가십시오.”
오랜 세월 국왕 데오란츠를 수호해 온 르마델의 유일무이한 초인 기사.
왕국의 수호자 드베이안 공.
무력으로만 따진다면 왕국의 기수인 사자왕보다도 더욱 드높은 경지를 이룩한 기사.
하지만 아라혼은 그렇게 왕국의 모든 기사들이 신처럼 경배하는 존재를 눈앞에 두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뵙기 전까진 물러가지 않겠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무례합니다!”
이곳은 청룡의 정원.
아무리 1왕자라고 해도 이 엄숙한 공간에서 르마델의 국왕을 사사로운 호칭으로 부르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불러 주십시오. 드베이안 공.”
“국왕께서는 당분간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이미 대신들에게 공표했습니다! 더 이상 무례하게 군다면 아무리 왕자님이라고 해도……!”
아라혼이 피식 웃었다.
“역시 그대도 이미 렌시아가의 사람이었군.”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너무 유별나게 군단 말이지. 과연 당신이 이 아라혼을 막아서는 것이 진짜 왕의 명령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
아라혼이 천천히 일어나 드베이안의 시선과 얽힌다.
“말해 보세요 드베이안 공. 지금 날 막는 게 왕명입니까? 아니면 렌시아의 당부입니까?”
“시끄럽다.”
거대한 청룡 베스키아의 청동상 뒤편에서 데오란츠 국왕이 무심한 눈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 올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은 무신경한 왕의 눈빛.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아라혼은 예전처럼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 데오란츠 소 뮬란드 르마델은 왕국의 적법한 왕으로서 온 백성들에게 엄숙히 선언한다. 1왕자 아라혼 니소 르마델에게 ‘청룡의 정원’의 출입 권한을 부여한다. 그에게 왕가의 신성한 이름, 뮬란드를 미들네임으로 하사할 것이다.
처음으로 경험한 ‘아버지’의 얼굴.
그런 자애로움이, 그런 따뜻한 미소가 진짜일 리 없다고 믿으면서도 내심으로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역시.
그날 자신이 본 것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 녀석이라 믿었는데, 이젠 뻔뻔함까지 갖추었구나.”
역시 데오란츠 국왕은 아라혼의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이어 더욱 차가운 국왕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희망을 버려라. 그땐 내가 아니었다. 어떤 사악한 존재가 내 정신을 침범한 것이다. 왕세자 선언은 곧 없었던 일로 공표할 것이다.”
“국왕의 공표를 번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제 와서 미련이 생긴 것이냐? 넌 왕의 자질이 없다. 네게 돌아갈 자리가 아니란 걸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아버지께서는 늘 케튜스를 염두에 두고 계셨죠.”
“……아는 놈이!”
피식.
“저를 자식으로 취급하시지 않는 것도 미리 정을 끊어 내는 것이 아닙니까. 어차피 적통의 1왕자는 그 결정에 반발할 것이고, 이는 자식이 아니라 왕의 정적이라는 거지요.”
“네 이놈……!”
아라혼이 청룡 베스키아의 청동상을 고아하게 응시했다.
“우리 르마델가(家)는 왕가가 맞습니까? 우리 르마델이 언제까지 렌시아 놈들의 꼭두각시로 살아야 합니까?”
척.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수호자 드베이안의 날 선 반응에 아라혼은 더욱 비릿하게 웃었다.
“왕국의 수호자라는 기사가 왕실의 명예보다 렌시아가의 명예를 더욱 챙기는군요.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버지.”
“더는 입을 열지 말라! 드베이안! 이놈을 당장……!”
물끄러미 데오란츠 국왕을 바라보는 아라혼.
“공표를 번복하십시오. 왕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셔야지요. 단―”
“네놈이 무슨!”
씨익.
“저는 가짜 어머니를 밝히겠습니다. 진짜 왕비는 국왕의 치정(癡情)으로 이미 오래전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전 왕국에 알리겠습니다.”
악마처럼 일그러지는 데오란츠 국왕의 얼굴.
하지만 그는 곧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누가 네놈의 말을 믿어 줄 것 같으냐?”
라슈티아나 왕비와 각별했던 1왕자.
이럴 때를 대비해 데오란츠 국왕은 하이렌시아가의 은밀한 제안을 받아들였다.
왕가의 패륜아, 망나니.
오랜 기간 까마귀를 동원해 여론을 조작했다.
1왕자의 이미지는 대외적으로 최악이었다. 이미 완벽하게 작업해 둔 것이다.
“물론이죠. 모두 믿을 겁니다.”
“뭐?”
씨익.
“하이베른가의 대공자가 저를 보증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