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이베른가의 대공자-145화 (145/187)

<145화>

국왕 데오란츠가 왕비를 죽였다.

더욱이 이 사건을 조사한다면, 국왕의 추악한 성적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런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질 경우 왕실의 명예가 모조리 부정당함은 물론 알칸 제국과의 전쟁까지 각오해야 하는 일.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왕실의 몰락 그 자체였다.

땅에 떨어진 왕실의 명예와 권위로는 더 이상의 왕권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다.

“정말로…….”

인간의 심리엔 본능적인 방어 기제가 있다.

끝까지 외면하고 싶은, 도저히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땐 자신도 모르게 기억을 지워 버리는 것이다.

루인이 보기에 아라혼은 그런 왜곡된 기억, 인지의 부조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

아마도 많은 왕실의 구성원들 또한 이런 상태일 것이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루인의 차가운 눈.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는 건 일단 대역 왕비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과거처럼 사교 파티 중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대역 왕비의 역사가 반복된다면 그땐 이미 늦은 것이었다.

파국이 시작되기 전에 일단 그녀의 불안정한 심리를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나는 명목상 그녀의 아들이다…….”

“그런데?”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나아질 수가 없다.

루인이 여전히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넌 참 바보 같군.”

“뭐……?”

“이 일로 데오란츠 국왕을 구석까지 몰아붙여야 한다. 적당한 시점, 적당한 사건을 만들어 그녀의 죽음을 공표하라고 압박하라는 뜻이다.”

“무, 무슨 그런!”

루인이 비웃었다.

“권력이 장난인 거 같은가?”

고대로부터 권력의 도박판은 언제나 지옥이었다.

왕이 된다는 것.

친구와 형제를 죽이고 아비의 등에 칼을 꽂아 완성하는 광기(狂氣)의 길.

“렌시아가와 그 권속들은 모두 너의 정적(政敵)이다. 국왕 데오란츠 역시 네가 왕세자가 되는 걸 방해하기 위해 이미 칩거한 상태. 이런 상황에서 과연 네가 무사히 즉위식을 맞이할 수 있을까?”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 버린 아라혼을 향해 루인이 다시 비릿하게 웃는다.

“어쨌든 국왕 스스로가 1왕자인 너를 왕세자로 선언한 마당. 네가 취해야 할 행동은 당연히 협박이다. 국왕이 왕세자 선언을 번복하고 즉위식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추악한 행위를 전 왕국에 까발리겠다고 협박하는 거지.”

“어, 어떻게 국왕의 적통인 내가 왕실의 명예를 스스로 부정한단 말이냐?”

피식.

“여전히 상황을 읽는 눈이 부족하군. 오히려 넌 철저하게 선을 표방해야 한다. 왕실의 명예를 추락시킨 국왕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단죄해야만 한다. 또한 가증스런 대역 왕비로 전 왕국을 기만한 귀족 대신들을 함께 엮어 그들의 권력을 빼앗아야겠지. 산 채로 뼈를 발라 먹듯이 말이야.”

“뭐……?”

“이것으로 넌 두 개의 효과를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모든 정치적 명분, 즉 상황의 우위를 단숨에 점할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는 너란 존재가 몸을 낮추고 있던 렌시아가의 모든 적들에게 희망이 된다는 것.”

“그래도 렌시아가는…….”

왕국을 철저하게 장악하고 있는 렌시아가다.

아무리 명분의 우위가 있다고 해도 힘 약한 군소 귀족들이 곧바로 렌시아가를 적대한다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잊었나?”

“뭘……?”

씨익.

“국왕의 추악한 행위를 고발하는 새로운 왕세자,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줄 또 다른 대공가가 있다.”

“아!”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친구와 인연을 맺었는지 뼈저리게 깨닫는 아라혼.

왕국의 기수, 하이베른가가 자신을 지지한다는 건 모든 북부의 귀족들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이베른가가 구심점이 되어 준다면 렌시아를 두려워하던 군소 귀족들도 하나의 명분으로 강력하게 묶을 수 있는 것이다.

“…….”

아라혼은 등줄기에서 소름이 돋았다.

왠지 루인이 오래전부터 이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강하기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 모든 계획은 하나의 재앙을 배제하고 있다.”

어느덧 맹렬한 눈빛으로 돌아온 아라혼을 향해 루인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날아들었다.

“알칸 제국 말인가?”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알칸 제국과의 전쟁은 무조건 막아야 했다.

제국의 창칼 아래 왕국이 멸망한다면 권력이든 뭐든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

그러나 공주를 잃은 알칸 제국이 보일 반응은 너무 뻔한 것.

그렇지 않아도 침략의 명분만 찾고 있을 알칸 제국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뭐?”

알칸 제국은 베나스 대륙의 독보적인 패자.

더구나 중소 왕국들의 연합이 존재하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왕국 연합이 깨어진 상황이었다.

오히려 북부의 왕국들 대부분이 알칸 제국의 영향력 아래 복속된 상황.

전쟁이 일어난다면 알칸 제국은 물론, 북부의 왕국들까지 그들의 동맹으로 참전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천 년 르마델 왕국의 역사가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한데도 대공자 루인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제국과의 전쟁을 말하고 있었다.

르마델 왕국엔 수십 기에 달하는 제국의 마장기(魔裝機)를 막을 수단도, 그들의 수십만 기사들을 당해 낼 병력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

부유한 알칸 제국이야 군량을 산처럼 쌓아 놨겠지만, 중소 왕국인 르마델은 군량은커녕 다가올 춘궁기를 대비하는 상황이었다.

비옥한 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렌시아가와 그들의 권속들이 왕국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고 있는 근원적인 이유였다.

“전쟁이 왕국을 덮치게 되면 당연히 제국의 첫 공략 대상은 남부 국경 지대의 수비를 담당하는 불사조의 성이다.”

불사조의 성(Castle of Phoenix).

그곳은 남부의 수호 장벽, 렌시아가의 성이었다.

“설마 고작 남부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자는 뜻인가?”

아무리 렌시아가의 힘이 막강하다지만, 이건 소(小)를 위해 대(大)를 희생하는 꼴이었다.

자칫 남부를 통째로 제국에 헌납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도박.

전화(戰火)가 남부를 통째로 집어삼킨다면, 어브렐가의 중부는 더 취약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용병들은 막대한 보상이 보장되지 않는 한 국가 간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국가 간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전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총력전의 양상을 보이기 때문.

그런 총력전에서 용병대들은 항상 정규군의 방패로 쓰였고, 당연히 생환율은 저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중부의 어브렐가까지 장악당한다면 사실상 왕국의 절반이 날아가는 셈.

더구나 중부의 어브렐가는 수도 왕성 르마델 나이트 캐슬과 그리 멀지 않았다.

“미친 짓이다! 사실상 알칸 제국에게 왕국을 헌납하자는 뜻이지 않은가!”

“헌납?”

하지만 여전히 알듯 모를 듯한 미소로 일관하는 하이베른가의 대공자.

그런 루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라혼이 맹렬하게 쏘아붙였다.

“고작 내 왕위를 위해 왕국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다! 논의할 가치도 없는 일이니 이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마라!”

“마치 남부가 점령당한다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말하고 있군.”

“뭐……?”

첨단 마도공학의 결정체 마도 병기.

그 위험천만한 마장기를 무려 스무 기 이상 보유하고 있는 거대 제국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남부의 귀족들이 아무리 탄탄한 방비를 하고 있다고 해도 제국의 진격을 막는 건 독자적으론 불가능했다.

루인이 머나먼 남쪽을 응시한다.

“넌 마치 내가 그들을 방치하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것 같군.”

“전쟁을 통해 남부의 귀족들을 희생시키겠다는 전략이 아니었나?”

“허튼소리. 하이베른가는 왕국의 기수가다. 당연히 본 가문은 모든 북부 귀족들과 함께 알칸 제국에 맞설 것이다.”

“뭐……?”

아라혼은 도무지 루인의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북부까지 남부의 귀족들과 함께 전쟁에 휘말린다?

그렇다는 건 하이베른가도 막대한 피해를 각오한다는 의미.

왕국의 누구에게도 아무런 이득이 없는 상황이었다.

“대신 렌시아가가 간절히 바라는 순간, 그들이 겨우겨우 버텨 낼 수준으로 끊임없이 힘을 소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끌어 내야 하겠지.”

무려 알칸 제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소모전을 유도한다?

알칸 제국은 그런 얄팍한 의도에 쉽게 놀아날 국가가 아니다.

대체 무엇을 믿고 하는 소리인지 도저히 읽을 수 없었던 아라혼.

그가 이내 황당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이번에도 알칸 제국의 황제를 정신 조종할 생각인가?”

그의 빈약한 상상력에 루인은 또다시 피식 웃어 버렸다.

“헤볼 찬(Hevol-chan) 황제에게 접근하는 게 쉽다는 듯이 말하는군.”

순간.

츠츠츠츠츠츠-

“넌 확실한 믿음이 생기기 전에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성향이지.”

측량할 수 없는 마력이 일렁이며 공간이 찢어진다.

헬라게아를 처음 본 아라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고 있었다.

“그, 그게 뭐지?”

“나의 보물 보관소.”

루인이 기다랗게 찢어진 공간의 틈을 벌리며 문득 아라혼을 돌아보았다.

“이걸 본다는 건 내 비밀을 공유한다는 뜻이지.”

천천히 열리고 있는 시커먼 공간의 틈.

아라혼은 두려움이 치밀었다.

왠지 대공자의 비밀을 공유하는 순간 끝없는 수렁에 빠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가 궁금한 건 모두 이 공간 속에 들어 있다. 자신이 있으면 살펴보든가.”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간다.

그렇게 아라혼은 본능적인 불길함에 온몸을 떨고 있었지만 정작 헬라게아를 향해 걸음걸음 다가가고 있었다.

헬라게아 앞에 도착한 아라혼이 시커먼 공간의 틈으로 머리를 들이밀려고 할 때.

“다시 한번 명심해라.”

“무슨……?”

“이걸 보는 순간 우리의 관계는 영원히 지속된다. 만약 네가 관계를 깨거나 날 배신한다면―”

씨익.

“널 죽일 것이다. 그리고 너의 가족과 모든 권속들. 모조리 이 대마도사의 이름으로 벌할 것이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대, 대마도사?”

서슬 푸른 루인의 엄포에 끝없는 두려움이 치밀었지만 아라혼은 궁금증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만만한 루인의 태도, 그의 근원을 분명하게 살피고 싶었다.

스윽-

헬라게아의 공간 속으로 아라혼의 머리가 들어간다.

잠시 후.

천천히 자신의 머리를 빼내는 아라혼.

“…….”

그는 아예 혼이 빠진 사람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한참 동안 온갖 복잡한 상념으로 흔들리던 아라혼의 눈빛이 루인에게 향했다.

“……다, 당신은 대체 어떤 존재십니까?”

상상할 수 없이 광활한.

지독히 음침하고 어두운 공간 속에.

결코 인간계에 존재할 수 없는 악(惡)의 세계(世界)가 있었다.

루인이 음침하게 웃었다.

“대마도사.”

대마도사(大魔道士).

멸망을 상대하던, 인류 연합의 지휘자인 그에게 이런 국가 간의 전쟁 따위는.

그저 소규모 국지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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